《제2의 정중부 사건을 자초하는 정청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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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는 정중부의 난(亂)이 왜 일어났 는지 아는가?
대한민국 해병대는 투철한 애국심과 임전 불퇴의 용맹함으로 널리 알려진 자타공인 막강한 군대다. 강한 자부심과 단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 다. 얼마나 용맹했으 면 귀신 잡는 해병이 라고 했겠는가, 이런 군대의 장군들을 국회 법사위원장 민주당 정청래와 박지원이 겁박하고 모욕을 주며 굴욕을 안겼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해병대 예비역들은 극도로 분노하며 분연히 일어나 국회 앞에 모여 정청래와 박지원을 성토했다. 가수 김흥국은 해병 대에 좌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했고, 수많은 해병대 예비역들은 체포조를 결성하여 끝까지 응징 하겠다며 결의를 다졌 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한번 한다면 하는 강철같은 군대라 조만간 정청래와 박지원은 잠자는 사자 의 콧등을 건드린 자업자득 후과(後果) 를 톡톡히 받을 것으 로 보인다. 정청래는 군대를 전혀 모르는 병역미필자다. 정청래는 1989년, 미국 대사관저를 점거 하여 방화를 시도하고 사제폭탄을 투척하여 징역 2년 자격 정지 2년을 선고받은 전과 자다. 사회 경력을 보면 학원을 운영한 경력 외에는 달리 내세울 것도 없다. 정청래는 나라를 지키 고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군생활을 한 적이 없다. 군대 경험 이 없으니 군대를 쓸모없는 집단으로 여기며 장군들을 귀찮 은 벌레 정도로 취급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해병대 장군들을 어찌. 감히 그렇게 심하게 능멸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 이다. 이런 자가 거친 입 하나로 국회의원 4선에다 법사위원장 까지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망조가 든 국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해 불가인 것은 이런 사람을 뽑아준 마포을 지역 주민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평생 거친 입 하나로 출세한 정청래 가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들려줄 역사가 있다. 평생 국민의 재산과 나라를 지켜온 호국 장병들을 별 볼 일 없는 일개 국회의원이 겁박하고 모욕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지 역사적 사건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 다.
평생 험악한 막말과 운동권 이념에 젖어온 정청래가 역사를 알면 얼마나 아는지 알 수 없지만!!! 중세시대 고려와 조선은 양반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였 다. 양반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으 로 나누어지지만 엄격한 신분상의 차별이 존재했다. 문신(文臣)은 정1품 까지 올라 지금으로 말하면 총리까지 올라가지만, 무신 (武臣)은 최고 품계가 정3품 상장군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현대에서의 대장이 정3품에 해당한다. 종3품은 대장군으로 불렀으니 현대에서는 중장급에 해당한다. 무반은 최고 지위인 정3품 상장군에 올라도 병권을 가질 수 없었고 군사 지휘 권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러니 품계가 낮은 무신은 늘 문신으로 부터 모욕과 멸시를 받았다.
고려 의종 24년이었 던 1170년 8월 하순, 그해 여름은 대단히 더웠다. 그 당시 의종은 정치는 외면하 고 조정의 문신들과 어울려 주색잡기와 향락에 빠져 있었다. 왕과 문신들이 흥청 망청하는 동안 무신 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녹봉도 받지 못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처지 였다. 그날 의종은 흥왕사에서 무술 경연인 오병수박회 (五兵手搏會)를 열었다. 문신들은 환갑이 지난 대장군 이소응을 불러내어 젊은 군인과 대결하게 했다. 나이가 많은 이소응은 당연히 젊은 무관을 당하지 못해 힘에 밀렸다. 그러자 문신 한뢰가 나서 이소응을 조롱하며 뺨을 때렸다.
종5품에 불과한 한뢰 가 종3품 이소응 대장 군의 뺨을 때린 것이 다. 이 광경을 지켜본 정중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한뢰의 멱살을 잡고 호통쳤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하급 군관 이의방, 이고 등은 치솟아 오르는 모멸감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나 수많은 문신들을 도륙하고 처단했다. 이 사건이 바로 정중부의 난(亂) 이다. 정중부의 난은 향후 100년간 무인 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사건이야 말로 문신이 무신을 천대하고 능멸하여 발생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머리보다 무거운 감투를 쓴 정청래가 해병대 장군을 능멸한 것은 이소응 대장군의 뺨을 때린 한뢰의 환생이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니 아무리 생각. 해도 정청래와 박지 원이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해병대 장군 들에게 가한 인격 능멸은 자부심과 명예 를 신조로 삼는 해병 대뿐 아니라 국군 전체를 모독하는 행위가 같다. 이러니 주변에서는 군은 왜 존재하냐며 당장 일어 나 민주당 일당의 국회 독재를 뒤엎어 버리라는 분노의 여론이 호응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수의 국민은 군사 정권은 좋지 않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지금 민주당이 장악한 국회를 보면 혁명과도 같은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도저히 치유가 불가하다는 심정적 여론이 잠재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해병대ㅔ 예비역은 정청래와 박지원을 반드시 응징(膺懲)하여 살아있는 해병대의 기개(氣槪)를 보여 주어야 한다.
정청래는 제복을 입고 국가를 수호하는 장성 들을 공개적으로 망신 을 주었다.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는 국회 의원으로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정신나간 양아치 짓을 했다.
고려 인종 때 어느날 궁중에서 임금과 문무대신(文武大臣)들이 연회를 하는 중에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라는 새파란 19세 초임 문신 (文臣)이 38세의 무신(武臣)인 정중부 장군의 수염에 불을 질렀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문신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정중부를 놀렸 다.
정중부는 애송이 문신 에게 모욕을 당한 것 에 기분이 나빠 주먹 으로 김돈중을 한방 갈겼다.
이에 김돈중의 애비 김부식이 자기 자식의 잘못은 지적하지않고 임금인 인종에게 정중부를 처벌해 달라고 상소하였다.
인종은 입장이 곤란 했지만, 정중부를 나무라며 이 자리를 모면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신 들은 문신들에게 앙심 을 품었다. 평소부터 문신들에게 무시를 당했던 설움이 복받친 하급무사인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이번일을 그냥 넘어 가서는 안됩니다. 손을 봐야 합니다." 라고 꼬드겼다.
이에 정중부는 때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그로부터 26년 후 인종의 아들 의종 임금 때, 어느 여름날 피서를 위해 보현원 으로 행차를 하는데 정중부와 이의방ㆍ이고가 경호원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물론 문신들도 함께였다.
의종은 갑자기 중간에 휴식을 취하면서 무신 들에게 무술시합을 시켰다. 이 때 나이가 많은 이소응이 젊은 무사에게 힘이 딸려 더 이상 못하겠다고 링 밖으로 나갔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문신 한뢰가 마당으로 내려가 이소응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소응은 아픈 뺨을 만지고 있을 뿐 대꾸 를 못했다.
무신들 속에서는 불만이 더졌다. 이의방이 칼자루를 만지면서 정중부에게 거사를 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정중부는 중지 싸인을 보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냐? 지금 위치는 개성과 보현원의 중간이기 때문에 양쪽 의 군대가 공격할 경우 위험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일이 거기서 끝나고 이의방과 이고는 임금의 행차를 앞질러 보현원에 도착하여 거기 있는 순검군 (경호원)을 꼬드겨 한편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의방과 이고는 임금의 행렬이 보현 원에 도착하자마자 뒤따라오는 문신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 였다.
물론 뺨을 때신 한뢰는 무신들이 내리치는 칼날에 두동강이 나버렸다.
그런데 눈치 빠른 김돈중은 도망가고 없었다.
보현원에서 사건을 일으킨 무신들은 개경으로 달려가 궁중에 있는 문신과 내시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지른 김돈중을 잡기 위해 현상금을 걸었는데, 김돈중의 노비가 신고하여 잡혔다.
김돈중의 몸뚱아리는 두동강이 나고 애비 김부식의 묘는 파헤 쳐져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국방의무도 안한 자가 군인을 무시하다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한줄 갈겼습니다.
-月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