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3.12.24. 대림 제4주일 2사무7,1-5.8ㄷ-12.14ㄱ.16 로마16,25-27 루카1,26-38
하느님 중심의 삶
-겸손(信), 경청(望), 순종(愛)-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89,2ㄱ)
대림 제4주일 B해 미사중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시편 가사와 곡이 참 좋습니다.
오늘 산책중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목청껏 부르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될 성탄시기 주일이나 축일등 한결같이 신바람나는 화답송 후렴이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 강론에 인용했던 원장 수사와 주고 받았던 메시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새 책, 좋은 책을 보면 참 행복해집니다.
“수사님이 부탁한 책 구입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책보기 위해서도 오래 살고 싶네요!”
“그러면 책을 컨테이너로 사드려야겠네요.ㅎㅎㅎ”
사랑이 가득 담긴 윗트에 얼마나 마음 따뜻했는지요!
바로 다음 저절로 떠오른 말마디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고 싶다!”
하느님을,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 날마다 주어지는 선물같은 날입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이야말로 진정 삶의 의미입니다.
참행복도 바로 여기 주님과의 깊어지는 사랑에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날로 깊어지는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얼마전 써놓고 행복해 했던, 겨울나무, 겨울땅을 보며 써놓은 “나 겨울에는”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푸른하늘 배경한
빛나는 별 열매들 가득 달린
텅빈 충만의
겨울나무들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밤마다
푸른 하늘 빛나는 별들
꼭꼭 품에 안아 두었다가
봄, 여름, 가을
무수한 사랑의 꽃들 피어낼
텅빈 충만의
겨울 땅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나
겨울에는 동안거의 추위에도
따뜻한 봄이
텅빈 충만의 겨울나무가, 겨울 땅이 된다
나 겨울에는
이 행복에 산다
내 이름은 ‘이행복’.”-2023.12.3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한 동안거중인 배나무들 강추위 속에서도 흡사 따뜻한 봄,
‘겨울속의 봄’을 살아가는 듯 합니다.
문득 어제 강론을 읽은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훈훈한 덕담도 생각납니다.
얼마전 손수 뜬 털쉐타를 선물한 자매입니다.
“저도 책 한 컨테이너 추가로 사드리겠습니다.ㅎㅎㅎ”
“감사합니다! 마음에 사랑 담아 둡니다!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털쉐터 사랑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텅빈 가슴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부르고 싶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화답송 후렴입니다.
도대체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는 맛이, 기쁨이, 재미가 없으면 하루하루 날마다 이 삭막한 광야인생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자주 고백성사 보속시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1-2)
어떻게 이런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겸손, 경청, 순종의 삶입니다. 믿음의 겸손, 희망의 경청, 사랑의 순종이니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은 신망애(信望愛)의 삶으로 직결됩니다.
첫째, 겸손(信)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겸손합니다.
겸손한 믿음(信)입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겸손한 믿음 없으며 서지 못합니다.
자기를 몰라서 교만이지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수록 겸손해집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참으로 겸손한 분이요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한 분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함께 갑니다.
보십시오.
하늘 높이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천사를 통해 무명의 촌구석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 나선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문득 삼고초려(三顧草廬) 무려 세 번씩이나 제갈량을 찾아 나선 삼국지의 유비가 생각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나선 하느님의 그 간절함은 유비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을 찾아 그의 무지를 일깨워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 주도로 다윗을 이끌어온 삶임을 환기시킵니다.
1독서에서 다윗을 위해 하신 일들을 읽어 보십시오. 다윗 삶의 문장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줄줄이 이어지는 하느님 주어의 문장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알립니다.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결과입니다.
내가 살아온 것 같지만 하느님 친히 인도해주시고 이끌어 주신 삶이라는 자각이
참으로 겸손하게, 기도하게 합니다.
제가 요셉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우리 삶의 문장에서 주어는 내가 아닌 하느님이심을 깊이 깨달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없이는 참 겸손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둘째, 경청(望)입니다.
남말하기는 쉬워도 잘 듣기는 정말 힙듭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주님 말씀의 경청입니다.
희망의 경청, 겸손의 경청입니다.
겸손은 희망의 경청으로 표현됩니다.
베네딕도 규칙서의 시작도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서에 참 많이 나오는 말마디도 “들어라!”입니다.
‘경청의 달인(達人)’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경청은 개방입니다.
침묵의 개방도 경청을 위함입니다.
주변에 활짝 깨어 열려 있는 침묵이요 경청입니다.
경청 또한 훈련입니다.
평상시 경청의 훈련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 희망의 사람, 경청의 달인 마리아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눈밝은 하느님의 분별력은 정확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당신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됩니다.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경청의 마리아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속내를 다 밝히시니
그대로 전폭적 신뢰를 반영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다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주님 천사를 통한 주님의 은밀한 말씀들이요 한결같이 경청하는 마리아입니다.
셋째, 순종(愛)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순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을 때, 희망할 때 순종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수록 이 진리도 깊이 깨달아 알 것입니다.
다음 마리아의 기념비적 응답은 늘 읽을 때마다 감동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대림 제4주일, 제대 주변을 환히 밝히는 4개의 대림 촛불이 마리아는 물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신망애(信望愛)의 빛’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탄생이 임박함을 알립니다.
마리아의 자발적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주님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이 결정적 순간의 한번만으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마리아 성모님의 생애는 말그대로 순종의 여정이요
“예스맨(Yes-Man)”으로 일관된 삶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절정은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 아드님을 내려 품에 안을 때의 피에타 성모님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케노시스 비움의 절정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이요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랑의 순교자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그러니 대림 제4주일의 주인공은 우리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믿음의 겸손과 희망의 경청, 그리고 사랑의 순종의 삶을, 시종여일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사셨던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겸손과 경청, 순종의 삶을, 믿음과 희망,
사랑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충실히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