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는 뜻으로, 사람이 무상(無常)함과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에 집착하여 온갖 고통에 빠져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一 : 한 일(一/0)
切 : 온통 체(刀/2)
皆 : 다 개(白/4)
苦 : 괴로울 고(艹/5)
인간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하느님은 흙으로 아담을,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어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 이브와 아담이 뱀의 꼬임에 빠져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다는 것을 안 하나님은 이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
쫓겨난 이들은 아담 나이 130세 첫 아들과 800살에도 아들을 낳으면서 아담 나이 930살에 죽었다고 한다. 성경에선 이브를 비롯한 여성분들은 몇 살에 죽었는지 말이 없어 이브는 몇 살에 죽었는지 내 친구 목사님도 모른단다.
필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질문 있습니다. 천지창조하실 때 마귀와 선악과, 뱀은 왜 만드셨나요? 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는 것을 구경도 못한 인간들에게 원죄를 뒤집어 씌우시다니, 1980년도 한국도 연좌제가 없어졌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초등교과서에서 나오는 세계 4대 문명(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황하, 인더스)을 지구촌 가족들은 부정하지 않는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도 훨씬 전인 기원전 7500년~6500년경에 밀로 빵을 만들어 먹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그럼 창세기 이전 인간들을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을 보고 쉬는 한숨에 위로를 받으려고 아담의 10세손을 노아라 불렀다. 코란경전에선 노아는 100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노아의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수명을 120살(창세기 6:3)로 확 단축시켰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인간의 수명은 120살이라는 말이 정설인양 퍼진 이유가 아닐까.
한편 기록에 의하면 가장 장수한 사람은 프랑스의 잔느 칼망(Jeanne Calment)이란 여자 분은 1997년 122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원시시대 인간 평균수명은 10세, 예수님 탄생 시는 20세에서 40~45세로 증가기간은 190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1970년 한국인 기대수명은 62.3세에서 2020년 83.5세로 21년 연장에 50년이 걸렸다.
이 비율로 한국인 기대수명이 늘어난다면 서기 3000년에는 노아홍수 이전인 900살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과학을 무시한 주먹구구식 단순 증가비율로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
필자가 20대 때 양산군농협에 근무할 때 내 집처럼 드나들던 마음씨 어진 가겟집 아줌마를 올 여름에 찾아 뵀다. 흐르는 세월에 93세 할머니가 된 아줌마는 4년 전에 93세 남편을 먼저 보냈으나, 몸과 마음이 곱게 늙으셨다.
할머니의 남편은 잠자는 치매환자로 걸음도 잘 걷지 못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남편이 건강했을 때 좋아했던 게이트볼 장으로 착한 아들 차로 모시고 간다. 거기서 할머니는 온갖 남편시중으로 잠을 쫓으면서 치매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고 한다.
할머니 평생 남편 밥은 손수 지어서 대접했다고 한다. 하늘 아래 찾기 힘든 순애보의 이야기를 그 집 막내딸한테서 듣고 뭉클한 가슴에 눈물이 주르륵했다.
할머니는 기독교신자도 아닌데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 지니라(엡 5:22-24)" 성경말씀을 지키신 분이다.
지금 93세인 할머니는 건강이 아주 나빠져 착한 둘째 아들부부가 할머니 대소변을 받으면서도 요양원이 아닌 집에서 지극정성으로 모신단다. 요즘 보기 힘든 효도부부에 고개가 숙여진다.
마음씨 좋은 가겟집 할머니께서 도덕적 본보기로 900살까지 사셨으면 좋겠다.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변하고 변하는 세상, 가슴을 짓누르는 모든 괴로움인 일체개고(一切皆苦)가 인생일까?
일체개고(一切皆苦)
고타마 붓다는 20대에 왕자의 위치와 처자까지 버리고 출가하였는데 그가 출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즉 '인생은 고(苦)이다'라고 하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즉 현실세계의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직시(直視)한 고타마 붓다가 얻은 것은, 모든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뜻대로 하고 싶다는 자기모순적인 욕망이 인간의 내면에 감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고타마 붓다는 이와 같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苦)을 고라고 하며 자기모순적인 욕망이야말로 고의 원인이라고 밝혀내었다.
일체개고의 현실인식은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고(苦)라고 하는 고정된 성질 또는 실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고(苦)의 원인이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제행무상) 인간은 항상 불변을 바라고, 또 모든 것은 무엇 하나 고정적 실체인 것은 없는데도(제법무아) 그것을 실체라고 고집하려 하는 데에 고(苦)의 원인이 있다고 고타마 붓다는 말하였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과 더불어 근본 불교의 기본 교의인 3법인 또는 4법인을 구성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
고(苦)는 모든 존재의 실상
흔히 '세상살기 힘들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공부도 힘들고, 먹고살기도 힘들고, 살아가는 과정들이 다 힘이 듭니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하나의 존재가 삶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힘들게 느끼는 것을 '고(苦)'라고 합니다.
고(苦)에 대한 원어가 두카(Du kha)인데 그 뜻이 바로 '힘이 든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힘들고 괴롭다는 것이 삼법인(三法印)의 두 번째 진리입니다.
고(苦)는 불교에서 중심적 주제이기 때문에 삼법인과 사성제와 같은 핵심적 교리에는 모두 고에 대한 내용이 설해져 있습니다. 불교는 고(苦)를 직시하고 그로부터 해탈을 추구하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타니파타'에서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고를 설한다"고 했습니다. '아함경'에서도 "고(苦)의 문제가 없었다면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고(苦)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출가하셨고 깨달음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리푸트라 역시 "나는 고(苦)를 다 알고자 부처님을 따라 수행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고를 알고 고로부터 해탈하는 것이 불자가 지향해야 할 길임을 보여주는 대목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괴로운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기 때문입니다. '아함경'에서는 "일체(一切)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흘러가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상하기 때문에 받는 고통을 부처님은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네 가지 범주로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늘 젊고 아름답기 바라지만 늙고 쇠약해져 갑니다. 또 늘 건강하고 활기차기 바라지만 모든 존재는 병고에 시달립니다.
또 어렵게 이룩한 자신의 업적과 재산을 영원히 누리며 살고 싶지만 가장 먼저 사라져 가는 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무상의 질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태어나는 것마저 괴로움이라고 했을까요? 십이연기법에 따르면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바로 이 같이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태어난다는 그 자체가 영원한 무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고(苦)입니다.
또한 불교는 육도(六道)의 윤회를 중생고의 실상으로 보고 그 곳에서 해탈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육도에서 윤회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대로 불난 집과 같은 고통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기 때문에 생(生)을 고(苦)라고 합니다.
무상에서 비롯된 고통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동물과 곤충을 비롯해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도 이 같은 고통을 겪게 마련입니다. 식물이나 산하대지와 같은 무정의 존재들도 동일한 법성(法性)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생노병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산천초목과 산하대지도 나이가 있고 병듦이 있습니다. 거대한 우주의 별들마저 새로 태어나는 별이 있는가 하면 사멸해 가는 별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주 공간도 탄생이 있고 점차 팽창해 가는 늙음이 있고 마침내 소멸해 갑니다. 이 같은 자연의 생성과 소멸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통찰은 모든 존재를 관통하는 영원한 진리이자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보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를 염세적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고(苦)이기 때문에 다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꿰뚫어 보고 그 고(苦)로부터 해탈하자는 것이 불교의 본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한 떨기 낙엽은 무상으로 인해 조락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낙엽의 조락이 있어야 또 새 봄이 오고, 잎이 썩어야 나무는 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도 살아 있는 이 육신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 늙음과 죽음은 곧 존재의 절멸이 되겠지만 그 같은 인식의 테두리를 벗어버린다면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거대한 질서 속에 참여하고 우주를 함께 생성해 나가는 법성의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우주적 자아를 자각하고 그 질서에 순응할 때 태어남도 죽음도 모두 물거품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살아가기가 힘드시지요. 있는 사람은 더 없어서 힘들다 하고 없는 사람은 아예 없어서 더욱 버거운 시대입니다. 전세값과 월세값은 왜 그렇게 오르는지, 집 없는 서민들은 죽을 맛입니다.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해도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은 점점 더해지고 있지요. 이럴 때일수록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의상의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생각하게 됩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좀 나누어 써야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내 욕망을 좀더 줄여야죠. 그게 바로 연기 패러다임을 실천하는 불제자의 길이니까요.
얼마전에 "대구의 영세 임대아파트에서 겨울을 나던 원씨 모녀가 먹을 것이 없어 나흘이나 굶은 채 지내오다 끝내 어머니는 숨지고 열 두 살 난 딸만 가까스로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삶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를 새삼 생각키우게 되었습니다.
그 이튿날 원모양을 돕겠다는 사람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고 합니다만, 가난한 사람은 끝없이 가난하고 넉넉한 사람은 가없이 넉넉해질 수밖에 없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삶의 구조만으로는 고통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현상적인 책임은 모두 해당 개인에게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들게 한 근원적인 시스템이 사람들인 한에 있어서는 당사자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는 근원적인 고통과 물리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고통은 제도적이거나 상대적인 기제로 인해 생겨납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고통은 심리적이거나 절대적인 기제로 인해 생겨납니다.
국제통화기금(아이엠에프)시대에 접어든 이후 서울역 등의 지하도에는 노숙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 땅의 산업 일꾼 혹은 가장으로서 피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죠.
그들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지하도 바닥 위에서 쓰러져 살고 있습니다. 술과 친구해 가며 말이죠. 이들이 바닥에서 느끼는 현실의 고통을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우리가 받는 고통을 네 가지 내지 여덟 가지 범주로 나누었습니다. 근원적인 네 가지는 태어나는 고통, 늙어가는 고통, 병들어가는 고통, 죽어가는 고통입니다. 삶이 진행형이듯이 고통도 진행형입니다.
물리적인 네 가지는 사랑하는 사람(상황)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구해도 얻을 수 없는 고통(求不得苦), 미워하는 사람(상황)과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나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가 불길처럼 타올라 일어나는 고통(五陰盛苦)입니다. 이 모두는 우리가 존재하므로 생겨나는 고통들입니다.
고통의 실체는 현실적 욕망이 다 이뤄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존재에 대한 불안정입니다. 즉 현실적 존재의 끊임없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의 다른 표현이죠.
'잡아함경'에서는 연기된 '오온'을 주어로 하고 '무상', '고(苦)', '공', '비아'를 술어로 하는 교설이 반복 심화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합니다. 존재에 대한 집착 때문이죠.
또 '괴롭기' 때문에 '공'이라고 합니다. 현실과 존재에 대한 불만족과 불안정 때문이죠. 뒤이어 '공'하기 때문에 '내'가 아닌 '비아'라고 합니다. 자기 동일성이 없기 때문이죠.
하여 '생(노병)사'라는 근원적 고통의 돌파라는 화두를 부여안고 천길 장대 위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는(百尺竿頭進一步) 수행이 요청되는 것이죠. 오온이 실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고'를 넘어서기 위해서 말이죠.
권력은 십년을 유지하지 못하고(權不十年), 꽃은 십일을 피어있지 못한다고 했습니다(花無十日). 제왕적 대통령제하의 대통령도, 호텔 앞의 화려한 장미꽃도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란 뜻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뜻으로 조그만 자극에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이르는 말을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이익을 얻음을 이르는 말을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번 들어 둘을 얻음 또는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을 일컫는 말을 일벌백계(一罰百戒),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란 뜻으로 한결같은 참된 정성과 변치 않는 참된 마음을 일컫는 말을 일편단심(一片丹心), 한 글자도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일자무식(一字無識), 한꺼번에 많은 돈을 얻는다는 뜻으로 노력함이 없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확천금(一攫千金), 한 번 돌아보고도 성을 기울게 한다는 뜻으로 요염한 여자 곧 절세의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고경성(一顧傾城),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는 뜻으로 좁은 강이나 해협 또는 그와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접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일의대수(一衣帶水), 밥 지을 동안의 꿈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취지몽(一炊之夢), 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 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득을 취함을 이르는 말을 일전쌍조(一箭雙鵰),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나 체계 따위가 잘 잡혀 있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사불란(一絲不亂),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이르는 말을 일일천추(一日千秋), 그물을 한번 쳐서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으로 한꺼번에 죄다 잡는다는 말을 일망타진(一網打盡), 생각과 성질과 처지 등이 어느 면에서 한 가지로 서로 통함이나 서로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번 던져서 하늘이냐 땅이냐를 결정한다는 뜻으로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으로 승부를 겨룸을 일컫는 말을 일척건곤(一擲乾坤), 강물이 쏟아져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 또는 문장이나 글이 명쾌함을 일컫는 말을 일사천리(一瀉千里),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었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음 또는 막힘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감을 일컫는 말을 일이관지(一以貫之), 기쁜 일과 슬픈 일이 번갈아 일어남이나 한편 기쁘고 한편 슬픔을 일컫는 말을 일희일비(一喜一悲),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뜻으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함을 이르는 말을 일구이언(一口二言) 등에 쓰인다.
▶️ 切(끊을 절, 온통 체)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칼 도(刀=刂;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七(칠, 절)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七(칠, 절)의 옛 모양은 물건을 베는 모양이라고도 한다. 刀(도)는 날붙이, 切(절)은 날붙이로 물건을 베는 일, 또 절박하다는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切자는 ‘끊다’나 ‘베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切자는 七(일곱 칠)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七자는 숫자 7이라는 뜻을 가지고는 있지만, 갑골문과 금문에서는 ‘자르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七자의 갑골문을 보면 十자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긴 막대기를 칼로 내리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고대에는 七자가 ‘자르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후에 숫자 ‘7’로 가차(假借)되면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刀자를 더한 切자가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切(절, 체)은 ①끊다 ②베다 ③정성스럽다 ④적절하다 ⑤중요하다 ⑥절박하다 ⑦진맥하다 ⑧문지방(門地枋) ⑨반절(反切: 한자의 음을 나타낼 때 다른 두 한자의 음을 반씩 따서 합치는 방법) ⑩간절히 그리고 ⓐ온통(체) ⓑ모두(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끊을 초(剿), 끊을 절(截), 끊을 단(斷), 끊을 절(絶) 용례로는 어떤 일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이 뼈저리게 강렬한 상태에 있음을 절실(切實), 마감이나 시기나 기일 등이 매우 급함을 절박(切迫), 끊어 냄이나 끊어짐 또는 잘라 냄을 절단(切斷), 몹시 간절한 모양을 절절(切切), 절실하게 느낌을 절감(切感), 간절히 바람을 절망(切望), 물가 수준이나 화폐 가치의 수준을 올림을 절상(切上), 화폐의 대외 가치를 낮춤을 절하(切下), 아주 친근함을 절친(切親), 째어서 가름을 절개(切開), 매우 암함을 절엄(切嚴), 잘라 버림을 절제(切除), 절실하게 필요함을 절요(切要), 끊어 가짐 또는 훔쳐서 제 것으로 함을 절취(切取), 지극히 원통함을 절통(切痛), 깊이 사랑함 또는 몹시 사랑함을 절애(切愛), 아주 가까운 이웃을 절린(切鄰), 절실히 느낌을 절감(切減), 간절한 마음을 절정(切情), 분하여 이를 갊을 절치(切齒), 매우 원통하고 분함을 절분(切忿), 다 팔려서 물품이 떨어져 없음을 절품(切品), 끊어 없앰이나 잘라 끊거나 깎음을 절삭(切削), 정한 날짜가 아주 가까이 닥쳐 몹시 다급함을 절핍(切逼), 꼭 맞음으로 어떤 기준이나 정도에 맞아 어울리는 상태를 적절(適切), 지성스럽고 절실함을 간절(懇切), 정성스럽고 정답거나 또는 그러한 태도를 친절(親切), 끊어짐 또는 잘라 버림을 단절(斷切), 절반으로 자름을 반절(半切), 말씨가 격렬하고 엄격함을 격절(激切), 매우 애처롭고 슬픔을 애절(哀切), 경계하여 바로잡음을 규절(規切), 썩 필요하고 실지에 꼭 맞음을 긴절(緊切), 매우 급하게 닥침을 급절(急切), 인정이 없고 쌀쌀함 또는 바싹 닥쳐서 몹시 급함을 박절(迫切), 뼈에 사무치게 절실함을 통절(痛切), 몹시 처량함을 처절(凄切), 모든 것이나 온갖 것 또는 모든 것을 다를 일체(一切),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내다라는 뜻으로 학문이나 인격을 갈고 닦음을 일컫는 말을 절차탁마(切磋琢磨), 이를 갈고 마음을 썩이다는 뜻으로 대단히 분하게 여기고 마음을 썩임을 일컫는 말을 절치부심(切齒腐心), 이를 갈고 팔을 걷어올리며 주먹을 꽉 진다는 뜻으로 매우 분하여 벼르는 모습을 이르는 말을 절치액완(切齒扼腕), 열심히 닦고 배워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켜야 함을 이르는 말을 절마잠규(切磨箴規), 남의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노파심절(老婆心切), 몹시 분하여 이를 갊을 일컫는 말을 교아절치(咬牙切齒), 몹시 애절한 꼴을 일컫는 말을 애애절절(哀哀切切), 쌍은 공적과 지은 죄를 절충하여 죄를 정하던 일을 일컫는 말을 장공절죄(將功切罪) 등에 쓰인다.
▶️ 皆(다 개)는 ❶회의문자로 사람이 줄을 짓는다는 뜻의 比(비)와 말함을 뜻하는 白(백)으로 이루어졌다. 모두 같이 말하다의 뜻이 전(轉)하여 죄다 또는 함께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皆자는 '다'나 '모두', '함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皆자는 白(흰 백)자와 比(견줄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皆자의 금문을 보면 白자가 아닌 曰(말씀 왈)자가 쓰여 있었다. 比자가 서로 나란히 서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고 曰자가 ‘말’을 뜻하니 皆자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皆자는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낸다는 의미에서 '모두'나 '다 함께'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皆자는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모두'라는 뜻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皆(개)는 ①다(=總), 모두 ②함께, 다 같이 ③두루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④견주다(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기 위하여 서로 대어 보다), 비교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 실(悉)이다. 용례로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 휴일 외에는 하루도 빠짐 없이 출석 또는 출근함을 개근(皆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일함을 개로(皆勞), 일정한 부분의 산림을 일시에 모두 베어 냄을 개벌(皆伐), 다 또는 모두를 개시(皆是), 모든 사람이 말하되 라는 개왈(皆曰), 남에게 빌었던 것을 남김 없이 다 갚음을 개제(皆濟), 조세 따위를 남김없이 다 바침을 개납(皆納), 전혀 없음을 개무(皆無), 거의 모두나 대부분을 거개(擧皆), 거의 다를 기개(幾皆), 모두나 다를 실개(悉皆), 지구와 태양과의 사이에 달이 들어가서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가 달에 의하여 가려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을 개기일식(皆旣日蝕), 누구든지 삼생을 통하여 불도를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개성불도(皆成佛道), 온 산의 풀과 나무까지도 모두 적병으로 보인다는 뜻으로 적의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찮은 것에도 겁냄을 이르는 말을 초목개병(草木皆兵), 사람은 있는 곳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니 그 환경을 서로 바꾸면 누구나 다 똑같아 진다는 말을 역지개연(易地皆然),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나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세상일은 무엇이나 내 몸가짐에 대한 깨우침이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 이미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다른 나머지도 다 이와 같음을 일컫는 말을 여개방차(餘皆倣此), 온 세상이 다 흐리다는 뜻으로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바르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거세개탁(擧世皆濁) 등에 쓰인다.
▶️ 苦(쓸 고, 땅 이름 호)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古(고)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오래다, 낡다, 굳게 긴장(緊張)하는 느낌이 쓰다는 고(古)와 쓴 풀(艹)의 뜻이 합(合)하여 '쓰다', '괴롭다'를 뜻한다. ❷형성문자로 苦자는 '쓰다'나 '괴롭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苦자는 艹(풀 초)자와 古(옛 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古자는 '옛날'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 역할만을 하고 있다. 苦자는 풀이 매우 쓰다는 뜻으로 艸자가 의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괴롭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苦(고)는 씀바귀, 쓰다, 괴로움을 뜻과 전세前世의 악업에 의하여 받는 고통 등의 뜻으로 ①쓰다 ②괴롭다 ③애쓰다, 힘쓰다 ④많다, 오래 계속되다 ⑤거칠다 ⑥엉성하다, 졸렬하다 ⑦무르다 ⑧욕(辱)되다, 욕보이다 ⑨싫어하다 ⑩씀바귀(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⑪쓴 맛 ⑫깊이, 심히 ⑬기어코, 그리고 ⓐ땅의 이름(호)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곤할 곤(困)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기쁠 희(喜), 즐길 낙/락(樂), 기쁠 환(歡), 달 감(甘)이다. 용례에는 괴로워하고 번민함을 고민(苦悶), 마음을 태우며 애씀을 고심(苦心), 매우 기다림을 고대(苦待), 괴로움과 슬픔을 고비(苦悲), 매우 힘드는 일을 고역(苦役),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을 고통(苦痛), 괴로운 심경을 고충(苦衷), 몸과 마음이 괴로움을 고뇌(苦惱), 쓴 즙을 담은 잔으로 쓰라린 경험을 고배(苦杯), 괴로움과 즐거움을 고락(苦樂),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괴로움과 어려움을 고난(苦難), 매우 힘드는 일을 고역(苦役), 괴로움과 어려움을 고초(苦楚), 귀에는 거슬리나 참된 말을 고언(苦言), 괴로운 인간세계를 고해(苦海),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는 힘든 싸움을 고전(苦戰), 힘들여 생각하는 것을 고려(苦慮), 괴로운 처지를 고경(苦境), 목이 말라 고생함을 고갈(苦渴), 시들어 마른 풀을 고초(苦草), 고생스럽고 곤란함을 고곤(苦困), 고통스러운 생각을 고사(苦思), 어이가 없거나 하찮아서 웃는 웃음을 고소(苦笑), 매운 것과 쓴 것으로 괴롭고 고생스럽게 애를 씀을 신고(辛苦), 처지나 형편 따위가 고생스럽고 딱함을 곤고(困苦), 즐거운 일이 어그러져서 받는 고통을 괴고(壞苦), 단 것과 쓴 것으로 고생을 달게 여김을 감고(甘苦), 애쓰고 노력한 수고로움을 노고(勞苦), 괴로움을 참음을 인고(忍苦), 몹시 애씀이나 대단히 힘들임을 각고(刻苦), 아이를 낳는 괴로움을 산고(産苦), 옥살이 고생을 옥고(獄苦), 적을 속이는 수단으로서 제 몸 괴롭히는 것을 돌보지 않고 쓰는 계책을 이르는 말을 고육지책(苦肉之策),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말을 고진감래(苦盡甘來), 괴로움에는 즐거움이 따르고 즐거움에는 괴로움이 따름을 일컫는 말을 고락병행(苦樂竝行), 안일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그 반동으로 찾아옴을 일컫는 말을 고일지복(苦逸之復), 몹시 애를 태우며 근심 걱정을 함을 이르는 말을 고심참담(苦心慘憺), 학처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몹시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학수고대(鶴首苦待),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같이 고생하고 같이 즐김을 일컫는 말을 동고동락(同苦同樂), 몹시 고되고 어렵고 맵고 쓰다는 뜻으로 몹시 힘든 고생을 이르는 말을 간난신고(艱難辛苦)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