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음 생에 만날까요?
박영해 장편소설
쪽 수 : 288쪽
판 형 : 125*210
ISBN : 979-11-6861-742-1 03810
가 격 : 18,000원
발행일 : 2026년 8월 20일
분 류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책 소개
45년 만에 묻는 질문
“왜 그렇게 떠났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추적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기억의 서사
▶ 늑골에 새긴 말, 45년의 침묵을 깨다
박영해 소설가의 장편소설 『우리, 다음 생에 만날까요?』는 돌연 곁을 떠난 첫사랑에게 45년 5개월 만에 문자를 보내면서 시작한다. 퇴직 교사 서혜주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대학 시절 짧은 만남을 가졌던 윤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혜주는 “통화할 수 있을까요?”라는 짧은 여덟 음절 문자를 보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망설였다. 윤재는 45년 전 여름 아무 말 없이 혜주의 곁을 떠나갔다. 혜주는 그가 왜 그렇게 떠났는지 묻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왔다. 이제 다음 생까지 이 물음을 끌고 가고 싶지 않아 용기를 낸다.
혜주는 윤재의 답장을 기다리며 부산 좌천동 증산, 옛 부산진성이 있던 산동네에서 보낸 소녀 시절과 윤재와 나눈 짧고 강렬했던 날들을 하나씩 되짚는다.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애써 외면해온 묵은 감정과 마주한다. 남 보기엔 별문제 없이 살아 왔다고 여겼던 지난 세월 아래에는 삭이지 못한 채 가라앉아 있던 물음이 있었다. 소설은 오래도록 스스로에게조차 묻지 못했던 질문 하나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이 한 사람의 생애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담담하게 묻는다.
▶ 말할 곳을 찾지 못한 언어가 자기만의 목소리를 되찾기까지
말할 곳을 찾지 못한 여성의 언어는 대개 안으로 향한다. 가족과 친구, 친척들 앞에서 저마다 다른 가면을 쓰고 지내야 했던 혜주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일기와 윤재였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것들을 자기만 알아보는 언어로 종이에 새기며 힘겨웠던 산동네 시절을 견뎌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는 책 한 줄에도 몰입하지 못했다. 아내로, 엄마로, 교사로 채워진 세월 동안 자신의 이야기는 뒤로 밀어두어야 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이들을 독립시키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마저 떠나보낸 뒤에야 혜주는 오랫동안 미뤄둔 목소리를 다시 꺼내고 윤재에게 말을 건다.
혜주는 윤재를 만나 지난날 건네지 못한 질문을 하고, 그 앞에서 온전할 수 있었던 자기 자신을 되찾으려 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였던 그를 통해, 혜주는 스스로 살아온 삶을 매듭짓고자 한다.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스스로를 돌보는 이 행위는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살아온 여성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발화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 산동네, 부산진성, 그리고 동물 우리에 살던 사람들
중학교 입학 직후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 나면서 혜주의 가족은 유복했던 시절을 보낸 부산 초량동과 좌천동 은행 곁의 집을 떠나 부산 좌천동 산동네로 밀려난다. 이곳은 조선시대 부산진성이 있던 자리이자 임진왜란 당시 첫 격전지였고, 훗날 방치된 공동묘지를 밀어내고 짓다 만 동물원이 흉물처럼 남아 있던 장소이다.
무덤을 파내고 주검을 태우던 이장(移葬)의 풍경, 이순신 장군과 부산포해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과 우키시마호 폭발 사고까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서 전해 들은 구전 이야기들은 이 가난한 동네가 그저 낙후된 변두리가 아니라 전쟁과 죽음, 이산의 역사가 겹겹이 쌓인 장소임을 말해준다. 한편 짓다 만 동물원의 우리에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스며들듯 들어와 살기도 했다. 사슴이나 여우의 팻말이 붙은 철창 안에서 밥을 짓던 이들, 담요 한 장으로 아기를 감싸안고 있던 여자를 목격한 소녀 혜주는 자신의 가난보다 더 깊은 밑바닥이 있다는 사실에 말을 잃는다.
이처럼 소설이 그리는 증산에서 온천천이 흐르는 안락동까지 이어지는 부산의 지도는 단지 배경에 머무르지 않는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일제강점기, 산업화 시기의 판자촌 형성과 재개발에 이르기까지 한 동네에 쌓인 시간들을 한 여성의 사적인 기억을 통해 되짚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좌천동이라는 구체적 장소의 도시사를 기록한 미시사로도 읽힌다.
역사의 흐름은 흔히 국가와 자본이 남긴 큰 사건과 그 이름으로만 기억되지만 박영해의 소설은 그 흐름이 한 소녀의 밥상과 우물가 이야기, 동물 우리에서 살아가던 이웃들의 얼굴에 어떻게 내려앉았는지를 세밀하게 되살린다. 『우리, 다음 생에 만날까요?』는 개인의 사랑과 상실을 그리면서 동시에 공식 역사에서 지워지기 쉬운 변두리 동네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되살려낸다.
추천사
이 소설은 한 마디로 ‘늑골에 새긴 말(言)’이다.
‘혜주 씨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라던 그 말 한마디를 불빛 삼아, 상실과 어둠을 견디며 산 자의 뒤늦은 모놀로그다.
주인공인 ‘나’는 재해석되고 기록됨으로써 가면을 쓰고 무던히 살아내려 애썼던, 그러면서 ‘진짜 나’를 드러내고자 했던 모순 속에서 규명되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불러내어 애도하는 의식을 치른다.
화자(話者)에 의해 ‘거기’라 불리는 곳, 지금도 사람들이 사는 좌천동 증산 부근. 오랜 시간의 흔적이 켜와 겹을 이루며 단단한 지층이 되어 있는 공간을 작가는 섬세한 시선으로 어루만진다. ‘거기’라는 장소의 혼과 그곳을 스쳐 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애도하고 연결하며….
_배이유 소설가
저자 소개
박영해
부산교대, 동의대학교 대학원 졸업
작품집: 『네 사람이 누운 침대』 『우리가 그리는 벽화』 『종이꽃 한 송이』
제9회 들소리문학상 대상 수상
제13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
책 속으로
p.7
거실 창밖에서 연초록빛 파초잎이 여리게 굽이쳤다. 기후 온난화 탓인지 기온은 일주일 내내 30도 내외를 오르내렸다. 윤재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지만, 하루 일이 웬만큼 마무리됐을 법한 오후 4시경에 눈 딱 감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통화할 수 있을까요
서혜주 드림.
p.47
날이 갈수록 친구들과의 거리보다 가면과 나 사이에 끼어 더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학교에서 쓰는 무뚝뚝한 가면, 집에서 쓰는 무딘 척하는 가면, 친척들 앞에서 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가면이 다 달랐다. 태연한 척했지만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지, 이러다가 내가 어디까지 떠내려갈 것인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p.114
나는 여전히 가면을 벗지 못한 채,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릴 수 없었다. 가끔 쓸데없이 예민해지기도 했지만, 차츰 감정도 무뎌져서 웬만한 일에는 무감각해졌다. 때로는 그런 내가 두렵기도 했다.
누구도 그런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 역시 성적밖에 관심 없는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지 않은 애들도 있었겠지만, 걔들도 가면을 썼는지 퍼뜩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대학에 가는지만 중시하는 거기서는, 누구도 가면 뒤에 숨긴 고통을 함부로 드러내지 못했다.
p.238
내가 죽을 때, 윤재를 찾아가 왜 그렇게 떠났느냐고 묻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싶지 않았다. 누가 먼저 떠날지 모르지만, 께름직한 마음의 빚도 해결하고 싶었다. 남해에서 보낸 엽서에 쓰였던 ‘무항산무항심’이라는 말의 뜻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대상이 그였든 나였든…. 내가 진작 그 말의 뜻을 알아챘다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p.258
인생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불친절했다. 그래도 끝까지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차례
1 문자를 보내다
2 증산공원에 가다
3 윤재와 동물원에 가던 날
4 윤재와 다시 동물원에 가던 날
5 우리가 살던 집을 내려다보며
6 여고 시절의 우리
7 어머니의 죽음
8 예가체프 커피를 마시며
9 아버지의 이름
10 영천경찰서
11 늑골에 새긴 말
12 그는 왜 내 곁을 떠났을까?
13 윤재의 연락
14 온천천변을 걸으며
15 전화 오다
16 만남
해설 | 자기를 찾는 기억의 풍경-구모룡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