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임하댐으로 수몰지역인 무실, 박곡, 용계, 한들 마을에서 70여 가구의 대규모로 옮겨온 일선리 마을을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군위군 소보면 시골 산길로 하여 해평으로 들어갔다. 해평(海平),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직역하면 바다 평야다.
내륙이지만 산을 등지고 흘러내리는 물은 습문천이 되어, 기름진 평야를 끼고 유유히 젖줄 되어 흘러가는 낙동강에 온몸을 맡긴다. 두 물줄기가 기름진 충적평야의 옥토를 만들어 주는 곳이라 이름에 걸맞다. 해평에서 일선리 문화재 마을에 가기 전에 길 좌, 우 야트막한 산(낙산고분군)에 가야 및 원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고분 205기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어 오래전부터 토착지배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라 최초로 눌지왕 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세운 도리사가 있고, 통일신라시대의 낙산리 3층 석탑이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신라가 쇠약해지는 말기(907년)에 후삼국이 각축을 펼 때 견훤이 일선군과 남쪽 10여 성을 점령하여 후백제가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936년(고려 태조 19년) 왕건이 선산 알리천에서 최후의 승리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때 김선(金宣)은 왕건을 도와 큰 공을 세워 일선김씨를 하사받고 이 지역 대표적 가문이 된다.
해평면은 지금이야 구미국가공단으로 한적했던 구미에 편입되었지만, 고려시대부터 현으로 독립관청이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해평을 본으로 하는 성씨만 해도 해평 윤씨를 비롯하여 해평 김씨, 해평 손씨, 해평 유씨, 해평 길씨, 해평 전씨 등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낙산 고분군을 조금 더 가면 길옆에 가슴 찡한 의로운 개 무덤이 있다. 해평에 사는 하급관리였던 김성원(또는 노성원)은 출퇴근도 개와 같이하면서 아낌없이 보살펴 주었다. 어느 날 이웃동네에서 술이 잔뜩 취하여 집으로 오는 도중에 풀밭에 쓰러져 깊이 잠이 들었다. 불이나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강으로 달려가 몸을 적셔 풀밭을 뒹굴어 불길이 잡히자 기진맥진하여 주인 옆에 쓰러져 죽었다. 깨어난 주인은 자신을 위해 온몸으로 불 끄고 죽은 개에 감동을 받아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이와 같은 의로운 개 기록은 많고 임실의 오수에도 이와 비슷하다. 신라 때 김개인(金蓋仁)도 술 취해 잠들고 불이 나자 냇가에 달려가 물 묻힌 개가 방화선으로 불 끄고 죽는다. 이것은 고려 고종(1254년)때 문인 최자의 보한집에 실려 있고, 1973년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1987년 임하댐으로 3개군 6개면 41개 동네가 사라졌다. 그중 박실, 무실, 한들, 용계마을 사람들이 고택 문화재와 함께 옮겨왔다. 70가구가 동시에 옮기려면 집터와 농지가 필수적인 조건이라 전주류씨 무실파 문중차원에서 추진위원회가 구성된다. 안동 남후면, 예천 신풍면, 상주 중동면, 구미(당시 선산) 해평면 후보지 중에 해평 낙산리(이주하고 일선리로 바꿈)를 선택했다. 안동과 멀었지만 농지와 집터 확보가 가능했고 학문을 좋아하는 류씨 문중은 이중환이 택리지에 “영남 인재 반은 선산에 있다.(嶺南人才在一善)”라고 하였듯이, 선산은 불사이군의 상징 야은 길재와 영남학파의 종장 김종직과 그의 아버지 김숙자. 의병장 허위 등 안동과 비견될만한 문향이 서려 있는 것에도 한몫했다.
집터 200평~5천10평은 추첨으로 분양받고 농사지을 논 12마지기(1천400평)를 각각 불하받아 조상대대로 살면서 정 들었던 고향을 떠나 낯 설은 구미 해평 낙산리에 정착하여 오늘의 일선리 문화재마을을 이루었다.
첫댓글 해평면은 첫째 들판이 넓고 낙동강을 끼고 있어 잘 사는 부촌 마을로 떠 올렸는데 해평을 본으로 여러 성씨들도 많군요.
구미 행평에 대한 여러가지 일화를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