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과 아폴로는 하느님의 일꾼이며 협력자고, 신자들은 하느님의 밭이며 건물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와 질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3,1-9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8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때 이것 회복에 집중하세요.
‘금쪽같은 내 새끼’ 111회에 엄마에게 반항하면서도 엄마가 좋다고 말하는 예쁜 쌍둥이 자매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이혼한 상태이고 아빠는 일주일에 한 번 와서 아이들과 놀아줍니다. 아이들은 엄마와 사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들보고 공부하라고 해놓고는 자신은 시끄럽게 피아노를 치고 어떤 때는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옵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해줄 만큼 해준다고 생각하지만 보통 사람이 볼 때는 엄마가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고 소통할 줄도 모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아이들이 동물 흉내를 많이 낸다는 것입니다. 개 소리도 하고 고양이 소리도 합니다. 엄마와 동물의 소리로 소통하고 싶어 합니다. 이는 엄마도 동물이고 자신들도 동물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정체성대로 사는데 아이들의 정체성은 인간도 아닌 동물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생활을 하더라도 동물의 수준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정체성은 부모로부터 받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감정과 정체성을 물려받습니다. 엄마가 자신을 동물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는 부모에게 학대를 받으며 컸습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했는데 엄마가 퇴근해 1차로 아이를 때렸습니다. 그다음 아빠가 퇴근해 2차로 때렸습니다. 아무 이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남동생과 강아지 한 마리가 자신들의 울타리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강아지와 소통해야 했습니다. 금쪽이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동물이었어요.”
이 믿음을 자녀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 자신을 규정합니다.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은 부모로부터 받습니다. 하지만 자녀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교육하더라도 아이들은 낮은 자존감으로 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해 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며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잡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내용의 복음을 선포하셨는지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병자들을 치유하고 악령을 내쫓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곧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 곧 에덴동산이 다가왔다는 선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으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병들고 배고픈 이에게 지금 당장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소원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육체적이고 영적인 병부터 고쳐주시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라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이 영적인 것이라고 해서 육체적인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자를 고쳐주고 악령을 쫓아내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말로 전하는 복음은 그다음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하게 해 주기 전에 전하는 복음은 그 사람 안으로 스며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맞는 이야기일지라도 잔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웃을 위해 어떤 복지도 주지 않는 교회는 그렇게 세상에 잔소리만 하는 교회로 전락하게 됩니다. 교회는 자신의 주위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가 성당보다 병원과 학교를 먼저 짓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새벽에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주님의 기도’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주님의 기도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줍니다. 이 정체성으로 병도 고쳐주고 복음도 전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이 되고 신자들을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것이 사제의 역할입니다. 제자들이 새벽에 물 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베드로처럼 자신도 물 위를 걷겠다고 해야 합니다. 이 정체성이 회복되어야 나중에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올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홍역으로 코가 녹아내린 할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마에는 못이 박혀있습니다.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이젠 기술이 발달했으니 코 이식수술을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비용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3차에 걸친 대수술을 해야 해서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처음엔 수술하기를 꺼립니다. 하지만 막내아들 결혼식에 온전한 모습의 어머니로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 험난한 길을 갈 용기를 주었습니다. 결국 피가 잘 통하지 않아 1년에 가까운 4차의 대수술 끝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다고 하십니다.
할머니는 아들의 결혼식 때문에, 엄마라는 온전한 정체성을 되찾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고난을 참아 받으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해야 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어떤 삶이 거룩한 삶일까요? 나 자신을 그리스도로 믿고 사는 게 거룩한 삶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을 회복하는 일은 대수술을 하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그렇더라도 끝마치고 나면 날아갈 듯이 기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특별히 새벽에 기도하면서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먼저 회복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https://youtu.be/BFDFQSIHr6Q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사 본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 고백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죄 고백할 것도 없는데 왜 고해소에 들어오셨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사 보신 지 얼마나 되셨는데요?”라고 물으니, 석 달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의 불편한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석 달 되었다는 말에, ‘얼마 안 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황님도 보름에 한 번 성사를 보신다고 하는데, 석 달이면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닐까요? 사실 많은 이가(저 역시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갔으면서도 안 넘어간 척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1)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
2)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3) 아직 젊으니까
4) 이번 한 번뿐이니까
사실 마귀의 유혹은 우리가 방심하는 잠시의 틈을 타서도 불쑥불쑥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주님의 말씀 따라 항상 깨어 있지 않는다면 죄의 침범을 절대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점령되었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도 마귀는 힘을 잃고 도망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정답입니까? 거짓입니까? 당연히 정답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도 이 고백을 해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마귀가 이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이 걸렸다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면 사람들이 과연 믿을까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도 마귀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면서 거리를 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마귀를 쫓아내는 예식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예식은 주로 랍비들이 담당했는데, 그 시간이 아주 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말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귀의 유혹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마귀와 타협하지 않고, 주님 말씀만을 따라야 합니다.
소통의 답은 존중하는 마음에 있다(템플 그랜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