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내 기억속의 첫 변소는
전주시 교동에 있는 한옥 동네에 있다.
주인 아줌마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있었던 그 집에서 내 어머니는,
새댁이라 불리며 두살 터울의 어린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내 동생 하나를 더 낳으셨다.
옛날 변소가 다 그러했듯이 큰 항아리를 묻어 놓은 넓고 깊은 곳이었다.
어느날 다리 가랭이를 한껏 벌리고 쭈그리고 앉아 빤스와 바지를 두손으로 꼭 잡고 똥을 싸고 있는데 남동생이 열린문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후에 보이지 않았다.
가랭이 사이로 내려다보니 동생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 변소에서 동생은 똥과의 친분을 처음으로 맺게 되었다.
그 후로 또 빠질줄이야.......
두번째로 기억하는 변소는
대문밖 골목길에 있었던 양철대문으로 된 작은 변소였다.
어른 한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어깨 넓이의 재래식 변소였다.
볼일을 보기 위하여 앉았을때 엉덩이 뒤에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50 장씩 연탄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환기구멍이 있었는데,
여름이면 파리가 화장실을 아지트로 삼은 듯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파리를 잡아 먹고 살기 위한 거미들은,
환기구멍 앞에 그물을 쳐 놓고 드나들다 걸린 파리를 포식하고 있었다.
볼일을 보기 위하여 앉으면
엉덩이와 얼굴에 사정없이 달라 드는 똥위에 앉았던 파리들.......
동생들과 나는 지금도 맨손으로 파리를 잘 잡는다.
더운 여름날 좁은 변소에서 파리들과의 씨름이 성질을 많이 나게 했다.
그래서 잡은 파리를 극형에 처하기를 수십번도 더 했다.
손으로 잡아서 빙빙 돌리다가 땅에 패대기를 쳐도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윙하고 날아가는 파리때문에 더 화가 났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엔 한쪽 날개를 떼고....
그 후엔 두쪽 다 떼어 몸통만 변소바닥을 걸어다니게 했다.
가끔은 잡은 파리를 거미줄에 붙여 놓고 나온적도 많았다.
20년 가까이 살면서 밤마다 자주 내가 한 일은,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쓸 연탄을 변소에서 갖다가 옮겨 놓는 일이었다.
집게를 들고 변소로 가서 달빛과 골목의 가로등 불에 비친 배설물의 모양과 냄새를 눈과 코로 확인하며 나르곤 하였다.
그때는 왜 그리도 추웠었던지......
그때의 소원은,
재래식이더라도 변소가 실내에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집도 연탄을 100장씩 들여 놓는 것이었다.
세번째 기억하는 변소는,
방학때마다 갔었던 대구 할머니댁과 논산 외가의 변소였다.
시골이었기에 거름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변소였다.
발판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할수 있는 변소 옆엔 불을 떼고 난 후에 생긴 재를 모아 놓거나 농기구를 보관할수 있는 넓은 다용도식의 공간이 있었다.
어느해 여름이었던가....
밭에 거름을 주기 위하여 외삼촌이 발판을 빼 놓은,
상태에서 남동생이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다가 빠졌었다.
몸에 붙은 구더기와 똥, 냄새...
그래서 동생은 손이란 성보다는 똥이란 성으로 불리었다.
(물론 우리 네 형제는 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네번째 기억속의 변소는 이제 더이상은 변소가 아닌 화장실이다.
서울로 시집을 왔던 것이다.
신식으로 지어진 깨끗한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보게 된 화장실....
세탁기도 들어가고 세숫대도 필요없게 된 화장실....
겨울에도 집안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수 있게 된 화장실....
신혼때 많은 눈물을 마음껏 흘릴수 있었던 유일한 화장실....
소변을 볼때는 적응을 했지만 대변을 보는 일엔 한참이나 걸렸다.
한덩어리가 떨어질때 똥물이 튀면서 엉덩이를 적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는 간사함이 있음을 나는 내 자신에게서 느꼈다.
이제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나올수 있는 나만의 공간인 화장실이 갖고 싶어졌다.
다섯번째 화장실은 분가를 한 후에 얻게 된 노량진에 있었다.
지하방이었지만 남편과 아이와 셋이서 행복했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걸치지 않고 나올수 있는 편한 내집이었다.
좁은 화장실에 세탁기가 있었고 그 옆에 바로 변기가 있었다.
너무 좁아서 남편은 다리를 조금 오므리고 볼 일을 봐야 했던 곳...
아가를 씻긴후엔 세탁기 위에 미리 깔아 놓은 큰 수건에 눕힌 후 분과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혀 데리고 나왔던 그런 화장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갖게 된 나만의 화장실이 있던 그 집은 어린 내게
많은 눈물과 사회의 냉정한 현실을 알고 배우게 해 준 집이 되었다.
여섯번째 화장실은 화곡동에 있는 지하방의 화장실이다.
노량진에서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가 경낙자에게 전세금을 받아서 나오게 된 상황이라 집을 빨리 비워줘야 했었다.
그래서 둘째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2월에 급히 얻은 집이었다.
이사를 하고 열흘정도가 지난 후에 출산을 했으므로......
그곳은 방과 거실이 넓은 대신 화장실은 너무 비좁은 집이었다.
화장실 문을 열면,
변기 하나뿐인 공간이었기에 세탁기는 화장실 문 앞 거실에 놓았다.
빨래를 할때마다 호스 두개를 빼고 끼우고....
휑구어진 후에 빠지는 호스의 물은 화장실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공간이 좁다보니 물이 빠질때를 기다렸다가 멈춤과 작동을 수시로 눌러줘야 하는 집이었다.
어쩌다가 그 순간을 놓치면 거실은,
좁은 화장실에서 넘쳐 나온 세탁물로 인하여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남편은 설 자리가 거의 없었기에,
변기뚜껑에 앉아서 물로 휑구는 정도의 샤워를 3년정도 해야 했었다.
그때 가장 큰 내 꿈은 조금만 더 넓은 화장실이었다.
남편이 자유롭게 서서,
샤워를 할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좋을것 같았고 더 욕심을 낸다면
물바다가 되지 않을 정도의 세탁기가 들어갈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했다.
일곱번째 화장실은,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연립에 있다.
지은지 20년이 넘는 오래된 집이었지만 세탁기도 들어가고,
변기도 있었으며 남편이 서서 자유롭게 샤워를 할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너무나 행복했었다.
그러나 청소를 해도 항상 지저분해 보이는 집과 낡은 집을 전혀 수리하여 주지 않았던 집주인에게서 마음고생을 하고 살게 되었다.
2년이란 계약기간이 끝났음에도 전세금 반환을 해 주지 않았기에 이사를 나올때까지 3년이 넘는 시간동안 집은 곰팡이로 번져 갔으며 쓰레기 하치장 같은 곳에서 살아야만 했다.
하천가에 지어진 오래된 낡은집이었기에 무척 덮고 추운 집이었다.
겨울에 한번 씻으려면 전기난로를,
변기위에 켜 놓은 뒤에 공기가 훈훈해지면 옷을 벗고 씻어야 했다.
그 집에서 3년정도 살면서,
난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나이값을 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봤고,
지금도 그들이 언젠가는 꼭 벌을 받을거란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가장 꿈꿔 왔던 화장실이었으나 아직도 죽이고 싶은 그 인간들이
사는 집에서의 악몽때문인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나이를 먹었고 나의 가장 큰 소원도 바뀌었다.
겨울에 전기난로를 켜 놓지 않고도,
샤워를 할수 있는 욕조가 있는 화장실이 소원이 되어버렸다.
여덟번째의 화장실은 내가 갖게 된 보금자리이다.
꿈이 이루어졌다.
결혼 10주년 기념일인 3월 25일에 ,
나는 작지만 내집을 마련하여 입주를 하게 되었다.
침대와 책상이 있는 비좁은 아이들 방....
거실엔 텔레비젼과의 거리가 가깝기에,
소파하나 놓지 못하는 작은 평수의 아파트지만 난 이곳에서 긴 세월의
끝을 마무리 지을수 있는 화장실을 마침내 얻게 되었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샤워를 할수 있는 넓은 화장실...
전기난로를 미리 켜 놓지 않아도 되는 욕조가 있는 따뜻한 화장실 !
이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소박하게 갖을수 있는 꿈은
비데가 있는 조금 더 넓은 욕실안에 있는 화장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다리 가랑이를 벌리고 똥과 오줌을 쌌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내가 늙어 가고 있음이리라..........
가끔 옛 향수에 젖어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서 오줌을 싸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오줌싸는 맛은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