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백. 그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다.
이병도의 수제자로 김원룡, 김철준, 천관우 등과 함께 해방이후 우리나라 고대사학계를 이끌어왔다.
그의 한국사신론은 국정교과서 이상가는 위력을 발휘하며 사학계의 정설을 논하는 권위있는 저서였고, 그의 위치는 서강대교수로 끝나지 않고 사학계 전반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성실한 연구자의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의 논문은 일본인의 논문으로 앞머리를 채웠고, 그의 주장은 이병도의 주장을 되뇌이었으며, 그의 생각에는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반도의 역사였다.(한국사신론 1966년판의 경우)
그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민족주의라는 색깔을 입고, 스스로를 신민족주의사학자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학문에 대한 반성이 없이 자기 합리화를 위한 명분론일뿐이다.
그가 일제시대에 유소년기를 살았고, 20살의 젊은 나이에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초기 국사학과 졸업생으로써 이병도로 부터 세뇌를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의 시대에 그와 같은 교육을 받은 자로 이병도를 세뇌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얼마나 될까. 참고자료로 활용될 일본논문을 인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실학에서 부터 내려오는 한국사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단재와 위당, 손진태 등을 인용하고 비판했다면 그의 학문은 정말 새로웠을텐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실증사학에 관한한 20세기말 한국사학계의 대표자였다. 고고학계의 김원룡과 더불어 이병도의 양팔이었고, 그의 주장은 곧 법률과도 같았다.
그나마 놀라운 것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철저히 불신하던 그로부터 이종욱과 같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신봉자가 나온 것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종욱의 박사학위논문을 통과시켜 주었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이병도의 직계이자 이기백의 또 다른 후계자라고 할 서울대 출신들에 의해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한국사학계의 암초로 건제하다.
또한 역사학자로서 이기백 역시 왜 역사를 연구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 대한 질문보다는 밥벌이로써의 역사학에 치중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시민강좌를 만들어 역사 대중화에 기여했다고는 하나,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재야사학에 맞서서 대중들에게 강단사학의 논리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논문집을 하나 만들은 것에 불과했고, 한번 얻은 권위를 바탕으로 역사학보, 진단학보, 한국사연구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학문의 단일화된 기준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사학이 다양화의 길을 걷지 못하고, 이병도 사학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오랜 시일이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기백과 같은 뛰어난 제자들 때문이었다.
이기백의 죽음이 과연 식민사학의 종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결코 아닐 것이다.
식민사학의 본질은 우리를 중심에 놓지 못하고, 우리를 타자화하여 주변부로 놓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사학계에서 제왕운기의 이승휴 이래로 한국을 중심에 놓고 서술한 역사책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여전히 한국사에서 우리는 여전히 수동적이며, 여전히 주인공이 아니다.
한국사신론은 지배계급의 변화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해놓았고, 그로 인해 고대 왕정에서 근대의 민주정으로서의 발전을 서술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회의적이다.
진화론에 대한 일방적 수용과 그로 인한 고대사회의 천박성을 전제로 한 역사서술은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처음부터 부정적인 것에서 부터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사학자로서 뛰어난 재주를 갖추고 있었다. 누구보다 앞선 깔끔한 문장력과 정리 능력, 학계의 리러로서의 리더쉽, 그리고 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권위까지.
그런 그였기에 우리는 죄를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혜안이 없는 만큼, 성실하게 살아온 죄아닌 죄밖에 없을 지 모른다. 그가 차지했던 위치를 생각하여 왜 하필 그가 그 위치에 서 있었는지, 부디 다른 사람이 그 위치에 서있었더라면 좀 더 낳은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그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가 이름없는 평범한 교수에 불과했다면 그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안가져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명실공히 이병도를 잇는 수제자로서 한국역사학계의 발전과 전개에 있어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시대를 넘나드는 인식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식민지시대의 지식인의 수준에서 맴돌았던 것에 대해 아쉬움이 어린 투정을 해보는 것이다.
그는 갔다. 이병도가 근 100살을 살았고, 김원룡도 70 이 넘어 죽었고, 김철준도 정년퇴임 후 죽었으니,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참 오래도 살았다.
그의 많은 주장들은 지금도 한국사학계의 정설의 위치에 서있다. 그의 주장이 많이 극복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의 주장과 권위는 살아있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이땅에서 한국사를 한다는 인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겠지만, 진짜 그를 추모한다면, 그의 가졌던 한계를 뛰어넘는 역사 연구로 보다 발전된 한국사 연구를 하여 과거 시대를 극복하지 못했던 한 지식인에 대한 질타를 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를 추모하는 것이리라.
중국의 제후국, 일본에 병합, 그리고 미군정하에 가난한 한국을 보고 자라온 사람에게 한국의 가능성을 찾고 한국의 미래를 설계할 역사학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 우리시대의 지나친 과욕이다.
그가 식민사학자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도 그를 진정으로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학문의 바탕은 이병도와 일본의 식민사학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출발하여 한국사 시민강좌까지 왔다. 그만하면 그의 삶은 그런데로 봐줄 만하지 않는가.
굳이 그를 위한 변명도 하지 말자. 그리고 그를 지나치게 폄하하지도 말자. 또한 그를 위대한 스승이니 어쩌느니 하는 헌사에 속아넘어가지도 말자. 그는 단지 20세기 후반을 살아온 보통 역사연구자였을 뿐이었으니까.
역사학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면에서는 식민사학의 계승자 또는 민족사학의 주창자라는 말을 들어온 이기백 그리고 이기백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민족사학을 주장하는 김용만님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치만이 유일한 것은 아닙니다. 역사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찾는 하나의 방편이므로 그 자체로서 존립 가치를 가진다고 보는 관점이 민족이나 국가의 위대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래의 목적이라는 주장보다 더 합리적이고 보편적일 것입니다. 김용만님 스스로는 민족사학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소위 꼴통 수준의 극우 성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ensamble님 끝이 명문장이로군요. 맞습니다. 역사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역사를 연구하는 자라면 누가 자신의 길을 제대로 걸었느냐는 것이지요. 분식하지 않고.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이기백 선생에 대해 쏟아나올 화려한 찬사와 비난 양쪽을 모두 비판하기 위함이니까요
또 하나는 내가 가졌던 이기백 선생에 대한 비판적 언설을 녹여서 그저 표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역시 개인에 대한 평가는 역시 어렵군요. 그런데, 한가지 민족이나 국가의 위대성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다는 것이 역사학의 본래 목적이란 표현은 누구와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궁금하군요.
"민족이나 국가의 위대성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다는 것이 역사학의 본래 목적"이라는 건 과거 역사를 현존하는 국가 또는 민족의 역사로서 정의하기를 윈하는 모든 역사학자들의 관점을 말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 역사학자와 더불어 그것을 역사 침략이라고
다른 분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를 둘러싼 역사라는 건 내가 세살 정도 이후로 내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갖게된 기억이 전부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모와 형제, 친구들... 이러한 사람들이 나와 인연을 맺으면서 나의 기억 속에 잔재로서 남은
나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일생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나의 정체성과 거의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연개소문의 일생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 정체성을 확립시킨다는 학교 교육을 통해 강제적으로 주입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입의 배경에는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파한 정치가와 관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 역사학자들이 있을 겁니다. 재미있는 건, 그런 식으로 정치를 위해 봉사하는 역사학을 전파한 원조가 바로 일본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기백을 보면서 민족을 위해 봉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식민사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
황국사학(식민사학)의 원조인 일본의 제국주의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식민사학의 異稱인 황국사학의 신봉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된 적이 있으면서 해방 이후에도 계속 소위 민족사학의 확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할 수 있는 한암당 이유립이
첫댓글 진정한 우리 역사는 없나요
식민학자 제자들이 100% 식민사학을 믿었다면 지금 이만한 성과도 없겠죠
- 인용 절대 불가. - <-압박스러워라 -_ㅜ
역사학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면에서는 식민사학의 계승자 또는 민족사학의 주창자라는 말을 들어온 이기백 그리고 이기백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민족사학을 주장하는 김용만님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치만이 유일한 것은 아닙니다. 역사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찾는 하나의 방편이므로 그 자체로서 존립 가치를 가진다고 보는 관점이 민족이나 국가의 위대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래의 목적이라는 주장보다 더 합리적이고 보편적일 것입니다. 김용만님 스스로는 민족사학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소위 꼴통 수준의 극우 성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김용만님도 식민사학자의 추종자라고 욕을 할 때가 있습니다. 결국 식민사학이니 하는 건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상대방이 만족시키는지 아닌지를 표현하기 위한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입니다.
ensamble님 끝이 명문장이로군요. 맞습니다. 역사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역사를 연구하는 자라면 누가 자신의 길을 제대로 걸었느냐는 것이지요. 분식하지 않고.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이기백 선생에 대해 쏟아나올 화려한 찬사와 비난 양쪽을 모두 비판하기 위함이니까요
또 하나는 내가 가졌던 이기백 선생에 대한 비판적 언설을 녹여서 그저 표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역시 개인에 대한 평가는 역시 어렵군요. 그런데, 한가지 민족이나 국가의 위대성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다는 것이 역사학의 본래 목적이란 표현은 누구와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궁금하군요.
'넌 약했으니까 내 말을 들어야돼'라고 말하는 쪽바리에게 '약했다고 니 말 들을 필요 없다!'라고 말하면서 '나는 약했다'라는걸 인정해버려 한국 사학계에 엄청난 해악을 남겨놓은 이기백. 역사학보다는 논리학쪽으로 갔었으면...-_-
"민족이나 국가의 위대성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다는 것이 역사학의 본래 목적"이라는 건 과거 역사를 현존하는 국가 또는 민족의 역사로서 정의하기를 윈하는 모든 역사학자들의 관점을 말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 역사학자와 더불어 그것을 역사 침략이라고
주장하는 남북한의 역사학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점이 하나의 예가 될 것입니다. "고구려의 역사"라는 것이 원초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기도 힘들지만, 설사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현존하는 특정 국가 또는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를 둘러싼 역사라는 건 내가 세살 정도 이후로 내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갖게된 기억이 전부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모와 형제, 친구들... 이러한 사람들이 나와 인연을 맺으면서 나의 기억 속에 잔재로서 남은
것이 나에게는 역사로서 중요한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일상 생활보다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일상 생활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며,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일생은 내 아버지의 어버지의 일생보다는 나에게 덜 중요합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일생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나의 정체성과 거의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연개소문의 일생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 정체성을 확립시킨다는 학교 교육을 통해 강제적으로 주입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입의 배경에는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파한 정치가와 관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 역사학자들이 있을 겁니다. 재미있는 건, 그런 식으로 정치를 위해 봉사하는 역사학을 전파한 원조가 바로 일본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기백을 보면서 민족을 위해 봉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식민사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
황국사학(식민사학)의 원조인 일본의 제국주의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식민사학의 異稱인 황국사학의 신봉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된 적이 있으면서 해방 이후에도 계속 소위 민족사학의 확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할 수 있는 한암당 이유립이
일본에서 극우주의자로 평가되는 사람과 지속적인 교류를 가졌다는 것은 황국사학과 민족사학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제 글을 보고서 혹시 김용만님의 마음이 거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제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는 정도로 이해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글이 특별히 김용만님을 겨냥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이상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