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신씨 시조 신숭겸의 생애
시조 동상 위치 전국 3기 춘천 : 춘천묘역 : 묘소가 있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곡성 : 용산단 : 탄생지인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 대구 : 파군재 삼거리 : 순절지인 대구 동구 봉무동 파군재 삼거리 ▣ 시조 동상 설계도 해설▣ 시조 동상은 각종 문헌과 고증 자료은 물론 전국 장군 동상의 실례를 참조하여 장군 입상(立像)으로서 영정을 토대로 한 것인바 태조 어진(御眞)과 같이 대묘(大廟)에 영정이 봉안되었고, 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역대왕조실록, 고려조편에 역대 왕의 어진과 더불어 위인편에 영인본이 등재되어 역사자료로 공인, 전래된 것이다. ※ 좌대(座臺) (3,780 × 2,100 × 2,100) 좌대는 장군상이므로 성곽을 상징하여 축단하였으며, 12간지를 상징한 12단을 쌓아 영영세세 영원할 것을 기원하고, 한단 높이를 춘향대제일(春享大祭日)인 3월 3일을 상징한 330mm로 하였고, 상판고는 순절 연도인 927년을 상징하여 270mm로 하였다. ※ 기단(基壇) (510 × 3,960 × 2,310) 분향을 엄숙하게 하기 위하여 중앙에 신도(神道)를 두었으며 좌우에 상계, 하계를 두고 상석을 놓아 헌화 또는 헌주하며, 향로를 놓아 분향을 하도록 하였다. ※ 부조(浮彫) (1,320 × 2,640) 부조는 전면에 충렬도, 사안도, 해설문, 후면에 약전(略傳), 도이장가, 건립문, 헌성록을 설치 하였다. ※ 부조벽(浮彫壁) (2,700 × 9,270 × 600) 부조벽은 성벽 도형으로써 시조께서 순절하신 927년을 상징, 폭은 9,270으로 하며, 판재는 330 × 330으로 하였으니, 3월3일과 9월 9일을 상징하였다. ※ 바닥판재. 바닥판재 또한 330 × 330과 990 × 990으로 하여 춘, 추 대제일(大祭日)을 상징, 세세연연(世世年年) 영원토록 기원한 것이며 전정(前庭)은 16,500 × 6,600이고 부조바닥은 12,870 × 7,920이다. ◐ 건립 취지 및 제막식 ◑ 우리 70만 종원의 오랜 숙원 사업인 시조 장절공 동상 건립이 준공되어 2004년 10월 역사적인 제막식을 마치고 그 장엄하신 위용을 우러러 뵈올수 있게 되었다. 장절공이 순절하신지 1080여년 동안 우리 선조님들은 위대한 유적을 소중히 보존하여 왔다. 황해도 태사사, 곡성 덕양서원을 비롯하여 율리사 경백사가 있고 왕건 태조를 모신 숭의전에 배향되시어 매년 제향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은 두상없이 예장되신 묘소나 영정앞에 설 때마다 비통하고 괴로운 심정을 참을 수 없어 전국 종원의 뜻을 모아 동상을 건립하여 위령의 제단으로 삼고자 대종중에서 세부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장절공의 유적지인 춘천 묘역, 곡성 용산단, 대구 표충재 등 시조 3대 유적지는 천년의 유서깊은 사적지요 의절의 표상이신 위대한 시조의 영령을 모신 성역으로 인류 역사에 길이 빛날 사적지 인바, 동상의 위치는 춘천 묘역은 묘역광장(2004. 10. 22 제막식)에, 곡성 용산단은 경내(10. 25 제막식)에, 대구 표충재는 전적지인 봉무동 파군재 삼거리(10. 28 제막식) 등에 3기를 모시고 전국의 종원은 물론 유관기관장 및 수 많은 축하객이 운집한 가운데 뜨거운 함성과 박수속에 역사적인 제막식 행사가 거행되었다. 우리 70만 후손들은 시조 장절공의 위훈을 더욱 빛내고 선조와 사적을 엄숙히 수호, 보존, 발전 시켜야 할 책무가 있는바 앞으로 시조 관련 유적지는 물론 동상을 모신 성스러운 위치에 국내외의 수많은 참배객이 증가 할 것으로 예상되며 국민교육의 도장이 되고 있는 실정이므로 깊은 관심으로 추모의 예를 올리고 숭고한 대의대절의 정신이 해와 달처럼 빛나도록 영원무궁 계승하여야 할 것이다..
1. 탄생 ㆍ성장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 장군은 신라말(서기 877년 경) 전라도 곡성 현(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서 탄생하셨다.
장군의 처음 이름은 능산이었으며, 휘(諱:돌아가신 조상 또는 높은 어른의 이름)는 숭겸이요, 시호(공신이 죽은 뒤 임금이 추증하는 이름)는 장절공이다.
장군은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천성이 용감하고 명민스러웠으며 활쏘는 재주와 무예가 뛰어나 장수다운 기질을 갖추고 있었다.
장군은 태생지 곡성 용탄에서 얻은 신령한 용마를 타고 신유봉, 비래산, 동리산, 화장산 등지에서 활을 쏘며 무예를 닦는 한편 독서당을 지어 문장도 익혀 15세에 유과(儒科)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2. 고려의 개국
태생지 곡성에서 닦은 무예가 출중하여 태봉국의 기장(騎將)이 된 장군은 궁예왕이 폭압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민심이 흉흉하므로 배현경, 홍유, 유금필, 복지겸등과 모의하여 궁예를 폐위하고 형제 결의한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를 개국함으로써 개국원훈 벽상공신 대장군으로서 고려국 500년과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3. 사성(賜姓: 姓을 주다)
고려태조 왕건이 개국공신 모든 장수들과 함께 황해도 평주에 사냥을 갔다가 삼탄에 이르러 마침 점심때가 되었는데 기러기 세 마리가 하늘높이 맴돌고 있는지라 태조가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 하니 신장군이 나서서 "신이 쏘리다" 하였다.
태조가 활과 안마를 내리리 신장군이 "몇째 기러기를 쏘리까" 하였다. 태조가 웃으면서 "세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 하였다. 신장군이 활을 쏘아 명한대로 그 기러기를 맞히니 태조가 탄복하여 평산(平山)으로 관향을 삼게 하였다.
4. 순국 , 위왕대사
태조10년 후백제 견훤군과의 대구 동수대전(대구 지묘동)에서 순국하셨다. 견훤군이 신라를 침공하여 왕족을 도륙하므로 태조가 동맹관계인 신라를 돕고자 팔공산에서 견훤군을 맞아 싸웠으나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에게 도리어 포위되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신장군은 그 용모가 태조를 닮았으므로 태조를 숨기고 대신 어의와 어차로 변장하고 적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셨으니 그 충절이야 말로 일월과 같이 밝고 별과 같이 빛난다 하겠다.
신장군의 위왕대사(爲王代死:왕을 위해 대신죽음)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태조 왕건이 신장군의 높은 충절을 기려 벽상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저저공신(壁上虎騎衛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戴 匡衛怡輔 砥節底定功臣) 을 추봉하고 장절이란 시호를 내렸다
출처http://blog.daum.net/shm1106/14655334 글쓴이 시현만 [출처]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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