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0년~1700년대🌹 |
🌱1618년 5월 13일 선조 때 정치가 백사 이항복, 유배지 북청 서 사망
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 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이 1618년 5월 13일 유배지 북청 서 향년 64년의 나이로 별세했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하면서 왕조의 위기를 넘긴 충신이었다. 그는 당시 관료사회에 만연했던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초연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회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 나라의 어려운 살림을 잘 꾸려 나갔다. | |
🌱1762년 5월 13일 조선 영조, 사도세자 뒤주에 감금
사도세자 : 조선의 왕세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영조의 차남으로 모친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이다. 정실부인은 혜경궁 홍씨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다.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사망했다. 이를 임오화변이라고 한다.
휘는 '훤(愃)'으로, '너그럽다'는 뜻이다.[5][6] '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愃'에 '선'이란 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이 '훤'으로 적혀 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煊(마를 훤)'을 써 두었다. 자(字)가 너그럽다는 뜻인 '윤관(允寬)'인데 이름과 자는 뜻이 연관되게 짓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사도세자의 이름도 '잊는다'는 뜻인 '선'보단 '너그럽다'는 뜻인 '훤'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원래 영조가 내린 시호는 '사도(思悼)' 단 2글자였지만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장헌(莊獻)'을 존호로 올려 '사도장헌세자'가 되었고 정조 7년(1783)에는 존호가 추가되어 '사도수덕돈경장헌세자'가 되었으며 정조 8년(1784) '홍인경지(弘仁景祉)', 다시 정조 18년(1794)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를 올렸고 한참 뒤인 철종[9] 5년(1854) '찬원헌성계상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를 더함으로써 최종적인 정식 시호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로 길어졌다.
간혹 "장헌세자가 죽어서 '사도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말이 돌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둘 다 죽은 뒤에 붙은 시호인 데다 '사도(思悼)'는 영조, '장헌(莊獻)'은 정조가 붙인 시호라 오히려 장헌이 나중에 붙었다. 어차피 장헌세자가 되고 나서도 사도도 여전히 시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두 칭호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세자로 있는 동안 공식 칭호는 '세자' 단 두 글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자는 동시에 여러 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냥 세자라고만 불러도 헷갈릴 일이 없다.
사도세자의 시호에 쓰인 한자의 뜻이 생각 사(思), 슬퍼할 도(悼)라 영조가 아들을 죽음을 생각하며 애도한다는 의미로 여기는 의견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시호에 쓰인 두글자를 시법상에 따르면 사(思)는 이전의 잘못을 후회했다는 뜻이고 도(悼)는 중년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일찍 죽은 세자'라는 뜻으로 사실상 고인드립이다. 이 때문에 정조는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싫어했으며, 일성록의 기록을 보면 조정관료들 역시 '사도라는 시호가 좋지 않다'는 것에 공감했다. # 정조의 의견을 존중했는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추가한 이후로 실록의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의 시호를 두글자로 호칭할 때는 장헌세자로만 호칭하였다.
사도세자가 만 14세인 1749년 어느 날 장인에게 쓴 편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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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 |
🌳13년 흥사단 조직-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애국 지사들이 모여 조직
1913년 5월 13일 도산 안창호 주도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
도산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된 흥사단(興士團)은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민족부흥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에 원동위원부를 조직,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고, 서울과 평양에는 수양동맹회(1922년)와 동우구락부(1923년)를 결성, 국내에서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에 불어닥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명의 회원이 검거·투옥돼 강제해산되는 비운을 겪었다. 광복 후에는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고 1969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흥사단(興士團)은 1907년 유길준이 설립한 계몽단체였고, 1913년 5월 13일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재결성한 민족운동단체이다.
1907년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은 1911년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해체되었으나 유길준 사후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조직을 부활시켰다. 홍언(경기도), 염만석(강원도), 조병옥(충청남도), 민찬호(황해도), 송종익(경상도), 강영소(평안도), 김종림(함경도), 정원도(전라도) 등의 8도 대표를 포함하여 25명의 창립위원으로 하여 흥사단이 재탄생 되었다. | |
🌳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로 비구ㆍ대처 암투 표면화 🌳61년 민자통 주최로 남북학생회담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 개최 🌳64년 서울시경, 경향신문 편집국장 등 7명 구속 (특집기사 말썽) 🌳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실시(공화당 박정희후보 당선, 7월1일 취임) 🌳71년 통혁당 재건기도 간첩단 11명 검거 | |
🌳75년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9호 (헌법비방· 반대금지) 선포 (긴급조치7호 해제)
1975년 5월 13일,긴급조치 9호 선포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9호’ 일명 긴급조치 9호를 1975년 5월 13일 선포했다. 이는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겪을 시련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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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연세대를 비롯한 6개 대학생 2500명이 광화문 에서 시위. | |
🌳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피격 1981년 5월 13일 요한 바오로 2세(Saint Pope John Paul II)는 터키인 청년 메흐메트 알리 아자(당시 23세)의 흉탄에 맞아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이 때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을 하던 중이었다. 서둘러 그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게멜리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총알이 교황의 심장을 1㎜ 차이로 비켜간 덕분에 대동맥과 척추를 다치지 않은 교황은 6시간의 대수술 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관중에게 붙잡혀 있던 아자는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중태에 빠졌던 교황은 4일 만에 의식을 회복하였다. | |
🌳83년 정부, 석탄값 평균 4.1% 인상 🌳84년 병든소 도입 파문-83년 도입2만여마리 12% 병들어 🌳85년 제12대국회 개원,제125회 임시국회 개회 의장에 이재형, 부의장에 최영철·김녹영 선출 🌳87년 정부, 88년 2월까지 남극기지 건설키로 확정 🌳88년 행정개혁위원회(위원장 신현확 전 총리) 발족 🌳88년 일,오쿠노장관 망언 해임-일본 침략사 부인-군국주의 망령 🌳88년 가락동 농수산물 직판장 개장 🌳89년 광주서 전민련 주최 3만여명 야간시위, 전남대 병원앞 점거. 큰 충돌없이 밤늦게 해산 🌳91년 서울 중부경찰서, 시위현장에서 화염병을 던진 S공고 3년 南모군(18)을 구속. 고교생 첫 구속. 🌳92년 북한, 한국전쟁중 실종 미군유해 13구를 비무장 지대 공동경비구역 판문점에서 유엔軍 사령부측에 인도. 🌳92년 전경련,「93년 재정운영방향」의견서- 軍 인력을 산업체에서 활용하는 방안을 대폭 확대해야 주장 🌳92년 대우그룹, 북한으로부터 남녀 작업복등 모두 16만 726벌을 81만 7456달러에 반입키로. 🌳92년 북한, 한국전중 실종된 미군유해 13구 판문점 에서 유엔사령부에 인도 🌳93년 김영삼 대통령, 12·12사태를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인 사건'으로 규정. 🌳93년 서울지검, 서울시경 3부장으로 재직중 슬롯머신 업소 15곳을 신규허가 한 千基鎬치안감 구속. 🌳94년 5·18민중 운동 연합 등 5·18관련자 35명을 내란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 🌳96년 이수성 국무총리, 폴란드 방문중 치모세비치 총리와의 회담 🌳97년 북한 안선국, 김원형 두 가족 서해 귀순 | |
| 🌸2000년대🌸 | |
✿2009년 5월13일...노무현 대통령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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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서울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서 예비군 총기난사 후 자살
13일 오전 10시53분쯤 서울 서초구 내곡동 육군 52사단 211연대 예비군 훈련장에서 동원훈련 중이던 예비군최모(23·서울 송파구 거주)씨가 K2 소총을 난사해 최씨를 포함해 3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총기를 난사한 최씨는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총에 맞은 예비군 중 박모(24)씨는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된 직후 숨졌다. 목 관통상을 입고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은 윤모(24)씨도 이날 밤 끝내 숨졌다.
2015년 5월 13일, 예비군 총기 난사 사건
2015년 5월 13일 10시 44분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52사단 예하 송파·강동 예비군 훈련장에서 예비군 최 모 씨가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범인 최 모 씨는 2박 3일간의 예비군 동원훈련을 받기 위해 5월 12일에 입소했다.
13일 사격 훈련에서 10발들이 탄창을 건네 받고 1번 사로로 들어갔다. 사로 뒤로는 다음 순번의 예비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최씨는 1발을 영점 사격한 뒤 뒤로 돌아 부사수 예비군을 쏘고 주변 2~5사로 예비군들에게 7발을 난사했다. 총격으로 예비군 4명이 피격 당했고 최씨는 총기 난사 후 자신의 총기로 자살하였다.
범행 총기는 K-2였으며, 부상자들은 삼성의료원, 국군수도병원, 강남 세브란스병원 등으로 후송되었다. 피해자 예비군 1명은 삼성의료원에 도착한 즉시 사망하였으며, 다른 한 명도 수술에 들어갔지만 결국 사망했다. 총 사망자 3명, 부상자 2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