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이라 불리는
6.25전쟁 중에
우리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
도움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이렇게 발전했다는 것을
어느새 잊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도움에 더해
우리 부모 세대의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세계를 향한
도움의 손길을 뻗칠 시간입니다.
헤퍼코리아 영상에서 보듯이
우리도 이젠 우리나라보다
어려운 나라,
전쟁중인 나라에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6.25전쟁 중
‘원양항해 목동
(Seagoing Cowboys)’이라
불리웠던
미국 아칸소주에 본부를 둔
국제개발 비영리기관인
‘헤퍼 인터내셔널
(Heifer International)’을 통해
(※heifer:
1. 암소 2. 계집 3. 젊은 여자)
한국으로 보내지는 가축을 돌보기 위해
배에 탄 목동들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아칸소주에 본부를 둔 국제개발 비영리기관인 Heifer International
|
‘한국을 위한 노아의 방주 작전'
(목회 칼럼, 2023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수송선들은
병력과 탱크, 장갑차 등 무기와
전쟁 물자를 한반도로 실어 날랐습니다.
전쟁물자를 가득 싣고
태평양을 건너는 수송선에는
특이하게도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가죽 부츠를 신은 목동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들은 미국 아칸소주에 본부를 둔
국제개발 비영리기관인
‘헤퍼 인터내셔널
(Heifer International)’을 통해
한국으로 보내지는 가축을 돌보기 위해
배에 탄 목동들이었습니다.
'헤퍼 인터내셔널'의 원양 항해 목동들
@해퍼 인터내셔널 홈페이지
사람들은 이들 목동들을
소 떼를 몰고 초원이 아닌
바다를 건넌다는 뜻에서
‘원양항해 목동
(Seagoing Cowboys)’이라고
불렀습니다.
‘원양항해 목동’들은
전후 한국의 구호사업에 쓰일
가축을 돌보기 위해
배에 올랐지만,
배 위에서 가축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폭풍우를 뚫고
뱃멀미와 싸우며
부산항까지 7주간의 항해를
해야 했습니다.
멀미로 나뒹구는
가축들을 돌봐야 했고,
가축에게 먹일 건초와
귀리 더미를 나르다 보면
몸살이 날 만큼
심한 근육통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가축을 먹이고
잠자리를 봐주는 일도 고역이지만,
가장 고달픈 일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가축 배설물을
신속히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한국 농가에 기증된 젖소들
@ '헤퍼 코리아' 홈페이지
이렇게 1952년부터 1976년까지
총 44차례에 걸쳐
젖소, 황소, 돼지, 염소 등
가축 3,200마리를
한국으로 실어 보냈는데,
가축을 실은 수송선에는
원양항해 목동 20여 명이 동승했고,
이 작업에 동원된 목동이
총 3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헤퍼 인터내셔널’을 통해
한국에 보내진 가축은
전쟁으로 망가진 축산업의
기반을 다시 세우는 데
종자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이 단체에서 보낸 것은
가축만이 아니었습니다.
병아리로 부화할 수 있는
종란 21만 6천개를
항공편으로 보내므로
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의 농촌에
자립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국내 축산 농장에 전달된 젖소들
@헤퍼 코리아 홈페이지
1954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공항에는
한국을 향해 출발하는 비행기 한 대가
특별한 손님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특별한 손님은 꿀벌이었습니다.
200개의 벌통에 나눠 담긴
150만 마리의 꿀벌들은
염소 75마리,
토끼 500마리와 함께
한국으로 보내졌습니다.
당시 꿀벌 운송에 참여했던
관계자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전쟁 중에 살충제가 다량 사용되면서
식량을 생산하는 작물의
꽃가루를 운반하는 곤충
대부분이 사라졌고,
굶주린 한국인들은
방사한 벌을 사용해
작물을 수분하고
재배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헤퍼 인터내셔널의 꿀벌, 염소,
토끼 수송작전
@헤퍼 코리아 홈페이지
이들은 꿀벌의 안전한 수송을 위해
별도의 비행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일반적인 비행기의 비행 고도는
8,000~9,000피트지만,
당시 꿀벌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보다 절반 이하인
약 4,000피트 정도에서
비행했습니다.
또 비행거리 2~3,000km의
중형 프로펠러기를 이용하다 보니
미국에서 한국까지
여러 기착지를 거쳐
3박 4일간 비행해야 했고,
눈, 비, 얼음 등
조종사의 시야를 가리는
악천후를 뚫고 가야 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도움으로
한국에 보내진
가축과 종란, 꿀벌을 통해
한국은 산업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농업과 축산업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렇게 보내진 가축은
전쟁 후 한국이 빈곤국을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농가에는 생계를 위한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젖소는 한국전쟁 고아들의
소중한 우유공급원이 되었습니다.
@헤퍼 코리아 홈페이지
헤퍼 인터내셔널에서는
가축과 꿀벌을 수송하는 프로젝트에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였습니다.
‘Operation Noah’s Ark for Korea’.
‘한국을 위한 노아의 방주 작전’이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모든 생물이 들어갔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꿈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한국을 위한 노아의 방주 작전’에도
가축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향한
약속과 꿈이 담겨 있었습니다.
헤퍼 인터내셔널
(Heifer International)은
1944년 미국 중서부 출신의 농부
댄 웨스트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내전 당시에
지치고 굶주린 피난민들에게
우유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목도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기아와 빈곤에 빠진 사람들을
구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그가 속한 '형제의 교회'
(Church of the Brethren)
성도들과 함께 자선구호 단체인
헤퍼인터내셔널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우유 한 잔을 주는 것보다
가축을 길러
직접 우유를 생산하고
더 나아가 자립을 유도하는 것이
굶주림과 빈곤을 극복하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한 잔의 우유가 아닌, 소 한 마리
(Not a Cup…But a Cow®)”
이 깨우침은
댄 웨스트가
헤퍼인터내셔널을 설립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자선 단체 이름을
암송아지란 뜻을 지닌
헤퍼(Heifer)로 정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헤퍼인터내셔널' 설립자 댄 웨스트
@헤퍼인터내셔널 홈페이지
1950년, 6.25전쟁으로
한반도는 폐허가 됐고,
수백만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가축도 씨가 마를 지경이었으며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1951년,
'헤퍼 프로젝트 인터내셔널'은
한국을 방문하여
상황의 심각성을 확인하고,
1950년 12월
유엔총회의 결의에 의해 창설된
국제연합 한국재건단과 함께
한국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처럼
6.25전쟁으로 황폐화 된
한국 땅을 복원시킬 프로젝트로
각종 생명체를
세심하게 선별하여 보내는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1952년 4월 4일,
‘산란계용 종란 보내기
(Hatching Eggs for Korea)’
사업을 통해서
최초의 종란 7만개가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21만 6천개의 종란이
미군 수송기 편으로
한국에 도착해서
24시간 안에
전국에 산재한 부화장에
전달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염소 222마리,
돼지 331마리,
닭 70마리,
토끼 500마리,
꿀벌통 200개가
미군 수송선 편으로
전쟁으로 굶주린 사람들과
고아들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1952~1954년의 기간 동안
헤퍼인터내셔널에서
200마리 이상의 염소가
한국에 지원되었습니다. @헤퍼 코리아
이렇게 1952년부터 1976년까지
총 44회에 걸쳐
가축 3,200여 마리가
미군 수송선 편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전국 17개 지역에 전달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1960년대 초에
처음 들어온 젖소 897마리와
황소 58마리도 포함되었습니다.
가축은 부산 애아원,
이사벨 고아원,
마산 애리원 등의 고아원과
울릉도의 병원 등으로 보내져
굶주린 고아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였고,
축산 농장에도 전달되어
국내 목축업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유명 브랜드가 된
연세우유의 역사도
1962년 헤퍼 프로젝트
(Heifer Project)로부터
젖소 10마리를 기증받아
연세대학교 캠퍼스 내
(현, 운동장 옆 언덕)에서
연세목장을 시작한 것이 시초로
우리나라 유업체 중에서
두 번째로 역사가 깊습니다.
혹자는 6.25를
'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이라고 부릅니다.
그라나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전쟁의 참혹한 참상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낯선 이국 땅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함께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로
각종 가축과 꿀벌까지 보내
우리를 도운 미국 국민과
특히 원양 목동의 고초를 자원한
'형제의 교회' 교인을 비롯하여
헤퍼인터내셔널 후원자들의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3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전쟁입니다.
그 전쟁의 비극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낯선 땅에서 생명을 바친
수많은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을 수 없습니다.
가축과 꿀벌까지 보내며 도운
우방 국가들의 도움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랑을 담아 보내는
노아의 방주 작전이
곳곳에서 펼쳐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미국(美國)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기독교(基督敎)정신에 입각한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인류애(人類愛)는
하나님의 눈으로만 판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막강했던 힘이
상대적으로 쇠락하고 있는 미국이
자신의 방어 또는 이익을 위해서
혹시 지금 우리에게 조금은
손해(損害)가 되는 어떤 일을 해도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包容)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미국은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달했고
경제발전과 안보는 물론
미개했던 국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각골난망(刻骨難忘)이란
단어가 생각납니다.
https://youtu.be/5PR0vQxfBd8
위 글을 읽고
청산이 하고 싶은 말은
1950년 6월 25일 04:00
북괴 김일성이
적화야욕으로 불법남침하여
인민군과 중공군이
삼천리 금수강산을
폐허로 만들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고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받쳤다는
사실과,
굶주린 우리 국민들을 위하여
노아의 방주 작전을
벌린 미국의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공산주의자와 간첩은 물론
종북 주사파와
진보주의자들도
하루 빨리 보수 우파로 전향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여
대한민국의 영원한 발전에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大師九回 在邱 同期
冠巖 류덕환 교수가
카톡으로 보내준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