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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우측으로 반 바퀴 가까이 꺾어다가 바로 원위치를 했다.
순간적으로 경운기도 버스도 스치듯 지나고 차도 제대로 가고 있었다.
하마 터라면 버스 밑으로 들어가 휴지처럼 될 뻔 했다.
가로수가 곧게 벗어있어서 곧은길이라고 생각했고 경운기라서 속도가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경운기는 풀리는 큰 것으로 개조를 많이 해서 시속 50km 이상 가는 것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판단을 잘못한 것은 길이 곧은 것만 생각 했지 도로가 꺼져 있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순간을 지나고 나니 다리가 후들 거리고 떨려서, 조금 가다가 길가에 가계가 있는 곳에 들러서 차를 세우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음료수를 하나 마시고 갈 수가 있었다.
그 후로 수동이는 처음 가보는 길에서는 절대로 앞지르기를 하지 않기고 결심을 했다.
사장 집에 도착해 보니 노모 혼자 살고 있었다.
그날 저녁을 먹고 사장이 차를 몰고 나가자고 해서 부강약수터 근처에 있는 술집에서 사장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 배석 하게 되었는데. 고풍스럽게 한복을 입은 여자 셋이 나와서 절을 올리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사장과 사장친구 그리고 수동이에게 술을 한잔 씩 따라서 올렸지만 수동이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나마 몇 년 전 태희와 술을 마시고 배가 아파서 혼난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아서 못 먹는다고 하면서 안 마셨다.
사장은 수동이보다 조금 많지만 가끔씩 배려를 했다.
이튿날 사장이 나흘을 쉬고 내려오라고 해서 기차를 타고 올라와서, 성남서 차례를 지내고 반계리로 내려갔다.
수동이 보니 아들의 이마 한쪽 부분에 털이 소복하게 나 있었다.
아 지난여름 양묵의 산소에 벌초를 하러 갔을 때. 땅벌집이 있어서 분상의 오른쪽 뒤 부분을 깍지 못하고 온 때문일까? 하는 생각 했다.
“예쁘지 당신 닮아서 쌍까풀까지 있어.”
하며 영자가 웃었다.
사흘째 되는 날 다음 달 셋째 주 장인 생신날 와서 같이 올라가자고 하고 올라왔다.
그리고 부강에 내려가 보니 사장이 차 운전을 배우려고 했는지 많이 끌고 다녀서 차 바닥에는 모래가 많이 있었다.
수동이가 털어내며 청소를 하는데 사장이 계면쩍은지 웃으며.
“강가에 갔다가 빠져서 꺼내오느냐고 혼났어.”
“그래서 모래가 들어왔군요.”
저녁에 도착한 관계로 사랑에서 자고 다음날 사장과 식구들을 태우고 올라왔다.
시월 셋째 주 장인 천복의 생신날 반계리로 내려가 식구들을 대리고 동화에서 열차를 탔다.
준광이는 창밖은 내다보며 좋아서 싱글벙글 했다.
80년9월 17일 연순이 숨을 거두었다.
방하리 중농의 장녀로 태어나 관천리 재운에게 시집와 고생고생하면서 살다가 예순 살 생일을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환갑도 못살고 세상을 떠났다.
재덕은 사흘 동안 형수장례를 도왔다.
수동이도 전날 사장에게 이야기 하고 전날 공릉동에 와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장지인 동두천 까지 갔다 오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정순은 전날 잠깐 왔었는데 자리가 껄끄러워서 그런지 바로 돌아갔다.
정자도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서리가 내릴 무렵 같은 공장안에서 기아자동차에 부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공장 공장장이 운전면허시험에 몇 번 떨어졌다고 가르쳐 달래서 안양천 둔치에서 아침마다 몇 번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붙었다.
그 후 사장이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몇 번 가르치기는 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얼마 후 초겨울 힘들다는 이유로 이사장은 장안평으로 와서 차를 팔아버렸다.
수동이는 또 다시 제기동으로 와서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차주는 지입차를 여섯 대를 가지고 있었다.
택시 운전이라는 것도 낮 시간은 몰라도 새벽에 가리봉 집에서 자고 일어나 정확한 시간만 가지면 그 시간에 택시를 이용하는 손님을 만날 수 있었다.
따르릉 하고 자명종이 울려서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시동을 걸고 나서면 노량진 수산시장에 생선 장사를 하러 새벽마다 나가시는 사장님을 만나서 태우고 노량진 시장에 내려줄 수가 있었다.
그렇게 몇 번 만나니 아침인사를 하고 그 시간이 되면 골목 입구에서 그 손님을 기다려 태웠다.
노량진 시장에서 손님을 내려주고 다시 건너 동내로 가면 남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시는 사장님을 태워다 주고 서울역에서 손님을 기다리면 새벽열차를 타고 올라와 남대문 시장에 물건을 떼러오는 지방손님을 한번 태워다 주고 다시 서울역에 와서 마장동 손님을 태우고 가서 가스를 넣고 교대지인 월곡아파트 뒤로 가면 되었다.
그렇게 교대를 해주고, 가리봉동 까지 버스를 이용해 출 퇴근을 하다가 월곡아파트에 120만원에 한 칸을 전세 얻어서 이사를 했다.
기를 쓰고 벌어서 아껴 쓰고 저축을 했지만 결국은 전세금 올려주면 또 계를 들어서 부지런히 부어서 계 타면 전세금 올려 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수동이가 생각을 해보니 전세를 끼고 집을 사두고 시골에서 운전사 일을 하다가 올라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위 동서인 성증에게 알아봐 달라고 했으나 연락이 없었다.
설이 다가와 수동이는 방이동을 다녀와서 반계리를 다녀오고 다시 삼양동 희상에게 세배를 갔다.
수동이는 두만과 희상에게 세배를 하고 났는데. 희상이가 넌지시 물었다.
“수동아 택시 사업이 어떠냐?”
“힘들지요. 입금 받아서 돈 모아서 오년 정도 지나면 새 차 뽑아야 하고요. 수시로 부속도 갈아야 하고요, 무엇 보다 사고가 나지 말아야 하는 데 사고 가 나면 돈을 많이 날려요.”
“응 그렇구나. 네 아버지가 차를 사서 너에게 관리를 맡기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서.”
“그래요. 저는 아직 경험도 없고 해서요.”
수동이는 당장 재덕의 얼굴이 떠올라 머뭇머뭇 하다가 에둘러 거절을 하고 만 것이었다.
사실 폐차되고 나면 대 폐차가 안 되고 지입제 택시의 경우 번호 값만 날리는 꼴이 되기 십상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만약에라도 재덕이 아는 날이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거절을 하고 말았는데 얼마 후 책임보험제도가 도입되고 이어서 지입제 택시는 한시택시로 전환이 되어서 대폐차를 용이하게 해 주었다.
수동이는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개인이 한시 택시를 한 대 가지고 있고 개인택시 자격이 되는 사람은 개인택시로 전환을 시켜 주었으니 한시 택시로 오년 정도 돈을 벌어주다가 명의를 수동이 앞으로 해서 개인택시로 전환을 하고 차 값만 갚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런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만큼 수동이는 이제에 밝지 못했고 재덕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4월30일 그날 종로에서 수동이차에 탄 손님이 잠실 시영아파트로 가자고 했다
손님을 잠실시영 4단지에 내려주고 나오는데 다시 손님이 잠실장미로 가자고 차를 타서 잠실 장미 아파트 정문을 들어서는데 경비가 뛰어와
“손님 빨리 내리세요.”
하면서 손님을 반 강제로 끌어내리고 뒷좌석에 앉더니 저리로 이리로 하면서 아파트 앞에 갔는데 아주머니 둘이서 아이를 안고 타면서.
“아저씨 빨리 한양대 병원으로 가요.”
수동이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면서 라이트를 켜고 비상 경고등을 켜고 신호를 무시하고 연신 경음기를 눌러대면서 달렸다.
뒤에서는 아이의 신음소리가 들렸고. 아주머니 둘은
“살아있네. 살아있어 아저씨 빨리 가요.”
“엄마는 어떻게 됐데?”
“다른 차로 오겠지.”
차는 그러는 사이에 화양리 고가 아래서 빵빵 거리며 신호를 위반하려고 하였다 .
그때 눈치를 챈 경찰이 급히 호루라기를 불면서 수동이의 차를 지나가게 해 주었다.
그렇게 달려서 한양대 응급실에 내려 주었는데 그러고 보니 비상 경고등을 오래 켜고 와서 그런지 작동을 하지 않아서 다시 차고에 와서 갈아 끼우고 일을 마치고 다음날 TV 뉴스를 보니.
그날 사고는 14층짜리 아파트의 13층에 사는 세라양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두 살짜리 남동생과 놀다가 엄마의 지갑에서 1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서 가지고 놀다가 놓치고 말았다.
엄마는 그 돈을 줍기 위해 아파트를 내려가 1층 베란다 앞을 서성이며 위를 올려다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라가 까마득한 베란다에 매달려 있는가 싶더니 떨어지는 것이어서 앞뒤 가리지 않고 아이가 떨어지는 곳으로 달려들었던 것이었다.
세라 동생일 수도 있었지만, 분명히 자신의 집 아기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본 엄마는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사력을 다해 품에 안았고 그 짧고 긴장된 충격이 실신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엄마는 상처가 없었고 딸은 왼쪽 눈에 몇 바늘의 봉합수술을 하는 찰과상을 입었을 뿐 다른 상처가 없었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우리 아이가 베란다를 기어올라 순식간에 떨어지는 걸 보았어요. 빙글 빙글 서너 바퀴를 돌며 떨어지는 아이를 가슴으로 받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고 그 뒤는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깨어보니 병원에 실려와 있었어요.”
이어서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추락한 지점의 높이는 지상에서 34m 세라양은 신장 60cm, 체중 18kg이므로 체중을 감안할 때 추락 속도를 초속 25m(시속 90km)로 추정된다며, 지상까지 추락 시간은 약 1.6초로 지상에 부딪치는 충격파(낙차 에너지)는 적어도 소문난 야구 투수가, 148g짜리 야구공 80∼90개를 한꺼번에 던지는 충격량과 맞먹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야구공을 받을 때 공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글로브를 탄력 있게 밀면서 받으면 충격파가 감소하는 이치처럼 추락 순간 어머니에 의해 제동이 걸리면서 낙차 에너지가 감소해 생명을 극적으로 건졌다는 설명이었다.
그럴 경우도 두 사람이 큰 상처 없이 위기를 면할 수 있는 확률이 10%도 안 된다는 점이 강조됐다.
TV를 본 수동이는 문병을 가려고 했지만 그날이 수동이와 영자의 결혼기념일이 여서 그날이 지나고 다음 쉬는 가보려고 했지만 마음만 먹었지 가보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수동이가 원하던 자가용 기사에 취직을 하는 바람에 결국은 가보지 못했다.
수동이가 취직을 한 곳은 세림조명이라는 등 가게를 하는 사장 차를 운전하게 되었다.
차는 감색 포니로 차 상태가 별로 여서 동내 카센터에서 카브레다를 손을 보았으나 상태가 나아지지를 않아서 답십리 기사식당에 있는 재수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카브레다를 손을 보러 갔더니 고압전기를 보내주는 곳에 있는(속도에 따라서 점화시기를 조정해 주는)가바나가 문제라며 손을 봐 주고 나니 연료도 적게 먹고 차 상태도 좋아 졌다.
사장은 가계에 있는 일이 별로 없었고, 가계에는 사장의 둘째 딸이 사무를 보고 있었고, 큰딸은 초등학교 선생님 이였고 셋째가 아들 넷째가 중학교를 다니는 딸이 있었고 초등학교를 다니는 막내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동생이 가계에서 일을 하다가 독립을 해서 가계를 차려서 나갔고, 가계에는 둘째 부인의 조카인 영진이 점원으로 있으면서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었고 또 한사람의 점원과 가계에 상주 하다가 조그만 전기 공사나 등 다는 일을 나가는 전기 기사가 한명 있었다.
사장을 태우고 다니다 일이 없으면 차를 세워놓고, 가계에 있었다.
그리고 점심은 점원들과 같이 먹었다.
사장이 하는 일은 큰 건물을 짓는 곳에 등을 납품하기 위해 열심히 사람을 만나러 다녔다.
그러는 한편 사장은 김 전무라는 사람과 접촉을 자주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전에 건설회사 전무를 지냈는데 지금 실세인 전 경환이 뒤를 봐 주고 있는 안양 지하상가에 전등납품을 따 주겠다고 해서 만나는 중이 이었다.
만날 때마다 밥도 술도 어떤 때에는 찻집 아가씨와 같이 지내게도 해주고, 어느 날은 춘천을 지나 소양강가에 있는 추곡약수로 삼겹살과 상추를 사가지고 가서 이틀을 묶어서 오기도 했다.
그러나 좀처럼 성과가 나지 않고 있었다.
견적서를 여러 군데 넣고 다니기도 하고, 이번에는 전기공사하는 회사에서 동부 이촌동에 세우는 커다란 교회를 짓는 공사에 등을 납품 하려고 쫓아다니기도 하였는데. 교회공사는 엄청 힘이 든다고들 했다.
터가 확보되고 기금이 절반정도 확보되면, 공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머지 공사대금을 받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사장 집 부근 구멍가계는 어정자의 오빠 금복이가 가계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들려 담배를 사곤 했다.
그리곤 사장이 특별한 업무가 없는 날은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대기를 하고 있으면, 점심을 사먹으라고 돈을 주는데, 차라리 세운상가 가계에서 있다가 점원들 하고 같이 먹는 게 나았다.
상가 밑에 주차를 시키려면 한 대라도 더 세우게 하려고, 주차요원들이 차 간격을 어찌나 좁게 하는지 문을 열고나올 수가 없어서 차창을 내리고 차창으로 나와서 문을 올리고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강남에 새로 짓는 집을 가 보았는데 거실 바닥 밑에 연못인지 수영장인지 만들어 놓고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 놓은 집을 보았다.
강남에 가면 벽 전체가 유리 어항으로 되어 아방궁 같은 집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초여름 어느 날 사장 집에서 무녀를 불러다 굿을 했다.
굿이 끝나고 가계에도 떡과 돼지머리를 가지고 가서 약식으로 굿을 하고 모두 한 번씩 깃발을 뽑으라고 해서 수동이도 깃발을 뽑았더니 조상님의 산소가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곳이 있는데, 잘 모시라고 했다.
그리고 점원 중 한 사람이 여름휴가를 어디로 가면 좋겠느냐고 물어서 황골로 가보라고 했더니 갔다 온 점원이 닭을 한 마리 사다가 백숙을 해먹었는데 크고 맛있었다고 했다.
어느 집에서 사다 먹었느냐고 물었더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해서 거기가 외당숙내 집이라고 했다.
수동이는 반계리로 가서 휴가를 보내는 중 가계에서 본 것 중 한지를 발라서 만든 갓도 있고 나무를 가지고 만든 것도 있어서 싸리나무로 잘 역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모양이 별로였다.
아마 수동이의 손재주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려서 만들어 보았던 여치집이 생각나서 배선에 끼우는 석면으로 만든 대롱을 사용해 보기도 했으나 별로 모양이 좋게 나오지를 않아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 차의 검사일이 되어서 재혁아저씨가 상무로 있는 혜화공업사에 가서 검사를 받으러 왔다고 하니 직원을 시켜서 차를 리프트에 올려놓고, 조향장치에 들어가는 부속 중 흔들어 봐서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바꾸라고 지시를 하면서 수동이에게
“이 녀석아 뒷바퀴는 앞에서 가는대로 따라 오는 거니까 상관없지만, 앞부분은 운전사가 핸들 돌리는 대로 잘 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사고가 나 그리고 서고자 할 때 제대로 서야 자동차야 알았어. 브레이크와 조향장치는 생명하고 직결 되는 거야, 그러니 돈이 들더라도 나쁘면 싹 바꿔야 해.”
하면서 조향장치에 들어가는 타이로드 엔드를 싹 갈았다
그러다, 년 말 들뜬 분위기에 아들 정훈이가 서소문 육교에서 친구들하고 패싸움을 하다.
그 중 한 명이 상대방의 복부를 칼로 찌르는 사고가 났다.
그 자리에서 다섯 명이 모두 붙잡혔다.
신문 사회면에 십자성파 백주 대낮에 상대 파를 칼로 찔러 중태라는 타이틀로 크게 보도가 되었다.
그때 정훈의 나이는 고등학교 1학년 이였고, 거의가 중학교를 퇴학한 아이들로 정훈이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두목으로 보도가 되었다.
삼청교육대가 엊그제 같이 생생한 때에 벌어진 일이라 사장은 바빠졌다.
무엇보다도 같이 가담한 아이들 부모들이 모여서 대책을 숙의해서 돈을 모아 치료비를 대고, 어린 학생이니 선처해 달라고 합의를 봐 달라고 매달려서 합의서를 받아 냈다.
만나는 부모 마다. 다 친구를 잘못사귀어서 그렇다고 했지만. 거의가 바람피운 부모를 두었거나 이혼한 결손 가정이 많았다.
그 중 한 명은 고입 검정고시를 쳐서 합격한 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을 쫒아 다니더니 잠잠해지고, 누군가의 입에서 한꺼번에 나오면 소문이 나서 안 좋으니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배경이 좋은 아이들은 하나씩 석방이 되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나고 보니 단 두 명이 남았다.
칼로 찌른 아이와 정훈이었다.
자연적으로 두 아버지는 자주 만나서 의논을 하게 되었다.
벌써 구정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귀띔을 해주는데, 이번에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는 이한동이라고 검사출신인데 선거유세에 한번 다녀오라고 하던데 같이 갑시다.”
해서 청평 장날 합동연설회장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이삼백 명 모여 있었고, 홍모 후보는 연설을 잘 해서 박수를 여러 번 받았으나 그러나 정작 응원을 이 후보는 연설이 중간이 되어가도 박수를 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다 온 보람도 없을 것 같아 박수칠 기회를 보고 있다가
“하겠습니다!”
하는 대목에서 수동이가 박수를 쳤다.
삼분의 이정도가 따라서 박수를 쳤다.
이한동은 힐끗 처음 박수를 치기 시작한 수동이를 보고, 청중을 향하여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연설을 해나갔다.
그 후 또 한 번 박수를 쳐서 다른 사람의 박수를 유도 했다.
모두 웅변을 할 때 들은 이야기로 박수 한번 받을 때마다 점수가 올라가고,
웅변의 기교는 일부러 끝난 것처럼 뒤로 한 자욱 물러나 인사를 할 것 같이 하면 웅변이 끝난 줄 알고 박수를 치는데 다시 연단으로 다가와.
“다시 한 번 이 연사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하면서 강조하는 말을 덧 붙여서 외치고 인사를 하면 박수를 받은 것이 되어 점수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어째 거나 서울로 오는 길에 사장이
“김기사 나는 멍하니 서있기만 했는데, 어떻게 박수가 나와.”
“박수 부대로 갔으면 박수를 쳐야죠.”
재덕과 정순이 하는 돼지 사육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고 사회가 안정되자 올림픽 유치문제가 대두 되면서 이곳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재덕과 정순은 성남 비행장 옆 배 과수원을 도지를 얻어서 농사를 지으라는 지인의 소개로 배나무 과수원을 보증금을 몽땅 선도지로 주고 이사를 했다.
과수원 관리사에는 방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한쪽은 재덕의 식구가 쓰고, 또 다른 한쪽은 남편이 폐결핵 환자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설이 지나고, 과수원은 바빴다.
가지치기를 하고, 거름을 주려고 땅을 파고 살아보려는 의지를 불 태웠다. 그러던 3월 어는 날 정순이 성남 시내를 나가더니 늦게 들어 왔다.
거기다 술까지 한잔 걸치고, 잔뜩 부아가 치밀어 있던 재덕이
“아니 어디를 싸돌아 치다가 인제 겨들어와, 집에 할 일이 태산인데, 집에서 일하는 사람 밥도 차려 주고 해야지,”
“아니 해 노은 밥도 못 찾아 잡숴서 난리에요. 경자 금자 다 큰 딸년이 셋씩이나 있는데 언제 까지 밥 타령 에그 지겨워,”
“뭐가 지겨워 지금까지 어떤 연놈하고 다니다 술까지 처먹고 들어와서 뭘 잘 했다고, 지겹대 다 네 년이 살림을 엉망으로 해서 이렇게 된 거야.”
“돈 만 잘 벌어 왔으며 왜 이렇게 되요 누군 쓸 줄 몰라서, 이렇게 사는 줄 알아요.”
요 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재덕의 손이 뺨을 향해 날아 왔다.
화가 난 정순은
“살림 잘하는 년 데려다 잘 살아봐요,”
젊어서 손찌검을 당하고 산 것도 억울했지만 수년전 손찌검에 사내아이를 낙태한 이후에 안하던 손찌검을 한 것이다.
정순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서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나섰다.
재덕이 젊어서는 어림없는 일이였지만 술기운인지 모르지만 경자 금자 은자 수미가 말렸지만 자존심에 그 냥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 정류장 까지 따라 나와서 말리는 경자 금자에게는 들어가라고 하고 성남 가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경자나 금자는 정자내 집에 갔다가 몇 칠 지나면 오거나 아버지가 데리러 가겠지 했다.
정순은 그날 정자내 집으로 가서 병구 할머니 그러니까 사돈 마누라 하고 술병을 기울이고 나서 정자내 집에서 자면서 공금이 생각을 해보니 화도 났지만 내 나이 이제 막 사십 중간이데, 까짓것 식당에서 몇 년 일하면 딸년들 식은 못 올려 줄까 하는 결론에 도달 했다.
정순은 다음날 우선 먹고 자고 주방일 을 하는 식당을 찾아서, 취직을 했다.
그러니 정순이 집에 올 리가 만무 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재덕은 자존심에 찾아 나서기보다. 수미를 시켜서 언니네 집에 있나 가보라고 했다.
수미가 쫄래쫄래 들어와 언니내 집에 없다고 했다.
재덕은 여러 가지 상념에 빠졌다.
이 우라질 년이 서방이 늙어빠지니까 젊은 놈하고 도망을 처 어쩐지 시장에서 장사할 때 누님, 누님 하며 따르던 그 남가 놈이 더럭 의심이 갔다.
어쩐지 지난겨울부터 그 자식이 보이지 않더니만 밥도 외상으로 덥석 덥석 처먹고 마누라까지 채가 이 후레아들 같은 놈, 이 연놈을 잡기만 하면 그냥 재덕은 술로 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시간을 내여 성남으로 나가 수소문을 해 봤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그 년 놈의 웃고 줄기는 모습이 떠올라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다.
간신이 잠들었는가 싶으면 건넌방 남자의 젖은 기침 소리에 잠을 깨면 잠들기 힘들었다.
그러면 뒤적거려 담배를 피워 물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지난 날 내가 희상을 버려서 죄를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81년 3월 25일 국회의원선거 있었고 정훈이는 석방이 되었다.
그리고 몇 칠에 한 번씩 반성문을 써가지고 청소년 선도 위원의 집으로 가서 인사를 하고 와야 했다.
그리고 아들 정훈이가 저렇게 된 게, 남편이 작은 여자를 두어서 저렇게 된 것이라는 한숨 섞인 엄마의 넋두리를 들을 셋째 딸 미영은 길 건너에 사는 영진의 고모를 찾아가 울고불고 하면서 따지는 것을 수동이가 달래서 데리고 나와서 차에 태우고 동내를 한 바퀴 돌면서 위로를 해 주었다.
얼마 후 수표를 받은 임 사장이 사취 계를 내내 어쩌네 하더니 결국 부도가 나서 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운전사인 수동이에게 잠깐 쉬라고 했다.
결국 수동이는 다시 택시 운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정순은 몇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재덕은 과수원 빈터에는 채소를 심어서 먹고 배 과수원 일을 하면서 틈틈이 정순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십여 년 넘게 왕래를 하지 않아 어디 사는지 알 수 없었던 정순의 소꿉친구 명순이가 하는 미장원을 알아내어 찾아갔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답답해하던 재덕을 그도 사람이라면 딸들 하고는 연락을 주고받겠지 하는 생각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물었으나 딸년들은 어미와 짰는지 강하게 낯놀림을 하면서.
“아니요. 연락이 없었어요.”
옛날 재덕의 성질 같아서는 딸들을 추궁해서 알아내고 야 말았겠지만 환갑이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고 보니 성질이 많이 죽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만 나면. ‘이 염병을 앓다가 땀을 낼 년이 어느 놈하고 재미를 보고 있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래 잊자 하면서 손은 자연히 냉장고 문을 열어서 소주병을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 밤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이 오라를 질년 잡히기만 해봐라. 하면서 잠을 청해서 겨우 잠이 들면 건넌방 남자의 기침소리에 잠이 깨면 영 잠들기가 어려웠다.
결국 건넌방 남자는 젖은 기침을 해대더니 결국 더위가 한창이던 늦여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여자는 오랜 병간호에 지쳤는지 또한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해서 인지 눈물을 훔치며 방을 나왔다.
그리고 몇 사람이 와서 염을 하고 입관을 했는데 관을 내가는 게 문제였다. 빈 관을 들여갈 때에는 약간 세워서 들여갔는데, 관을 어떻게 하던 돌려서 문을 나가려 했지만 내갈 수가 없고 그렇다고 들어갈 때처럼 세워서 내올 수도 없고, 그 때 금자는 방에 누워 잠이 들려는 순간 방문이 덜컥 열리며 관이 방안으로 쑥 들어 왔다.
깜짝 놀란 금자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한참을 진정을 못하고, 온 몸이 떨었다.
그게 원인이 됐는지, 가슴이 뛰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건넛방에 여자는 몇 칠 후 돌아와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다.
그리고 금자는 온몸이 푸석 푸석 함을 느끼기기 시작했고, 소변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어도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더니 마찬 가지었다.
여기서 재덕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나으려니 하고 약을 사다 먹으라고 했지만 금자는 임신 막달에 다다른 것처럼 배는 부어오르고 식식 거리며 어깨로 숨을 쉬었다.
‘이런 개가 파먹을 년 새끼가 이렇게 되가는데 어떤 놈하고 붙어서 깨가 쏟아지도록 살고 있는 거야.’
‘내 새끼 죽기만 해봐라 그냥 두나봐라. 내 이년 만나면 뼈를 갈아 마신다.’
그럴수록 차명우 생각이 들었다.
‘서방질해서 간년 잘 사나 봐라.’
하는 저주를 퍼 부었다.
그럴수록 찾느니 소주요.
눈을 끔뻑이며 애처로이 재덕을 바라보는 금자를 보고 있자니 오간장이 다 타들어가는 심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술에 취해 잠들어서도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렇게 죽고 못 살 것 같던 재덕과 정순이었지만 재덕은 그렇게 저주를 퍼붓고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구석에서는 그래 죽어라 그래야 내가 네 년을 더 증오 하게 될 터이니까.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런 병원에서 죽기나 하지 여기서 죽어서 관을 남에 방까지 밀어 넣어 멀쩡한 애 병이 들게 해 죽기 전에 기침소리로 남을 잠 못 이루게 하더니 애 병까지 얻게 해.’ 거기 까지 생각을 하면서 다시 빈속에 소주를 들이 붓고 김치를 싶어 넘겼다.
술에 취해야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취하자 하며 커다란 컵에다 따라서 마셔 버리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재덕이 술을 마시는 날이면 어느새 눈치 빠르게 하나 둘 빠져나가 성남 정자내 집으로 피신을 가고 남아 있는 게 재덕과 금자만 남아 있었다.
그러면 재덕은 꺽꺽 울다가 술에 취해 잠드는 날도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수동이가 쉬는 날 복정동에 들렸다가 금자가 퉁퉁 부어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침 재덕은 정순이를 찾으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아서
“금자야 우리 집으로 가자.”
해가지고 집으로 데리고 왔다.
영자는 황당하고 깜짝 놀랐다.
금자는 온몸이 퉁퉁 부어서 숨 쉴 적마다 어께로 숨을 쉬어야 할 정도였다.
이미 날이 저물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이튿날 수동이가 일을 나가고 다음날 수동이는 금자를 데리고 용두동 시립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병원에서 어쩌면 애를 저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뒀냐 뒀냐며 입원을 시키라며 보증인을 한 명 세워야 한다고 했다.
수동이는 급히 재순에게 전화를 했다.
병원으로 달려온 재순도 놀라서 입원 서류에 도장을 찍어서 입원을 시킨 후 “그래 네 엄마는 소식도 없고,”
금자가 머리를 끄떡이며 고갯방아를 찧었다.
“어째 사람이 그 모양이냐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입원을 시키고
“금자야 오빠 내일 일하고 모래 올게.”
하고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재순은 아직도 심사가 불편한지
“요물 덩어리야 요물 덩어리, 사람이 인두겁을 쓰고 그럴 수가 있어,”
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서 병원비를 정산을 하고 병실에 오니 오빠 이거 하면서 링거 줄로 만든 열쇠고리를 주었다.
금자는 지루한 입원생활에 버리는 링거 줄로 열쇠고리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쉬는 날, 병원을 갔더니 금자가 보이지 않았다.
같은 병실 환자들의 말로는 어제 재덕이 와서 퇴원을 시켰다는 것 이였다. 의사와 간호사가 만류를 해도 듣지를 않고 내 새끼 내가 죽이던 살리던 할 테니 퇴원을 시켜달라고 한바탕 난리를 처서 할 수 없이 퇴원을 시켰다고 했다.
재덕의 입장으로서는 수동이에게 해준 것도 없이 계모의 손에 크게 하고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시켰는데 그리고 삼남매 까지 두고 깜냥깜냥 살아가는 수동이에게 내가 뿌린 씨앗까지 짐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수동이는 이해가 됐다.
그 고집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쉬는 날 열시 무렵 재덕이 환하게 웃으며 찾아와.
“이젠 금자는 살았다. 살았어.”
하면서 어젯밤에 소변을 보기 시작 했는데, 한 요강을 넘게 보았다고 좋아 했다.
“그러면 시립병원에서 약을 지어다 먹이세요.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니 음식은 절대 맵고 짜게 해서 먹지 말라고 하고요.”
그리고 얼마 후 준영이의 첫돌에는 재덕이 옷을 한 벌 사가지고 와서 밥만 먹고 급히 갔다.
그리고 사흘 후 추석을 맞아서 수동이가 복정동에 들렸는데 금자가 조금 부석부석해 보여서 걱정이 되어.
“음식 짜고 맵게 먹지 말고, 약은 어떻게 먹니.”
“네 성남 약국에서 사다 먹어요.”
“약도 중요 하지만 음식은 절대 짜고 맵게 먹지 말라 다시 도지면 큰 일 난다.”
“네 알았어요.”
그때 까지 정순은 돌아오지 않아서 영자가 조촐하게 추석 차례 상을 차렸다.그리고 재덕이 수동이를 불러서
“이젠 이걸 네가 간수해라.”
하면서 물막골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450평 밭 계약서와 꽃재에 있는 27평짜리 양묵이란 이름이 양희라고 되어서 팔지 못한 땅문서를 수동이에게 주었다.
정순이 있었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정순이 나간 마당에 재덕이 마음을 고쳐먹고 수동이에게 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물막골로 올라가는 밭은 밭머리 산기슭에 선복과 용단의 산소가 있어서 만석에게 주라고 한 것을 주지 않고 있다가 정순의 가출과 금자의 입원치료 가 계기가 되어 수동이에게 준 것이었다.
서류를 가지고 법무사무소에 가서 물어보니 등기명의자로 되어있는 탁도현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방법이 제일 간단하다고 했다.
수동이는 쉬는 날 새벽에 기차를 타고 전남 승주에 살고 있는 탁도현을 찾아가 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 이게 누군가 수동이 아닌가?”
“예 수동이예요.”
“그래 아버님은 안영하시고.”
“예.”
“땅 때문에 왔구먼.”
“예 그래서 말씀인데, 제가 법무사무소에 알아본 바로는 아저씨께 소송을 걸어야 하는데 아저씨에게 법원으로 오라는 우편이 오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 올 거예요. 그렇게 안 오면 제가 승소해서 저에게 명의이전이 되게 됩니다.”
“그래 알았네. 내가 호문씨에게 팔고 자네 부친이 산걸 잘 알고 있지 그리고 자내 아버지를 친형님 이상 따르며 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려우시겠지만 인감증명서 한통만 떼어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았네. 내가 인감증명서 한통 떼어 보냄세.”
탁도현씨는 실상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물골안에서 어머니의 재혼으로 뼈 다른 동생 둘을 볼 무렵 아내를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형편이 피지 않아서 그나마 마련했던 밭을 용분아버지 호문에게 팔고 아내의 고향인 승주로 내려가 살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재덕과 의남매를 맺어서 각별하게 지내기도 했었다.
그리고 몇 칠 후 인감증명서가 등기우편으로 왔고 수동이는 인감증명서를 보강 증거로 법무사무소에 제출했고 의정부법원에 두 번을 가서 증언을 하고 판결문이 등기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인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총회가 서울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했다.
그리고 금자는 병이 아직 났지 않아서 조금만 짜게 먹어도 푸석푸석하게 붓고 처음 부었다 빠진 배는 애벌 썰어서 말려 놓은 논바닥처럼 배가 터서 흡사 임신을 했다가 출산한 것처럼 되었다.
그리고 정자는 둘째아들 영진이를 낳았다.
그리고 얼마 후 영자의 둘째 언니 영애가 올라왔다.
“언니가 웬일이야?”
“아니 그저 바람 쐬러.”
“형부는 잘 있고?”
하니 영애는 고갯방아를 찧었지만 영 아닌 눈치었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 했다.
한참 만에 입을 뗀 영애는 성증이 사표를 내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올라 와 봤다는 것이다.
“언니 걱정 마 별 일이야, 있겠어. 곧 돌아오겠지.”
그리고 영애는 하루 만에 내려갔다.
택시운전을 하다 보면 별별 손님을 다 만난다.
한 번은 삼선동에서 남녀가 탔는데, 조금 오는데 길은 막히고 조금 시간이 지체되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아이고 아이고 못 참겐 내.”
하더니 원남동 을 지나 광화문 쪽으로 가는 도중에
“아저씨 급해요 차 좀 세워주세요.”
하더니 길가 나무 뒤에서 노상 방뇨를 하였다.
어떤 손님은 술에 취해서 입금 채워 줄 테니 술친구 하자는 손님도 있었으나 술을 잘 먹지 못하는 수동이는 진땀을 빼야 했다.
어느 날은 회현동에서 퇴계로 6가 쪽으로 오면서 보니 반대편 길이 곽 막혀 있었다.
그런데, 손님이 타더니 회현동으로 가자고 했다.
“손님 건너편에서 타셔야 하는 데요.”
하니 건너편에서는 차를 잡을 수가 없어서 이쪽으로 왔으니 돌려서 가자고 했다.
“그쪽으로 가는 길이 꽉 막혀서 삼십분 이상 걸려요.”
그래도 막무가내로 가자고 했다
그러니 어쩌랴 정말 30분을 넘게 걸려서 회현동에 내려 주었다.
다음날 종철이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야 바보야 그럴 땐 평상 주시던 요금만 주세요. 하고 남산 2호 터널을 들어가서 3호 터널을 나와서 가면 되지. 그러면 자기도 양심이 있으면 돈을 다 낼 것이고 양심이 없으면 기본요금만 주겠지 야 삼십분이면 얼마를 벌어야 하는데.”
어떤 날은 손님이 내리고 가서 다음 손님이 타려다가 아저씨 이게 뭐에요 하면서 내려서 보니 바닥에 토한 게 잔뜩 있어서 어디서 차를 닦을까 해맨 끝에 건물 옆에 세워진 드럼통에서 꽝꽝 언 얼음을 깨고물을 퍼서 바닥 매트를 닦아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보다도 밤11시가 가까워지고 서부지역에 있으면 마음이 불안했다.
시내 무교동에 들어오면 이차선 까지 사람이 몰려 나와서 따불 따불을 외치며 차를 잡느냐 북새통을 이루는데 노련한 기사들은 차고지로 가는 손님 중 따불을 외치는 손님을 실지만 수동이는 차고지 가는 손님이 있으면 얼른 태우고 떠났다.
시간이 열한시 반이 넘어서면 신호 위반을 다반사이고 청계고가도로를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로 질주를 했다.
너 나 없이 총알택시가 되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시간에 쫓겨 통금 이분 삼분이 지나서 집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추운 날이면 시동이 안 걸릴 우려가 있어서 네 시 전부터 주전자를 연탄불에 올려놓고 물이 끓으면 들고 나가서 보닛을 열어 기화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기화기를 따듯하게 하고서 어젯밤 차고에 도착하기 300m 전에 트렁크를 열어서 잠가놓고 가스를 태우고 돌아왔던 가스밸브를 열면 쏴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스가 기화기로 가면 시동을 거는데 잘 걸리면 되는데 안 걸리면 돈도 못 벌고 고생을 하면서 아침에 카센터에서 사람을 불러와야 했다.
통금시간에 맞추어 집에 들어오는 게 점점 익숙해 질 무렵 하루는 대림동에 손님을 내려 주었는데 차가 그만 진창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고 히터를 켜놓고 밤을 지세고 4시에 간신히 빠져나와 집에 온 적도 있었다.
이런 날 밤에는 애들 셋을 데리고 씨름을 해서 초저녁에 골아 떨어졌던 영자도 12시 수동이가 돌아올 시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깨곤 하던 버릇이 있어서 꼭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이런 날을 무슨 사고라도 났나? 아니면 택시강도? 하면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했다.
아침 여섯시가 지나면서 복도와 계단을 서성이며 아파트 뒤쪽 공터를 몇 번이나 살펴보기를 여러 번 수동이의 차가 보이면 그제야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그럴 때마다 영자는 온몸에 힘이 빠지곤 했다.
81년 12월 말 10시 반 저녁 무렵에 살짝 내린 눈이 녹아서 길을 질퍽거리는데 화곡동에서 손님이 도봉동을 가자고 했다.
동북부로 가는 손님이라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그리고 200m쯤 운전을 하고 가다가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 술 취한 행인이 중앙선 쪽에 어정어정 걸어오고 있어서 손님에게.
“어지간히 취했네요.” 했더니 손님도
“네 많이 취했네요.”
“망년회도 좋지만 저렇게 마시고 걸어 다니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필이면 걸어와서 수동이가 운전하는 택시 옆에 와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사고 났어 사고야.”
하면서 서너 명의 일행들이 몰러왔다.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 어정어정 걸어와 서있는 신호 대하고 서있는 차에 부딪쳤는데.”
술 취한 일행 중 두 놈은 수동이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그게 말이 돼.”
“내 차에 탄 손님이 봤어요.”
하면서 돌아다보니 벌써 손님은 내려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선 병원에 갑시다.”
하면서 길바닥에 쓰러져 흙투성이인 사람을 뒷좌석에 실었다.
그리고 일행이 타고서.
“어딜 발뺌을 하려고 해.”
“무슨 발뺌이요.”
“너 오늘 잘 걸렸어.”
수동이는 연신 말대꾸를 하면서 초록 십자 표시가 보이는 병원을 찾아 헤매야했다.
서너 군데의 병원 표시가 있는 곳의 문을 두드린 끝에 문을 열어주는 병원이 있어서 술 취한 놈을 부축해 이층병원 침대에 눕혔다.
간호사가 급히 원장선생님을 부르고 의사가 급히 나와서 침대에서 자고 있는 놈의 눈을 까고 불을 비춰보고 청진기를 대 보고 술에 취해서 그렇다고 하는데도.
“사고에요 사진을 찍어 봐야 하잖아요.”
“내가 볼 때에는 술에 취해서 그래요.”
그들이 의사와 승강이를 하는 사이 수동이는 병원 복도에 있는 공중전화로 112에 신고를 하려고 하니 일행 중 한 놈이 달려와 전화 수화기를 빼앗아 수화기에 대고. 병원이름을 대면서 뺑소니 운전사를 잡아서 병원에 데리고 왔으니 빨리 오라고 하면서 병원이름까지 댔다.
수동이는 간호사의 도움으로 진찰실 문을 닫고 강서경찰서 교통계로 전화를 거는 사이 밖을 나와 보니 모두 도망을 갔다.
그러는 사이에 경찰이 나와서 우선 면허증을 달라고 해서 면허증을 주었다.
수동이는 병원진료비를 내고 차를 몰고 경찰서로 가서 진술서를 쓰고 보니 벌써 12시가 넘어서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밤새 야간 근무자들에게 자판기에 잔돈으로 가지고 다니는 동전을 투입해 커피를 뽑아다 주어야 했다.
아무런 배려도 없었다. 단지 봉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면허증을 달라고 하니 모래 찾으러 오라고 했다.
무슨 근거로 그러는지 운전자 수동이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한편 집에서 영자는 초저녁에 한숨 잔 이후에 잠을 한숨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돈을 버는 게, 났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개념도 없는 정순에게 아이를 맡겨 그러다 보면 대 식구 뒷바라지나 하다가 끝나지 하는 생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다음날 아침 수동이는 파김치가 되어서 들어왔다.
근심스레 묻는 영자에게 수동이는 어제 겪은 이야기를 하면서 아침을 먹고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은 스페어 기사를 내보내고 강서경찰서로 면허증을 찾으러 갔다.
때가 한참 지났는데 형사는 뭐가 바쁜지 수동이를 힐끗 쳐다보고 할 일을 한참 한 다음에 나가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으며.
“내가 그 자식들 잡아서 혼을 내주었어. 다신 오지 않을 거야.”
‘오긴 뭣 하러 와. 올 녀석들이면 도망을 가.’ 점심 그냥 얻어먹기 미안 했는지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사흘 후 82년 1월 5일 통행금지 가 없어졌고, 설이 지나고 반계리로 세배를 가서 성증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더니 간이 나빠서 1년도 못 산다는 진단 결과에 충격을 받아 면 계장 진급을 앞두고 사표를 내고 바람을 쐬러가서 가출을 했다고 했다.
마음을 비우고 잘 먹고 한 달 후 진단을 받아보니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미애 처제는 동내 연쇄점에 다니는데, 성증이 휴게소를 얻어서 운영하기로 해서 그리로 가기로 했다고 했다.
수동이도 집으로 올라와 쉬는 날 여주에 내려가 보니 막내 처제도 와 있었다.
마당 한 구석에 타이어 수리 점을 차리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성증의 이야기로는 하루 통행량이 이천 대가 넘는다고 했다.
그러면 1%만 잡아도 20대 펑크 수리비는 대형차는 이천 원 중형차 천오백 원 소형차는 천 원 이라고 했다.
서울로 올라온 수동이는 몇 칠 후 이사를 가도 좋은지 나뿐지 물어보았다.
방옥은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결정을 해놓고 물어보는 것이어서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방을 내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이 나갔다.
이사하는 날 재덕과 성동이가 같이 이삿짐을 날라서 실어주고 여주까지 따라와 이삿짐을 내려놓고 영자가 서둘러 차려 주는 점심을 먹고 떠났다.
매점으로 쓰는 곳 건너편에 집이 한 채 비어 있어서 수리를 해서 쓰고, 서울 서초동 화물 터미널 부근에 있는 타이어가계에 가서 일하는 것을 보니 엄청 바쁘고 일이 많았다.
한두 달 배우면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하는 도중에 잠간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람을 불러서 일할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데, 사람 좀 소개해 달라고 하니 자기가 가겠다고 해서, 청계천4가에 가서 컴프레서(공기압축기)[air compressor]를 사서 경운기 엔진을 올려서 붙이고, 대형 인팩 곡괭이 레버 대 기타 연장과 부속을 사고 장안평 폐차장에서 폐차된 버스(엔진과 기타 부속을 다 떼어낸)를 견인차로 견인해 가지고 가서 마당 한구석에 세워놓고, 컴프레서를 버스 안에 넣고 우선 헌 대형 튜브에 바람을 넣고 흰 페인트로 빵구라고 써서 길 옆 전봇대에 걸었다.
버스에는 연탄보일러를 설치하고 연탄위에는 손잡이를 붙인 철판을 향상 올려놓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일은 생각과 같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진입로 부분을 남기고 농지에 시멘트 포장을 한 불법 농지전용이라서 군에서 강제 집행을 해서 시멘트포장을 다 뜯어냈다.
그렇게 두 동서가 일을 벌여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수동이의 아들 준영이는 성증이네 집에 식사 시간에 가서 넉살 좋게.
“이모 맛있는 냄새 난다.”
하면서 성증이 매 끼니 마다 구어서 먹는 삼겹살을 얻어먹었다.
그게 귀여웠고 영애가.
“준영아 너 커서 무엇이 될래?”
“나 커서 종렬이 형 될 거야 했다.”
준영이에게는 성증의 막내아들 종렬이가 닮고 싶은 지주였나 보다.
그리고 어느 날 보니 현대시멘트 기사들이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1982년 4월 29일 정몽필 인천제철 사장이 경부 고속도로에서 트레일러를 추돌해 사망한 것이었다.
결국 두 달 후 에는 예상한 대로 일을 다 배운 수동이는 사람을 내보내고 홀로 서기를 해야 했다.
성증은 사교성을 발휘하여 울산 조선소에서 해체된 배의 고철을 인천 제철소로 운반하는 현대세멘트 차들이 하루 종일 달려서 쉬고 자고 갈 공간이 필요해서 비포장 이지만 쉬게 되었다.
펑크수리는 기술이 숙달되지 않은 수동이에게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차가 들어오면 차가 움직이지 않게 펑크가 나지 않은 바퀴 앞뒤로 굄목(나무토막)을 대고 쟉기를 뜰 곳에 넓고 둥그런 철판을 대고 쟉기로 차를 들어 올리는데 적제중량의 배가 넘게 실려 있어서 이를 악물고 레바(지랫대)를 저어야 아주 조금씩 올라가서 차축을 들 수 있었다.
물론 둥그런 철판은 현대시멘트 운전사한테 얻었지만.
쟉기로 차를 들어 올리고 인팩으로 휠 너트를 풀어내는데, 위치표시를 해서 볼트와 너트의 순서가 섞이지 않도록 빼내야 너트가 잘 들어가고 헐거운 너트도 없게 된다,
그리고 타이어를 빼내서 굴려다 놓고 무시를 빼서 남아 있는 타이어의 바람을 제거 한 다음 물을 부으면 물이 부글부글 끓는다.
과적에 속도를 내어 달려와서 타이어의 온도가 높기 때문이었다.
100kg 가까이 되는 대형 타이어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지고 하면서 곡괭이로 찍어서 휠을 떼어내고 열에 짝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튜브를 떼어내고, 다시 튜브에 바람을 넣어서 펑크 난 부분을 찾아 표시를 하고 바람을 다시 빼고 펑크 난 부분을 그라인더로 갈아서 풀칠을 하고 미리 만들어 놓은 얇은 생고무를 댄 튜브를 가위로 오려서 대고 적당히 달구어진 철판을 올려놓고 프레스로 눌러 놓고 한 5분을 기다리는 동안에 타이어에 박힌 못이나 유리를 제거한 다음 다시 조립을 해서 바람을 넣고 다시 차에 부착을 하려면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현대 시멘트 차들은 타이어 부정수리 근절책의 하나로 영수증에다 타이어 생산할 때 찍혀져 나오는 생산번호를 색연필로 문질러서 복사를 하든지 아니면 인주를 타이어에 묻혀서 찍어내어야 했다.
그런데 대한통운의 경우는 휠 속에 회사에서 고유번호를 새겨 넣고 그걸 복사해서 영수증을 끊어야 했다.
부정 수리비청구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지만 빈 간이 영수증을 달라고 해서 주면 몇 장씩 복사를 해서 가지고 다니다 적당한 시기에 제출을 하고 돈을 받아내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한통운은 회사에서 타이어를 끼워줄 때 타이어 생산번호를 적어놓고 일정한 거리를 운행하지 않으면 타이어를 주지 않아 실밥이 나오도록 썼다.
트레드 깊이의 개념 따위는 아예 없었다.
터져서 못쓰게 될 때까지 쓰라는 것이었고, 헌 타이어를 가지고 가야 새 타이어를 주었다.
그러다 보니 운행 중 터진 타이어도 꼭 실고 갔다.
그만큼 관리를 철저히 했다.
어째 던 15분이면 펑크 수리를 다한다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렇게 기진맥진 하도록 일을 하니 얼마 후 항문에서 밑이 빠져 나오고 하혈도 있었다.
그래서 하루 날을 받아서 원주 처형 문자가 근무하는 기독병원에 갔더니 치질이라고 했다 약을 지어다 먹었다, 하혈이 멈추고 약간의 효과가 있었으나 완치하려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에는 교현이 장거리 손님을 태우고 장호원에 왔다가 가면서 들려서 준광이에게 초크파이 한 상자를 사주고 갔다.
조카 수동이가 어떻게 사는가 보기위해 들린 것이었다.
모든 자연의 이치가 달도 차면 기울고 그렇게 계절이 가듯이 얼면 녹게 마련인지 재덕의 정순에 대한 증오도 조금은 녹아서 어떤 때는 내가 나뿐 놈이지 순진하고 사랑밖에 모르던 나 어린 정순을 꼬드겨 이날 까지 호강 한번 못 시켜 줬는데 하는 마음이 한구석에서 조끔씩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떤 때에는 그 증오가 마지막 꽃샘추위처럼 재덕의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날이면 예외 없이 김치 조각을 안주 삼아 소주를 컵에 따라 들이 키고 욕을 한 사발 퍼 붓고서야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재덕의 마음은 조금씩 녹았다. 얼었다. 하며 자신도 모르게 봄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기사들이 휴게소운영에 힘들어 하는 성증에게 돈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자기들이 회사에서 정해진 연료를 넣고서 운행을 하게 되는데, 후리를 쓰면서 운행을 해서 울산에서 서울을 왕복하면 40L의 경유를 남겨서 뒤 탱크에 모아 두는데, 이걸 싸게 사서 주유소에 넘기라고 했다.
그리고 국도 3호선에 그런 곳이 몇 군데 된다고 하면서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우선 20L 들이 플라스틱 통을 준비를 하고, 고무호스로 경유를 빼내는데, 입으로 빨아서 나오게 하는데, 잘못해서 입에 경유를 삼키면 보통 고통이 아니었다.
그 일은 수동이가 일이 하지 않은 때에는 거의 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끓는 물을 플라스틱 통에 붓고 뚜껑을 닫고 흔들어서 통을 키워서 조금 더 많이 들어가게 해서 한 통에 사천오백 원에 사서 드럼통에 넣으면 여덟 개 반이 되면 한 드럼이 되고 네다섯 드럼이 차면 주유소에 넘겼다.
그러나 수동이가 펑크를 때우느냐고 못 하면 그 때는 느리지만 손으로 돌려서 기름을 빼는 것으로 한참을 돌려서 빼냈다.
기사들이 인천서 울산으로 내려 갈 때에는 단양에 가서 시멘트를 실고 가는데, 모아 두었던 경유를 단양 갈 수 있는 양만 남기고 팔아 버리는데 한 드럼을 팔고 갈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박영수라는 기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사업에 실패를 해서 빛이 많아서 위장 이혼을 하고 성증의 모친이 사는 (소댕이라는 곳) 건넌방을 얻어서 아들과 부인을 데려다 살림을 했다.
버스 바닥에 장판을 깔고 잠을 자는 수동이는 전부터 알아오던 속이 아파서 새벽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 방중에 잠이 들었을 때 문을 두드려서(그때마다 위가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지만)펑크 수리를 해달라고 하면 고욕 이였으나 어쩔 수 없이 일을 했다.
그 사람들은 생물을 가락농수산시장에 시간을 맞추어 대주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순경이 수동이를 잡으러 왔다고, 휴게소 마당 근처를 서성이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수동이는 속이 많이 아파서 쩔쩔 매다가 좀 가라앉은 다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순경은 저승사자라는데, 내가 이렇게 아프다가 오래 못 살고 죽으려나 보다 하고 어느 신이라도 좋으니 신이 있다면, 저 불상한 삼남매를 다 키워서 결혼할 때까지만 나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날 영자의 큰언니 문자가 근무하는 원주기독교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고 위 사진을 찍는 예약을 하고 몇 칠 후 가서 위 사진을 찍었더니 십이지궤양이라는 진단이 나와서 약을 지어다 먹으면서 조금 나아 졌다.
그러는 사이 기술도 늘어서 비슷한 튜브는 미리 때워 놨다가 끼워 주기도 했다.
음성 차평리에서 복사차에 농산물을 실고 서울을 다니는 차에 펑크를 수리해 주었는데 그 다음날 또 펑크가 났다고 다시 왔다.
다시 찾아서 수리를 하는 동안 타이어를 살펴보아도 못이 들어간 흠집은 전혀 없었고 튜브에는 작은 바늘에 찔린 것 같은 작은 구멍이 전부여서 야전용 펫치로 때워서 보냈는데, 다음날 또 펑크가 났다며 다시 왔다.
이번엔 기필코 원인을 찾으리라 마음을 먹고 무시부분을 타이어에 정확히 표시를 했다.
그리고 튜브를 빼내 바람을 넣어서 펑크가 난 부분을 살펴보니 먼저와 같이 바늘구멍만 하게 뚫려 있었다.
그래서 무시로부터 어느 부위인가를 살펴보니 세시 방향 중심에서 2cm부분 이었다
그래서 타이어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흠집하나 없었다.
그래서 가느다란 송곳으로 튜브에 펑크를 낸 부분을 찔러서 송곳을 전 후 좌우로 돌려보니 손끝에 쇠가 닫는 느낌이 와서 흠집을 크게 꺼내보니 압정 부러진 것이 박혀 있었다.
잘 살펴보니 재생타이어 인데. 재생하기 전에 약간 박혀있는 상태로 재생을 했는데, 바람을 넣으면 살짝 나와서 구멍을 내 놓고 바람이 빠지면 타이어 코오드 실사이로 들어가 버리니 타이어 겉에는 들어간 흠집하나 없고 안에 실 무늬사이로 나와서 구멍을 내놓고 숨어 버려서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압정을 찾아내자 기사가 하는 말이 아는 기사가 새 재생타이어인데 자꾸 펑크가 나니 너 가리면서 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두 번은 그냥 수리해 줄 수밖에 없었다.
고작 녀석은 음료수 한 캔을 주고 떠났다.
그 다음부터 타이어에서 원인은 반드시 찾아내고 수리를 했다
그리고 수동이 떠난 서울에서는 방옥이 그동안 골골하더니 그게 폐암이어서 죽었다.
수동이 보고 이사 가지 말라고 하더니 제 앞길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명옥으로서는 막막하기 이를 때 없게 되었다.
시동생이 둘이나 있으나 하나는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서 돌아올 수 없고 하나 있는 게 어린 딸 하나 데리고 혼자 사는 걸 제 작년 과부 하나를 붙여서 살림을 시켰더니 겨우 서너 달 살더니 어디로 온다 간다 말없이 사라져 버려서 도통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전실 자식을 불러서 일을 치루려니 큰 녀석이 겨우 스물두 살 작은 녀석이 스무 살이니 제대로 일을 처리 할 수 있는 사람이 집안에 없었다.
전실 딸이 스물다섯 먹은 게 있는데 이년 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결국 명옥은 효순을 성남 과수원에 보내서 재덕을 불러왔다.
없는 살림이라 어디 병원 영안실을 빌려서 장례식을 치룰 형편도 아닌지라 급히 염을 하고 제일 싼 관을 사다 입관을 했다.
다음날 조그만 영구차를 불러서 화장장에 가서 화장을 했다.
재덕이 이틀을 넘게 애를 쓴 덕에 장례식을 마쳤으나 이제는 살기가 망막 했다.
그동안 방옥이 절학을 한다며 점을 봐주고 부적을 써주고 하면서 살았는데 가장이 졸지에 갔으니 전실 자식에게 생활비 달라고 손 벌릴 처지도 아니고 내가 나가서 벌어야 하는데 당장 살 집도 만만치 않았다.
보증금 있던 걸 빼서 장례비용 빌린 걸 다 갚고 나니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그리고 방옥이 단을 모으고 부처를 모셨던 인순의 집에서도 막막했다.
몇 푼씩 받으며 부처를 모시게 했는데. 그걸 그냥 어디다 막 버리면 죄 받고 탈이나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방옥의 작은아들 정수가 모셔가겠다고 해서 다 해결이 되었다.
그렇게 홀가분하게 인순은 껌 딱지가 떨어져 나갔다.
인순만 홀가분한 게 아니라 인순의 남편은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 것 같았다.
남은 문제는 네 식구가 어떻게 사느냐 이었다.
서울서는 방한 칸 마련할 보증금조차 수중에 없었다.
“저 준광 할아버지 과수원에 빈방 하나 있는 거 우리식구들 가서 살면 안 될까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해서 그 폐병환자가 살던 방에 네 식구가 와서 살게 되었다.
처음엔 며느리의 고종사촌 언니라 조금은 어려웠으나 한집에 살게 되고 명옥이 또한 술을 좋아해서 둘이는 자주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서먹서먹하던 과계를 떠나 친한 술자리가 되어서 눈빛만 봐도 술 고픈지 배고픈지 알게 되어 한 살림처럼 되어갔다.
효순이 취직을 해서 일을 나가고 아들들은 학교에 나가고 둘이 남는 시간이 늘어가자. 술에 취한 재덕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우리 같이 살까요?”
“에이 뭔 소리예요.”
명옥이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지만 다음 날 술이 깬 재덕이 약간은 민망해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정순이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버린 떡도 남이 먹지나 않을까 하는 게 사람의 심리였다.
결국은 돌아가기는 돌아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 하는 데 마침 영진이 첫돌이 생각났다.
‘그래 그걸 이용하자 그 방법 밖에 없지.’
하면서 영진이의 첫돌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그해가 저물어갈 무렵 정순은 외손자 영진의 첫돌을 맞아 금반지 한 돈을 사가지고 장현의 집을 찾았다.
우선 안에 재덕이 와있나 없나를 살펴보고 있는데 장현의 엄마가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정순을 발견하고.
“어머 광진이 외할머니. 오셨어요?”
“쉿 광진이 외할아버지 안 왔죠?”
“에이 그 양반이 오시라고 한다고 오시나요.”
그 말을 듣자 정순은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한 기대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덕은 유독 사돈이라면 낯가림이 심했다.
전부터 용단에게도 세배를 초사흘이 지나서 마지못해 와서는 밥 끼니 들고 불 맞은 산 돼지처럼 서둘러 돌아갔다.
형님이 면목동 살 때에도 옆에 사는 옥자의 시아버지를 만날 까봐 옆으로 돌아서 다녔다.
그리고 장현의 아버지와 어머니하고 자리를 함께 하는 법이 없었다.
딸년을 똑똑히 키워서 당당하게 식을 올려서 사는 것도 아닌데다가 지금의 형편으로 올 리가 만무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웃거리고 있다가 장현엄마 아니 영진할머니에게 들키고 만 것이었다.
“자 사돈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가요.”
쭈뼛쭈뼛 망설이고 있는 정순에게 영진할머니는 들어가자고 손을 잡아끌었다.
“영진이 외할머니 오셨다.”
방안에 있던 축하객들이 모두 일어나서 맞아들이니 정순은 기대 반 우려 반 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분명히 이 영감탱이가 오기는 올 텐데 언제쯤 일까 하면서 밖에다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어 미역국과 음식이 나오고 정순은 준비해간 반지를 영진이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모두 박수를 쳐 주었다.
그렇게 영진이의 조촐한 돌잔치를 하고 있었다.
정순에게도 술잔이 돌아왔고 몇 순배 받아마셨다.
정순이 얼간하게 취해 있을 무렵 재덕은 오늘 영진이 첫돌이라고 부산을 떨면서 정자네 집으로 몰려가든 딸들을 보자 몇 번을 망설이다 옷을 챙겨 입고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장에 들려서 돌쟁이 옷 한 벌을 사가지고 들려만 간다는 생각으로 정자내 집으로 향했다.
다른 때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모든 게 정순이 사가거나 했으련만 지난번 준영이 돌 때 산 이후로 무엇을 사다줄까 망설이다.
그래도 외갓집에서 옷 한 벌 안사주고 돌을 지내게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 반신반의 하면서 혹 정순이 올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정자네 집으로 향했다.
정자네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왁자지껄할 것 같았는데 조용해서 들어가기가 조금은 망설여졌다.
어렵다면 어려운 딸의 시집식구 들이 와 있는데 불쑥 들어가기도 뭣해서 쭈뼛쭈뼛 하고 있는데 장현이 동생이
“어머 광진이 외할아버지 어서 오세요.”
하면서 인사를 하면서 안을 향해
“영진이 외할아버지 오셨어요.”
하자 안에서는 일순 조용해지고 광진 할아버지가 나오며.
“사돈 어서 오세요.”
하면서 재덕을 맞아 드렸다.
방안을 들어서던 재덕은 눈에 불이 번쩍 튀었다.
정순이 당황한 척 했지만 미리 계산된 수순이었다.
재덕 또한 여기서 큰 소리를 내어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앉으시지요. 사돈.”
자리를 권하는 광진 할아버지에 이끌려 마지못해 부아가 치미는 것을 억누르며 장마 끝에 오이 꼭지 씹은 얼굴을 해가지고 앉았다.
둘이는 그렇게 어색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정자는 머리가 빨리 돌아갔다.
싸움을 말려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얼른 생각해낸 게 영동이었다.
재덕은 아들 수동이보다 영동이를 신뢰했다.
어려서부터 유독 재덕을 잘 따랐고 명석하고 근면했다.
무엇보다도 큰집이 잘살아야 한다며 장가들기 전 해에 용동에게 땅까지 사주고 빚까지 갚은 일이 있어서 재덕이 그 어느 누구의 말 보다 잘 들을 것 같아서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전화로 달려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빠 저 정자예요.”
“그래 동생이야 뭔 일 있어?”
“저 다름이 아니고 엄마가 왔는데 오빠가 싸움 좀 말려주세요.”
“그래, 그래 알았어.”
전화를 받은 영동은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성남을 향해 떠났다.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작은 아버지 재덕에게는 열 효자 보다 악처가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던 이 싸움을 말려서 살게 해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복정동 과수원에 도착한 시간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도착해 보니 효순 엄마가 있어서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하고 방안에 들어가 앉아서 방안을 둘러보니 술병이 두 개가 구석에 있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그래도 열무김치며 고추장아치 그리고 된장과 고추장이 담겨져 있는걸 보니 생활을 그런대로 이어가고 있는 거 같았다.
눈물이 확 돌았다.
왜 환갑이 다가오는 나이에 이 고생을 하면서 사는지 희상이와 같이 살면 지금쯤 손자의 재롱을 보면서 사실 때가 아닌가.
정순을 만나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작은 아버지 재덕의 삶이 왜 이렇게 한심해 보이는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수동이 결혼식전 희상을 찾았던 일이 생각났다.
우연이라고 할까 찐빵 집을 정리하고 떡 방앗간을 하면서 빨랫골 무녀 집에 떡을 배달하고 오다가 희상을 보아서 인사를 하고 얼마 후 수동이 결혼식 날을 받아서 수동이 결혼식에 올수 없느냐 고 했더니 지금 갈 게제가 아니지 않느냐 고 냉정히 잘랐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 축하한다며 빈말이라도 했으면 덜 서운했겠지만 거기서 낳은 삼 남매에게 누가 될까봐 선을 그었던 희상을 생각하면 수동이가 더욱 불상해 보였다.
그렇다고 불상한 사촌 수동이를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수동이라고 별 도리가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에이 물골안에서 땅 팔고 나온다고 하실 때 적극 말리기라도 할 걸.
‘애이고 다 팔자 소관이지.’ 하다가도 왜 남의 것을 빼앗았으면 잘 살지 왜 뛰쳐나가 가지고 참 작은 아버지가 속을 어지간히 끓이며 살았구나 하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도리가 없지 않는가, 지금 헤어지게 해봐야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다고 수동이에겐 너무나 가혹한 짐이 아닌가. 그래 정순의 품에서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해 그래야 하지. 그리고 지금 시집을 못간 동생들이 줄줄이 다섯이 아니가.
그 무렵 정자내 집에서 나온 재덕은 몇 개 없는 이를 빠지직 갈며.
“따라와 집에 가서 이야기 하자.”
일은 정순이 의도 한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걱정이 된 정자를 비롯한 딸들이 우르르 몰려서 같이 버스를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둘은 냉랭하게 서로를 외면한 채 정류장에 내려서 과수원을 향하는 길에 접어들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래 여태까지 언놈 하고 눈이 맞아 싸질러 돌아친 거야.”
먼저 재덕이 입을 열어서 싸움을 걸었지만 정순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꾸를 해봐야 변명에 여지가 없고 재덕의 성질만 돋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도 했지만 길거리에서 싸워봤자 목소리만 커지고 창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놈이 그렇게 좋으면 짝 붙어서 살지 거기가 어디라고 낯짝도 두껍지 거길 와 남사스럽게.”
“내가 누구랑 살았다는 거예요.”
“남가 놈하고 산거 아니면 누구냐 또 있어. 내가 모를 줄 알고.”
“생사람 잡지 말아요. 창피하게.”
“창피 할걸 아는 년이 집을 나가서 이 년 동안 서방질을 안 했으면 뭘 했어.”
“안 했어요.”
“안하긴 이 더러운 화냥년, 네년하고 못살아 아니 내가 죽어도 안살아.”
재덕이 소리를 지르며 금방이라고 달려들어 칠 듯 하는 걸 정자와 경자가 매달리고 금자 은자 수자 까지 매달려 말렸다.
정순의 의도하지 않았다면 바로 돌아서서 택시를 타던 버스를 타던 돌아갔을 텐데 명옥이가 옆방에 사는 게 마음에 걸려서 말다툼을 하면서도 여전히 따라서 들어오고 있었다.
과수원 관리사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들은 영동이 재덕과 정순이 다투는 소리를 직감하고 서둘러 과수원 입구까지 부지런히 걸어 나왔다.
“작은 아버지 저 왔어요.”
하는 소리에 씩씩대며 목소리를 높이던 재덕이.
“조카 왔네 그려. 가게가 바쁠 텐데 가게는 어떡하고?”
“바뿐건 다 해놓고 왔어요.”
“그래 들어가자.”
영동이가 나오는 바람에 개년 쇠년 하던 소리는 들어가고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 숨을 몰아쉬며 관리사로 들어갔다.
“나가 이 더러운 년.”
따라오랄 때는 언제고 나가라고 했다.
“아유 더러워서 못 살아 나가라며 못 나갈 줄 알고.”
하면서 나가려고 하니 영동이가 막아서며.
“가시긴 어딜 가요. 애들 생각 좀 하셔야지요.”
“아 나가라고 하지 않아요.”
“화 낌엔 무슨 소린들 못 합니까?”
“아 붙잡긴 왜 잡아 가게 내버려 둬. 참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려 온 건가 본데 한번 이혼한 놈이 두 번은 못해 내가 찍어줄게. 걱정 마 내가 내일 물골안 면사무소에 가서 도장 꽝, 찍어 줄 데니 걱정 마.”
“작은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금자 은자 수자 생각도 하셔야지요. 애들이 뭐 죄가 있어 수동이처럼 고생을 해야 해요?”
재덕은 수동이처럼 이라는 말에 조금 기세가 꺾였다.
“작은 아버지가 참고 받아들이세요. 아들 딸 있으면 뭐 합니까? 그래도 찬밥덩이라도 챙겨줄 사람은 작은어머니잖아요.”
명옥이 까지 거들었다.
“열 효자 보다 악처 하나가 났다고 하잖아요. 힘 떨어지면 수동이한테 가봐야 여기서 마누라가 차려주는 찬밥덩이가 더 나은 법이예요.”
재덕이 듣고 보니 맞는 말 이었다.
내가 수동이에게 해준 게 없는데 늘그막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 불쌍한 녀석에게 얹혀산단 말인가.
명옥이는 동생 영자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잘 살기나 하면 모를 까 수동이가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도 살림은 피지 않고 시아버지의 시집살이 까지 하게 되면 중매를 선 언니를 원망 할 것 같아서 한말이었다.
“그래도 들어온 건 준광이 할아버지 생각해서 그런 게 아녜요. 자 그러고 있지 말고 술 한 잔씩 하면서 풀어요.”
참 웃기는 게 부부싸움의 화해도 술 이야기가 나오자 얼음에 더운물 부은 것처럼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자가 잽싸게 소반을 들여오고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내고 잔은 꺼내고 김치탕기를 내 놓았다.
“뭐해 서방님한테 한잔 올리지 않고.”
명옥의 호들갑에 소주잔이 채워지고,
“언니도 한 잔.”
하면서 정순이 명옥에게 한잔 그리고 명옥이 정순에게 한잔 그렇게 술판으로 바뀌면서 얼음은 녹아버렸다.
“내가 집을 나간다고 나가서 그래도 저 커가는 딸년들 돈 벌어서 시집이나 보내려고 식당에서 이를 악물고 일했어요.”
하면서 정순은 눈물을 훔쳤다.
“그럼 그랬겠지. 돈 벌려고 그랬다 다잖아요. 자 손잡아 줘요.”
재덕 또 한 눈물을 흘리는 정순을 보자 한구석에 남아있던 얼음 조각마저 스르르 녹아들었다.
그렇게 정순의 각색에 정자 영동이 명옥의 조연에 의해 두 주인공은 몇 잔의 소주를 나누어 마시며 얼었던 가슴을 녹였다.
“참 준엽아범 바쁠 텐데 가 봐야지.”
“예 가봐야 갯내요.”
“오빠 차비 드려라.”
하면서 정순이 오천 원짜리를 꺼내어 정자에게 주었다.
“아 됐어요.”
하면서 받지 않으려고 했다.
정자가 버스 정류장 까지 걸어가면서.
“오빠 고마웠어요.”
“고맙기는 뭘 그래도 다행이다 화해가 되는 걸 보아서. 두 분이 잘 살아야지.”
“그러게 말이 예요.”
“이젠 들어가.”
“네 이거 차비.”
“에이 뭔 소리.”
하면서 차비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몇 번의 작은 승강이가 있었지만 결국 버스에 올라탄 영동이 돈을 창밖으로 던져서 정자는 할 수 없이 돈을 주어서 돌아왔다.
그 시간 화해의 술이 얼간 해지고 명옥도 오늘은 자제를 하는지 분위기만 띄워주고 돌아갔다.
정자도 시누이에게 맡겨놓은 영진이가 걱정이 되어서 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술상은 윗목으로 밀어 놓은 채 두 사람은 쓰러져 잠자리에 들었다.
경자 금자 은자는 명옥의 방으로 자러가고 오랜만에 만난 수자만 정순옆에 잠들고 둘은 오랜만에 녹은 가슴을 열고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은자는 버스 안내양으로 취직을 해서 집안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현대시멘트 기사들은 태평리에서 고물상을 하는 정씨를 불러서 전선을 벗긴 구리 배를 해체 하면서 떼어낸 커다란 밸브에서 놋쇠를 떼어내서 팔고 중량이 모자랄 것 같으면 잡철이나 심지어 돌로도 중량을 채웠다.
밸브에서 놋쇠를 떼어내기 위하여 볼트를 풀어야 하는데 힘이 드니 수동이에게 인펙으로 풀어달라고 부탁을 해서 가끔씩 볼트를 풀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과 경유 팔아 모은 돈으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운전기사 다섯 명 이상이 모이면 방에 앉아서 고스톱을 쳤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도리 짓고땡으로 바뀌었고, 판돈이 백만 원이 훨씬 넘기도 했고 고리를 떼서 밤참을 만들어 달래서 먹기도 했다.
그리고 고물상 정씨도 그들과 어울려 화투를 쳤는데, 어느 날은 정씨 부인이 직접 찾아 와서 말리다가 결국은 지서에 신고를 해서 경찰이 오기도 했다.
결국은 소문이 나니 투전을 좋아 하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겁이 난 성증은 차츰 자제를 시켜서, 인근사람들은 못 오게 하고 운전사들끼리만 놀게 하
였다.
그러던 어느 날은 조광수라는 기사가 불도저로 경지 정리를 하는 일을 주선하러 다니는 정씨와 우연히 고스톱을 쳤는데. 조기사가 돈을 일었는데 그걸 복구 하려고 판을 키우기 위해 마지막에는 도리짓고땡으로 바뀌었는데. 조기사가 잃은 돈이 백만 원 가까이 되자 정씨는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니 땀을 뻘뻘 흘리면서 괴로워했고, 아픈 정씨는 딴 돈이 있어서 고만 하자고 못하고 돈을 잃은 조기사도 본전 생각에 더 하려고 손을 따주고, 했지만, 아파서 울다시피 하는 사람을 붙잡고 계속 화투를 칠 수는 없었다.
정씨를 보냈는데 병원에 사흘이나 입원을 해서 병원비로 삼십만 원을 넘게 썼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허진이 딸들을 보기위해 온 때에 희상이도 아이들이 방학은 해서 수동이를 보기 위해서 내려 왔다.
그래서 처음으로 안사돈끼리 마주 앉아서 진이는 작심을 하고 말을 꺼냈다.
“아들하고는 어려서부터 떨어져 살았다면서요.”
“예.”
“아이고 불쌍해라. 그 어린 걸 떼어 놓고 눈에 밟혀서 어떻게 사셨어요.”
순간 희상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김 서방이 저렇게 힘들게 고생 하면서 사는 걸 보면 사위 자식도 내 자식이라 향상 가슴이 찐 해요.”
“어련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인데 안사돈 김 서방에게 한 몫 떼어줄 수 없나요?”
“생각은 굴뚝같으나 제 코가 석자라서.”
진이 더 이상 채근을 할 게제도 아니고 해서 입을 닫았다.
희상 역시 방학이라 우울해 지는 것을 느끼고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수동이를 보면 좀 나아지려나, 하는 생각에 영희에게 두만이 밥을 챙겨드리라고 하고서 훌쩍 떠나 왔지만 응어리를 풀기는커녕 납덩이같은 것만 가슴에 더 얹어가게 생겼다.
하긴 아무 생각 없이 내려와 손주 녀석들 옷 한 벌 준비 안 해가지고 온 것조차 마음에 걸렸는데 사돈마누라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더 답답했다.
거기다 준광이 혜영이 준영이까지 외할머니를 자주 봐서 그런지 매달리고 하는데 나에게는 곁도 주지 않았다.
그 옛날 수동이를 보러 잔득 기대하고 물골안에 가면 수동이는 달려와 안기지도 매달리지도 못하고 그저 절만 하고 눈치만 보던 생각이 났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데 수동이는 웬만하면 버스 차부까지 따라와 마장동 가는 버스표라도 끊어주련만 인사만 하고 나 혼자 태평리 차부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서 마장동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을 내다보니 수동이가 보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시커먼 자동차 바퀴를 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버스는 순식간에 지나쳤다.
그리고 복정동 과수원에 살던 명옥은 효순이가 알뜰히 모은 돈으로 효순이 직장 근처에 월세 방을 얻어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수동이가 식구들을 데리고 설을 쇠러 올라가 보니 정순이 와 있었고 집안이 평화를 되찾은 것 같아서 수동이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하루는 동내 이장 집 경운기가 논에서 노타리 작업을 하다가 고장이 났는데 성증이 소개를 해줘서 가져다가 보니 트랜스미션이 망가져 있었다.
그걸 겁도 없이 분해를 하고 보니 기어가 서너 개 깨져 있어서. 깨어진 기어를 주면서.
“이장님 이천에 가셔서 부속하고 기어오일 하고 사오세요.”
그렇게 해서 이장이 사온 부속을 조립을 해서 시운전을 해보니 괜찮아서 가지고 가라고 했는데 아들이 와서 끌고 가다가 동내 입구에서 방향전환 크러치를 잡았는데 원위치가 되지 않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급히 전체 동력을 끊고 방향을 틀어서 가다 보니 또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았다.
미안해하면서 살펴보니 방향전환 케이블을 서로 반대로 연결해서 그런 것이었다.
케이블을 바꾸어 연결해 주니 괜찮았다.
그리고 몇 칠 후 심 이장을 고치는 값으로 쌀 세말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5월5일 어린이날 성증은 자신의 아이들 넷에 수동이네 아이들 셋이 어린이날이라 과자를 내어주고 파티를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두시 TV를 보고 있는데.
“실제 상황입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정체불명의 항공기 한 대가 우리나라 영공을 침입했습니다.”
라는 방송이 있었다.
승객 96명(납치범 6명제외)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용항공총국소속 여객기가 춘천 켐프페이지에 불시착한 사건이 이었다.
실제 상황이라는 말에 라면을 사러 슈퍼로 달려간 사람도 있었다는 후일담도 있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비행기가 대한민국 영토에 불시착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한국전쟁이후 서로 적대시 하며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 접촉이 없었는데 정부는 이를 십분 활용하여 접촉을 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승무원을 비롯한 승객들에게 모처에 있는 음식점에 데려다 놓고 갈비를 대접했다.
인공적으로 잘 조성해 놓은 정원에서 갈비를 뜯으며 행복해 하고 있는 장면은 일반 서민들은 꿈도 못 꾸던 시절에 그 장면을 TV에 방영을 했다.
그렇게 해서 공식외교적인 접촉을 하는 단계로 발전 시켰다.
그리고 성증의 매형이 학교 선생님을 하는데 벌통을 갔다가 놨는데. 영자의 언니 영애가.
“준광이 아빠! 벌 나왔어 벌.”
하면서 수동이를 찾았다.
수동이가 가보니 벌통에서 한 10m 떨어진 향나무에 한 바가지가 넘는 벌들이 뭉쳐있었다
“어떻게 해요.”
“저기 빈 벌통에서 벌집에 꿀을 발라서 벌이 뭉친 곳에다 대고 솔가지로 살살 쓸어 담으면 여왕벌이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고 거기로 다 뭉치면 벌통에 넣으면 된대요.”
수동이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어려서 5년 선배 창기가 현상이 할머니네 벌통에서 벌이 분봉해 나와서 뽕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짚으로 짠 모자처럼 생긴 것을 대고 벌을 솔가지로 쓸면서.
“몰리하라, 몰이하라.”
하던 것이 생각나 수동이도 저절로
“몰이하라, 몰이하라.”
하면서 벌을 살살 쓸어서 벌집으로 옮겨서 벌통에 넣고 벌집을 여러 게 간격을 두고 넣어 주었다.
그리고 뚜껑을 닫고 벌통을 먼저 있던 벌통에서 2m 떨어진 곳에 아래에 벽돌을 고이고 나란히 놓았다.
이틀 후 벌통 주인인 성증의 매형이 와서 보고.
“사돈 잘 하셨네요.” 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6월30일 저녁에 시작했다.
이틀 동안은 TV에서 시간만 나면 보았는데 그 후로는 시들해 졌다.
그리고 회사에서 책정해준 연료를 남겨서 파는 것은 현대시멘트 차뿐만 아니라 장거리 운행을 하는 차들은 대개가 연료를 남겨서 기회가 나면 팔아먹었다.
충주비료공자에 납사(naphtha)를 운반하는 삼일상운 운전사가 장호원에서 기름을 빼서 팔다가 회사직원에게 들켰다는 소문이 났다.
‘그 기사 여기서 팔다가 안 오더니 거기서 팔다가 들켰구나. 아이고, 하마드라면 우리가 걸릴 뻔 했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기사가 휴게소에 들려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회사에서는 기름을 남겨서 팔아먹는 것은 회사에서도 공공연히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들킨 원인은 노조를 만드는 일에 하는 걸 알고 회사 간부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노조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인천회사에서 납사를 실고 출발해서 얼마쯤 오다가 사이드 밀러로 보니 승용차 한 대가 추월도 하지 않고 계속 따라와서 미심적어서 여기도 들리지도 않고 가보니 태평리를 지나서 사이드 밀러에서 사라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미심적어서 장호원 주유소를 그냥 지나치면서 보니 따라오는 차도 없어서 에이 괜한 의심을 했구나 하고 충주에 가서 비료공장에 납사를 내려주고 올라오다.
아까 그 차가 태평리에서 없어진 것이 생각나 장호원 주유소에 들려서 호스로 연료통에서 기름을 빼고 있는데 번쩍 하면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얼굴이 나오게 서라고 하더니 사진을 다시 찍고서 주유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갔는데 다음날 회사 사무실에서 오라고해서 갔더니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서 사표를 내겠다고 해더니 사표를 쓰라고 해서 사표를 쓰고 나와서 이 회사로 옮겼다고 했다.
“그래 장호원주유소에는 아무런 말도 없고요.”
성증이 묻는 말에
“아무 소식이 없다는데요.”
83년 9월 1일 소련전투기에 의한 KAL 747점보기 피습사건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성증은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가을 날 은봉리 사는 정의만씨가 성증을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던 중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산을 밀어서 휴게소를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서 그 일에 나서게 되었다.
성증은 우선 도로 점용허가를 받기위해 정의만과 함께 여주에 있는 설계사무소에서 서류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그리고 신갈에 있는 국도관리청은 면허가 없는 정의만이 차를 가지고 가기 힘들어서 수동이가 정의만의 1.5t트럭을 운전하고 가게 되었다.
관리청 직원이 서류에 미비점을 설명하면서 서울에 가서 등고선이 그려진 지도까지 첨부하라고 했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지도를 사가지고 내려오는데 곤지암을 막 지난 곳에서 속도위반을 해서 경찰관의 지시대로 차를 갓길에 세웠다.
경찰이 다가와 거수경례를 하면서
“속도위반을 하셨습니다. 면허증 주십시오.”
“예 여기 있습니다. 조금 싼 걸로 끊어 주십시오.”
수동이가 고개를 숙여 부탁을 하니.
“바쁘십니까?”
“예 조금.”
“그래도 천천히 가셔야죠.”
하면서 면허증을 도로 내어주면서
“수고 하십시오.”
거수경례를 하고 그냥 보내 주었다.
수동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집에 와서 왜 그냥 보내줬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성증이 가운데 타고 있었고, 성증의 상의에 있던 배지를 보고 옆에 정의만씨는 통일주체 국민회이 모자를 쓰고 있어서 그냥 보내 준 것이었다.
아무튼 서류를 보안해서 올리고 한 달이 지나서 허가 가 떨어져서 도로 점용료를 내고. 산지훼손허가를 받기위해 설계를 하고 서류의 높이가 10cm가 넘게 만들어 군에 접수를 시키고, 기다렸지만 곧 된다, 된다 하면서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수동이는 그라인더에다 쇠를 갈던 중 눈으로 쇳가루가 들어가서 또 한 번 원주기독 병원에 가서 눈에 밖인 돌을 파내고 왔다.
어느 날은 트레일러 기사가 휠 볼트가 다 부러지고 해서 수리를 해주고, 중고 휠까지 갈아 끼워 줬는데, 돈이 없다며 자동차 등록증을 맡기고 십만 원을 넘게 외상을 하고 갔는데 한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 차는 지입차고 연락을 해주겠다고, 하고 영 소식이 없었다.
몇 번을 전화를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지만 검사증은 얼마든지 새로 발급받을 수 있는 것으로 양심 없는 차주였다.
그리고 추석전날 수동이가 재덕의 집에 올라가 추석을 지냈는데 올해 환갑이 되는 재덕의 회갑 잔치의논이 없었다.
정자도 경자도 그런 의논을 할 만큼 철이 들어 있지 않았고 삶에 쫓겨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정순도 삶에 쫓겨서 그랬는지 재덕이 수동이의 삶을 알기 때문에 입을 열게 하지 않았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자의 신랑인 광진 아범하고 의논을 할 만큼 해준 게 없다보니 대놓고 물어보기도 뭐해서 그냥 내려와 일상에 빠졌는데. 두 달이 금방 흘러가고 말았다.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해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 하려는 폭파사건 이 있었다.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다행이도 사고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을 순방 첫 번째 방문지에서 급거 나머지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였다.
곧이어 비상 국무회의에서 비상경계 태세를 결정하고 10월13일 17위에 대한 국민장 거행 후 연일 벌어진 북한만행규탄대회를 고비로 대북 보복 론까지 대두되었다.
모두 전쟁이 나는 거 아니냐 하면서 비상식량으로 라면과 쌀들을 구입하고 법석을 떨었다.
심지어 금값도 올랐다.
수동이는 만약 전쟁이 나서 가족이 헤어져 못 만나게 된다면 첫째 일요일은 남산 팔각정으로 셋째 일요일은 부산 영도다리로 나와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10월 20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한 대북한 경고와 더불어 자제 론이 천명됨으로써 고조되었던 남북한 간의 위기국면은 진정되었다.
한편, 미얀마 정부는 사건발생 즉시 5인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암살범 추적수사에 총력을 기울여 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북한에서 온 강민철과 진 모 등 2명을 체포하고 1명을 사살하였다.
뒤이어 미얀마 정부는 외무장관을 진사조문사절로 파한했으며, 10월 17일 이 사건이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공식발표하고, 11월 4일 북한에 대한 외교단절 및 정권승인 취소조처를 취하였다.
이 조처에 따라 미얀마 주재 북한공관원들이 이틀 뒤 미얀마를 떠났으며, 다음날인 11월 7일 일본 정부가 대북한 제재조처를 취했으며 잇따라 미국 등 우방국들의 대북한 제재조처가 이어졌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수동이는 재덕의 환갑 전날 식구들을 데리고 올라갔다.
준비한 게 없어서 수동이는 가까운 친지조차 부르지 않았다.
하물며 재덕의 형인 재운에게 까지 번거로울 것 같아서 연락을 하지 않았다.
환갑날 아침 온 식구들이 식사를 마친 후
“오늘은 그냥 보낼 수 없으니 용인 민속촌에 가서 구경이나 하고 오시죠.”
하고 수동이가 말을 하자.
“그래 그게 좋겠다.”
그렇게 해서 재덕 정순 수동이 영자 준광이 혜영이 준영이 광진이 영진이 경자 금자 은자 수자 까지 열 명이 넘는 식구가 버스를 타고 용인민속촌으로 가서 표를 끊고 들어갔다.
정자와 장현이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따라오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도 하고 정순과 재덕은 널도 뛰고 무엇보다도 젊어서 상쇠까지 했던 농악공연을 가장 추억에 어린 눈으로 보았다.
재덕은 열두 발 상모를 돌리는 것을 보면서
‘금돌이 그 친구 북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하는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렇게 오후 서너 시 무렵 제일 어린 영진이가 발이 아프다며 칭얼대어서 보니 하루 종일 따라다녀서 뒤꿈치에 물집이 잡히고 터져 있었다.
“아유 이런 네 애미가 보면 뭐라고 하겠다. 쯧 쯧 쯧.”
그 뒤부터는 수동이가 집에 올 때 까지 안고 다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수동이는 다시 여주로 내려왔다.
동생 환갑날을 모르고 지나간 재운은 노발대발 했고 영동이를 비롯한 조카들은 미안해하며 그리고 수동이를 탓했으나 수동이는 못 챙긴 우리의 잘못이 더 크다고 수동이를 변호하고 나서서 그렇게 무마되고 말았다.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수동이가 잘못한 것이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큰 아버지나 사촌형님들은 불렀어야 했고 의논할 상대가 없다고 해도 용동이나 영동이 성동이와 의논을 했으면 후회 할 일이 없었을 덴데 수동이의 생각이 아주 짧았다.
첫 추위가 시작되고 얼음이 언 날 아침 정의만씨의 1.5t트럭이 시동이 안 걸린다고 전화가 와서 연장을 챙겨들고 응봉리 정의만씨 집으로 가서 시동이 안 걸리면 화물차 기사들이 하는 것을 눈동냥으로 본 것이 있어서 브란자 가기 전에 있는 연료필터 위에 있는 볼트를 풀고 피드펌프질을 해가며 연료 라인에 있는 에어를 빼서 시동을 걸어서 끌고 오는데 어라 또 서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번을 걸쳐서 태평리에 와서 카센터를 갔더니 연료펌프와 연료필터로 오기 전에 연료 탱크 옆에 세족기라는 작은 소주잔 보다 조금 크고 투명한 것이 또 달려 있는데 그걸 풀어보니 그 안에 얼음 덩어리가 있고 컵 모양의 세족기는 금이 가 있었다.
거기서 얼음이 녹으면서 그랬는지 아니면 세족기가 깨져서 그랬는지 공기가 올라오는 바람에 시동이 걸리지 않고 꺼진 것이었다.
아무튼 다만 몇 푼이라도 벌게 해주려는 의만씨 덕에 한 가지를 배운 것 이었다.
수동이는 여지 것 전기 점화 방식인 휘발유 차나 가스 차만 접하다가 겨우 경운기를 보았는데 디젤(경유차)에도 경운기처럼 아래에 필터 말고 또 하나의 물을 걸러내는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게기로 펑크를 때울 때 쓰는 컴프레서 위에있는 경운기 엔진에 붙어 있는 필터도 얼까봐 뜯어내어 닦아내고 속에 필터를 사다가 교환을 했다.
그리고 그 무렵 휴게소에는 수동이와 비슷한 또래의 어찌 보면 한두 살 더 많은 것 같은 한 씨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형님 같이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하면서 자기는 정비만 하고 펑크 손님은 형님이 하면 손님이 더 많을 거라며 같이 해보자고 했다.
한 기사는 아내와 이혼은 했는지 도망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옷가방을 가지고 혜영이 또래의 여자 아이와 준영이 또래의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와서
보일러 깔린 버스 바닥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그리고 냄비 두 개 그리고 숟가락 세 개 와 그릇 몇 개를 사가지로 왔다.
그런데 운명은 겨우 날아와 앉은 셋을 시기하듯 여주 군청에서 마당에 세워놓은 폐 버스를 치우라고 했다.
86 아시안 깨임을 앞두고 길가에서 빤히 보이는 폐차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기사와 둘이서 시멘트불럭과 문짝 몇 개를 사다가 마당 한쪽에다 현대 시멘트에서 얻은 시멘트로 불럭을 쌓아서 무허가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용기를 낸 것은 동내에 사는 준광이 또래의 영규 아버지가 휴게소 뒤편에 무허가 건물을 지어서 살림을 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지어서 하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것을 본 정의만씨가 휴게소 허가를 얻으러 다니는 산 아래에 세를 놓고 있는 집 헛간이 비었으니 그걸 수리해서 쓰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렇게 해서 불럭과 문짝을 실고 가서 헛간을 수리를 하는데 지붕의 반은 날아가고 없어서 슬레이트와 각목을 사서 지붕까지 수리를 해서 비는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보일러를 깔고 방을 만들고 아직 마르지도 않은 바닥에 비닐장판을 깔고 시멘트 냄새가 나는 방에 담요를 둘러쓰고 한씨의 어린 남매와 함께 다섯이서 들어앉아서 웅크리고 앉아서 손님을 기다렸다.
어설프기가 짝이 없는 생활이었다.
마당을 질어서 차가 간신히 들락거릴 장소에 전봇대 밑에 컴프레셔를 놓고 보니 아무래도 간판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간판을 만드는 가계에서 아크릴로 형광등 두 개가 들어가게 빵구 밧데리라는 아크릴 간판을 만들어다 멀리서 잘 보이도록 산 위에 참나무 아래에 땅을 고르고 세웠다.
아무래도 수동이 혼자서는 못할 일을 한 씨가 같이 해서 그렇게 해나갈 용기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한 씨는 가계를 자주 비우고 장호원으로 이천으로 돌아 다녔다.
그리고 수동이에게는 늘 형님, 형님 하고 불렀다.
그가 그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터를 잡고 일이 들어오려니 하고 기다려도 일이 없자 일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하루는 한 씨가 없는 저녁 무렵 11톤 덤프트럭이 펑크를 때우러 왔다.
그래서 타이어 속을 보니 심하게 찢어져 있어서 페치를 대야 할 것 같아서 페치를 대야 한다고 운전기사에게 말하니 얼마냐고 물었다.
튜브에다 오비 펑크 수리비 까지 만 삼천 원이라고 하니 돈이 모자란다고 해서 헌 페치를 넣고 조립을 해서 바람을 넣는 도중에 타이어가 찌찍하는 소리가나서 운전기사가 호스를 잠그려는 순간 펑 하면서 터지고 타이어는 순간 2m 가랑 공중으로 뜨면서 운전기사의 손을 치고 올라갔다 떨어지고, 운전기사는 손이 아프다고 쩔쩔맸다.
난감해진 수동이는 스페어타이어를 꺼내 끼워주고, 튜브에다 오비 펑크 값까지 못 받고 그냥 보내고 나서 타이어 터진 곳에 가보니 땅이 30cm는 파여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페치 정도는 그냥 끼워주고 다음에 가져 오라고 할 걸 과욕이 화를 불렀다.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 했다.
설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직행버스 앞 타이어가가 펑크가 나서 들어 왔다. 신형버스는 승차감 때문에 차대가 낮아서 작기를 넣고 뜨기가 힘이 들었다. 간신이 작기를 넣고 떠서 타이어를 빼내고, 스페어타이어로 바꾸어 끼우려는데, 핸들이 돌아가 있어서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래서 운전사에게 타이어가 들어가기 쉽게 핸들을 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타이어를 집어넣는 순간 작기가 둥그러져 손가락 두 개가 버스 앞 펜더 와 타이어 사이에 손가락이 끼고 말았다.
운전사가 다시 작기를 떠서 손가락을 빼내고 병원으로 가서 뭉그러진 부분을 뜯어내고 꿰매는 동안 고통에 오른손으로 영자의 옆구리를 얼마나 세게 움켜잡았는지 모른다.
손목이 들어갔을 때 그랬으면 손목을 잃을 뻔 했다.
일도 못하고 해서 바람이나 쐬러 가야겠다며 황골엘 가서 사흘을 쉬고 돌아왔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했다.
혜영이가 준영이하고 시멘트 불럭을 가지고 놀다가 혜영이 새끼손가락이 시멘트 불럭 사이에 찧어서 피를 흘리며 울면서 들어왔다.
영자는 뼈는 괜찮은 줄 알아서 우는 혜영이를 달래서 현겁으로 손가락을 묶어 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손가락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정의만씨와 준광이를 태우고 태백을 다녀왔다.
산을 팔고 간 사람이 태백에서 광부 생활을 하는데, 산에 있는 묘지의 이전문제를 해결하고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정의양씨가 말했다.
그 사람에게 파묘를 해도 좋다는 동의서를 받고 삼십만 원을 줬다고 했다.
충주 땜 공사가 한창이던 때에 수석을 주우러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청풍으로 따라가 보았는데, 한겨울에 사람들이 2, 3십 명 모여서 괭이로 강바닥을 파헤치고 있었고 누구는 오십만 원이 넘는 돌을 캤네, 누구는 80만원이 넘는 돌을 주었네. 하는 소리가 가끔씩 들렸다.
그리고 큰돈을 버는 사람은 수몰 지구에서 조경을 위하여 돌 반출 허가를 받아서 돌을 채취해 가는 사람들 이었다.
그리고 강가에 대추나무가 많이 있었다.
물어보니 보상을 받는데 대추나무가 가장 비싸다고 해서 가짜로 나무를 베어다 꽃아 놓은 것이라고 했다.
한 씨는 계분(닭똥)을 실어 나르는 민사장내 4.5톤 복사 차를 보링을 했다.
거기서 수동이는 많은 것을 눈동냥으로 배웠다.
수동이가 십여 년 전 배터리 가게에 있을 때에는 보링을 한다고 하면 정비공장에서 뜯어서 보링공장으로 보내서 해왔는데 한 씨는 차를 세워둔 체로 엔진의 위와 아래를 뜯어내고 아래에서 망치로 처서 라이너라는 것을 빼내고 실린더와 링을 새로 사다가 넣고 크랭크에 들어가는 매달을 조립을 하고 밸브도 새로 사다가 끼우고 조립을 했다.
그러나 한 씨는 세상을 읽는 눈은 빨랐으나 기술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았다
덤프차를 세대 가지고 장호원에서 논바닥을 파내고 골재 채취허가를 받은 차 사장의 자가용 르망을 보링을 했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아서 서너 시간을 쩔쩔 매더니 한참 후에 타이밍을 체인을 잘 못 맞춘 것을 알고 다시 맞추어 시동을 걸었다.
수동이도 눈동냥으로 배운 것이 있어서 의만씨 경운기를 부속을 사다가 보링을 했다.
우선 실린더가 하나라 쉽고 부속도 농협에서 팔았다.
조립을 해 놓고 돌리는데 잘 안 걸려서 분사 노즐을 풀어놓고 돌려보니 분사가 되는 게 안개처럼 분사가 되지 않고 노즐 끝에 경유 방울이 남았다.
노즐은 뜯어서 다시 맞추면서 조금씩 조정을 해서 분사 시 노즐 끝에 경유방울이 맺히지 않게 해서 조립을 해서 시동을 걸었더니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준광이가 초등학교를 입학 했다.
녀석은 숙기가 있어서 “우리 아버지 빵구집 해요.” 하고 큰 소리로 말해서, 입학식에 온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수동이는 아들이 기죽지 말고 학교생활 잘 해나가라고 태권도 학원에도 다니게 했다.
생각보다 명랑하고 발표도 잘해서 부반장을 했다.
그러면서 정의만과 수동이는 가끔 시간을 내어 다른 휴게소는 어떻게 운영되고 어떻게 허가를 받았나 보기위해 목계로 박달제로 다녔다.
정의만씨 말로는 목계 휴게소 사장이 대단 하다고 했다.
주민등록 초본 한 장을 떼도 고맙다며 창구 직원에게 오천 원씩 준다고 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VIP라고 했다.
임야훼손허가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서류가 몇 번을 반려 되었고, 곧 될 것 같으면서 시간이 흐르는 사이 휴게소 사장은 휴게소와 여관을 바꾸기로 계약을 했다고 통보를 해왔다.
그렇게 되자 성증은 태평리에 대서소사무소를 차리기로 마음을 먹고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서류보안을 해서 휴게소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어느 날 산림과 실무자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날 성증 그리고 의만 수동이가 부푼 마음을 안고 실무자를 만나기 위해 여주로 가면서 성증이.
“아무래도 여럿이 만나면 그러니 제가 만나 보는 게 났겠죠.”
“그게 났겠네요. 김씨와 나는 다방에서 기다릴 테니 조주사가 만나고 오세요.”
그렇게 해서 의만과 수동이는 다방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의만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참 후 성증이 다방에 나타나 쌍화차를 들면서.
“정 이장님 잘 될 것 같아요.”
“그래요.”
하면서 얼굴에 활짝 웃음 꽂이 피었다.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그렇고 가면서 말씀드릴 깨요.”
그렇게 서둘러 집으로 향하면서 성증이 설명을 하는데 각부서의 계장들의 협의결제는 났다고 하면서, 산림과에 돈이 필요해서 그러니 차용증을 써 줄 터이니, 200만원만 빌려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과장들의 합의결재와 부군구와 군수의 결재가 떨어지면 서류가 도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된다고 했다.
“명목상 빌리는 것이겠지요.”
“그럼요. 허가가 안 떨어지면 돈을 도로 돌려준다는 의미지요.”
기분이 좋아진 의만은 다음 날 성증 수동이는 충주로 해서 단양을 걸쳐서 제천을 지나 봉양검문소에서 차가 방향지시등이 끊어져서 들어오지 않은 상태로 지나갔더니 세우라는 호루라기 신호를 무시하고 도망을 쳐서 탁사정으로 들어갔는데, 거기까지 따라와서 방향지시등을 켜보라고 해서 안 들어오니까 왜 도망을 했느냐면서, 처음에는 안 커지는지 몰랐다고 했지만 서라는 호루라기 소리를 못 들었느냐며 다그치고 봉화 삼거리 검문소에 끌려가서 성증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여주지부 운영위원이라고 하면서 봐달라고 사정을 해서 한참 만에 나왔다.
그러나 과장협의회에서 두 개과 과장의 합의를 받지 못해서 허가가 반려되어 세 사람은 허탈해 했다.
그리고 성증은 포기를 했는지 금당리 땅을 일부 팔아서 태평리에 집을 사고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고 농사를 지으며 혼자 살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모친도 모셔왔다.
수동이도 훼손허가를 시청한 산 아래 사는 노 영기씨 건넌방으로 이사를 했고, 한 씨의 주선으로 반월성 주유소와 연결이 되어 수동이가 성증이가 하던 식으로 화물차에서 남는 연료를 사서 드럼통에 받아서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가가 나지 않은 게 허가를 받으려는 산에 건물이 있어서 허가 보류 되는 게 아닌가. 해서 헛간을 헐고 집 뒤에다 컴프레셔를 옮기고, 담장을 쌓고 허허 벌판에서 일을 하게 되어서 뒤에 안 쓰는 화장실위를 막고 배관을 하고 보일러를 설치하고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게 되었고, 한 씨는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했는지 사라졌다.
그런가 하면 군청에서는 간판까지 문제를 삼았다.
빵구라는 글자가 세종대왕의 능이 있는 여주에서 맞춤법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뭐라고 써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빵구는 일본어 이고 사전에 여자가 정조를 잃다. 라고 표시되어 있다.’며 얼버무리며 적당한 단어를 이야기 해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산 뒤에 있는 의만의 논 중에서 깊은 논을 불도저 가 와서 의양의 뒷산을 깎아서 매워서 논을 만드는데 매워서 깊은 곳을 물을 대서 평편하게 하는 작업 중 불도저가 논에 빠지면 산에 있는 커다란 참나무를 베어다 불도저 트랙 양쪽에 묵어서 후진을 하면 빠져 나왔다.
그렇게 논을 풀었는데 그 논을 부치던 사촌동생 진만은 작년 보다 늘어난 논에 잔득 기대를 걸고 논을 경운기로 고르고 있었는데 예외 없이 경운기는 쉬(수렁)에 빠졌다.
그 때마다 진만은 수동이 가게로 와서 의만이의 경운기에 삼발이와 체인불럭을 가지고 가서 경운기를 가지고 가면 수동이가 같이 가서 꺼내 주곤 했다.
그렇게 형님 동생 하면서 지냈고. 장화에 구멍이 나면 장호원 장이나 이천 장에서 때워 와야 하는데 수동이가 그냥 때워 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모를 심는 날 의만과 함께 모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해서 먹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는 또 다른 사람 나래리에 서울서 살다가 내려온 풍채가 멀쩡한 윤명환 이라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
거기에 오진영 이라는 의만의 사촌 매부 그러니까 진만이 친 매형이 일을 나와 있었다.
“명환이 빵구는 동내에서 먹여 살리나.”
순간 수동이 밥숟갈이 멈칫했다.
그리고 십여 살 더 먹은 그에게 뭐라고 해야 하나 하다가 참자 참아 하고 말았다.
그것은 의만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없는 자 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다음부터는 모 밥을 먹으라고 불러도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의만이 가자고 해도 먹었다고 하거나 집에서 먹었다.
사람은 염치를 알아야 하는 데 의만을 믿고서 따라 다닌 게 그런 굴욕을 당한 것이었다.
84년 9월 3일 동안 300mm가 넘는 곳이 있을 정도로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9월14일 뉴스에는 대한 적십자사 유창순 총재가 지난 8일 북한적십자회가 방송을 통해 남한의 수재민을 위해 쌀 천 시멘트 의약품 등을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수락한다고 발표했다.
유창순 총재는 북한적십자회가 지난 8일 하오 8시 방송을 통해 우리 측 수해 이재민을 위해 쌀 오만 석 옷감 오십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 기타의약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고 전하고 우리 대한적십자사는 지난 8월20일 전두환 대통령의 인도주의적 제의에 적극 부응. 이번 북한적십자회 측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이달 중에 북한 측이 제시한 물자가 우리 측에 모두 인도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대한적십자사는 “전 대통령이 지난8월20일 기자회견에서 남북한 경제교류 및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북한주민들의 생활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술과 물자를 북한 측에 무상으로 제공을 할 용의가 있음을 내외에 천명한바 있다.” 지적하고 “서울과 지방에서 폭우로 인해 이재민을 낳고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으나 국민모두의 단합된 힘과 노력으로 단기간에 완전 복구해 지난 3일 세계적십자사 연맹이 수재민을 위한 원조를 제의해 왔을 때 우리 힘으로 충분히 복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정중히 사양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족간의 인도적인 문제에서부터 진정한 상부상조의 길을 트고 나아가 남북한 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북한 측의 제의를 받아들이다.”고 제의 수락 이유를 밝혔다.
대한 적십자사는 “물자의 인도 방법으로 북한적십자회가 배에 물품을 싣고 인천항 또는 부산항으로 오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 말하고 “북한적십자외가 제의한 물자의 인수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조속한 시일 내에 쌍방 적십자의 실무접촉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했다.
그리고 대한적십자회도 “앞으로 북한에서도 재해가 발생하면 우리는 인도적 차원에서 물자제공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히고 “이번에 이루어진 새로운 접촉과 교류를 계기로 남북한 사이에 화합과 상부상조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 같은 인도적 차원의 교류가 확대되기를 바란다.” 했다.
그러면서 대한 적십자사는 “북한적십자회의 제의에 대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렵해 북한적십자회의 제의를 수락하기로 결정했다.”밝혔다
대한적십자사의 북한적십자회 물자 제공 수락은 남북관계 개선과 민족화합의 계기를 마련하는 적극적인 조치는 대북국력 우위의 자신감에서 나온 조치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남북 간의 물자교류는 이산가족문제의 해결은 물론 남북관계 개선의 길을 열어놓으려는 대북 포옹성의 발로로 이를 게기로 앞으로 북한의 재해 또는 기타 인도적인 구호를 필요로 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우리 적십자사가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해서 북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나름 최선을 다해서 물건들을 준비해 보냈다.
남조선 동포들에게 보낼 쌀이라고 일일이 쌀에서 돌을 골라내고 흠 있는 물건들은 배제하고 보냈다.
그러면서도 북한 당국이 수재물자에 대한 ‘인도식’을 거행하고 북측 요원들이 직접 수해 현장을 방문해 이재민을 위로하겠다고 나섰다.
난항 끝에 북한은 남한의 요구대로 1984년 9월 29일 북평, 인천, 그리고 판문점을 통해 물자를 부려놓았다.
TV 뉴스의 에서는 북에서 판문점을 통해 수해물자를 실고 온 북한차를 보여 주었는데, 차는 엔진이 앞쪽으로 나온 우리나라 60년대에 많이 다니던 G.M.C.같았다.
특히 그 차의 앞바퀴를 한참 비춰 줬는데, 타이어가 일본 요코하마라는 상호가 뚜렷이 나오도록 비춰 줬다.
다분히 의도적 이었다.
그리고 북한 운전사와 인터뷰도 있었다.
북한 운전사는 판에 박힌 듯 수해를 입어 힘들어 하는 남조선 동포 운운 했다.
이틀 후 수동이의 가게에는 시멘트를 실은 차가 펑크 수리를 하러 들어와서 펑크 수리를 해줬는데 북에서 보낸 수해물자를 실고 가는 중인데, 중간에서 차를 정차하면 10분 이상 세우면 안 되게 되어있어 확인서를 와 영수증을 받아 가지고 갔다.
그런가 하면 재덕이 얻어서 하는 과수원은 돈은 벌지 못하고 먹고 사는걸 해결하고 가을에는 배를 팔아서 목돈이 되면 선도지를 주고 얼마간 남은 걸로 생활을 해나갔다.
과수원 주인도 굳이 녹지로 묶여있고 매매도 되지 않는 땅이지만 언젠가는 풀리겠지 하는 심산으로 도지만 받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재덕은 배를 팔고 나서 소주 생각에 과수원을 나와서 조금 걸어서 큰길 건너서 소주 서너 병을 사서 검정 비닐에 넣어가지고 길을 건너고 있었다.
‘끼 이 익 쾅.’ 브레이크의 마찰음이 들리고 재적은 길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아이 구 아 구구 팔이야 아 구구 팔이야.”
운전자가 급히 재덕을 차에 싣는 데 보니 팔이 축 늘어지고 한 손에는 소주 병을 들고 있었다.
운전자는 서둘러 가장 가까운 성남병원 응급실로 재덕을 싣고 갔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팔뼈가 으스러진 중상이었다.
입원을 하고 기브스를 했다.
모두 놀라서 달려 왔다.
연락을 받은 수동이도 병원에 입원실에 가보니 어께에서부터 팔까지 기브스를 한 재덕이 누워있었다.
정순은 재덕이 다쳐서 병원에 실려 오면서 까지 소주병을 놓지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수동이는 간 길에 속이 쓰린 것을 진찰 받고 시메디틴이라는 제산제와 잔탁이라는 위점막 보호제를 받아왔다.
그러다 보니 정순이 혼자서는 과수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형편에 놓였다.
정순은 생각 끝에 과수원 주인을 만나 다른 사람에게 도지를 주라고 통보를 하고 복정동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정순은 병원에 상주하면서 간병을 해야 했다.
그렇데 재덕의 팔의 뼈는 붙어서 형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병원에서는 갈비뼈를 잘라다 이식을 하는 수술을 했다.
수동이는 배추를 사다가 김치를 담가서 응달진 곳에다 구덩이를 파고 커다란 플라스틱 통으로 두 개나 김치를 담갔다.
그리고 뚜껑 위로는 얼지 말라고 20mm스티로폼을 오려서 대고 묻었다
그리고 경자는 정순의 친구 명순의 중매로 오경훈과 선을 보고 혼담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고 결혼식 날이 다가 올 무렵 정자는 경자와 같이 오경훈이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사는 곳을 찾아가 보았다.
경훈은 정혼녀의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했고, 정자는 경훈이 방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에 빠르게 방을 훑어보았다.
방한 구석에 소주병과 그리고 깨어진 거울 그리고 주먹으로 맞아 쿡 들어간 종이상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자가 주사가 있구나. 아버지의 주사를 어려서부터 잘 보아 왔고 광진이 아빠인 장현을 만났을 때 손가락을 잘 살펴보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다.
장현은 당구에 미쳐서 손가락에 고무가루를 안 묻히고 오는 날이 드물고, 살아갈 걱정은 하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당구장에 살다시피 하고, 그나마 잔소리를 해서 조금 일을 다녀서 몇 푼 생기면 어김없이 당구장을 찾는다.
박력이 없어도 진수가 진국이었는데 내가 내 발등을 찍었어, 하면서 후회 한들 소용이 없고 참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경자의 결혼식 이틀 전 영자와 영철이는 돼지고기 목살을 사다가 생강과 계피를 넣고 삶아서 김장김치를 들통으로 하나를 퍼가지고 성남으로 갔다.
그날 저녁 함이 들어오고, 신랑일행이 다 돌아갔을 때, 그때까지 오지 않았던 정자가 나타나 사단을 피웠다.
이 결혼은 막아야 한다며, 내일 보낼 이불을 싼 보따리를 꺼내어 들고, 방문을 나가고 정순은 저게 미쳤다며 쫓아가서 빼앗아 오고 무슨 까닭인지 전혀 알 수 가 없는 수동이는 길거리에서 승강이 끝에 정순이 빼앗은 이불 보따리를 들어다 방에 놓았다.
그리고 정자는 사라졌고 방에 들어온 정순은 저년이 미쳤어 하면서 이불 보따리를 풀어서 흙 묻은 보자기를 털어내고 빨아 널었다.
그날 밤이 지나고 예식이 시작될 무렵 신부입장은 재운이 손을 잡고 들어갔고, 정순과 나란히 않았다.
그리고 피로연 때, 재덕이 어깨와 가슴을 기브스를 한 몸으로 왔고,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받았다.
그리고 수동이와 영자가 준비해간 김치와 목살 그리고 영동이 해가지고 온 떡 어제 만든 잡채와 전을 정순의 부탁을 받고 온 복정동 아주머니 둘과 영자가 담아서 내었다.
음식점에서는 갈비탕과 밥과 장소만 제공해 주었다.
특히 영자와 영철이 만든 목살을 땅속에 묻어두었던 김치에 싸먹으면서 맛있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렇게 84년 한해가 저물고 85년이 되었다.
그리고 설을 맞아 성남을 다녀왔더니 연탄불이란 불은 꺼지고, 모두가 냉방이 되어 있어서 번개탄에 불을 붙여서 연탄불을 피우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고 앉아 있다가 그래도 큰 방보다 수동이가 혼자 앉아서 쓰는 작은방이 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섯 식구가 수동이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화장실을 개조한 방에 자리를 잡고 않아서 방이 따듯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끄르륵 부드득 하더니 팍 하면서 보일러에서 방으로 연결한 호스 부위가 압력으로 빠지면서 뜨거운 김이 확 올라왔다.
그래도 다행히 누구하나 덴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셋방은 이불을 펴놓고 갔다 와 얼지 않아서 식구들이 모두 옮겨가서 잠을 자는 동안 수동이는 물을 끓여서 방바닥에 부어서 녹이고 빠진 호스를 다시 끼우고 조금 지나니 물이 조금씩 돌기 시작하면서 얼음이 녹으니 얼음덩어리 들이 끄르륵 끄르륵 하면서 물이 돌면서 보일러가 녹았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서 도로 보수 작업을 하는 곳이 많아 졌는데, 그 사람들이 도로에서 걷어낸 폐아스콘을 처리할 곳이 없는걸 알고 부탁해서 깊고 질은 마당에 깔았다.
그렇게 하니 일하기가 훨씬 좋았다.
그리고 정의만 씨는 휴게소 허가가 나지 않자 이번에는 남광토건에 다니는 사람과 가수 이미자의 과수원에 일을 다니던 사람들에게 세놓았던 집을 빼고 집을 개조해 가계로 만들려고 내부수리에 들어갔다.
지붕을 보강하고 벽을 허물고 전기 배선은 수동이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내 입구 조금 들어간 버드나무 아래에 숨어서 교통단속을 하던 경찰이 우연히 기름을 빼는 것을 보고 와서 허가증을 내 놓으라고 했다.
사업자 등록증을 내놓자 이것 말고 고물상허가증을 내놓으라고 해서 없다고 하니 허가를 내서 하라고 하며 다음에 오겠다고 했다.
다음날 십 만원을 주었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허가증을 확인하러 오겠다고 해서 여주고물상지회에 가서 허가증을 내다 걸었다.
그랬더니 그 순경이 다음에 들려서 지서에 무기고 준공식에 오라고 해서 십만 원을 넣어가지고, 갔더니 반갑게 맞아주며 지서장에게 은봉리타이어 수리점 사장이라고 소개를 했다.
그 이야기를 주유소 사장에게 했더니, 땅 속에 탱크를 묻으라고 했다.
그래서 1.7톤 짜리탱크를 맞추고, 펑크수리를 위해 들린 굴삭기에게 부탁을 해서 집 뒤에다 구덩이를 미리 파 놓았다.
구덩이를 파면서 보니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놋수저 깨진 게 몇 점 나왔는데 모양이 지금에 쓰는 수저와 달리 타원형으로 길게 생긴 게 녹이 검푸르게 나 있었다.
정의만의 이야기로는 휴게소를 지으려는 조그만 산이 어른들 말씀으로는 원터라고 불리는 곳으로 주막이 있어서 영남에서 한양으로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쉬어가면서 밥도 먹고 자고 가던 자리라고 했다고 했다.
근거가 맞는 것이 아마 충주에서 걸어서 하루거리에 위치하는 곳이고 서울로 가는 직선거리에 있기도 했다.
그리고 저녁에 탱크를 실어다가 밤에 묻고 드럼통 여섯 개중 네 개를 주유소로 실려 보냈다.
그리고 낮에 기름을 뺄 때에는 습관적으로 버드나무 아래부터 살펴봤다.
그리고 밤에나 낮에 아무도 없는 틈에 드럼통에 든 기름을 땅속에 있는 탱크로 옮겼다.
그렇게 해서 탱크가 차면 주유소에 전화를 해서 가져가게 했다.
그리고 영자는 돈이 조금씩 늘어나는 재미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여주경찰서 형사과에서 나왔다며 두 명이 찾아와서 다 알고 왔다고 하면서 드럼통을 흔들어 보더니 한통은 비어있고 한통은 들어있네 하면서 겁을 주었다.
할 없이 의만씨에게 이십 만원을 꾸어서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전화를 쓰겠다고 하더니 전화를 걸어 “뭐 별거 아닙니다.” 하고 보고 까지 하고 돌아갔다.
땅속에 탱크 까지 있는걸 알았으면 일이 커질 뻔 했다.
그렇게 그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올 무렵 정의만씨 에게는 뜻밖에 행운이 찾아왔다.
도청에서 시군구청장 회의가 있었는데, 용인군수가 사례발표를 하면서 국도에 농산물 직판장을 만들었는데, 물건이 성공적으로 잘 팔려서 농가소득에 이바지를 하고 있다고, 보고를 했고, 염보현 도지가가 칭찬을 하자.
“여주군수가 저의 군도 국도 변에 하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잘 만들어서 보고 하도록 하시오.”
그렇게 해서 군수가 과장회의를 할 때 농산물 직판장을 만들 장소가 없느냐고 했다.
산림과장이 은봉리 정의만씨의 야산이 국도3호선에 접하니 가장 적당한 장소가 될 것이라고 보고를 했다.
즉석에서 군수는 그렇게 추진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산림과 직원의 연락을 받은 의만은 뛸 듯이 기뻐하며 산림과를 다녀왔다.
허가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왔으니 86아시아 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국도변 공지에 화단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흙이 필요하자 산에 흙을 군에서 굴삭기와 8톤 덤프차 2대를 가져와 파내어 도로가 화단 만드는 일을 하자 정의만은 신이 나서 차 사장내 11톤 덤프와 폐로다 까지 임대를 해다가 구청에서 하는 일을 지원까지 했다.
그리고 수동이는 산 옆에 묻어 두었던 기름 탱크를 더 안쪽에 있는 연못 옆 공터로 옮겨 묻고 그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치고 스티로폼으로 내부를 마감 하고 비닐을 또 덥고 그 위에 보온 덮개를 덥고 끈으로 묶어서 마감을 하고 바닥은 연탄보일러를 설치하고, 이사를 하고 살기시작 했다.
그리고 들쥐가 무서워 경미내 집에서 암 고양이 새끼를 한 마리 얻어다 길렀다.
애들이 먹다 남긴 우유를 먹여가며 키운 지 두 달이 지나자 아무거나 잘 먹고 사람을 잘 따랐다.
그리고 쥐 잡는 연습이 필요해 산 개구리를 잡아다 앞에 놓아 주었는데, 처음엔 도망을 가더니 차츰 익숙해 지자가지고 놀기도 했다
한편으로 불도저가 투입되고 산을 깎아서 좌우에 있는 자기 소유의 논과 밭 그리고 도랑에 시멘트 흄관을 설치하고 묻었다.
그러더니 얼마 후 의양이 논과 이접해 있는 논의 임자를 설득을 해 산에서 내려오는 도랑을 그쪽으로 설치했다.
드디어 업자를 선정하게 되어서 수동이는 만석을 찾아가서 공사를 맡아서 할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못한다고 했다.
그 밤에 차를 돌려서 마치고개를 넘어오는데 빗길에 미끄러져 차가 옆으로 서는 아찔한 일이 있었으나 다행으로 그 밤에 집으로 왔다.
태평리 있는 업자를 선정해 기초공사를 하고 마당 끝에는 맨홀을 만들고, 뚜껑은 고물상에서 H빔을 사오고 수동이가 전기 용접기로 절단을 하고 용접을 해서 만들었다.
그리고 도로에서 20m 까지는 와이어 메시를 깔고 두께가 20cm 의 콘크리트 포장을 했다.
의양은 공사하는 동안은 펑크 수리를 뒤에 있는 가장자리에서 하라고 해서 뒷부분에 비닐하우스 한 동을 더 만들고 그곳에서 펑크수리를 하게 되었는데, 차가 밟아서 땅이 다져지는 것을 은근히 바랬다.
그리고 서울에서 조적 팀 최 씨 일행이 왔고, 여주일신연와에서 벽돌을 들여오고 최 씨의 소개로 알루미늄 새시를 만드는 사람을 불러다 만드는데, 기술이 부족한지 복층유리를 끼워야 하는 재료를 잘못 들려와 홈을 일일이 깎아내고 시공을 하고 드디어 거푸집을 대는데 거푸집이 모자란다고 하니 의양이 합판을 사오고 외측은 미장일을 안 하게 얄은 합판을 덧대고 철근을 깔고 배관을 하고 레미콘을 불러서 콘크리트를 쳤다.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서 세경을 주기로 하고 빈집에 기거를 하게 했는데, 레미콘 기사들이 공사장에서 콘크리트가 남으면 가지고 와서 의양은 적은 돈을 주고 마당을 조금씩 포장을 해 나갔다.
물론 수동이와 의만씨 큰아들 영걸이 작은아들 영산이가 모두 장화와 삽을 들고 쏟아놓은 레미콘을 골고루 펴고, 세경을 주기로 하고 쓴 길만이가 조금 커다란 합판에 나무 자루를 덴 것으로 콘크리트를 다졌다.
그러다 보니 한양레미콘 기사들은 현장에서 남기만 하면 가지고 와서 수동이를 찾았다.
그러면 전화를 해서 의만이 나와서 가격을 흥정해서 주었다.
레미콘이 남아서 들어올 때에는 거의 공사장 일이 끝나가는 저녁시간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의만은 결코 공사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재덕은 퇴원을 했다.
일 년 넘게 병원생활을 하고 돌아온 것 이었다.
그리고 정순과 함께 아들 수동이가 어떻게 사나 보러 왔다.
와보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비닐하우스 두 동을 지어놓고 한 동은 살림을 한 동은 가게를 한다고 하지만 밖에 컴프레샤를 놓고 진흙바닥인 차 아래를 기어들어가 작키를 뜨고 타이어를 빼내서 곡괭이질을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타이어 속의 튜브를 꺼내어 때우고 얼굴이 땀과 기름 범벅이 되어서 일을 하는 것을 보니 재덕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이 진작 노가다가 지겨워 설비공사를 하던 사장이 사람을 구할 때 배관을 배우라고 할 걸 하고 후회도 되었다.
자동차 정비가 저 녀석의 직업이 맞는다면 진즉 배터리 가게에 있을 때 형님에게 보리쌀이라도 보내서 더 배우게 할 걸 하고 후회도 했지만 정순은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을 활짝 피고 즐거운 모습이다.
그리고 물을 받아서 얼굴을 씻어보고는
“아이고 물이 매끈매끈 한 게 좋은데.”
를 연발하며 그 옛날 황골 느티나무 아래 논배미에 나선 샘물 구덩이를 회상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재덕은 애면글면 살아가는 수동이가 안타까워 하룻밤도 자지 않고 금방 돌아갔다.
성남으로 올라온 재덕과 정순의 현실은 당장 정순이 일을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아내 정순이 열심히 일을 나가는 것이 고마워 정겹게 지냈다.
그러나 가장과 주부의 위치가 변하고 보니 정순이 술이 얼큰해 돌아오는 때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담하게 외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밤이면 재덕은 속을 끓이며 다음날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일이 많아서 그렇다는 핑계나 광진네서 자고 왔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정자도 일정한 직업이 없어 빌빌 거리는 광진이 대신 시장에서 뭔가 해보겠다고 장사도 해 봤지만 광진은 여전히 돈만 조금 생기면 손에 고무 가루를 묻히고 들어왔다.
이황리에는 육군 교도소가 들어온다고 공사를 시작해서 그레이더나 페로다가 펑크를 때우러 자주 왔다.
운전병들은 돈이 없다고, 나감해 해서 경유를 받고 펑크수리를 해주니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절토를 한 공사장 배수로 맨홀에는 꼬리를 까부는 할미새 한 쌍이 들락거리고 있어서 보니 둥지가 있고 새끼 다섯 마리가 입을 벌리고 먹을 것을 달라고 찍찍 거리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낙비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다.
수동이는 급히 공사장 흙물이 도로로 나가지 않게 막으러 다니고 흙이 무너져 논배미로 들어가지 않게 비를 맞아가며 물고를 보러 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하우스에 누어서 다리를 하우스 대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뻔쩍하며 온몸이 오그려 드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첫댓글 희상을 버리고 택한 정순과의 갈등,가난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보기에는 재덕의 고통이 너무 크네요.
그리고 영동이의 중제와 타이밍
소설은 끝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재밋게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