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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의의 확장
세번째 글은 비잔티움 공화국론이라는 새로운 담론을 보다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13~4세기의 위기를 재해석하는 공간이 되겠습니다. 필자가 세미나 당일에는 Kaldellis의 무정부적 공화국론과 Polybius의 혼합정적 공화국 모델을 가지고서 장단점을 확인해보고, 여기서 나아가 Marie Theres Fogen 선생의 관료제 모델을 절충 적용한 관료제적 공화국 모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내용까지 포함하게 되면 내용도 흐트러지고 무엇보다도 두번째 글과 같이 1만 7천자나 되는 글이 쓰일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부득이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3~4세기의 위기는 대체로 두 가지의 사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미하일 8세로부터 안드로니코스 2세 초기(1261~1310)의 약 50여년간 벌어졌던 아르세니오스 분열이고 다른 하나가 제 2차 시민전쟁(1341-1349)입니다. 두 분열은 모두 팔레올로고스 통치시대에 벌어진 일들인데 사실 이 모두가 팔레올로고스 통치의 양식과 무관한 일이 아닌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살펴볼까요?
1. 아르세니오스 분열
1258년 8월 18일. 라스카리스 가문의 황제였던 쎄오도로스 2세(1254-1258)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가운데, 니케아의 황제위는 겨우 8살이던 요안니스 4세(1258-1261)에게 돌아갔습니다. 쎄오도로스는 자신이 중용한 평범한 가문들에게 아들의 섭정을 맡기고자 했고, 이에 따라 그다지 큰 명망은 없었던 요르고스 무잘론이란 사람에게 섭정을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귀족에 대한 반감으로 대표되는 쎄오도로스 2세의 정책은 군사 및 행정관료의 수장층을 차지하고 있던 귀족들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8월 27일,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진행되던 선황제 장례식날 귀족들이 단체로 정변을 일으켜 무잘론 섭정을 살해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직후, 역모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었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석방됩니다. 미하일은 얼마 뒤, 귀족들의 표결을 통해 요안니스 4세의 섭정으로 추대되었으며 마그니시아에 있던 제국의 재무성을 장악합니다. 당시 재무성에는 요안니스 3세 때부터 축적된 막대한 자금이 쌓여 있었습니다. 아직 지지층이 튼튼하지 못했던 미하일은 이 자금과 제국 소유의 토지들을 귀족들에게 대거 분할해주는 조치를 통해 지지를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지지층을 확보한 가운데 1258년 12월, 미하일은 섭정의 명의로 공동황제의 지위에까지 올라 국정을 주도하게 됩니다.
물론 1259~1261년의 기간에 미하일의 통치 자체에 대해서 본격적인 불만이 전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1261년 8월 15일, 미하일 8세(1258~1282)가 요안니스 4세를 버려두고 콘스탄티노플로 환도한 이후로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미하일은 라스카리스 황실을 숙청하고 자신의 통치를 굳히기 위해 크리스마스(1262년 1월 초)에 요안니스의 두 눈을 뽑고 유폐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섭정을 위임받은 황제에 대한 방임과 공격은 즉각적인 반격을 불러왔습니다. 1261년 12월, 니케아 시 외곽에 위치한 트리코키아(Trikokkia) 요새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정부군이 즉각 개입하여 회유책을 전개하니 반란 주민들이 일부는 투항하고 나머지는 튀르크족에게로 도망을 치면서 일단 사건은 잠잠해졌지만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사건은 순식간에 중앙정계로도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아르세니오스 아브토리아노스(1200~1273)는 미하일 8세를 파문하였으며 교회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봉쇄해버렸습니다. 미하일은 그러나 공격일변도로 나와 아르세니오스 총대주교가 라스카리스의 일당과 협력한다는 참언을 근거로 총대주교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약 3년간 정쟁이 잇따른 뒤에야 1265년, 겨우 종교회의를 통해 아르세니오스가 해임되고 유배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 내부, 특히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와 지역 교구들은 몹시 들끓었습니다. 후임인 게르마노스 3세(1266)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물러나야 했고, 마지막으로 요시포스가 취임 석달만인 1267년 2월에 겨우 황제의 파문을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앙정계가 파국을 헤쳐나가는 동안, 사회 전반적으로 불신과 음모가 극적으로 확대되어갔습니다. 이미 1265년엔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를 살해하려 하는 음모가 발각되어 발칵 뒤집히기도 했으며 소아시아에서는 대놓고 제국을 부정하고 튀르크인들과 합세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대다수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지역 사회의 사기가 현저히 떨어진 것은 분명했습니다.
여기에 1273년부터는 동서교회 통합 문제를 정부가 어거지로 추진하는 바람에 그나마 분열하지 않고 있던 나머지 사회도 통합파와 정통파로 나뉘어 각축을 벌이게 되니 국내의 정계는 혼란의 연속에 처합니다. 1282년에 미하일 8세가 죽은 뒤, 통합문제로 인한 분열은 끝났지만 아르세니오스 파는 1305~6년, 오스만 튀르크에 의한 니케아 제국 중심부 공략 이후로 쇠퇴하여 1310년에 대통합에 동의할 때까지 계속해서 분열을 이어나갔습니다.
아르세니오스 파의 최후
비티니아 지역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아르세니오스파도 의지를 대거 상실했다.
결국 1310년에 총대주교 니폰의 중재를 받아들여 50년만에 대통합을 이루었다.
아르세니오스 분열이 특기할 만한 점은, 이 분열이 단순히 지배계층 내에서의 세력 싸움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수도사, 농민, 노동자에서부터 위로는 황제의 외사촌에 이르기까지 쉽게 범주화할 수 있는 유형이 아닌 대단히 복잡한 형태로 사회 전반에 걸쳐 전개되었던 분열이었습니다. 더욱이 팔레올로고스 조는 이전 황실인 라스카리스를 지방 정권으로 격하하고 아예 그 역사를 기록하지도 않는 '망각' 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아르세니오스 파는 요안니스 3세의 통치를 50년 동안 기억 속에 남기면서 끝까지 투쟁을 일구었습니다.
이렇듯 아르세니오스 분열과 같은 대사건이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잔티움에서 출현이 가능했던 것은 전반적으로 제국 정부가 여론을 통제할 수 있는 선전체제를 잃고 있었던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콤니노스 조 시절에는 무려 4대 계승을 실현하는 가운데 불만이 일기도 하였습니다만, 주요 고등교육을 정부가 통제하고 있었고 자유로운 정치사상 담론 형성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4차 십자군 이후 중앙의 통제가 무너진 가운데 원래는 주변부였던 각 지역에서도 고등교육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담론의 논의는 보다 자유로워졌습니다. 쎄오도로스 2세의 스승인 니키포로스 블렘미디스(1197~1272)가 강력한 황제권을 주장하는 쎄오도로스에 맞서 황제가 제국의 재정을 잘 관리하는 공직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내세울 정도였습니다.
- 황제(이사키오스 2세)께서는 제위의 '합법적 계승자'가 아니셨으므로 이를 칭송할만 합니다. 비합법적으로 직위를 획득함으로써 가문을 명예롭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제위의 계승은 더 이상 단일한 가문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 니키타스 코니아티스(1155~1216)
- 부끄러운 사람들은 황실의 혈통을 뽑냅니다만, 계보라는 것은 황제 공직을 주장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 니콜라스 카바실라스(1355)
미하일 8세는 섭정 즉위 당시 귀족들의 투표로 얻은 정당성을 일종의 '선거 왕정'적인 개념으로 선전하였으며 미하일 8세와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에 궁정에서는 이러한 '선거 왕정' 이념에 의거해 팔레올로고스의 통치를 옹호하는 연설들이 난무하곤 했습니다. 문제는 일반 대중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이죠. 팔레올로고스 가문에 대한 적대감은 이후 1292~1300년 사이에 걸쳐 소아시아에서 방위전략을 놓고 벌어진 촌극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아시아는 결국 튀르크족들에 의해 함몰되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공화제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냐고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결국 '통치 계약 해지'의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팔레올로고스 치하의 비잔티움 제국은 급격하게 혈연적 관계에 의한 지배라는 관념이 도입되어 갔으며 이에 대한 반발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14세기 중반에 살았던 펠라고니아의 요르고스는 대놓고 돌직구를 던집니다.
요르고스가 팔레올로고스의 황제들을 대놓고 '얼간이'라고 공격하던 것과 유사하게, 역사가이자 관료인 파히메리스(1242~1308)나 요르고스 아크로폴리티스 등은 독자적으로 라스카리스의 업적을 일부나마 기록하고 그 관점에서 팔레올로고스의 정책을 비난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부의 이념 통제와 어긋나는 행보를 보여줍니다.
1304~6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이 위기가 결정적인 단계로 치달아, 비티니아 전역에서 특별세에 항의하며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였고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아르세니오스 계열 수도사들이 안드로니코스 2세 암살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하고 비밀암구호를 짜는 등 많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에서도 팔레올로고스 통치를 부정하는 팜플렛이 두 차례에 걸쳐 배부되고 대규모 반황제 봉기가 발생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급기야 다급해진 황제가 군대를 불러오고 모든 시민들에게 일일이 충성맹세를 강제로 요구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일개 학생이 그것에 항의하고 투옥되는가 하면 적지 않은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관료층과 지식인층에선 1307년이 되자 아예 명목상 라틴황제인 유능한 발루아의 샤를에게 제위에 올라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팔레올로고스 조가 통치 양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만큼 역시 저항도 엄청났으며, 이것이 기본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말기를 불운하게 만든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2차 시민전쟁기 (1341-1349)
1310년에 국가적 위기가 심각해지고 아르세니오스 파의 본진인 구 니케아 제국령이 몰락함에 따라 아르세니오스 분열은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드로니코스 2세의 후반기 통치(1310-1328)가 안정적이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권위는 날이 갈수록 약화되었으며 지방도시에 대한 통제도 불안정했습니다. 황제가 금인칙서로 먼 지방도시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신경을 꺼야했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안드로니코스 2세의 전반적인 인기가 형편없었던 까닭에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가 감세 정책 등을 기반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정권이 순식간에 흔들리게 됩니다.
1328년에 들어선 신정부는 대외정책, 대내정책을 재검토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 일단의 혼란을 수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신정부는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 그들을 주로 수장층 관료로 임용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특히 그 중심은 총리대신 요안니스(훗날의 요안니스 6세)였는데 그 자신의 막대한 부로도 인해 그는 자연스레 서서히 증가하는 사회적 압력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인구팽창이 정체상태에 이르고 혼란을 막 수습한 상태의 당시 비잔티움 사회에서는 내적으로 시민의 역할을 하는 중산층들이 경제적 문제로 인해 쇠퇴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자연스레 과도한 세금을 거두는 정부와 더 나아가 그 정부를 지지하고 움직이는 귀족에게로 맞추어집니다. '팔레올로고스 체제'가 다시 위기를 맞은 것이지요.
사례 1에서 보이는 알렉시오스 마크렘볼리티스는 요안니스 6세 정권에서 장관직을 지냈습니다만, 그 자신의 책인 '빈자와 부자의 대화'(1343년작)를 통해 그는 당시 사회 전반에 만연한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비난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시 여러 저자들을 통해서 확인이 되며,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노동자들도 그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가령 1341년 9월, 해군총사령관이었던 아포카브코스는 요안니스 6세를 공격하면서 그가 시민의 권리를 무시하였으며 그 일당이 시민의 부를 착취한다고 명분을 댑니다. 그리고 1341년 10월 27일, 요안니스 6세가 기어코 자신의 대관을 강행하자 시민들이 그를 비난하는 것을 넘어 일용노동자 세 명의 선동에 호응하여 대규모 봉기에 가담합니다.
바로 장장 9년간 비잔티움 제국 각지를 격렬한 도시공화국들과 무정부 영역으로 나누어놓을 제2차 시민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요안니스 6세가 간신히 진압하였습니다만 이때를 기점으로 유럽의 비잔티움 사회들도 철저하게 무너진 가운데 튀르크의 침공이 시작되자 맥을 추리지도 못한 채 괴멸되고 맙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중앙정부가 행사하던 막강한 권력에도 원인이 있었습니다. 정부는 국가의 위기가 심각해지자 점점 봉토로서 귀족들에게 내어주었던 토지마저도 법적 근거조차 없이 국고로 환수시켰으며 수도원 토지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 절차의 정당성이었고 또한 자발성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불과 22세였던 니콜라스 카바실라스는 수도원 토지가 제2차 시민전쟁 와중에 정부의 멋대로 침탈되고 매각되는 등의 문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면서 인간의 '자유' 문제를 제기합니다.
인간의 모든 소유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자유가 없어서야 어찌 정부의 형태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 선량한 행정관들이 항상 자기 국민들에게 정의의 체제 내에서 자유와 내외적 안전을 제공하는데 분투해왔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카바실라스 등의 논조는 수도원 토지 문제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시민 대중의 항거와 연관짓기에는 무리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관료제적 공화국 모델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법적인 근거 없이 무단통치를 행사하는데 대해서 부정적인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공격이 나왔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가 안보를 이유로 시민들의 부를 쥐어 짜면서도 귀족에 대해서는 미온적으로 대하는 점은 이러한 불만을 더 강화시켰습니다. 1384~1387년 사이에 진행되었던 쎄살로니키 포위전 당시에도 이러한 문제가 방어측의 사기를 더 저하시킨 예가 존재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더욱 신빙성이 높습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비잔티움 제국 자체는 니케아 망명기를 거치면서 공화제적인 정부모델의 정상적 형태를 많이 상실한 상태로 13세기와 14세기를 보냈습니다. 그 와중에 정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주민들의 이탈, 봉기 등으로 비잔티움 세계 자체는 지속적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과정에서도 공화제적 형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도시 차원에서는 민회가 -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에서도 1306년 전체 민회가 열렸습니다 - 유지되었으며, 지식인들이 번성하던 14세기 중반까지 황실에 적대하면서도 투쟁을 이어가는 사상가들이 배출되었습니다.
1452~3년, 동서교회통합 논의 과정 중 시민위원회, 귀족위원회가 세워져 회의를 열고, 포위전 과정에서 위원회를 조직하여 식량배급의 임무를 맡기는 일을 마지막으로 비잔티움-로마도, 그 공화제스러운 전통도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사실상 14세기 중반 이후로는 형해화되어 도시국가 수준이 되었기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겠습니다만은.
이때까지의 글을 통해서 비잔티움 제국이, 아니 더 나아가 로마 제국이 공화제적 질서는 물론이거니와 실제로도 그러한 정신을 기저에 포함하고 있는 상부구조로 자리하고 있었음을 살펴봤습니다. 물론 이는 아주아주 기초적인 시작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입론 단계에 불과하고 보다 엄밀한 논의와 검토가 잇따라야할 것입니다. 다만, 이를 통해서 한 사회를 움직이는 이념과 정치질서와 무관하게,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국가의 관료제화라는 현상이 중세에서 실재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공화주의의 맥락을 이어받았으나 통일된 하나의 영토국가, 총체적 국가라는 측면을 결여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도시공화국들과 구분되는 측면이라 하겠습니다.
첫댓글 결국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찬탈이 제국의 붕괴를 가져왔군요.
미카일 본인은 스스로 잘 해낼 수 있다 여겼고 당대엔 외교에서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제국의 분열에 대한 치명적인 원인이 된 셈이니... 만일 라스카리스가 그대로 이어져 왔다면 역사가 조금은 달라졌을까요?
라스카리스 체제 역시 니케아 망명기 시절에 대폭 강화된 귀족들과 맞닥뜨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예전 전통으로 회귀할 수는 없었겠습니다만, 1천년을 통틀어 가장 사기적인 요안니스 3세(1221-1254)가 대부분의 업적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미하일 8세가 무리한 정적 제거방식을 사용하지만 않았어도 훨씬 사태는 나았을 겁니다. 정말 악독한 짓을 저지르거나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려고 바득바득하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그냥 수도원에 퇴진만 시켜도 나았을 거구요. 파편화된 '가문' 중심의 판단이 결국 공연한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어...이거 물의백작님 글인데.... 혹시 물의 백작님 닉 바꾸신건가요?
성녀님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