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리 방조어부림
간밤 지족대교 가까운 펜션에서 대학 동기들과 함께 보냈다. 장어구이 전문점에서 멸치회와 조림으로 남해 향토 음식을 맛봤다. “섬과 섬 좁은 물길 갯벌에 말뚝 세워 / 옴팍한 테를 엮어 해협을 지킨 통발 // 은비늘 그대로 살려 건져서도 빛나다 // 바닷속 유영하는 잘디잔 멸치 떼가 / 그물에 걸려드나 갇히긴 마찬가지 / 이왕에 보시하는 몸 / 온전하게 바치리” ‘죽방멸치’ 전문.
잠들기 전 앞 단락 시조를 엮어두고 객지에서 잠을 깬 새벽 3시였다. 날짜 변경선을 넘겨 잔을 기울였을 동기들은 빈 병을 그대로 두고 거실 바닥 잠들었다. 나는 실내등을 켜지 않은 채 옷을 챙겨 입고 어둠 속에 현관을 나섰다. 거리에는 간간이 외등을 켜둔 채 오가는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자동찻길로 나가니 노량 바다와 남해읍 방향으로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불빛이 반짝였다.
이동면으로 가던 길에서 되돌아와 어제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던 지족항으로 향했다. 편의점이나 피시방이라도 있으면 워드 작업이 가능한지 여쭈어 전날 여정을 기록으로 몇 줄 남기고 싶었으나 그럴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어촌 파출소 긴급 호출 벨을 눌러 경찰관 도움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다. 일기를 남기지 못한 답답함은 참아 누르고 어둠 속 해안로로 산책을 나섰다.
해안로는 외등을 밝혀두지 않아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 나아갔다. 죽방렴이 설치된 지족해협은 사리 물때라 갯벌은 수위가 낮아져서 게들이 기어 나와 스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안 산책로는 남파랑길 남해 지족에서 미조 구간 전도마을 가는 길이었다. 전도마을까지 가질 않고 되돌아오니 현지인으로 새벽 산책 나온 부부를 만나 죽방렴 관람대를 소개받고 데크를 따라 같이 걸었다.
워낙 이른 시간 산책을 나와 어둠이 쉬 사라지 않을 기미라 가까이 다가간 죽방렴 내부를 들여다볼 기회는 갖지 못했다. 죽방렴은 연중 주로 멸치가 가두어지고 일부 잡어도 든다고 했다. 어촌계에서 운영하지 않고 부동산처럼 등기부 등재되어 사고팔기도 하고, 목이 좋은가 여부에 따라 어획량에서 차이가 난다면서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현지에서는 소중한 관광자원이라고 했다.
지족항에서 어제 차량으로 지나온 지족대교를 걸어서 건너면서 일출 기운과 함께 죽방렴을 다시 한번 살펴봤다. 남해읍과 망운산으로는 안개가 피어올랐다. 지족대교에서 ‘해 뜨는 펜션’ 숙소로 돌아오니 친구들은 하나둘 잠을 깨 자리를 정리했다. 친구들보다 먼저 샤워를 끝냈더니 몸은 가볍고 시원함이 더했다. 아침 식사가 예약된 식당으로 갔더니 주방에서는 갈치 내음이 풍겼다.
숙소 맞은편 갈치 요리 전문점에서 구이와 찌개를 곁들인 아침상을 받았다. 연전에는 동기와 모임을 가진 이튿날이면 운전대에서 자유로운 나는 늘 해장 술잔을 비웠는데 이제 술을 끊어 전설로 남겼다. 어제저녁 장어와 멸치 밥상도 좋았지만 갈치 요리도 일품이었다. 자리를 주선하는 총무의 혜안과 배려에 일행은 모두 감사했다. 식후 여장을 꾸려 다음 행선지인 독일마을로 향했다.
우리가 청년기를 맞을 때 앞선 세대 고학력자는 석탄을 캐러 독일로 떠났고 같은 시기 간호사도 나갔다. 그들의 신산한 삶은 한 개인 가족사 이전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장면이기도 했다.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그들 가운데 귀국한 분들이 정착한 독일마을을 찾아 박물관 전시물을 둘러보니 콧등이 시큰했다. 독일마을에서 물건리로 내려가 방조어부림 숲을 거닐면서 잠시 더위를 잊었다.
이어 미조항에서 가까운 설리 스카이워크에 들렀으나 나는 고소 공포로 쳐다만 봤다. 물밀면 맛집에서 점심을 먹은 귀로에 ‘물건리 방조어부림’을 남겼다. “뒷동산 산비알은 이국풍 독일마을 / 파도가 출렁거려 원호를 긋는 포구 / 절벽은 해식에 깎여 몽돌되어 깔렸다 // 팽나무 푸조나무 우거진 활엽수림 / 바람은 잠재우고 물고기 유도해서 / 고깃배 만선 이루려 나이테를 둘렀다” 24.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