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면 동별 지명유래
본래 예천군 지역으로서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보문면이라 하여 마촌, 옥천, 어등, 지과, 기동, 독죽, 진양, 평고, 문래, 우평, 산성, 신운, 오류, 수양, 쌍계, 점리, 작평, 읍곡, 문암, 오적의 20개 동을 관할하다가,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승도면의 간곡, 이방, 미호, 본동, 동막, 편월, 신탄, 벌곡, 고평의 9개 동리와 동읍면의 통명동 일부와 감천면의 장산동 일부와 안동군 북후면 석탑동을 병합하여 마촌, 옥천, 독양, 기곡, 우래, 산성, 작곡, 오암, 간방, 미호, 승본, 신월, 고평의 15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84년에 고평동을 예천읍으로, 1986년에 마촌동을 감천면으로 이관시켜 13개 동이 되고 동쪽은 안동시 북후면, 남쪽은 호명면과 안동시 풍산읍, 서쪽은 예천읍, 북쪽은 감천면과 영주시 장수면, 문수면에 닿고 있다.
간방동(澗芳洞)
- 원래는 예천군 승도면의 지역인데 간곡, 이방동과 보문면의 마촌동 일부와 감천면의 덕율동 일부를 병합하여 간곡과 이방의 이름을 따서 간방동이라고 하였다.
- 간 실 : 간방동에서 으뜸 되는 마을.
- 간초정 : 간실 옆에 있는 정자
- 고은정 : 간실 동북쪽에 있는 정자. 박고은의 자손들이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으며 못을 파서 큰 바위를 천연적 섬으로 만들고 그 바위 위에 유모비를 세웠음
- 골 마 : 간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 꼭두바우 : 꼭두바우가 있는 마을
- 덕거리 : 문고개 동남쪽에 있는 마을
- 문고개 : 문고개가 있는 마을
- 일 방 : 문고개 남동쪽에 있는 마을. 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며 경북선 철도의 보문역이 있다.
- 웃일방 : 일방 위쪽에 있는 마을
- 탑 동 : 간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
기곡동(基谷洞)
- 본래 예천군 보문면의 지역이었으며 마을의 옛 터가 있었으므로 텃골, 또는 기곡, 기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간은, 대율곡을 합하여 기곡동이라 하였다.
- 간 은 : 한밤실 서쪽에 있는 마을, 임씨가 살면서, 수풀은 냇가에서 잘된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지었다.
- 느룸실 : 잔늠 동쪽에 있는 마을, 느릅나무가 많다.
- 대밭골(대율곡) : 간은 동남쪽에 있는 마을. 대밭이 있었다.
- 뒷 골 : 간은 뒤에 있는 마을.
- 잔 늠(잔내기) : 간은 동쪽에 있는 마을.
- 텃 골 : 기곡동
- 한밤실 : 기곡동에서 가장 큰 마을. 사방으로 높은 산이 둘려있다.
독양동(篤陽洞)
- 독죽동, 진양동(지예이), 평고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독죽과 진양의 이름을 따서 독양동이라 한다.
- 거먹골 : 평장개 동남쪽에 있는 마을.
- 계옹정 : 평장개에 있는 정자. 효종 때 진사 장지걸이 세웠다.
- 독 죽 : 막실 서쪽에 있는 마을. 소가 죽을 먹는 형국이라고 한다.
- 막 실 : 독양동에서 가장 큰 마을. 굴막이 있었다.
- 평장개 : 막실 서쪽에 있는 마을.
미호동(眉湖洞)
- 본래 승도면 지역으로서 내성천이 마을 앞을 둘러서 눈썹처럼 되었으므로 미흘 또는 미호라 하는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미호동이라 하여 보문면의 중심으로서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등이 있다.
- 남하정 : 미호동 남쪽에 있는 정자. 김해 김씨가 세웠다.
- 동짝마 : 미흘 동쪽에 있는 마을.
- 별 묘 : 동짝마에 있는 사당. 별동 윤상의 신주를 모셨다. 윤상은 그 아버지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옛 무덤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그 무덤 주인이 학 한 마리를 주는 꿈을 꾸고 윤상을 낳았는데, 어찌 자상하던지 예천통인으로 있을 때 틈틈이 관솔을 모아 두었다가 밤 늦도록 글을 읽고, 원이 캄캄한 밤중에 대야를 문 위에 놓고서 문을 닫으라 하였는데, 윤상이 그 대야를 손으로 옮겨 놓고 닫았으므로 원이 크게 칭찬하고 나라에 천거하여 벼슬에 예문 직제학에 올라서 명망을 세상에 떨쳤음.
- 청심대 : 미흘 동쪽등성이에 있는 정자. 직제학 윤상이 세웠는데, 뒤에는 산이 수려하고 앞에는 내성천의 맑은 물이 흘러서, 이 정자에 오르면 마음이 맑아지고 정신이 쾌락하여진다고 한다.
- 표절사 : 서짝마에 있는 사당. 김저, 김전, 김두 등을 배향하였다.
- 율은 김 저
우왕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최영을 따라 오랫동안 군사에 종사하였다. 1389년에 최영의 측근인 전부령(前副令)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여주에 가서 폐위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李成桂)를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와서 곽충보(郭忠輔)와 모의하여 팔관일(八關日)에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그 사실을 밀고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가 팔관회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 있자, 정득후와 함께 이성계의 집으로 잠입하였다가 문객에게 잡혀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고, 다시 창왕(昌王)도 폐위되어 강화로 추방되었다. 그해 11월 옥에서 죽으므로 그 시체를 저자에서 베었다. 그리고 김저의 모의에 가담한 문하평리 정지(鄭地) 등 27인은 유배되었다. 김저가 죽자 머리위에 새 한마리가 고려충이라고 하였
다고 하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이성계도 충신을 알아보는 새라고 하여 지충새라고 하였다고한다.
산성동(山城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