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인
왕수인 王守仁, 호:양명(陽明), 자:백안(伯安), 시호:(文成), 1472년 ~ 1528년)은 중국명나라 시대의 철학자·정치가·군인으로 호 양명을 따서 왕양명(王陽明)이라고도 한다. 자는 백안(伯安)이며 시(諡)는 문성(文成)이고, 원래 이름은 왕운(王雲)이었으나 나중에 수인으로 고쳤다. 양명학을 주장했다. 여요(餘姚-현재의 저장 성에 속함) 출신으로 부친은 화(華)라고 한다.
생애
1481년 진사(進士) 제1인에 급제하였고, 관(官)은 남경(南京)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15세에 조정에 들어가 치안에 대한 방책을 건의하였으며, 자주 반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출생 이래로 선병질(腺病質)이어서 청년기에 벌써 폐병으로 피를 토한 일도 있다. 혼미와 번민의 원인은 이 병과 주자학에서 설명되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이 아무리 하여도 납득되지 않는 점에 그 원인이 있었다. 주자의 이(理)는 사사물물(事事物物)에 즉하여 궁구해야 할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때는 뜰의 대나무를 잘라 대의 이치를 파악하려고 한 나머지 병이 나기도 하였고, 또 어느 때는 주자의 독서법을 읽음으로써 그대로 성현(聖賢)의 유교(遺敎)를 읽었으나 도리를 얻지 못하여 신경쇠약에 빠지기도 하였다. 자신은 도저히 성인(聖人)이 될 만한 그릇이 못된다는 체념이 ‘오익(五溺)’(任俠·騎射·辭章·神仙·佛敎의 傳習)에 빠지게 하였다고 한다.
35세 때에 중앙정부에 비판적인 정치논문을 상주하여 환관 유근(劉瑾)의 노여움을 삼으로써 귀주(貴州) 용장(龍場-현재의 貴州에 속함)에 유배되었다. 산악부족 속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실의(失意)의 양명(陽明)은 여기서 본래의 깨달음을 얻었다. “성인(聖人)의 도(道)는 나의 성(性)에 구비되고 있다. 지난번에 이(理)를 사물에서 구한 것은 오류였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理)가 사물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에 있다. ‘심즉리(心卽理)’의 설이 여기서 확립되어 마침내 양명 사상(陽明思想)의 근간이 되었다. 왕수인의 이 큰 깨달음을 그곳 이름을 따 ‘용장의 대오(大悟)’라 하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양명학이 탄생한다. 심즉리라고 하는 것은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라는 뜻이 아니고, 마음의 발동이 항상 이(理)의 경지를 뜻하는 실천적인 개념인 것이다. 주자가 이(理)와 심(心)을 나누어 전자를 형이상적, 후자를 형이하의 음양이라고 한 말과는 크게 다르다. 나의 마음이 발동이 항상 이(理)라고 하는 것은 효(孝)를 아는 것과 효를 행하는 것이 나누어져 둘인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지(知)와 행(行)이 합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하여 양명이 치지격물(致知格物)을 말한 것도 '양지(良知)를 치(致)한다-치양지(致良知)'라고 한 것도, 요는 마음의 본체로서의 양지 그것으로 되는 경지를 말한 것이다. 양명의 사상은 행위하는 주체가 항상 이(理)의 체현자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사후, 그의 사상은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어 실천하는 주체를 소홀히 하는 관념적·공상적인 이론으로 흘렀는가 하면, 착실한 면학수양(勉學修養)을 경시하는 풍조까지 빚어냈다. 그러나 명대의 사조는 양명 사상의 전개(우파와 좌파로 나누어진다)에서 개성이 발휘된 것도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다. 한국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의 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1]
전습록
《전습록(傳習錄)》은 왕수인의 제학설과 교계(敎戒)·서간 등을 그 제자들이 편집한 것이다. 전습(傳習)이라고 한 말은 《논어(論語)》 〈학이(學而)〉 제1의 ‘전(傳)한 바를 익혔(習)는가’에서 나온 것이다. 즉 이 명칭은 양명에게서 전수된 학문을 자신이 잘 체득 습숙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스스로 반성하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전습록》은 보통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 38권 중의 처음 3권에 수록되어 있으나, 《전습록》만을 간본(刊本)으로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양명 사상(陽明思想)을 파악하는 데는 <왕문성공전서> 전체를 숙지해야겠지만 《전습록》을 정성껏 읽으면 그의 사상은 대체로 이해된다.[1]
왕양명의 사상에서 주도동기(主導動機)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심정에 대한 신뢰의 정조이다. 주자학에의 회의에서 출발한 그의 사상도 사상의 전체적 구상, 즉 사상의 범주라는 점에서는 도달한 최종단계에서조차 주자의 사상에서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왕양명이 주자학과는 다른 심학의 대성자, 양명학의 시조로 숭앙받은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양자의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의 경우는 분석적이며 왕양명의 경우는 직관적이었다. 주자는 인간의 마음을 성(性<本性>:理)과 정(情:현실의 마음의 작용)으로 나누고, 정은 성(性)을 현혹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서 성(理)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을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현실의 인간 심정은 마이너스로 평가되고 있다. 왕양명은 그것을 플러스로 평가한다.
인간(人間)의 자연적 심정에는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심정에 의거하여 행동한다면 성(理)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지라는 것은 <맹자>의 "깊은 궁리를 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양지이다. 2, 3세의 어린이도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라는 글에서 볼 수 있는 말이며 왕양명은 그것을 하늘(天)이며, 천리(天理)인 동시에 인간의 마음의 본체로서 시비선악의 판단을 갖추고 더구나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사려(思慮) 이전의 것, 자연스런 것, 오늘날의 말로 한다면 '양심'에 가까운 것으로서 받아 들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연의 심정 그대로 양심에 따라 살 것을 주장하며, 이는 주자의 실천론에 비하면 자유로운 해방감이 수반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