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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살해
설을 앞둔 최참판댁은 앞뒤가 분주했다. 특히 부엌을 중심한 곳이 들었다. 귀녀와 삼월이는 사랑과 안방의 시중, 그리고 봉순이가 곁에 있기는 하나 별당의 서희도 돌보아야겠기에 바깥 일에는 참여 못했고, 김서방댁과 남이 연이 여치네 드난꾼들과 마을의 여러 아낙들까지 불러들여 벌써 여러 날 전부터 연이네의 지시 아래 부산을 떨고 있었다. 큰 가마솥에 안친 다섯 말들이 시루에서 연달아 쪄낸 술밥 엿밥은 이미 담그고 고고 하여 술은 익고 있었으며 엿은 사기마다 퍼내어 여기저기 찬마루에 널려 있었다. 고방에서는 곶감이다 대추다 밤에서 잣 호두 은행, 가을에 장만한 호박오가리 정과 거리를 꺼내놓고 우물가에는 새앙이 무덤같이 그득히 담겨진 소쿠리가 두 개나 있었다. 여치네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벌개진 팔뚝을 휘두르며 깨를 씻고 있다. 그 깨의 분량은 농가에서 담그는 떡쌀보다 많았다. 한켠에서는 산적거리 생선포를 뜨고 있었으며 햇볕이 바른 행랑 뜰에는 멍석에 아낙들이 둘러앉아 잡담을 하며 제기를 닦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쌓인 것은 음식요, 발에 채는 것은 일거리였다. 마을 아낙들은 그 많은 먹을 것을 보며 집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을 했고 울타리 밖에서는 기웃기웃 안을 들여다보며 제 어미가 행여 지에밥이라도 뭉쳐서 한덩이 내주지 않을까 손가락을 물고 섰는 아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낙들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어미 찾아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고 그래도 철부지가 따라나서면 길가 돌을 주워,
"이눔 자식! 집에 못 가겄나!"
하며 위협을 했으니 문밖에 아이들이 와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어미 치마 꼬리를 잡고 흥얼거리는 임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임이네는 집에 못 가겠느냐고 나무라기는 했으나 건성으로 하는 말이었고 감주를 만들려고 막 찌어서 내놓은 지에밥을 슬쩍 집어서 손바닥을 호호 불어가며 뭉쳐서 아이에게 주기도 하고 남의 눈치 보아가며 밤이랑 대추를 집어주기도 했다.
"새끼 버릇도 더럽게 딜인다. 일질에 아아는 머할라고 데리고 오노."
산적을 장만하던 김서방댁이 지껄이며 혀를 찼으나 임이네는 그때만은 귀거리 흉내를 냈다. 한편 봉순네는 여러 날 밤을 새가며 지은 설빔을 챙기느라 바빴다. 이에는 임이네와 두만네가 바느질을 거들어주었으나 함안댁이 빠졌기 때문에 일은 좀 더딘 편이었다. 그러나 이럭저럭 끝막음은 했으며 동정이나 속고름 다는 것이 더러 남았을 뿐이다. 두만네는 아무래도 시어머니 병세가 수상쩍다 하며 일이 끝나자 이내 돌아갔고 임이네는 드난꾼들 속에 끼여 바깥일을 모두 시원시원 해내고 있었다. 섣달 그믐날, 이른바 아이들에게는 까치설날이었다. 서희는 까치저고리에 오색으로 지은 까치두루마기를 입고 역시 까치저고리를 입은 봉순이와 함께 별당 뜰에서 깡충거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어미를 잊지 않고 있었으나 까치설은 즐거운 모양이었다. 봉순이 이마에는 흠집이 하나 나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는 별 지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나 없느니보다 나을 리는 없다.그믐날 밤에는 밤마다 장등을 한다. 고방 앞에 쭈그리고 앉은 돌이는 등잔이란 등잔은 모조리 꺼내어놓고 기름을 그득그득 붓고 있었다. 행랑 뜨락에서는 아침부터 떡치는 소리로 요란했다.
"에이야 흑!"
"데이야 흑!"
기세 좋은 소리와 함께 철버덕철버덕 떡치는 소리.
"모르겄다! 내 허리야. 이자부터는 떡 묵는 놈만 쳐라."
메를 물에 적시다가 삼수는 나앉는다.
"지랄한다. 떡만 묵어봐라. 입을 찢을 기니."
절구통 옆에 꾸부리고서 물에 손을 담가가며 뭉게지기 시작한 떡을 이리저리 굴려주던 김서방댁이 눈을 흘긴다. 개똥이녀석, 침을 흘리며 어미를 바라본다. 영팔이 빙긋이 웃으며 나선다. 손바닥에 침을 뱉고 메를 잡으며,
"어디 한번 쳐보까?"
아낙들은 멍석위에 즐비이 앉아 쳐낸 인절미를 모양있게 다듬어 콩가루에 굴리기도 하고 몽우리 없이 잘 쳐졌는가 뜯어먹어 보기도 한다. 김서방은 깨끗한 차림을 하고 행랑에서도 상방인 넓은 방에 마을의 서서방과 함께 앉아 밤을 치고 있었다. 서서방은 한자 길이가 넘는 문어다리로 봉황을 오린다.
"나으리. 진지상 올려 왔습니다."
방문 앞에 밥상을 놓고 귀녀가 아뢴다.
"점심이냐?"
"예."
아무말이 없자 귀녀는 다소곳이 두 손으로 방문을 열고 밥상을 들였다. 최치수는 귀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머금는다. 그러더니 귀녀의 허리 쪽을 가만히 노리듯 본다. 본시 귀녀의 허리는 굵은 편이었고 아직은 몸에 변화가 나타날 시기도 아니었으나 최치수의 눈길은 무서웠다. 사랑에서 나온 귀녀는 뒤뜰에 한참 서 있다가 부엌으로 들어간다. 연기와 김이 서리고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부엌에서는 전을 지져느라 한창이었다.
"어째 강청댁은 코빼기도 안보이노."
여치네 말에,
"오나마나지 머. 제집이 궂어서, 하는 일이라는 기이."
하며 임이네가 헐뜯었다. 그런 주고받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귀녀는 우두커니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숭늉을 떠서 부엌을 나선다.
"숭늉 가지왔습니다."
아까처럼 다소곳이 두 손으로 방문을 열고 다시 두손으로 숭늉 그릇을 든 귀녀는 그것을 밥상 위에 놓는다. 최치수는 숭늉 그릇을 들었다.
"진지상 물리오리까?"
대답이 없었다. 숭늉을 마신 뒤 별안간,
"이년!"
"예?"
"이년! 그래 애는 뱄느냐?"
삼신당에서 은조랑씨 제앙님네 하며 빌던 일을 생각하여 최치수의 핀잔이 발동된 것이다. 속절없이 애를 밴 귀녀로서는 청천의 벽력 같은 말이었다. 얼굴이 풀잎같이 변한다.
"무, 무슨 말심을..."
"나쁜 년 같으니라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더라고 이년!"
"..."
"소행을 생각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만 강포수한테 들은 말이 있고 해서 서 하느니라."
"예?"
귀녀는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여유를 되찾는다.
"산중에 가시 화전을 일구며 살겠느냐?"
"무슨 말씀이온지."
귀녀는 디딤판을 차 던지고 앞으로 나서듯이 반문했다. 자신들의 음모와 상관이 없는 다만 강포수와의 관계를 두고 최치수가 추궁했었다는 것을 그는 재빨리 포착던 것이다.
"종문서를 내어줄 것이니."
종문서를 내주고 어쩌고 할 것도 없었다. 노비 제도는 관습으로 남아 있을 뿐 나라에서 철폐한 지 이미 사오 년이 지났으니까.
"무슨 말씀 이온지 쇤네, 잘 모르겠사옵니다."
비로소 귀녀는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 커다란 눈에 희미한 빛을 띠며 최치수를 쳐다본다. 이년 하며 불호령을 내리던 얼굴과는 딴판으로 실실 웃고 있었다.
"강포수 계집이 되라 그 말이야. 총 대신 너를 주는 게야."
웃음은 일시에 사라졌다. 귀녀 얼굴에 이는 변화를 응시한다. 핏물이 괴기라도 한 듯 벌겋게 핏발이 선 귀녀의 눈이 최치수의 눈을 피하기는커녕 무섭게 대항한다.
"억울하옵니다."
뱃속에서 밀어내듯 목소리는 굵었다.
"종년 신세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싫사옵니다!"
"왜?"
"싫사옵니다!"
"강포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 늙은 것이 죽으려고 그런 말을 했나 봅니다."
"사내가 계집을 탐하는 것은 음양의 이치이거늘."
하다가 말을 끊은 최치수는 눈에 불을 켰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 입매가 뱅글뱅글 돌았다.
"초당에 불 지피라고 어서 일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녀는 조용히 일어섰고 조용히 밥상을 들고 방 밖으로 나온다. 길상을 찾아낸 귀녀는 초당에 가서 불을 지피라고 일러놓고 자신은 고방 뒤켠 아무도 지나는 이 없는 곳에 가서 팔짱을 끼고 쭈그려앉는다. 일년 내내 햇볕이라곤 들지 않은 응달은 창자까지 얼어 붙는 것 같은 냉기를 몰고 왔다. 귀녀는 전신을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상기되어, 좀처럼 붉힌 일이 없는데 양볼은 타는 듯 붉었다. '어떻게 하노? 씹어서 묵어도 분이 안 풀릴 원수놈을! 한시가 바쁘다! 한시가!' 이를 부드득 간다. '그렇다고 어둠이 오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최치수가 강포수와 귀녀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그것을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최치수가 윤씨부인에게,
"귀녀를 강포수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하고 입을 벌리기 전에 그 입을 암흑 속에 묻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귀녀를 강포수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하는 날에는 만사는 휴의다. 야망은 모래무덤같이 허물어지고 말 것이며 뱃속의 아이는 쓸모없는 핏덩이, 숲속에나 내다버릴 물건밖에는 되지 못한다. 수동이를 나귀 등에 싣고 돌아오던 날, 그 황망한 중에 돌아왔다는 인사를 올린 후 아직 한 번도 최치수 모자는 상면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그렇다면 때는 늦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귀녀의 이빨 사이에서 무서운 소리가 새나왔다. 악마의 얼굴, 악마의 미소, 악마의 희열, 보복의 화신. '내가 강포수하고 살아? 내가 강포수하고 살아? 화전을 일구며 살수 있겠느냐?' 이제는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보복 때문이다. 서희가 얼굴에 침을 뱉었을 적에 귀녀는 보복의 칼을 갈았다. 이제는 그 칼을 내리침에 주저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였고 죽일 것을 주저했던 귀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귀녀는 만석꾼 살림보다, 아니 백만 석의 살림보다 여자로서 물리침을 당한 원한이 더 강하였다. 최치수를 사랑했던 것도 아니었으며서. 지금 귀녀는 백만석의 살림을 차지하는 야망보다 노비로서 짓밟힘을 당한 원한이 더 치열하였다. '그놈은 나를 손톱 사이에 낀 떼만큼도 생각지 않았다!' 비단과 누더기를 구별하는 따위의 자존심! 야수 같은 강포수에의 허신과 인간 쓰레기 같은 칠성이와의 동침을 거치면서 마지막까지 최치수에게 여자 대접을 받고자하는 희망은 애정일까 허영일까 또는 집념일까. 억압을 쌓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동자불 앞에서 도움의 기도를 올리던 귀녀, 모든 것은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밖만 싱그러우면 마음속의 쓰레기는, 자기만이 아는 쓰레기는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고독한 여자가 아니다. 부처님이 무섭지 않은 여자였던 것이다. 귀녀는 채마밭을 질러서 급히 초당쪽으로 올라간다 초당 뒤켠으로 돌아간다. 길상이 장작불을 지펴놓고 그 앞에 퍼질러 앉아서 주머니칼로 뭔가 열심히 깎고 있었다.
"길상아!"
열중해 있던 길상이 놀라서 일어섰다. 주머니칼은 손에 들었으나 깎고 있던 나무 토막은 땅에 굴러떨어졌다.
"아이구 놀랬다."
"니 심부름 좀 해야겄다."
"어디로요?"
"나으리께서 곧 올라오실 모양인데 김평산이. 거복이 아버지 말이다."
"야."
"여기 초당에 좀 오십사고. 나으리께서 이르시는 말이다."
길상이 가려고 하자,
"그 양반보고 내가 이르더라고 그래라, 초당으로 오시라고, 나리께서 곧 오실 기니. 내 그 동안 불 보고 있을께 어서 뛰어가거라."
길상은 언덕을 뛰어내려간다. '집에 붙어 있지 않으면 우짤꼬?' 귀녀는 급히 서둘며 아궁이 속의 불붙고 있는 장작을 꺼내어 묵혀둔 채 있는 협실 - 그러니까 이따금 치수가 올라와서 쓰는 방옆에 붙은 조그마한 방인데 그곳은 방문이 뒤켠에 나 있었고 방문 앞에 아궁이가 있었다 - 그 아궁이에 꺼낸 장작을 밀어넣는다. 묵혀둔 방이어서 불이 잘 들지 않았다. 눈물이 찔끔찔끔 짜면서 겨우 불을 살라놓고 초조하게 초당 앞쪽으로 나간다. 다행한 일이었다. 띵띵한 몸을 굴리며 팔을 휘저으며 평산이 길상와 함께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귀녀는 뒤안으로 되돌아와서 아궁이 앞에 앉는다. 평산이 초당 앞까지 이른 기색이 나자 귀녀는 큰기침을 했다. 그래놓고 나서
"길상아!"
길상이 뒤안에 왔다.
"너 어서 가서 장작 한아름 가져오너라."
"많이 넣었는데요?"
"아니다. 골방이 습해서 거기 갈라넣었다. 나으리가 오시기 전에 방이 따끈따끈 끓어야지. 그란하믄 야단벼락 내리실 기니. 와 골방엔 불을 안 넣노? 오늘은 섣달 그믐이니께 불짐을 해야 한다."
길상은 다시 언덕을 뛰어내려간다. 길상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나서 평산이 급히 뒤로 돌아왔다.
"큰일났소."
"무슨 일인데."
평산은 귀녀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잠자코 내 말만 들으시오, 길상이 오기 전에. 그 개 같은 놈이 오늘 나를 보고 강포수 따라가라 하지 않겠소?"
"치수가?"
"가만히 듣기만 하시오. 산에서 돌아온 그날 마님한테 인사하고 여직 상면하지 않았으니 나를 강포수한테 보낸다는 말을 아직은 하지 않았을 게요. 그러나 일은 급하게 됐단 말이요.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있는 것을 마님이 안다믄 만사는 허사요. 가만히 기시요. 내 말만 들으소. 그러니께 마님한테 말이 가기 전에 요절을 내야겄소. 초당에 불 지피라 했으니 오늘 밤에 여기 와서 잘 기요. 집안이 시끄러우니까 여기 와서 잘 모양이요. 그러니 준빌 하고 삼신당에서 기다리시요. 내 형편 봐서 빠져나갈 것이니."
귀녀는 단숨에 지껄였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압력을 가하듯 평산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평산의 얼굴이 굳어지고 뻐드렁니 위의 입술이 말을 할 둣이 떨렸으나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귀녀의 말이 날았다.
"이제 앞에 나가 기시요. 길상이가 장작 안고 오면은 기다리고 있는 하다가 내가 가서 그 양반을 만나지 하고 어물쩍거리며 내리가시요. 가다가 사랑에 들러 인사나 하고 가면 길상이 눈칠 채지는 않을 테니까. 후일 이러쿵저러쿵 말도 없일 기고. 자아, 어서 나가요."
귀녀는 평산을 떠밀었다. 목적을 위해서 줄달음치는 무모한 행위라 할 수 있었지만 짧은 시간의 임기응변은 대단한 것이었다. 귀녀가 시키는 대로 초당 뜰에 나간 평산이 얼쩡거리고 있을 때 길상이 장작 한아름을 안고 올라왔다.
"오신다더냐?"
"모르겄십니다. 오신다 하시었으니 오시겄지요."
"음... 뭐 여기서 기다릴 것 없이 내가 그리로 내려가지."
사랑으로 내려간 평산은 반길 턱이 없는 치수에게 이러쿵저러쿵 인사도 아니요 잡답도 아닌 말을 하고 나서 우물쭈물 돌아섰다. 치수는 무슨 일로 저자가, 싶었으나 일이 설이어서 궁한 말을 하려다 간 게 아닌가고 개의치를 않았다. 그믐밤 어둠 속에서 평산은 오랫동안 떨며 귀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서운 계집이다. 한데 왜 안 오나.' 평산은 언 발을 구른다. 모닥불이라도 피웠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 추워서 일이나 쳐내겠나.' 순간 평산은 모든 계획을 다 팽개쳐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추위도 추위려니와 그는 마음속에서 떨려 올라오는 무서움을 느꼈다. 귀녀가 무서웠다. 그러나 귀녀가 삼신당 앞에 나타났을 때
"치수는 초당에 있나?"
하고 먼저 물었던 것이다.
"거기서 지금 자고 있소. 이것부터 한잔 하시요."
귀녀는 조그마한 두루미병을 내밀었다. 술이었다. 추위를 막고 평산의 마음을 키우기 위해 술을 가져왔던 것이다.
"으음."
평산은 술병을 물고 꿀컥꿀컥 술을 들이마신다. 술병을 놓으면서 평산은,
"됐다!"
"괜찮소?"
"뭐가?"
"떨고 있지 읺소."
"추우니까. 오늘 밤이면 끝장이 난다. 그러고 나면 우리 세상이다."
자신을 격려하듯이 말했다.
"어떻게 할라요?"
"어떻게 하기는, 너는 구경이나 하고 떡이나 먹어라."
살해하는 방법까지 설명할 용기는 없었다.
"그 개놈이 자식! 죽는 꼴을 내가 못 보아 한이요."
"죽으믄 그만이다."
평산은 다시 떨기 시작했다.
"참, 잊어부릴 뻔했소. 혹 나중에 말이라도 나오믄 안 되니께 일러두어야겄소. 행여 낮에는 뭐할려고 치수를 만났느냐고 묻는다믄 구천이 행방을 수소믄해보라 일렀다든가 하고 실수가 없도록 하시요."
그러고 내일 아침에 제사도 모시고 할 기니 일찍 내려올 게고 서둘러야 한다는 말을 했다. 평산은 술병을 물고 술을 마신다. 침침 칠흑 같은 그믐밤, 마을에는 불빛들이 깜박이고 있었다. 빈 술병을 들고 집으로 내려온 귀녀는 잠들지 않고 두신거리는 행랑 뜰에나가서 잠시 얼쩡거리다가 다시 부엌 쪽으로 들어와서 음식을 장만하며 잡담을 하고 있는 속에 끼여들었다. 평산은 초당 층계를 더듬고 발소리를 죽여가며 치수 방 앞을 향해 간다. 그림자도 없이 안성맞춤인 밤이다. 방 앞에서 귀를 기울인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온다. 깊히 잠든 모양이다. 방문을 당겨본다. 문고리가 걸려 있다. 손바닥에 침을 흠씬 뱉어서 장이를 뚫은 손이 문고리를 벗긴다. 방문이 열려지고 닫혀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우욱..."
낮은 목소리, 발버둥치는 소리, 낮은 숨이 찬 신음, 발버둥치는 소리, 비틀거리는 소리, 소리... 소리가 멎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헉헉 흐느끼는 것같고 쥐어짜는 것 같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한층 크게 들려온다. 이를 악물면서 새어나는 거칠은 숨소리, 방문이 열리고 허둥지둥 뛰어나오는 모습. 모습이 땅바닥에서 나동그라졌다. 시꺼먼 무엇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것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누, 누, 누고?"
했으나 목소리는 입 밖에 나가지 않았다. 기다시피 하다가 일어선 평산은 초당의 뜰을 벗어났다. 마을을 피하여 초당 뒷면 숲속으로 해서 달아나기로 된 애당초의 계획도 잊은 평산은 사뭇 미친 둣 마을을 향해 달아난다. 마을은 모두 잠들지 않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그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작은 방에는 불이 커져 있었다. 그러나 베 짜는 소리는 없었다. 아무 척도 없었다. 큰방으로 기어들어갔던 평산은 다시 문을 박차고 작은 방으로 달려간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함안댁은 베틀 위에 엎드려져 있었다. 멀거니 바라보다가
"불을 켜놓고 뭘 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띤띤한 몸을 흔들고 짖었다.
"불을 켜놓고 뭘 하느냐 했것다!"
함안댁이 얼굴을 들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비참한 얼굴이었다.
"못 일어날까!"
"아아."
함안댁은 몸서리를 친다.
"아아. 흉측스런 꿈도, 흉측스런 꿈을 꾸었소."
평산이 주먹을 떤다.
"아가리 찢을라! 자빠져 자란 말이야!"
하다가 그는 함안댁의 멱살을 잡고 베틀에서 질질 끌어낸다.
"왜 이러시요,"
"으으잉! 죽여버려야지."
"왜 이러시요. 여보!"
평산은 함안댁을 쓰러뜨린다. 뼈만 남은 여자의 몸을, 메말라서 잎 떨어진 겨울나무 같은 여자의 몸을 주먹으로 마구 내지르며 머리끄덩이를 잡아끌며 발길질하며, 그러다가 울부짖으며 정욕을 채우는 것이었다.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송장같이 된 여자를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면서 다시 범하여 신음하는 평산은 공포에 몰린 구역질과도 같은 배설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평산이 도망친 뒤 초당 뜰에 서 있던 검은 것, 또출네는 킬킬거리며 웃다가 비죽비죽 울기 시작했다.
"내 자식 어디가 우떻다고 그 몹쓸 년이 신방에서 달아나노. 이년을 어디가서 잡아오노. 옥황상제도 보옵시요. 부리제석도 보옵시요. 호패 찬 내 자식이 금의환향하옵시고 삼현육각 잽히시고 고을마다 송덕비요, 춘향이도 넋을 잃고,"
중얼중얼 끝도 없이 지껄이다가 일어선 또출네는,
"아이고 날씨도 고추걸이 맵다. 신방 채맀는데 신랑 신부가 꽁꽁 얼겄네. 불을 때야제. 불을 때줄 기니, 그것도 공덕이라."
어둠하고 또출네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가, 언덕을 쏜살같이 내려간 그는 김서방 집의 채마밭으로 들어간다. 집을 비워놓고 식구들은 모두 울타리 안의 최참판댁에서 밤을 새가며 일들 하고 있었다. 기둥에 초롱 하나만 덩그렇게 걸려 마당을 비춰놓고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간 또출네는 기둥에 걸린 초롱을 들어낸다. 대숲에서 바람이 울고 지나간다. 방문의 문풍지가 팔락팔락 소리를 냈다. 초롱을 들고 초당으로 올라오는데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싸락눈이 내린다. 또출네는 초롱을 들고 초당 뜰을 왔다갔다하며
"소원성취 비나이다. 소워성취 비나이다."
한없이 그러고 다니다가 또출네는 돌층계를 밟고 올라간다. 연신 입속으로 소원성취, 소원성취 하면서 누각으로 들어간다. 누각 마룻장을 뚜벅뚜벅 밟고 돌면서 역시 소원성취, 소원성취 하며 중얼거린다.
"아이고 내거 군불 땔 긴데, 치버서 내 자식이 꽁꽁 얼겄네."
초롱을 누각 바닥에 놓고 또출네는 아까처럼 언덕을 쏜살같이 내려간다. 다시 김서방 집 마당으로 들어선 그는 쌓아놓은 솔가지 한 단을 번쩍 치켜든다. 장정이 무릎에 힘을 주어가며 묶은 솔가지 한 단을 장정 못잖은 힘으로 버리 위에 얹더니 한 팔을 휘저으며 누각 마르까지 가서 내려놓고 그 짓을 세 번, 네 번을 되풀이하여 마룻바닥에 솔가지를 쌓는다.
"아이고오 이만하믄 방에 불이 날 기다."
마지막 나뭇단을 내동댕이쳤을 때 쓰러졌던 초롱에서 불이 기름을 타고와서 나뭇단에 옮아갔다. 어느덧 싸락눈은 멎고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장엄한 정월 초하루의 해돋이를 서둘고 있는 것이다. 탁탁 불꽃이 튀며 솔가지에 불이 핀다. 누각이 훤하게 밝아왔다. 또출네는 덩실덩실 춤을 춘다. 추면서 다시 초당 뜰로 내려온다.
"소원축수 하나이다아!"
싸락눈이 깔린 뜰에서 나붓이 절을 하고 또 절을 한다. 잠들지 않고 있던 마을은 동녘이 밝아오자 한층 더 활기를 띠고 술렁거리는 것 같았다. 누각이 불타고 있는 것을 먼저 발견한 것은 마을에서였다.
"불이야! 불이야!"
한 사람이 외치자
"불이야! 불이야!"
여기저기 외치고 순식간에 마을과 최참판댁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손에 손에 물동이를 들고 언덕을 몰려서 달려온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또출네는 불붙는 누각 쪽으로 도망친다. 포졸이 아들 잡으러 온다고 소리소리지르며. 김서방은 초당으로 면저 달려간다.
"나으리! 나으리!"
누각에서 기왓장이 날아왔다.
"나으리!"
김서방은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나으리!"
김서방은 시체를 끌어내었다. 끌어낸 뒤 그는 치수가 이미 죽어 있는 것을 알았다.
"나,나,나으리가 돌아가싰다아!"
절규가 무리둘울 뚫고 울려퍼졌다.
"나으리가 돌아가싰다아-"
"저년 잡아라-"
"나으리 돌아가싰다아-"
"저년 잡아라아-"
불과 죽음과 물동이와 몽둥이와, 당산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화했다. 해가 솟아올랐다. 온 천지에 새해를 엄숙히 축복하며 솟아올랐다. 강물도 하늘도 땅도 아름다웠고 새로웠다. 또출네는 무너진 누각과 더불어 타죽었다. 최씨 가문의 마지막 사내였던 최치수는 삼끈으로 교살되어 세상에 마지막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