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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발리에 도착했을 때만큼 아무 대책이 없던 때도 없었다.
내 대책 없는 여행 역사상 이번이 그 최고봉이었다.
어디서 살아야 할지, 뭘 해야 할지, 환율이 얼마인지, 공항에서 택시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심지어는 택시를 잡는다 해도 어디로 가자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도네시아에는 친구도 없고, 친구의 친구도 없다."
<Eat, Pray, Love>란 책에서(한국 번역판 제목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인도네시아 발리' 편 소제목
'내 몸에 완벽한 사랑을 만나다'라는 글을 읽고 바로 뒷장을 넘기자마자 저 위의 글을 만났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란 책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아직 출판사에 다닐 즈음,
사무국에서 일하는 동료가 입에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을 때였다.
그녀는 영문으로 된 그 책을 이미 읽은 후였고, 내게 말하길 번역해서 출판하자고, 책이 너무 너무 좋다고,
출판하게 되면 자신이 번역하고 싶다고, 어서 에이전시를 통해 저작권과 출판권의 향방을 알아보자고 채근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알아본 결과,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출판기획이 잡혀 있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책은 보란듯이!! 출판되었다.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책은 읽지 않은 어느 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앞두고 있던 날,
말그대로 심장이 뛸 정도로 설레는 마음으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앞두고 있을 때, 장도를 앞둔 내게 후배가 그 책을 내밀었다.
자신도 아직 다 읽지 않은 상태지만, 너무 좋으니, 산에 가서 읽으라는 말과 함께.
책의 글쓴이는 말 그대로 망가져 가는 자신을 찾으러 세 나라를 여행했다.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망가져가고 불행하고 힘겨운 내가 (I), I로 시작되는 세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정말 기이한 인연이지 않느냐면서....
(절망 속에서도 이런 유머를 잃지 않는 그녀는 얼마나 귀여운지...)
이탈리아도 인도도 인도네시아도 아닌, N으로 시작되는 나라로 떠나면서 나도 그랬다.
흠. 네팔은 이런 뜻이래.. 너무 멋지지 않아?
N=NEVER E=ENDING P=PEACE A=AND L=LOVE
절대 끝나지 않을 사랑과 평화의 땅....
풍요로운 여신의 땅, 안나푸르나에서 꽃과 함께.... 사진)타라 제공
그리하여, 안나푸르나를 여행하는 도중, 읽으려고 책을 챙겨넣었다.
<어린 왕자> 영문판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딱 두 권.
기필코 영문판으로 읽으려던 어린 왕자는, 영어 잘하는 후배가 어느 날 밤, 후딱 읽고 넘겨주었고,
난 끝내 그 책을 읽지 못했다. (트레킹을 하루 종일 하고 나면 해가 확 져버렸고, 밤에 전기불도 없는 롯지도 태반이었다.)
그렇다 해도, 후배가 책을 읽은 이틑날.....
"...But if you tame me,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인다면,
it will be as if the sun came to shine on my life.
내 삶은 햇살이 가득할거야.
I shall know the sound of a step that will be different from all the others.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너의 발자욱 소리를 알게 되겠지.
Other steps send me hurrying back underneath the ground.
다른 발소리에는 그늘로 도망치게 될거야.
Yours will call me, like music, out of my burrow.
네 발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내겠지.
And then Look: you see the grain-fields down yonder?
그리고,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니?
I do not eat bread.
난 빵을 먹지 않아.
Wheat is of no use to me.
나에게 밀은 전혀 필요없어.
The wheat fields have nothing to say to me.
밀 밭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And that is sad. But you have hair that is the color of gold.
슬픈일이지. 하지만 네가 금빛 머리카락이잖니.
Think how wonderful that will be when you have tamed me!
일단 네가 날 길들이면, 정말 멋질거야!
please- tame me!
부탁이야, 나를 길들여줘.
The grain, which is also golden,
will bring me back the thought of you.
밀밭이 금빛이 되면, 네가 생각날거야.
And I shall live to listen to the wind in the wheat..."
그러면 나는 밀밭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될거야..."
그 유명한 여우와 어린 왕자가 나눈 말들을, 별 빛이 빛나는 촘롱의 산 정상에서 홀로 누워 읽다가 불현듯 눈물이 났었다면서
후배는 긴 길을 걷는 동안, 햇살이 마치 금빛처럼 쏟아지는 길에서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도 물론 읽기는 읽었다.
그녀가 이탈리아에서 울고 불고 난 이후, 인도의 아슈람에서 영성에 대해 궁구하고 난 후, 발리로 떠나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아가는
여로를 따라, 한장 한장 아끼면서 읽었다.
안나푸르나, 히말라야의 심장이라는 그 트레킹 코스를 일주일 동안 걸으면서 만난 꽃들이, 잎들이 그 책들 사이에
얼마나 많이 자리잡았는지,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 책은 꽃들을 품에 끼고 안고 있느라 세 배쯤의 부피로 통통해져 있었다.
발리로 가는 밤 비행기, 창가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기내에 비치된 신문을 읽다가 바라본, 그 시간.
생전 한번도 본 적 없는 그 땅을 향해, 그 바다를 향해 한정없이 부풀어올랐다.
흠. 그렇구나.
발리는 아무 대책 없이 도착해도 괜찮겠구나.
그렇게 무대책으로 떠나 도착한다 해도 결국은 내 몸에 꼭 맞는 사랑을 만날 수도 있을 정도로 영성적이거나 아름다운 곳이겠구나... 대책 없이 편하게, 그냥 가고 싶구나, 생각했다.
내가 그러하듯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발리'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으레 '바다' '물놀이' '석양의 아름다움' 등을 떠올릴 것이다.
아니, 그전에 이미 환상적인 '허니문' 과 '풀 빌라'와 '사랑'등을 떠올리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라야 발리를 수식하는 그 많은 말들, '신들의 낙원'이니 '천사들이 사는 땅'이니
'푸르른 계단식 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조금씩 떠올릴 터.
바람에 흩날리는 트로피컬 카페에 매달린 꽃들, 꽃들, 한들한들....
발리 덴파사르에 도착하는 비행기 편을 끊어놓고 마음만 조금씩 설레던 12월 중순 쯤.
발리에 관한 책들을 두 어 권 사놓고 야금야금 읽으면서 한 가지만 생각했다.
발리 여행은 그토록 오래 꿈꾸어 온 것이 무색하게 , 졸지에, 갑자기, 돌연히, 결정되었다.
나는 신혼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다,
나는 휴양을 하러가는 것도 아니다,
나는 무언가 대단한 성찰을 할 수 있는 명상처로 발리를 꿈꾼 것이 아니다.
현재 내게는 그냥 발리, 발리면 되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그냥 발리로 가서 발리의 품 속으로 그냥 뛰어들면 되는 것이다.
아마도 발리의 에코 여행 쯤 될까, 그렇다해도 발리는 날 받아주겠지.
발리로 떠나는 여행기획을 한다면,
나이가 좀 든 여자들이나, 좀 더 나이가 든 은퇴한 부부들이나,
여하튼 신혼여행이 아닌 여자들끼리의 여행이라거나, 영혼과 몸의 쉼을 꿈꾸는 여자들이,
또는 기가 좀 빠져서, 심드렁해진, 연인들이나, 오래된 친구같은 부부들이
나처럼 발리를 가게 된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의 마음 또한 혼자 가고 있지만, 그런 마음으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발리를, 저 책의 필자, 엘리자베스처럼 가고 싶고, 머물고 싶다, 고.
그렇게 여행을 앞둔 것 치고는 기이하게 편한 마음으로, 그러나 발리를 꿈꾸게 한 정말 좋아하는 만화책
세 번째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발리’라는 글자는 여섯 권 째 결말에 단 한번 나오는 그 만화를.
그러나 전체가 결국 낙원으로서의 발리를 꿈꾸게 만든, 그 이야기를.
책의 제목은 <Heaven?>이다.
그 만화 주인공, 이가 칸과 추리소설 작가이자 레스토랑 ‘로윈 디시’의 주인인 막무가내 사장여자의 마지막 해후처가
발리인 것에 최대한의 공감을 끌어올리면서.
자. 발리에 가면 마음껏 걸어야지, 자전거를 타야지, 래프팅도 해야지, 스노클링도 해야지, 시간을 내서 트레킹도 해야지.
아니 정말 시간이 난다면 그녀, 앨리자베스 길버트처럼 늙은 주술사를 만나러 가야지.
그에게 손금을 내밀어, 물어봐야지.
"내 인생은, 내 사랑은 어떻게 될까요?" 하고 물어봐야지.
아니 듣는 만 못한 소리를 듣더라도 기꺼이 그의 목소리를 들어봐야지...
와인 두 잔과 맥주 한 캔과 땅콩 세 봉지를 먹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신혼여행자들은 많지 않았지만(그들은 거의 5월에 결혼한다!), 혼자 발리를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포상으로 가는 사람들, 회사의 워크숍이 있어 가는 사람들로 내내 시끄러운 비행기 안에서
잠도 하나 오지 않았다.
발리에 도착하니, 겨울 옷으로 꽁꽁 쳐맨 몸에서 후끈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분명 더울 테니, 조끼 파카를 입는 게 현명하리라 생각하며 나름 준비했는데도, 발리는 그 밤중에도 그냥 슬리브리스 티셔츠 하나면
충분한 그런 날씨였던 것.
웰컴 투 발리, 라고 쓰인 공항앞 편의점 앞에서 내리자 마자 삼십분도 되지 않아, 사기를 당했다!!!
만나기로 한 한국인 숙소주인이자 여행업을 하는 분은 나와 있지 않았고, 휴대폰은 그냥 로밍되기에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서 있다가 벌떼처럼 달려드는 택시 운전사들에게 거절 삼아,
"조금 있으면 나의 친구가 나를 데릴러 올 것이니, 택시는 필요없다, 그가 곧 올것이다" 라고 물리친 것 까진 좋았으나
황망하게도 나를 데리러 올 사람이 그 후 삼십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던 터라, 택시 운전사들 거의 네 다섯명이 모두 나만을 쳐다보며, 출동준비를 마치고 있었으니.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휴대폰은 저 혼자 로밍된 것은 맞는데....
한국에서 발리로 전화할 때, 그것이 일반 전화일때, 휴대폰일 때, 다르고,
로밍된 전화로 발리에서 발리로 전화할 때, 발리의 일반전화로 할 때, 휴대폰으로 할 때, 휴대폰과 휴대폰으로 할 때,
등등 조금씩 다른 방법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몇 십 개의 눈이 번득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다가,
오기로 철석같이 믿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였는지, 시간이 너무 늦어서인지,
역시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칠칠치 못한 인물인 탓인지, 당황한 채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내게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먹잇감으로 충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너 호텔이름이 뭐니"
"왜 사람이 안 데리러 오니"
"전화가 잘 안되니'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한 나는 다만 니 전화기 좀 빌려줘봐라, 내 전화가 안된다, 전화비는 줄게... 하면서
택시 기사의 전화를 빌려 통화를 시도했다. 바로 나를 데리러 오는 사람이 받았다. 바로 공항 앞이라는 것.
시간을 잘 못 알았단다.
안도하면 전화를 끊은 순간, 전화비를 달라고 했다.
바꿔 온 루피아를 꺼냈다. 큰 돈 밖에 없었다.
이제 처음 꺼낸 루피아이니, 아직 통화수준도 잘 모르는 상태...
큰 돈을 내밀며, 그래도 전화비로는 무지 많을 테니, 거슬러 달라고 했더니, 그 사람 왈,
거스름 돈 없댄다.
어버버버 하는 사이, 거스름돈을 바꿔 준다나 뭐라고 하더니... 그는 사라져 버렸다.
하하하.
웃을 수밖에.
그 실랑이를 하고 마음 졸이는 사이에 속에 입은 티셔츠는 이미, 완전 젖은 상태.
발리는 그렇게 나의 입성을 축하해 주었다....
새벽 두시에 도착했던 짐바란 홈, 입구의 쉼터와 혼자 잠든 방갈로 방. 한국사람 앤디가 경영한다.
우여곡절 끝에 예약해 둔 짐바란 홈의 방갈로에 도착한 것은 새벽 두 시경, 간신히 짧은 잠을 잔 후, 바로 그곳,
짐바란 홈에서만 컨택해 줄 수 있는 딴중브노아 스노클링 및 회 크루즈를 하기 위해 딴중브노아를 향해 떠났다.
그러니까, 저 방의 이쁘고 편안한 침대에서 잠잔 시간은 겨우 세시간 정도 되었을까.
서울에서부터 연락했던 한국인 주인은 한 항공사의 부기장으로 일했던 사람이라 여행, 비행기, 발리, 등에 있어선 할 이야기가 많았고, 나도 어차피 일 삼아 온 사람이니,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한국에서 사온 소주를 꺼내놓으니, 그는 밤새 영업하는 KFC에서 사온 닭고기를 꺼내고, 망고스틴을 수 십개 가지고 와
수영장 옆 탁자에 펼쳐 놓았다.
그 시간이 새벽 3시.
일면식도 없는 주인 앤디와 일삼아 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그러나 사리사욕을 채우려 여행을 떠나온 내가 발리의 밤 속에서
마주 앉았다.
비행기 부종사로 일했던 시절의 이야기,
발리가 좋았다는 이야기,
발리에서 살면서 같이 모시고 있는 그의 엄마 이야기,
우리 회사이야기, 나이가 몇 살이냐는 이야기로 한 시간 나눈 것까지....
그는 한국 팩소주 대여섯개를 그 시간에 다 마셔버렸고, 나는 발리 맥주와 망고 스틴 열 개 정도를 먹으며 거의 날 밤을 새었다.
비행기에서 먹은 밥, 술, 땅콩, 그가 사준 치킨과 맥주로,
발리, 첫날, 나는 그야말로 너무 배가 불러, 배가 정말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발리에서 얻은 장염의 서막을 그야말로 그 밤에 바로 열어버린 셈이다...
엘리자베스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그토록 외치던 발란스, 즉 <균형>을 발리 첫날부터,
잃은 셈이었다.
딴중브노아로 스토클링을 떠나기 바로 전, 남쪽, 울루와뚜 사원과 절벽 해안.
딴중브노아를 가기 전에 사람을 만났다. 오래전부터 짐바란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는 가족들.
마야는 한국인. 그녀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살고 있는데, 인도네시아 대학의 한국어교수라고 했다.
그녀는 한국에 사는 엄마와 오빠를 발리로 오게 하고, 자신도 자카르타에서 일부러 발리로 와서 가족들과 함께
쉬는 중이라고 했다.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한국어 교수를 하고 있으니, 인도네시아 말 잘 하지, 발리 말 잘하지, 영어도 잘하지, 한국말도 잘하지...
게다가 그녀는 어찌나 사람이 싹싹하고 밝고 건강하고 선선한지, 척 보는 순간 마음에 들어버렸다.
오빠는 한국에서 연극연출과 기획을 하고 있다하는데, 수줍음이 많았고, 엄마도 멋있었다.
환갑을 넘으셨다는 그 분은 혼자서도 잘 놀고, 딸이랑도 잘 놀고, 아들과도 잘 놀았다.
심지어, 그 가족 아무도 모르는 예의 그 책을 이미 읽어서 알고 있었다.
함께 아침을 먹고, 발리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첫 날의 여행을 시작했다.
앤디는.... 앤디는 간밤의 술이 과했는지... 아침 녁엔 맥을 추지 못했다.
그도, 균형을 잃었다.
울루와투 절벽 사원은, 그래,
절벽이자, 사원이었다.
그 절벽에 그토록 큰 사원을 누가 지었는지 모르나, 사원을 가득 채운 것은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와 나무밖엔 아무 것도 없었다.
절벽에 만들어진 공연장만 노을이 지면 발리의 춤 공연이 열릴 뿐, 사원은 사람 하나 없이 비어 있었다.
동행한 마야는 카메라를 달라며
연방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하여 혼자 여행할 경우, 거의 안찍게 되는 풍경을 망쳐버리는 내 얼굴 사진은 마야 덕에 수십장에 달하게 되었다.
(저 위에 사진도 그런 수십장의 사진들 중 하나)
울루와뚜 사원의 원숭이들은 발리 시내 몽키 포레스트가의 원숭이들보다 더 난폭하게 여행자들의 모자나 안경, 스카프, 가방을 뺏어가니 조심하라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마야와 나와 그녀의 엄마는 열심히 물건들을 챙겼다.
그러나, 그러면 무엇하랴. 원숭이들은 사원에 살고 있는 성자 같은 토박이 발리 주민들과 모종의 합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과 주종관계거나, 아니면 동업자거나.
일단, 여행자의 행색을 살핀 발리수행자(모습은 영락없는 수행자다)가 그들끼리 통하는 뭔가 수신호나 텔레파시를 통해 원숭이에게
말해준다. 자, 저 인간의 안경을 뺏어와라, 모자를 벗겨와라....
그러면 원숭이가 조용히 여행자가 아주 짧은 순간, 찰나라고 해도 좋을 그 짧은 순간, 방심하는 사이에 여행자의 물건을 채간다.
여행자가 비명을 지르고, 뺏긴 물건을 찾으려고 우왕좌왕 할 때쯤, 수행자가 다가와 무엇을 잃었느냐,고 묻는다.
이 때, 값나가는 소중한 것들을 빼앗긴 경우, 여행자의 태도에 바로 나타난다.
저게 얼마짜리 모잔데, 얼마짜리 선글라슨데.... 하며... 동동 구르면, 바로, 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내야 한다.
아주 비싼 값은 아니지만 우리 돈으로 만원 정도는 주어야 물건을 원숭이에게 되찾을 수 있다.
수행자들은 준비한 바나나나 땅콩 같은 먹거리를 싼 봉지를 원숭이에게 던져서 강탈해온 물건과 맞바꾸고, 수행자는 그걸 원래 여행자에게 돈을 받고 건네준다.
이건 사실 완벽한 시스템이다.
우린, 그래서, 우리는 절대 당할 수 없다, 는 각오로, 모자를 벗어 손에 쥐고, 가방을 앞으로 껴안았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어도, 우리 일은 아니니라 믿었다.
그러나, 나는 잠깐 사이에, 안경을 빼앗겼고, 마야는 모자를, 마야 엄마는 아예 머리에 칭칭 감은 스카프 겸 모자를 빼앗겼다.
안경을 벗겨가던 원숭이의 손놀림은 너무도 빠르고 날카로워서, 거의 눈가에 할큄 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사실, 눈알을 안 파내간 것이 다행일 정도.
차에다 가방을 두고 나온 나는 돈이 없어, 멍하니 있었고, 마야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모자와 안경과 스카프 값을 지불했다.
수행자는 아주 곤란해했다. 돈이 터무니 없이 적었던 것이다. 그의 기준으론.
세 사람의 물건 값으로 오천원 정도의 돈을 받고, 뺏은 물건을 건네주는 그의 얼굴이 얼마나 못마땅해 하시던지.
돌연한 해프닝을 치르고 물건을 건네 받고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니... 하하하.
머리는 봉두난발에 안경 쓴 자리에 난 상처에.... 흘러내린 땀까지.
세 여자가 머리 끄잡고 싸운 것만 같았다.
그나마 물건을 제대로 돌려받은 것만도 마야의 발리말 실력과 순발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명품 모자나 명품 선글라스를 앗긴 사람들은 돈을 무지 많이 내야하기도 했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원숭이가 뺴가는 도중에 안경알이 깨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절벽 해안은, 너무 너무, 맑고 깊어서,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아침 녁, 원숭이와 실갱이를 하느라, 너무 땀을 흘려버렸다.
울루와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그 까마득한 깊이 때문에, 다시 한번 균형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역시, 나는 너무 높은 것은, 너무 깊은 것은, 아직 두렵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한국어교수일을 하는 마야.
풍모 만큼은 도 닦은 수행자보다 월등하신 노원숭이. 텅 빈 사원이 이들만의 세상이다.
첫댓글 사랑얘기 나오는 줄 알고 눈을 부릅뜨고 봤더니 고것도 아니구만! 아이고.. 사랑이 하고싶네...
하도 오랫만의 댓글이라 너무 너무 반가워 눈을 부릅뜨고 봤더니... 흠... 하하. 사랑이 하고 싶으세요..? 그냥 하믄 되요... 사랑처럼 어려운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쉬운 것도 없던데요... 담엔 제 사랑이야기를 해드리...도록....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