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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지나치는 누룽지 공장이 있다. 아무런 간판도 표시도 없다. 구수한 냄새가 코에 닿는다. 자연발생적으로 입안에서 침이 돌다가 꿀꺽 넘어간다.
국어학자도, 언어학자도 아니지만 구수하다와 고소하다의 차이를 말하고 싶다. 고소하다는 그 표현은 얄미운 상대가 일이 잘못되어 속이 후련한 경우를 말하며 구수하다는 것은 누구이든 상관없이 일이 즐겁고 시원하며 결과가 좋을 때 쓰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음식의 맛으로 치자면 고소하다는 것은 비스켓과 같이 조미료나 다른 어떤 여러 가지를 섞었을 때 나는 맛이며 구수하다는 것은 한가지 재료에 의한 은근한 맛을 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표현이 옳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건 내 생각의 자유이니까. 고소한 맛은 곧잘 질리지만 구수한 맛은 질리지 않는다.
어릴 적 반들반들한 시커먼 무쇠 솥에서 아침을 짓는다. 나무 가지를 잘게 부수어 아궁이에 집어넣으면 불꽃이 활활 일어난다. 여름에는 솥을 마당에 걸어 밥을 짓지만 겨울에는 부엌에 솥을 걸고 아궁이에 불을 피운다. 더운 여름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짚인다면 찜질 고생에 어디 잠이나 붙이겠는가. 겨울에는 몸을 아궁이 가까이 하면 따뜻해 좋다. 불을 넣다보면 솥뚜껑이 들썩거리며 김이 쏴하고 나온다. 그 때는 더 불을 넣지 않는다. 그래야 밥이 고슬고슬하고 맛이 좋다. 여기서 나무를 더 집어넣으면 밥이 타는 냄새가 나는데 이걸 화근 내가 난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꾸지람을 듣는다. 밥의 양이 줄어들 뿐 아니라 누룽지가 많이 생긴다. 물을 넣어 끓인 숭늉은 좀 시커멓기도 하지만 구수하다. 무쇠 솥은 요즘의 알루미늄 냄비와는 달라서 불을 많이 피워도 솥이 알아서 밥을 짓고 불을 적게 넣어도 뜸을 들이며 밥이 잘 된다. 그러나, 요즘의 알루미늄 냄비는 불을 적절히 알맞게 조절하지 않으면 죽이 되든지 타게 된다. 시집 온 첫날 새색시가 밥을 잘 짓는 다는 것은 여간 신경이 많이 쓰이며 힘든다. 시집오기 전 신부 수업을 잘 받은 색시는 첫날 아침밥을 설지 않게 고슬고슬 잘한다.
이제는 좋은 밥솥이 나와서 이 힘든 일을 해결해 준다. 이로 밥을 지으면 누룽지 구경을 아예 할 수가 없다. 식사 후 누룽지를 끓인 숭늉을 찾기란 여간 힘든다. 그러니 식사 후에 생수나 오차를 넣어 끓인 물을 마신다. 마시는 물맛 따라 세상의 인심도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생수나 정수기에서 받은 냉수며 끓인 오차 물맛은 세상 인심 그대로처럼 멀겋고 찹찹하다. 식당에서는 간혹 누룽지 숭늉이 나오지만 시중에 파는 것을 사다가 끓인 것이다. 누룽지를 끓인 물맛은 옛날 어린 시절 마시던 숭늉 맛은 아니지만 후후 불며 마시기도, 누룽지를 떠먹기도 하면서 넉넉한 마음을 담아낸다.
그 누룽지를 슈퍼마켓에서 사게 되었다. 널찍한 게 노릇노릇 굽어졌다. 습기차지 않게 비닐봉지에 담은 누룽지는 바싹거리며 그런 대로 맛이 있다. 밥을 짓고 나서 주먹덩이 크기의 둘둘 말은 누룽지를 손에 지어 준 기억이 난다. 그걸 들고 밖으로 나가면 친구들은 개 코처럼 어떻게 알았는지 낌새를 차리고 졸졸 옆에 따라 다닌다. 쬐끔씩 뜯어 함께 먹는 그 맛은 어디에다 비할 수 없다.
자기들은 말하기를 누룽지를 생산하는 식품회사라고 하지만 공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공장이라는 단어가 더 오래지 않나 싶으며 내게 친숙한 마음이 든다. 누룽지를 만들고 있는 아낙네들이 대여섯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만들어지나 물어보니 기술이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옛날 같으면 자신의 솜씨라도 자랑하는 양 어떻게 해라고 할 것인데. 척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일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내가 누룽지를 만들어 팔 일도 없고 그네들과 맛으로 경쟁할 일도 아닌데. 요는 가만히 창 밖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 그것만은 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직경이 삼십 센티쯤 되는 알루미늄 냄비가 수십 개, 고무호수로 연결된 가스 버너가 수십 개, 그릇 씻는 큰 물통, 큰 전기 밥솥 몇 개, 쌀포대, 종이 박스가 그 전부였다. 쌀을 씻어 밥을 짓는 사람, 밥통에서 밥을 퍼다 냄비에 얇게 골고루 펴는 사람, 이리저리 다니면서 냄비를 살피는 사람, 냄비에 담긴 누룽지를 칼로 가운데로 선을 긋고 잘라 널찍한 사각 플라스틱 소쿠리에 펴는 사람, 박스에 담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박스에는 간식, 안주로 좋으며 어린이나 노약자는 끓여 먹어도 좋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한쪽에는 누룽지를 떼어낸 빈 냄비를 씻고 있다. 모두들 얼굴에는 방울방울 땀이 맺혔다. 삶은 구슬 같은 땀 방울이다.
냉수 같이 차갑고 오차 물 같은 멀건 세상보다 어릴 적 마시던 누룽지 끓인 구수한 숭늉 같은 세상이 좋다. 내 일, 네 일 할 것 없이 누구든 상관없이 하는 일마다 즐겁고 시원하며 좋은 보람이 와락 쏟아지는 구수한 세상이었으면 한다. 누룽지 공장 아낙들이 강한, 중간, 약한 불로 기다리며 태울 때 누룽지는 더욱 구수하다. 이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자신을 기다리며 태우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옛날 우리들이 마시던 숭늉처럼 구수한 세상이 된다.
오늘도 누룽지 공장의 아낙들은 땀으로 누룽지를 굽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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