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역 중앙광원형광장이다.천호(千戶)가 살 수 있을만큼 넉넉한 땅 천호마을이다.
서울에서 사람이 가장 먼저 산 곳이 바로 강동구다.7천년 전 신석기시대 인간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기가 막힌 명당에
삶의 터전으로 잡아 정착생활에 들어갔다.첫 정착지 명당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바로 이웃하고 있는 천호마을이다.
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위례성 그 성밖에 자리한 천호의 마을이다.천호(千戶)는 1천가구다.지금 1만가구의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오래 전 1천가구가 몰려사는 마을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다.하남위례성은 약 9만여명이 살았다고 전한다.
1010년 고려 초조대장경을 지을 때 개경의 인구 10만명이었다.그 개경은 당시 세계 10대문화도시로 꼽힐만큼의 대도시였다.
개경과 비슷한 규모의 하남위례성의 성 밖에 '가히 천호(千戶)가 살 수 있을만큼의 좋은 땅' 천호의 도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는 대가족제도였다.그때 보통 10여명이 한 가구를 이루어 살지않았나 한다.1만명의 인구가 사는 천호도시라고 짐작된다.
그 마을에는 도미가 부인 아랑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그 천호의 중앙광장에서 한강역사탐방은 출발한다.
초기백제 도읍지 하남위레성으로 가는 길목에 대형 풍차와 바람개비가 곳곳에 설치,환영하고 있다.
바람개비는 지명 '바람드리'를 상징한다.바람드리는 바람 풍(風) 바칠 납(納)의 풍납동으로 바뀌어 부르고 있다.
풍납1동 주민들이 과거 상습 수해지역이었고 현재는 풍납동토성 문화재 보존을 둘러싼 갈등지역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2010년 7월부터 주민자치 프로그램으로 ‘바람개비 춤추는 마을가꾸기’ 사업을 벌여왔다.풍납1동은 마을 담장에 바람개비 조형물 설치, 풍납토성 모형의 바람개비 동산 조성, 주민 기증 바람개비 군락지 조성, 바람개비 희망봉사단 운영 등 다양한 바람개비 춤추는 마을가꾸기 사업을 통해 도시 미관 개선은 물론 주민들의 애향심을 고취시켰다. 이와 관련, 풍납1동은 송파구 주최 자치회관 운영 우수사례 발표회에서 최우수상 수상을 받은데 이어, 송파구 대표로 서울시 자치회관 운영 우수사례 발표회 참가해 주민자치 프로그램 운영부문에서 우수자치회관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초기백제를 이끌었던 백제의 심장부 하남위례성이다.당과 신라에 멸망한 백제이기에 그 역사는 무참히 왜곡되고 축소되었다.
아니 철저히 무시당하고 잊혀진 백제역사였다.1980년대까지만 해도 공주나 부여를 찾아 백제역사와 문화 그리고 유적을 살폈다.
대단히 광대한 영토와 최강의 국력 그리고 가장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백제였다.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말한다.
“백제(百濟)는 삼국(三國) 중에서 제일 강성했지만 가장 먼저 망한 나라이다.(百濟於三國最强而其亡最先).
첫 도읍지인 위례성은 직산이 아니라 한강북안이다.그 절대위치는 동소문 밖 10리 남짓한 지점인 삼각산동록
(三角山東麓)의 한양동(漢陽洞)이 그곳이다. 그 증거로는 옛 성(古城)의 흔적이 있으며, 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켜
한양고현(漢陽古縣)이라고 하고 있다. 당시의 성(城)이란 다만 나무울타리를 하고(樹柵) 흙을 쌓았기(築土) 때문에 흔적은 있지만
돌(石)은 없다.......온조의 옛 궁성은 본래 광주 고읍에 있어 궁촌이라는 이름을 남겼고 여기 사는 백성들은 참외를 심어 생업으로
삼았다. 여기가 하남위례성이다."”-다산 정약용의 <백제론>에서
고구려 말 인구 69만 7천호 백제 말 인구 76만호 (400만 명),백제가 패망하고 무려 7백60여년이 지난 조선시대 초기의
호수 조사에는 옛 백제권(경기· 충청· 전라의 삼도)의 인구가 6만호 남짓에 불과하다. 요서백제 등 백제의 강역을 생각하게 한다.
둘째아들 온조와 함께 백제건국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어머니 소서노도 잊혀져가는 인물이다.
신라 천년문화를 자랑하지만 그 대부분은 백제의 장인들이 빚어낸 걸작품들이다.
일본인들에게 백제는 대국(大國)이요 상국(上國)이다.
바로 백제를 구다라(くだら)라고 숭배했다.くだら는 대국 상국이다.
일본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진품 명품은 바로 백제문명이라고 여겼다.
‘구다라나이’(百濟無いくだらない )가 그 말이다.구다라(くだら백제)와 나이(ない아니다)의 합성어이다.
일본인들이 백제 문화를 찬양하던 이 말의 어원은 “이것은 백제 물건이 아니다(これはの物では無い)”였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뛰어난 생산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백제에 대한 최상의 칭송이다.
아시아에서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城) 가운데 가장 크고 강한 풍납동토성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으로 한강가 평지에 축조된 초기백제의 국도(國都) 왕성 하남위례성 북성(北城)이다.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이 토성 성벽의 길이는 3.5킬로미터로 추정되고 넓이는 성벽 바깥쪽을 기준으로 할 때 22만 6천 평이다.
성벽을 뺄 때는 19만 평쯤 된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북벽 약 300m 동벽 1.500m 남벽 200m 가량 되며 여기에 유실되고
남은 서북벽 250m를 가산하면 2.250m 가량 된다. 성벽의 너비는 30~40m 정도이고 가장 넓은 곳은 70m에 이른다.
복원된 북벽의 높이는 11.1m, 미복원된 남쪽과 동쪽의 높이는 6.2m 내지 6.5m 정도라고 한다.
사다리꼴로 중심을 쌓고 판축을 한 거대한 토성이었다.
나무상자 안에 뻘흙과 황토 마사토 등을 넣고 나무공이로 다지는 판축기법이다.그 흙과 흙 사이에는 짚과 나무잎 풀 등을
섞어넣은 부엽공법도 활용된다.여기에 석회를 뿌려 스팀효과를 내는 증토법(蒸土法)이 이 토성을 쌓는데 동원되었다.
참으로 단단한 성(城)이다.곡괭이로 찍었다.성벽이 조금도 깨지지 않는 아주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군 풍납리에 있는 성(城)이라고 해서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이라고 했다.
'風納里土城 事績碑'는 이 도시의 공식적인 이름은 풍납리토성이라고 밝히고있다.유적의 고유명이 분명하지 않을 때는
행정동 이름을 따서 그 이름으로 한다는 게 문화재청의 입장이다.현재 정식 명칭은 풍납동토성이라고 해야 옳다.
아직도 '풍납토성'으로 잘못된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풍납리토성 뒷면에 기록된 비문을 그대로 옮긴다.
由來-이 토성(土城)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백제(百濟)의 사성(蛇城 배암드리)으로서 그것이 바람드리(風納)로 변한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사성은 백제의 책계왕(責稽王)(三八六~三九八)이 고구려(高句麗)을 막기 위해 쌓아 그 안에 궁(宮) 건물들까지 세웠던 거성(巨城) 겸 술성(戌城)이었으나 서기 四七五년 백제가 고구려에 패배하고 웅진(熊津 公州)으로 천도(遷都)하면서 폐성(廢城)되고 말았다. 이 토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며 원래 둘레가 四千미터에 이르렀으나 한강(漢江) 쪽의 서벽(西壁)은 1925년의 큰 홍수로 유실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三벽은 잘 남아있으며 북벽(北壁)의 경우는 아래 너비는 三十미터 높이가 五미터 이상이고 동벽(東壁)에는 두 군데 문자리도 남아있으며 또한 이 성은 현존하는 삼국시대 유일의 평지성(平地城)으로서 귀중하지만 1964년 서울대학교의 성안발굴에 의하면 지하 三미터 깊이에서 서기 三세기 축성을 입증하는 주거지와 유물들이 나와 백제 건축초기(建國初期)의 생활유적으로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서기 일 천 구 백 칠 십 삼 년 십 이월 대한민국
풍납동토성 서쪽 성벽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헐려나갔다.그 자리에 대형아파트가 성벽을 따라 들어서 백제유적을 짓누른다.
을축년 대홍수가 지나고 풍납동토성을 물바다로 만들었던 한강 물이 빠져나가면서 풍납동토성의 서북벽이 무너진 채 각종 유물과
함께 땅위로 모습을 드러냈다.성안 남쪽 흙더미에서는 항아리 속에 담겨진 채 출토된 청동초두 1점을 비롯해 금귀걸이 구리로 만든 쇠뇌, 백동(白銅)으로 만든 거울, 과대금구, 보라색 유리옥, 4등분한 원형 무늬가 있는 수막새 등이 나온 것이다.
커다란 토성의 성벽만이 노출돼 있던 풍납 토성이 홍수를 만나서 은밀하게 간직하고 있던 백제의 속살 일부를 살짝 드러낸 것이다.
"풍납토성이 바로 백제 초기 도읍지이자 그 도성인 하남위례성이다."
일제 식민사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이 유물을 토대로 백제의 왕성임을 주장했다.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서온 인물로 1895년 명성왕후 살해사건에 선봉에 섰던 '낭인' 중 한 명이다.
아유카이 후사노신은 1934년 11월 [조선]이란 잡지 제234호에 '백제고도안내기'라는 일본어 글을 싣고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다'라고 획기적인 주장을 편 것이다.우리는 이를 외면하고 백제 도읍지가 아니라는 기존 학설을
거듭 확인 주장했다.유물은 대홍수때 밖으로 속살을 드러내며 신호를 보냈으나 우리는 끝까지 외면했다.
1997년 1월1일 연휴 때이다.
서울 풍납동 현대아파트 공사 현장에 역사학자 이형구가 잠입했다.
“터파기 한 밑에 층까지 들어갔는데 위에서 한 5미터쯤 팠어요. 깊이 팠어요.
그런데 한 5미터 4미터 그 사이에서 목탄 층, 재가 탄 목탄 층이 보이고 그 부근에서 토기편이 막 널려 있어요.
기와편도 있고. 그걸 주머니에 있는 대로 집어넣었어요.
경비는 날 들여보내고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그걸 주머니 있는 데마다 내 눈짐작으로,
요 층에서 난 거는 아래 주머니에다 위층에서 난 거는 윗주머니에다 넣고 이렇게 해서
있는 대로 다 주머니에 넣고 부랴부랴 소형카메라로 사진 찍고 그러고 급히 나왔지요.“
그는 현장에 백제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채 나뒹구는 것을 발견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신고했다.
그로 인해 공사는 중지되고 풍납동 지하에 잠든 백제사는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4m 정도 터파기를 하자 수막새 등 기와와 전돌(일종의 보도블록) 토기 등 수천점이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유물이 발굴되면서 아파트 공사는 중단됐고 현장 발굴 작업이 그해 11월까지 계속됐다.이제 역사학자 이형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성백제의 왕성 풍납토성을 발굴한 사람은 아닙니다.그 왕성을 찾아낸 발견자입니다."
유적 발굴은 누구든 언제든 할 수 있다. 유적을 찾아내는 발견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땅속에 영원히 묻혀버릴 뻔하였던 그 한성백제의 도성을 찾아내 30여년동안 한성백제의 왕성터를 밝혀내는 데 심혈을
쏟아온 학자로서 백제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하게 돼 감개가 무량하다고 그는 말한다.
풍납동토성은 초기백제의 도읍지 왕성임을 분명하게 밝혀내 만천하에 당당하게 알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