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는 옹성(甕城)이 많다.
그 성의 모양이 항아리를 닮았다.항아리 옹(甕)자의 옹성(甕城)이라고 한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둘러 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힌다.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 옹성(甕城)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다.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이라기보다는 치(雉)나 용도(甬道)라고 할 수 있다.

연주봉 옹성은 해발 464m 인 원성에서 해발 466.4m 인 연주봉 정상부까지 좁고 긴 성벽을 쌓아 연결한 성이다.
전체 길이는 315m 이고, 성내부의 면적은 865㎡이다. 남한산성의 옹성중에서 가장 훼손이 많이 된 옹성으로
여장(女堞)이 37개가 있었으나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이 옹성은 5암문을 통하여 성내부와 연결되고 있다. 옹성은 원성에 닿아 있는 지점의 폭이 17.5m로 가장 넓고
능선을 따라 가면서 점차좁아들어 연주봉에 도달하기 직전에는 폭이 3.5m 정도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약간 넓어져
연주봉을 감싸고 있다. 연주봉 정상부에는 현재 직경 510cm 높이 160cm 정도의 원형석축단이 조성되어 있다.
석축단은 대략 40-50cm 정도의 할석으로 쌓았다.
정신문화연구원 소장의 「남한산성도」에는 연주봉 옹성에 砲壘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옹성의 북쪽 끝부분에 포루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포루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북쪽으로는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수계가 한눈에 조망되며, 북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말단봉에
있는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관측된다. 산성쪽으로는 원성 북벽의 넓은 지역과 산성파출소 등 성내부가
잘 바라다보인다.
이 옹성은 인조4년(1626) 축성후 영조21년(1745)에 수축되었으며, 현재 옹성 성벽은 축조상태를 확인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붕괴상태가 심각하다. 옹성주변에 대한 잡목제거 등 조속한 정비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토지주택박물관 홈페이지 '중요연구' 연주봉 옹성' 발굴조자'에서-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이다.
남한산성 아래 광주의 중심지역이었던 춘궁동, 이성산성 일대, 한강과 그 너머의 아차산성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지점에
설치된 방어시설이다. 남한산성 서문에서 북문을 연결하는 성벽 바깥쪽으로 돌출된 능선에 성벽과 여장, 포대를 설치한 옹성으로
그 둘레는 315m이며, 73개의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의 연주봉 옹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었던 것을 고증을 통해서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장경사 신지옹성이다. 장경사에서 수어(守禦:信地)를 담당하는 옹성이란 뜻이다.
동쪽성벽은 해발 501m인 망월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따라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온다.
지형상 성의 안쪽은 경사가 완만한데 비해 성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하고, 굴곡이 심해 성을 방어하는데 유리한 지역이다.
그러나 동성지역은 병자호란 이후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청군은 동성 밖에 있는 벌봉에서 성 내부를 들여다보며 작전을 수립하였고, 한봉에는 대포를 설치하고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동벽의 여장 대부분이 훼손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동벽에는 한봉성 정상부를 겨냥하는 포루가 설치되고 장경사 신지옹성이 신축되었다.
장경사 신지옹성이 위치하는 곳은 동벽의 중간부분으로 해발 489m 지점이다.
이곳은 남쪽으로 뻗어내려오는 산능선의 한갈레가 동쪽으로 뻗어나가면서 정상부에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성벽은 다른 옹성과 마찬가지로 원성과 높이를 달리하여 원성의 기저부와 옹성의 여장부분이 거의 같도록 하여 쌓았다.
이 옹성은 전체 둘레가 159m 이며, 성내부의 면적은 1,447㎡ 남한산성에 설치된 5개의 옹성중 남옹성2와 남옹성1에 이어
세 번째로 규모가 크다.
기록에의하면 이 옹성은 둘레가 127보에 여장이 40개라 하였다. 127보는 아마 周尺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주척1척을 20.81cm 하면 158.57m로 실측치인 159m와 거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옹성은 2암문을 통하여 연결괴도 있으며, 붕괴된 곳이 많고 잡목으로 뒤덮여 있다.
성벽은 완경사면을 따라 체성벽에 접하는 부분에 비해 약 7m 정도의 고저차를 이루며 67m 정도 내려와 능선 말단부를 따라
회절하여 폭 28m 정도를 이루고 다시 일직선으로 체성벽에 연결되고 있다. 성벽의 동쪽말단부에는 체성벽에 2개소의 포루를
구축하였다.
옹성의 동쪽 말단부에 설치되어 있다. 체성벽에 장방형의 포루를 구축하였다. 포루는 2개가 남북방향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입구는 폭 140cm , 높이 60cm 정도이며, 길이는 300m 이고, 좌벽에는 폭100cm 에 깊이 80cm 정도의 耳房을 설치하여 화약이나
무기등을 저장할 수 잇또록 하였다 포혈은 폭50cm 높이 35cm 정도의 장방형이며, 외부의 성벽 하단에서 228cm 지점에 있다. 옹성의 끝부분은 여장하단부까지의 높이가 은 높이 440cm 이며,7단 정도가 구축되어 있는데 각단은 바른층 정연하지만 각증의 눈금이 일치하지 않으며, 두께 35-40cm 에 폭40-60cm 정도의 정방형에 가까운 성돌을 사용하였다.
성돌의 폭과 두께의 비는 대체로 0.9~2.4 정도에 걸쳐 있는데 대체로 1.2내외의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성돌은 거의 정방혀에
가까운 모양으로 변해 있다. 특히 원성성돌의 두께가 20cm 내외임을 감안한다면 1.5배 이상 두터워졌음을 알 수 있다.

옹성의 내부에는 성벽수어 군사를 위한 건물이 여러동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정상부에는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
확인하기 어려우며, 옹성 남쪽성벽에는 1개의 수구가 설치되어 성내의 물을 밖으로 배출시키고 있다.
長慶寺信地瓮城은 인조2년(1624) 원성 축성당시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16년(1638)년 원성에 대한 증개축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다른 옹성들과 함께 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최소한 숙종19년(1693)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남대학교 소장의 「남한산성도」에 장경사신지옹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영조27년(1751)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해동지도」에는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초, 측히 산성내의 제구조물에 대한 대대적인 중수작업이 실시되는 영조24년(1748)년에 신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이 경우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출입하기 위하여 구축한 2암문도 함께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옹성과 연결되는 곳에는 대부분 치(雉)가 있다.
제 2남옹성 앞의 치(雉)를 앞에서 본 모습이다. 치는 꿩 치(雉) 자이다. 숲에서 꿩이 몸을 잘 숨기는데서 유래한 이름인 듯 하다.
본성에서 4각형으로 돌출된 형태로 저 곳에서 병사들은 몸을 숨기고 접근하는 적병을 공격하는 시설이다
2남옹성은 둘레가 318m이며 옹성 끝에 87개의 여장이 있었다. 이 옹성은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에는 포루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다. 포루는 동서남 3방향으로 3개씩 9개가 설치되어 있다.

제2남옹성 치에서 내려다 본 제 2남옹성이다.
제 2 남옹성은 3개의 남옹성 중 가운데 위치하고, 둘레가 318m에 다른 옹성과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옹성 끝에는 동, 서, 남 방향으로 3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고 남한산성 5개의 옹성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제1남옹성은 둘레가 426m이며 옹성 끝에는 7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원성과 연결되는 시축지점은 약간
넓게 벌어졌다가 가운데는 잘록하고 끝부분은 다시 넓어져 뭉툭하며 옹성 중간 부분에는 장대가 구축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