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6년 만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종을 거쳐 태종이 집권을 한다.
그리고 그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 세자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를 원치 않았다.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해 경거망동한 행동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자신의 뜻대로 폐세자가 됐다.
양녕을 세자 자리에서 폐한 태종은 총명한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양녕은 언제나 왕위를 빼앗을 수 있는 인물로
정치적 분란의 가능성을 우려한 신하들의 감시와 난언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조금만 잘못을 해도 격렬하게 탄핵했다.
세종은 '양녕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보고도 종종 들었지만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고
단 한 번도 민감하게 반응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1년에 한 번 정도 형 양녕대군을 불러 우애를 나눴다.
세종 20년(1438) 1월에는 양녕대군을 서울에서 살도록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서울과 이천을 오가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세종은 양녕대군을 감쌌고, 양녕대군 역시 동생의 믿음에 보답해 오해받을 행동을 결코 하지 않았다.
항상 한강 남쪽에서 지내며 한강을 넘지 않았다. 그 시절 도성은 한강 이북이었다.
양녕대군은 도성을 떠나기 전 한강 남쪽 강둑에 서서 한양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며 북악을 향해 절을 했다.
“나의 동생 충녕아. 네가 내 대신 임금이 되어서 고생을 많이 하는구나.
…우리 형제 중 나나 효령대군은 장수할 것이다마는 너는 온 정력을 쏟아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니 우리만큼 장수를 하랴? 미안하오 상감마마.”
이제 영원히 한강 쪽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가 살 것이며, 한강을 절대 넘지 않겠다는 약조의 의미였다.
임금의 형인 양녕대군은 그의 처신을 잘 알고 방배하고 떠났으니 양녕대군이 ‘등지고 떠난 동네’라 해서
그 곳의 이름은 오늘날 방배동이 되었다.
-2013년 서울스토리텔링 관광명소화 프로젝트 <한강이야기자료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