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암흑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安씨 부인- 나의 어머니
안영희
미국과 쏘련의 이념적 충돌의 최전선, 참전 22개국에 무려 100만명 이상이 사망한 한국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 남편과 집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젖먹이까지 줄줄한 어린 자식들과 함께 팽개쳐져 있었다.
도청 가까이 있었던 일본식 목조의 이층집, 엄마의 비단 치마폭에 달려 시장을 따라가거나 이웃아이랑 길 하나 건너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한 언니이 체조시간을 구경하러 다녔던, 층백나무 울타리 울울한 유년의 그 집까지가 , 돌아보면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근심걱정 몰랐던, 눈물너머 반짝이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신문도 방송도 일상으로 접할 수 없던, 그러나 변화와 자유의 열망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던 해방의 분방한 물결 속에서, 고작 스물아홉 설흔 쯤의 젊은 아버지의 집 2층에는 늘 아저씨들이 있었고, 총을 멘 순사들은 일중 필수업무인양 날마다 찾아와 현관 앞 모과나무 그늘에서 집으 보며 놀고 있는 어린 내게 물었다. “얘 너의 아버지 집에 있냐? 있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찾아와 물었다. 그러나 안 계신데요, 안 계세요, 안 계세요…, 학습됀 5살의 내 것짓말 뒤에서 뿌리깊은 차별과 부패 만연한 세상 뒤엎고 싶은, 혁명의 피 들끓는 출구 없는 젊은이들에게 맑스, 레닌으로 불을 놓는 동경유학생 출신의 선생들이 있었던 듯, 시대의 몰이짐승이 되어 사라져버린 젊은 아버지의 뒷자리, 언제라도 배가 고픈 부재한 아버지의 뒷자리 주변엔, 엄마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와세다니, 명치대 출신의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뭣 모르고 바람결 살랑이는 계절 고모 손에 이끌려 나들이 나선 철부지 도시 아이였던 나는, 전쟁이 끝나고도 대책없이 남의 시골집에 더부사리로 전락한 체 마냥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 대신 고모부 이름이 보호자란에 올려진 체로 간신히 허리에 책보를 매었지만.
"난리통에 새끼들 데리고 어디서, 어느 길바닥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고모의 붉은 울음 속의 한 맺힌 탄식은 내가 국민학교 5학년이던 해 생사를 몰랐던 어머니가 보퉁이를 이고, 동구 밖으로부터 걸어듦으로 해서 끝을 맺었다. 어머니의 그 보퉁이에는 검은 고무신 밖에 신어본 적 없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일러 복과 윤기 자르르한 인견의 멜빵치마, 그리고 내년엔 중학교를 가야 한다고, 언니가 공부했다는 전과도 한 권 담겨져 있어 나를 감동시켰다. 뿌렁지 내 뽑힌 어머니에게는 나 말고도 아이가 셋이나 달려 있었음에도, 다음 해엔 내가 윗 학교에 진학할 거라는, 그땐 집으로 돌아갈 거라는 약속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그리도 오랜동안 남의 집에 얹혀져 숨어 울었던 , 기약없는 어린 불행에게 반짝이는 희망을 선사하고, 고모의 눈물을 거두어 주었다.
외할아버지는 3개 고을을 아우르는 훈장선생님 이셨다. 그의 막내딸인 어머니를 무릎에 앉히시곤 부디 봄을 두 번이나 살거라, 살거라 며, 이름을 이춘二春이라 지어주시는 등 몹씨 사랑 하셨다 했다. 그런 이유들 때문인지 끼를 굶으면서도 넷씩이나 되는 여자아이들에게 무모하다시피 어머니는 가방을 들려 주셨다.남이 보기엔 그것은 거의 실현 불가능의 맹신이었다. 전쟁이 샅샅이 난장 치고 간 아수라 속에서 공부는 커녕 하나뿐인 자식도 버리거나 팔자를 고쳐가는 남편 잃은 어미들이 비일비재 했으므로.
_마을에서 담벼락이 가장 긴 집.대문 중문을 다 열고 들어가서야 둥글게 쌓인 노적까리가 나오는 큰 집을 찾아간 어린 언니 손에, 시든 고구마 순 두 단을 내어주며 저 따위 가시네들 죄다 식모로나 줘버리지 왜 귀찮게 찾아오냐?고 소리치는 큰집 문깐의 개밥그룻엔 쌀밥이 느글거리더란 언니의 말을 전해들으신 어머니는, 내 길바닥에 쓰러지더라도 기어이 아이들을 가르치리라, 다시는, 내 다시는…, 하며 이를 악물었다고 하셨다.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내가 어머니에게로 돌아왔을 때, 광주의 왕 변두리에 방 한칸을 얻어 든 옆마당에서 손목이 유난히 가늘고 창백한 중학생 언니가 식칼로 땔감을 뽀게고, 부엌엔 사과궤짝 하나가 찬장으로 놓여 있었다.
언니는 그 가느다랗고 창백한 손으로 어머니를 도와 피난민 열차가 쉬어가는 막간에 물주전자를 들고 올라가 물을 팔았고, 역 철조망을 숨어 들어가 조개탄을 훔쳐 왔으며, 신문을 돌린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잠든 머리맡에서 밤새도록 재봉틀을 돌리거나 , 보따리를 이고 나가 몇 날이고 집에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 시절 운송수단이라곤 사람과 짐이 뒤엉크러진 버스가 있긴 했으나 비포장도로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기가 일쑤고, 더러는소구루마 같은 게 있긴 했으나, 일상적으로는 목아지가 휘게 이어 나르는 아낙들의 머리였으니,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나간 짜투리 비단이거나 양말따위의 값이 아마도 거의가 지폐 아닌 곡식들이었겠기로, 새끼들을 위하여 어머니는 얼마나 필사적으로 폭염 아래서도, 눈보라 속에서도 그것들을 머리로 이어 날랐겠는가!
매순간 눈 못뜨게 칼날치는 폭포의 뒷벽에다가 둥지를 틀어놓고,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이기 위하여 시속 170킬로로 쏟아지는 폭포 속으로 돌진하는 이과수의 칼새처럼, 어머니의 삶도 매순간 가히 목숨을 거는 일이었으리라.
목숨을 걸지 않으면 감당해낼 수 없는 한 여인의 초극의 의지로 어머니 가신, 이 한 세상의 뒤에 어머니의 네 딸들은 저마다 이름을 갖고, 세상 속에 당당히 섰다. 운명이 밀어뜨릴 때마다 혼신으로 뒤틀었으므로 가학이었던 삶도 마침내는 소화해, 올려다보면 온몸 고운 분홍빛이 되어 선, 아름드리 소나무들처럼.
그러나 낯선 어느 마을 어느 거리에서든 만개한 이팝꽃 환한 꽃가지들을 막닥뜨리면 저만큼 어디쯤 곡식자루를 인 배고픈 어머니가 가시는 듯, 싸하게 밀려드는 통증으로 걸음을 멈추곤 한다.
꽃 피는 봄을 두 번씩이나 살라고 축복하여 이춘二春이란 이름을 주신 외할아버지는 간과하셨던 것이다. 찬연한 생명의 계절 봄은, 죽음의 잔혹한 겨울을 거친 뒤에야 터지는 축복인 것을.
정신이 좀 혼미해지신 무렵 모시고 산 가족나들이의 밥상에서도 자신릐 밥그릇에서 밥 한술을 고봉으로 퍼서 가차없이 장관사위의 밥그릇에 부쳐주시던 어머니를, 사람들은 진즉서부터 安씨 부인이라 존경심을 담아 불렀다.어머니 심부름으로 싻바느질 외상값을 받으로 가도, 등록금을 꿔달라고 심부름 간 집에서도.
동생과 내가 일군 용문의 시골집 마당에 올 해는 복숭아 꽃이 만개했다. 그 꽃그늘에 앉아 전쟁의 뒷 세상 젖먹이를 등에 업고 복숭아 바구니를 이었던, 젊은 어머니를 추억했다. 그해의 잔혹한 햇볕에 눈을 상한 저 갓난 아이, 안경잡이 동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