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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전
● 전체 줄거리
[외부 이야기①] 선조 연간의 어느 봄날, 선비 유영이 춘흥을 못 이겨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안평대군의 구택(舊宅) 수성궁터에 놀러가 문득 잠이 든다. 한 곳에 이르니 어떤 청년과 여인이 유영이 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이하여 그와 함께 유흥을 즐긴다. 청년은 김 진사, 여인은 안평 대군의 궁녀[운영]이라 성명을 밝힌 그들은 자신들의 슬픈 사연을 털어놓는다.
[내부 이야기①] 어느 날 안평 대군과 궁녀들이 시를 짓고 있는데 김 진사가 찾아와 함께 어울려 시회(詩會)를 열게 된다. 그때 운영은 김 진사의 재주와 용모에 마음이 끌려 그를 사랑하게 되고 김 진사 또한 운영에게 정을 느끼게 되어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다. 안평 대군은 이 관계를 눈치채고 힐문하지만 운영은 죽을 각오로 사실을 부인하고 자백하지 않는다.
[내부 이야기②] 김 진사는 밤마다 궁장을 넘나들며 운영과 즐거움을 나누나, 결국 두 사람의 일은 궁인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마침내 운영은 탈출을 계획하고 김 진사의 종인 특(特)을 통하여 그의 가보와 집기들을 모두 궁외로 옮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안평 대군이 운영을 하옥하자 그녀는 자책감으로 그날 밤 비단 수건으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다.
[내부 이야기③] 운영이 죽자 김 진사는 운영이 지녔던 보물을 팔아 절에 가서 그의 명복을 빈 다음 식음을 전폐하고 울음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운영의 뒤를 따라 자결하고 만다.
[외부 이야기②] 이야기가 끝난 뒤 세 사람은 다시 술을 마신다. 유영이 술에 취해 졸다가 문득 산새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새벽이 밝아 있었다. 김 진사와 운영은 보이지 않고 다만 두 사람의 일을 기록한 책자만이 무료히 놓여 있었다. 유영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상자에 감추어 두고, 그 뒤로는 침식을 전폐하고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사람들은 그 마친 바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 핵심 정리
▶ 지은이 : 미상
▶ 시대 : 조선 후기 숙종 때
▶ 배경 :
시간적 -조선 초기~중기
공간적-안평대군의 사궁인 수성궁, 천상계
▶ 갈래 : 염정 소설, 몽유 소설, 액자 소설
▶ 구성 : 액자식 구성(외화 : 유영이 운영과 김 진사를 만남⇒내화(환상) : 김 진사와 운영의 사랑⇒외화 : 운영과 김 진사의 일을 기록한 책과 유영만 남음)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사상 : 신선 사상, 불교 사상, 무교 사상
▶ 특징 :
* 고전 소설 중 유일한 비극 소설
* 작품 구성의 주된 매체가 ‘시(詩)
* 봉건적 애정관을 탈피한 자유연애 사상을 보여 줌
* 등장인물에 대한 개성적 성격 표현과 대화체의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생동감 있는 구성과 함께 작품에 흥미를 더해 줌
▶ 주제 : 신분을 초월한 남녀간의 비극적 사랑과 인간성 해방
▶ 고전 소설 속 시 삽입의 효과 : 고전 소설에서 삽입되는 가요나 시가는 인물들의 원망이나 한탄 등의 심리를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문체에 변화를 주어 글의 단조로움을 피하는 효과를 얻고, 내용이나 의미를 뒷받침한다. <운영전>에서는 두 주인공이 서로를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심리나 정서를 보다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궁녀 운영과 김 진사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염정 소설로, 전형적인 고전 소설과 달리 비극적으로 결말을 맺는다. 신분과 인간적 애정 사이에서 갈들을 겪다가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표면적 이야기로만 본다면 이들은 비극적 인물이요, 좌절된 인간상이지만 순수한 애정마저 감추어야 하는 유교적 질곡(桎梏)과 궁녀의 억압된 삶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면적 의미를 살펴본다면 단순한 비극성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는 비인간적 규제와 형식에 매인 삶을 벗어나 진정한 자아 찾기를 위한 방면이었기 때문이다.
▶ 등장 인물의 성격
* 운영 : 비인간적인 삶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약한 궁녀이자 순결하고 뜨거운 정열과 지성을 지닌 여인
* 김 진사 : 정서적이며 감상적인 인물. 운영과의 순수한 사랑의 성취가 현실적 장벽에 가로막히자 운명의 뒤를 따라 죽음으로써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영원한 사랑을 획득함
* 안평대군 : 겉으로는 품위 있는 행동을 보이며 도덕군자인 척하지만 밑바닥엔 위선이 깔려 있는 전근대적 사고를 지닌 인물
▶작품 감상 - 순수한 사랑의 표현
‘운영전’은 조선 후기의 애정 소설로 작자, 연대 모두 알려져 있지 않다. ‘운영전’ 역시 대개의 고전 소설이 그렇듯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문본과 한글본이 모두 전해지고 있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도덕의 나라,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특히 조선 시대는 유교를 국시로 삼아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엄격히 강조하였다. 따라서 남녀간의 자유로운 교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 전해지던 아름다운 연애담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녀 간의 애정 문제가 우리들의 이야깃거리에서 빠질 수는 없다.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자 인류의 영원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윤리와 도덕으로 억압한다 하더라도 인간 내면에 흐르는 사랑의 본성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 수는 비록 적었지만 ‘금오신화’와 같은 애정 소설이 조선 전기에도 창작되었던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애정 소설의 창작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소설 속에서 도피처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국토와 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온 백성을 실의와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이는 인간성의 황폐화를 가져와 인간의 정서를 메마르게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소설 속에서의 간접 체험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애정 소설이 많이 창작된 데에는 실학사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17세기 이후 발생한 실학사상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공용성(功用性, utility)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리하여 실학사상으로 인해 형식적이던 문학이 실질적인 문학으로 변모하였고, 사람들은 이제까지 억눌렸던 순수한 정감을 소설을 통해 표출하기 시작했다.
‘운영전’은 안평대군의 궁궐인 수성궁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지는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을 다룬 애정소설인데, 고대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비극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고대 소설이 다루고 있는 주제인 ‘권선징악(勸善懲惡)’에서 벗어난 개성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성은 작품의 구성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운영전’은 흔히 ‘수성궁 몽유록’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수성궁 몽유록’이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이 ‘운영전’은 몽유록계 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유영과 김 진사가 나타나 자신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후 유영은 꿈에서 깨어난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운영전’은 일반적인 몽유록계 소설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몽유록계 소설과는 다른 주인공이 현실과 꿈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나 ‘운영전’은 현실에서는 유영이 주인공이지만, 꿈속에서는 운영과 김 진사가 주인공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의 다원화는 인물의 개성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운영이 자란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시점의 혼란이 나타나는 부분도 있다.
또한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 이야기는 액자 소설의 형식을 취하여 유영과 운영 · 김 진사의 대화 속에서 서술되고 있다. 이는 운영과 김 진사가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직접 함으로써 사실성을 부각시켜 감동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성은 궁중 안에 있는 궁녀들의 생활 묘사에서도 나타난다. 궁녀들의 갇힌 생활과 그로 인해 몸부림치는 사랑의 한(恨)은 ‘운영전’의 비극성과 함께 사실성을 한층 더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운영전’은 인간의 본성을 가로막는 제도의 모순과 궁녀들이 억눌린 생활 묘사 등 그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생생히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실제로 역사책에 나오는 ‘유영’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하여 작품의 현실감을 더해 주고 있기도 하다.
운영과 김 진사는 결국 자유로운 사랑을 구속하는 사회제도적 올가미에 굴복하고 만다. 그러나 이는 영원한 굴복이 아니었다. 땅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하늘에서나마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이룬 운명과 김 진사의 사랑은 헛되이 사라져 버리는 인간의 부귀, 영화에 대비되어 그 영원성이 더욱 빛나고 있다. 영원히 계속되는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 이처럼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는 위대한 것이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운영전’에서는 인간의 본성인 사랑은 영원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사회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운영전’은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귀나 영화, 그리고 사회 제도도 아닌 우리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자유로운 인간성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 구성상 특징: 이 작품은 유영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와, 유영과 두 사람(운영과 김 진사)간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이중 구조를 띤 액자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단 유영이 들은 이야기는 꿈속의 사건이 아니라 신비한 환상 체험으로 처리되어 있어 다른 몽유록 소설과는 다른 구조를 보인다. 또한 대부분의 몽유록계 소설이 현실과 꿈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과는 달리, ‘운영전’은 현실에서는 유영이 주인공이지만, 환상 체험 부분에서는 운영과 김 진사가 주인공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러한 다원화는 인물의 개성을 더욱 뚜렷이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 비극성: 이 작품은 조선 시대의 유일한 비극 소설로, 고전 소설의 보편적 주제인 ‘권선징악’에서 벗어난 개성적인 작품이다. 김 진사와 운영,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유영이 모두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운영은 김 진사와의 사랑이 안평 대군에게 탄로나자 옥중에서 목을 매어 죽었고, 김 진사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따라 죽는다. 그리고 둘의 사랑 이야기를 들은 유영도 망연자실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결국 행방불명되고 만다.
● 출제목록 : 2007년 9월 1학년 성취도
● 작품 읽어보기1
잠시 후에 술이 깨어 얼굴을 들어 보니 놀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없었다. 그 때 한 가닥 부드러운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 왔다. 유영은 이상히 여겨 일어나서 찾아가 보았다. 한 소년이 절세 미인과 마주 앉아 있다가 유영이 옴을 보고 흔연히 일어나 맞이하였다. 유영은 그 소년을 보고 물었다.
"수재(미혼 남자를 존대하여 이르는 말)는 어떠한 사람이관대 낮을 택하지 않고 밤을 택해서 놀고 있느뇨?"
소년은 빙긋 웃으며
"옛사람이 말한 '잠깐 만나도 오래 사귄 친구와 같다'는 말은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인이 나지막한 소리로 아이를 부르니, 시녀 두 사람이 숲 속에서 나왔다. 미인은 그 아이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 우연히 오랜 친구를 만났고, 또 기약하지 않던 반가운 손님도 만났으니 오늘 밤을 쓸쓸하게 헛되이 넘길 수가 없구나. 그러니 네가 가서 주찬을 준비하고 아울러 붓과 벼루도 가지고 오너라."
두 시녀는 명을 받고 갔다가 잠시 후에 돌아왔다. 가볍게 왕래하는데 마치 날으는 새와 같았다. 유리로 만든 술병과 술잔, 그리고 신선주와 진기한 안주 등 모두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세 사람이 석 잔씩 마시고 나자, 미인이 새로운 노래를 불러 술을 권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깊고 깊은 궁 안에서 고운 님 이별하니
천연(하늘이 맺은 인연)은 미진한데 뵈올 길이 바이 없다
꽃 피는 봄날 애태우기 그 몇 번이뇨
밤마다의 상봉은 꿈이지 참은 아니었네
지난 일은 허물어져 티끌이 되었어도
부질없이 나로 하여 눈물짓게 하누나
노래를 마치고 나서 한숨을 쉬면서 흐느끼니 구슬같은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 유영은 이상히 여겨 일어나 절하고 물었다.
"내 비록 양가의 집에 태어난 몸은 아니오나, 일찍부터 문묵에 종사하여 조금 문필의 공을 알고 있거니와, 이제 그 가사를 들으니 그 격조가 맑고 뛰어났으나 시상이 슬프니 매우 괴이하구료. 오늘 밤은 마침 월색이 낮과 같고 청풍이 솔솔 불어오니 이 좋은 밤을 즐길 만하거늘, 서로 마주 대하여 슬피 우는 것은 어인 일이오. 술잔을 더함에 따라 정의가 깊어졌어도 성명을 알지 못하고 회포도 펴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구료."
유영은 먼저 자신의 성명을 말하고 강요했다. 이에 소년은 대답했다.
"성명을 말하지 않음은 어떤 뜻이 있어 그러하온대, 당신이 구태여 알고자 할진대 가르쳐 드리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려우리까마는 말을 하자면 장황합니다."
그러고는 근심 띤 얼굴을 하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의 성은 김이라 합니다. 나이 십 세에 시문을 잘 하여 학당에 유명하였고, 나이 십사 세에 진사 제이과에 오르니 일시에 모든 사람이 김 진사라 부릅디다. 제가 나이 어린 호협한 기상으로 마음이 호탕함을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또한 이 여인으로 하여금 부모가 내린 몸을 받들고서 마침내 불효의 자식이 되고 말았으니, 천지간에 한 죄인의 이름을 억지로 알아서 무엇하리까. 이 여인의 이름은 운영이요, 저 두 여인의 이름은 하나는 녹주요, 하나는 송옥이라 하는데, 다 옛날 안평대군의 궁인이었습니다."
유영은,
"말을 하다가 다 하지 아니하면 처음부터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안평대군의 성시의 일이며, 진사가 상심하시는 까닭을 자상히 들을 수 없겠소?"
하고 청했다. 진사가 운영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 때의 일을 그대는 능히 기억할 수 있겠소?"
운영은
"심중에 쌓여 있는 원한을 어느 날인들 잊으리까. 제가 이야기해 볼 것이오니, 낭군님이 옆에 계시다가 빠지는 것이 있거든 보충하여 주옵소서."
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략).....
● 작품 읽어보기2
남대문 밧 쳥파(靑坡)에 유영(柳泳)이란 선비가 잇다. 그는 빈한(貧寒)하야 맛처 입을 의복도 업고, 흣터진 두발에 무든 얼골로 거리에 왕래함으로 여러 유객(遊客)들에게 비읏슴과 만흔 천대를 바들 이다.
만력 신축(萬曆辛丑) 춘삼월(春三月) 긔망에 유영이 춘흥을 못 이기여 홀로 한 병 술을 들고 처자도 업고 의지 업는 고독한 몸이 표연이 궁문(宮門) 안으로 드러갓다. 보는 자마다 유생에 의복이 남루함을 손구락질야 비웃지 안는 자가 업섯다. 그러나 유생은 그 말에 굴복지 안케다는 긔개(氣槪)를 가젓스나, 그래도 무료한 듯이 얼골을 불킨 채로 후원으로 드러가 놉흔 곳의 올나가서 사면을 바라보니, 새로이 병화지변(兵火之變)을 경과한 오늘날에 장안의 궁궐과 만성의 화려한 가옥이 폐퇴(廢頹)되야 지나간 옛날에 성관(盛觀)을 볼 수 업고, 다만 현실(現實)에 보는 무너진 담과 여진 긔와가 벌려 잇고, 팔안 풀들만 변함이 업시 싹이 나서 잇슬 이오, 모든 관렴(觀念)은 말할 것 업시 압흐기만 할 이다. 그리고 동랑(東廊)의 두어 간이 초연이 잇서 전일을 말하는 것 갓다. 유생은 만고 성쇠의 옛자최를 감회하면서 느린 걸음으로 서원(西園)에 드러가니, 천셕(泉石)이 유슈(幽邃)한 곳에 백훼(百卉)가 총생(叢生)하엿는데, 이 거림자는 맑은 못 속에 러저 잇고, 만디 락화(滿地落花)의 사에 자최가 업스며, 다만 바람이 사르를 불 마다 복욱(馥郁)한 향긔가 사람의 코를 스치고 갈 이다. 유생은 호올로 바위 우에 안저 침착한 어됴로 소동파(蘇東坡)의
我上朝元春半老 내가 상조원 춘에 반나마 늙어스니
滿地落花無人掃 만디락화에 쓰는 사이 업도다
하는 시구(詩句)를 읇흐며, 가지고 온 쥬호(酒壺)를 글느고 술을 라 일 배 일 배 부일 배로 한 병의 술을 모다 마신 후, 바위 한 모통이에다가 머리를 의지하고 자긔도 모르게 잠이 깁히 드럿다. 얼마 후에 전신의 랭긔가 치올라 번적 잠이 엿다. 잇에는 유산객들도 다 흣터저 가고, 명랑한 달이 교교(皎皎)히 우쥬를 빗칠 인데, 바람으로좃차 아름다웁고 연한 목소리가 들이닌다. 유생은 하도 이상하야 좌우를 삷혀본즉, 거긔에는 생각밧게 한 소년과 절세의 미인 두 사람이 잇다.
유생은 깃거움을 못 이기여 한헌을 베푼 후 무러본다.
“수재는 엇더한 사람인지 어렴푸시 생각이 나는구려.”
하고 말하엿다. 소년은 얼른 대답하기를,
“고인의 말슴한 바 ‘경개함도 옛거와 갓다’는 것은 이 일을 두고 이름이로소이다.”
두 사람은 임이 십 년간 지우지긔와 가티 미인과 자리를 한가지하야 심즁의 먹은 마음을 말하려 한다.<중략>
김생은 여기지 적고 붓을 던지며 두 사람이 서로 붓들고 운다. 유생은 위로하면서,
“두 분이 여기서 만남은 지원한 정성 덕임니다. 원수들도 임의 제하고 분긔도 스러젓는대 웨 이가티 비통하십니. 다시 두 번 인간의 태여나지 못함을 슬어하십니.”
김생은 눈물을 거두고,
“우리 두 사람은 모다 원한을 품고 죽엇다 하지만 디하의 낙이 인간의 낙과 갓지 안슴니다. 허물며 텬상의 낙을 누리고 출세함을 원한 바는 아님니다. 다만 오늘 밤에 비통함은 대군의 옛궁에 주인이 업고, 오작이 슯히 울며, 인적이 어지엇스니 나의 슯흠이 지극함이오, 한 병화지변을 당한 후 화옥은 재가 되고, 장담은 문어젓스며, 다만 계화 분불(階花芬茀)하고, 뎡초(庭草)는 번영하야 봄빗이 옛의 경치를 고치지 못하나, 인사의 변키 쉬움을 생각하고 슯흠을 이기지 못하나이다.”
“그러면 당신들은 텬샹의 사람이심니?”
“우리들은 텬상의 선인으로 오래동안 옥황상뎨 안전에 시봉하고 잇섯슴니다. 하로날 상뎨서 태쳥궁(太淸宮)에 어좌하사, 우리들에게 명하시기를, ‘옥원(玉園)의 과실을 라.’ 하심에 이에 운영과 사통한 죄로 인간에 보내사 인간고(人間苦)를 격게 하시드니, 지금은 상뎨서 전죄를 사하사 삼쳥(三淸)의 두시매, 다시 안전에 뫼시게 되엿나이다. 에 표륜(飇輪)을 거두고 진세의 옛노름을 두 번 하는 것이 올시다. <후략>
<‘영창서관본(永昌書館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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