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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9일 경상남도 창원
나는 가끔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하며 그것을 뚫어지게 응시하곤 한다.
과연 이 손바닥에는 여지껏 무엇이 쥐어졌었던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쥐어졌던 것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가에 대해서...
또한 앞으로는 무엇이 쥐어 쥘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결국 그 손이 다시 비워지게 될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늘상 잡히지 않는 것을 잡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듯 하다.
그 ‘허상’이 현실이라는 단단한 껍질로 위장되어 있기에
자신이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추호도 깨닫지 못하면서...
그리하여 쥐어질 수 없는 것을 탐하고, 이루워질 수 없는 것을 쫓는 우리의 삶은
늘상 허기에 가득차 있는 듯 하다.
왜 우리는 탐욕으로 꽉 쥐어진 그 손을 펴서 인간을 보듬어 안지 않는 것이며,
왜 우리는 허세를 채우기 위해서 그 위에 올려 놓여진 것을 움켜 쥠으로
그것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가...
인생은 바람인 것을...
[ 바람 ]
[진해에서 창원 가는 길...]
진해와 창원을 가르는 산맥의 '중심점' 안민고개 하나를 넘으면 창원이 나온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봤을 때는 저 꼭데기까지 어떻게 올라갈까하며 막막했다.
하지만 일제시대 때 부터 심어져 있었다는 굵직한 벚꽃나무 그늘에 목조 등산로가 고개 끝까지 잘 닦여져 있었고,
경사도 가파르지 않아서 한 시간 가량 걸어서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안민고개 올라가는 전경]
고개로 올라갈 것에 겁을 집어 먹고 터널로 들어가려다가 말았는데,
터널로 가려 했으면 돌아가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퀘퀘한 공기’ 때문에 숨이 막혔을 것이다.
[안민고개에서 내려다보이는 창원전경]
안민고개 정상에서 생태다리 를 넘어 창원시에 입성했다.
[생태다리 - 산 중심을 가르는 도로로 인해 과거 하나였던 생태계는 둘로 분리되며
야생동물들이 그간 적응해왔던 생태에 심각한 교란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이를 최소화하고자 야생동물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이렇게 만들어 놓곤 한다.]
전망대에서는 창원시가 내려다 보였다.
[안민고개 정상에서본 창원시가지의 모습]
전망대 한편에서 누워서 쉬다가 다시 창원 시가지를 향해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창원으로의 내리막길도 목조로 등산로를 잘 닦아 놓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나무그늘이 빈약했다.]
[창원으로 내려가는 중에... 가지런히 정렬된 바닥의 틈 사이에 삐죽 튀어 나와서
등산객들로부터 고초를 많이 당한 풀잎의 모습. 이것은 내 창원활동에 대한 암시였다.]
(꼴랑 창원가는 일지 전부)
창원시
[ 경상남도 - 창원의 지리적 위치]
이곳 창원은 인구 50만의 중대형 도시이기는 하지만, ‘길 찾기’는 상당히 수월하다.
왜냐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방위산업단지의 중심으로 만들면서 그만큼 계획적으로
길을 잘 닦아 놨기 때문이다. 창원은 호주의 켄버라를 본땄다고 한다.
8차선으로 12km가 직선으로 뻗은 창원대로가 중간에 있고, 그 남쪽은
주로 ‘창원국가산업단지’이고, 그 북쪽에는 관공서, 상가, 주택 등이 밀집되어 있다.
경남에서는 ‘부산/울산 광역시’ 빼고는 가장 큰 도시라서 경남도청부터 시작해서 각종
‘도’급 관공서/기업/금융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다.
큰 도시지만, 길을 물으면... ‘이곳(창원대로)으로 쭉가다가 XX건물 나올 때
좌회전 해서 쭉~ 가다보면 나와요’라는 식의 ‘간략한’ 답변을 얻곤 한다.
물론 간략한 설명이 가까운 거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어서
‘좀 멀어서 차타고 가야해예’라는 부언을 듣곤 한다.
국가 권력에 의한 도시 계획의 결과로 인해서 발생되는 ‘폐해’?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당히 ‘박’한 모습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이곳 토박이인 한분의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그것은 ‘창원의 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얘기를 하신다. 원주민이 5만여명의 도시에다 집중적인 개발을 한다고 길을 닦고
공장을 세우다 보니, 과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문화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하고,
자본의 논리가 도시를 이 가득 매우고 있는 듯했다.
창원 상담시장 주변은 엄청난 규모의 상가밀집지역인데, 어떤 이는 한국최고 규모의
상가지대라고도 한다. 특이한 것은 갑작스러운 개발 열풍으로 이곳 윤락가를 주름잡는
‘주먹’들의 경우에도 ‘토종’세력들이 서서히 성장한 것이 아니라, 서울, 부산 등의 세력이
집중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자본과 권력의 원리로 집중된 지역의 특성을
드러내는 예이다.
[ 상남시장 주변의 상가밀집지역]
아마 이로 인해서 돈 있고 힘 있으며 조직사회에서 ‘잘 적응한 이들’에게는 살기가
수월하지만, 그렇지 않은 나와 같은 이는 텐트조차 제대로 치고 묵기 힘든 도시가
되어 있는 듯 했다.
계획도시 창원을 지배하는 ‘규율’과 ‘질서’는 ‘냉혹’한 듯했다.
일 예로 창원내의 가장 큰 대학인 창원대학교의 입구에는 ‘플랭걸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 이외에 ‘학생회관’ 앞이라든지 ‘교문 뒤쪽’등의 다른 곳에는
학생들이 쓴 플랭을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여느 다른 대학에서 느껴지는
‘역동성’ ‘자유분방함’ 등을 도무지 찾아 볼 수 없게, 철저히 ‘질서’가 잡혀 있었다.
[ 질서잡힌 대학]
물론 그렇다고 창원에 짜여진 규율과 냉혹함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달리 박대를 많이 받고 아픔이 많았기는 했지만, 반대로 유달리 친절하고
사려 깊은 분들을 또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이곳 창원은 공장과 자동차가 내 뿜는 매연으로 인해서 대기오염이 상당히 심했단다.
주변을 빙두르는 산맥이 공기의 순환을 막고 있기 때문에도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한 ‘자전거환경도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그에 대한 가시적인 효과가 상당히 나타나고 있었다.
(-> 뒤에 다룸)
[ 자전거환경도시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서울시청 광장만큼 널찍한 창원광장에는
대형자전거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5월 20일
창원 마산은 예전에 셋째 형님이 계시던 곳이었는데,
오후에 창원대쪽으로 향하는 길에 용지 호수공원을 지나쳐서 가려니 예전에 형님과 함께
왔던 기억이 난다. 10몇년 전의 아스라한 기억들이 새록 새록 피어날랑 말랑 한다.
[ 용지공원의 모습]
[창원대로 주변의 작은 소공원 풍경]
사진 몇 장 찍고 창원대를 향했다.
앞서 창원대학에 학생들이 붙여 놓은 플랭이 플랭 거취대 말고는 없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다만 공단이 즐비한 ‘노동자의 도시’답게 투쟁력강한 민주노총산하 공공노조에서
해직노동자의 투쟁텐트가 건물 본부 앞에 세워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빙 둘러 관련 플랭이 붙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무질서?’함에 대해서 대학본부 측에서는 ‘고소’한 상황에
있었다.)
[창원대대학본부 앞의 전경]
어떤 사연인지를 경남공공노조 소식지를 통해서 살펴보자.
[창원대분회투쟁! 이제부터시작이다.
지난 3월 1일 15명의 계약해지로 발생된 창원대분회 고용승계 투쟁이 벌써 70여일이
넘어가고 있다. 문제의 발단도 대학본부이며, 장기간 문제 해결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대학본부의 무성의한 태도 때문이다.
2007년 1월 1일자로 감시단속적 근로자(경비)에게 최저임금이 적용되고,
이에 따라 1인당 20만원 이상 임금인상효과가 발생하자 창원대학교는 정년단축을 통해
인원을 축소하고 무인시스템을 도입하면서 현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노동자합이
수차례에 걸쳐 교섭, 간담회, 면담을 통한 합리적 해결을 요구했으나, 대학본부는
이에 응하지 않고 급기야 조합원들의 업무방해 혐으로 고소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말하는 업무방해는 나이들고 힘없는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70여일 동안
힘든 천막농성을 진행한 것이라 한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어렵고 힘든 천막생활을
하고 싶어하는가.
창원대분회는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매일 창원대학교에서 점심선전전 진행과
정우상가 및 롯데백화점 앞에서 창원시민 선전전을 진행한다. 만약 5월 중하순
신임 총장 취임에 있어 대학본부가 문제 해결 의지가 없다고 판단되면 강력한 행동전을
펼칠 것이다. 한편 창원대분회 투쟁이 공공노조와 민주노총 장기투쟁사업장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 전국적 관심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공경남 ]
[ 해직노동자분들의 대책회의 모습]
아하~ 그러고 보니 이곳은 민주노동당 전대통령후보 ‘권영길 의원’의 지역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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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정리할 것도 있고, 야영할 공간 확보 차원에서도 우선 도서관을 찾아 들어갔다.
노트북 코드를 꼿아 쓸 곳이 없어서, 도서관 입구 한쪽에 앉아서 또닥이고 있는데,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글귀가 박힌 옷을 입고 가방을 세워 놓고 있으니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인다.
한참 또닥이면서 자료 정리하다가 학교 건물 벽면을 따라서 저녁에 야영할 공간을 찾는다.
교수동 한쪽 주차장이 좀 한산한 듯 하다.
주변에는 농구하면서 쉬는 학생들이 있고, 산책을 즐기는 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야영하기에는 천혜의 공간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텐트를 치고 나서 뒷통 수 맞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 이었다.
가로등 빛 아래, 12시 넘을 때 까지 ‘산책’하는 남녀 쌍쌍과
농구하면서 쉬는 이들이 잠을 못 자게 괴롭혔다.
‘통통~’ 농구공 튀기는 소리가 저렇게 혐오스러울 줄이야...
‘저놈 자식들은 부모들이 공부하라고 등록금 대줬으면 공부나 할 것이지,
밤새 농구질이야 농구질은...’ ㅠㅜ
[길...]
진해의 구시가지는 ‘로타리’로 연결되어 있다.
‘남원로타리’ ‘중원로타리’ ‘북원로타리’가 그 좌우로 뻗은 도로와 서로 얽히고 섥혀 있다.
이 로타리는 각각 6~8개 쯤 되는 방향의 ‘방사향 통로’를 제공하는데...
진해에 있을 적에 이곳에 로타리 주변을 일주일 이상 서성댔었지만, 걸어서
고작 10분 거리 밖에 안되는 그 주변 일대에 대한 방향과 지리를 제대로 익힐 수 없었다.
한마디로 ‘직각’이 아닌 길에서는 내 ‘방향감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반면 창원의 경우는 다르다.
왕복 8차선 12Km 직선으로 뻗은 창원대로가 중심하고 있고, 그에 ‘수직’으로 길들이
교차해 있는 이유로, 길 찾기는 아주 손쉽다.
이게 내 ‘현대 사회에 적응된 방향감각’의 수준인듯 하다.
내가 ‘300여년 전쯤’에 살았다면...
숲속의 오솔길을 항시 누비며 살아야 하고 ‘대로’라고 해봤자 꾸불꾸불한 진흙 길 뿐인
그러한 시대로 돌아간다면 과연 ‘어찌 생활할까?’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내가 ‘자연상태’에서 살고 있는 동물이라면 어떤 방향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직선으로 쭉 뻗은 아스팔트 도로는 분명 인간에게 ‘문명’과 ‘기술’의 상징임에는 분명하다.
그 길은 인간 ‘이성’의 차갑고 날카롭게 단련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길’을
걷는 인간 역시 그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직선’을 통해서 이성이 다시 한번 정돈되리라...
나는 인간의 이성기능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지만, 숨 막히는 기준, 규칙, 형식, 관행,
논리는 거부한다.
나는 내가 이 ‘기술과 문명의 세계’속에 살아가는 중에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습성’이 배일 것에 대해 경계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쭉 뻗은 도로를 종종 지그제그로 걷는다.
[ 쭉 뻗은 창원대로에서 인간답게 걷는다는 것?은 지그제그로 보행이다.?]
5월 21일 창원대학교 활동
아침에 일어나 보니 텐트가 물기를 한껏 빨아들인 상태이다.
옆에 녹지가 있어서 아침에 이슬이 떨어진 것이다. 침낭 등에도 습기가 좀 배여 있었다.
내 옷이 습기를 빨아들이지 않게 조심하면서 전날 해둔 밥의 반절을 먹는다.
3일 전에 점심에 음식점에서 김치찌개 시켜 먹으면서 담은 신 김치가 반찬이다.
입을 탁 쏘는 맛이 일품이다.
7시 40분 쯤 되어서 진입로 쪽에 서니 학생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나무 사이에는 플랭을 치지는 못하고, 길 바닥에다 플랭을 펴 놓고 스티커 나눠주면서
캠페인 좀 하려니까 수위아저씨가 오셨다.
아저씨는 ‘총장님에게 허락을 맡았냐’고 물어 오신다.
아니라니 무조건 하지 말래신다.
플랭을 접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스티커만 나눠줬다.
학교버스가 종종 도착할 때는 그 앞으로 달려가서 문 앞에 서서 내려오는 학생들에게
나눠 줬는데... 엄청난 손기술? 이 요구되었다.
게중에 바로 받지 않고 조금 뜸을 들이면서 받거나, 받을 것 같이 하다가 그냥 지나치는
학생들이 있어서 리듬에 균형이 깨지곤 하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줄줄이
내리는 학생들 대상으로 해서 한 버스에 너 덧명 빼고는 다 건네는 솜씨는
‘중수’ 이상의 기술이리라~
진입로에서의 캠페인은 두 시간 정도 하고나서 주변에 ‘빨래’를 좀 빨아 널을까 해서
근처 시설물에 모여 있는 분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약간 난처해 하시며 주저하시더니 할려면 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속옷 한 세트, 활동복 한 세트를 수돗가 다라이에 넣고 부지런히 빨아 댔다.
한분이 호기심이 생기셔서 뭐하고 다니냐고 묻는다.
‘이런 저런 캠페인 하고 다닌다’고 말씀 드리니,
대뜸 ‘역마살이구만’ 하고 말씀 하신다.
전문가이시기도 하시지...
집에서 걱정 많이 하겠다고 하시면서,
‘왜 이런 것을 하고 다니냐’고 하신다.
‘앞으로 환경 재앙 때문에 후손들이 살기도 힘들 상황인데요. 답답해서 그래요.’라니,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뭔 미래의 일까지 생각하냐?’고 답하신다.
그리고는
‘정상적으로 생활하면서 사는 것이 순리이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으면서 충고해주신다.
빨래를 널어 말리고는 동아리방 돌아다니면서 설문조사를 곁들인 설명을 하고 다녔다.
동아리 방에 있는 학생들은 수업준비를 하거나 숙제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학생들이 바빠서 그런지 내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지... 내 마음까지 바빠져서 설명을
후다닥 후다닥~ 해 나갔다.
학생들 대상으로 해서 환경파국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80년 쯤 후에
환경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답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심각하게’ 느끼고 있지는 않는 듯 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본다.
‘미래’의 일은 그들에게는 다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자신의 ‘현실’과는 별개의
세계인 것이다. 전혀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그것인 것이다.
아마 현대 사회에서 멀리 내다보려 하지 않고, ‘발끝만 보고 사는 습성’이 고도화된
결과이리라.
그렇담 활동의 내용을 좀 수정해야겠다.
막연히 80년 후의 환경파국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환경오염/생태계붕괴조짐에 대한 사례를 많이 확보해서 좀 실질적인
설명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 반응을 민감히 수용하면 할 수록 해야할 많은 것들이 보여진다.
[ 피곤한 하루...]
오늘은 꽤 피곤한 하루를 지나왔다.
확실히 ‘대도시’에서는 ‘소도시’나 ‘시골’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을 종종 느낀다.
고도의 효율성이 기반이 된 ‘사무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의 성향...
사람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규제’ ‘조직’ ‘형식’에 적응하면서 사람들은 딱딱해
지는 듯 하다.
아침에 대학교 한쪽 진입로에서 캠페인을 하려니 ‘총장님한테 허락 맡지 않았으면 안 된다’
고 수위아저씨의 단호하게 제지하신다. 빨래 빨기 위해서 수돗물 동냥 할 때도 허락은
해주셨지만, ‘총장님 의중’이 먼저 나왔었다.
저녁에는 창원우체국에서 물건을 찾고 나서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ㅇ’ 초등학교에 텐트 치려고 들어갔다.
선생님을 너덧분 거쳐서 드디어 20여분 만에 수위아저씨를 만나뵜는데...
교장선생님에게 허락 맡지 않았으면 안 된단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소도시의 경우에는 그렇게 사무적이지만은 않다.
어차피 밤과 새벽에 학교 운동장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운동하신다.
그렇게 항시 사람들이 교통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학교 건물 내에 묵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는 나그네가 운동장 한쪽에 텐트를 치고 자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
중대형 대도시인들의 ‘정형화되고 사무적인 사고방식’은 ‘그것’을 ‘문제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듯 하다. 더군다나 ‘자신의 일도 아님에야’...
원래 이 학교에서 하루 묵고 아침에 일어나서 캠페인을 하려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했는데, 야영지 확보가 실패함으로 인해서 이 학교 활동은 접고 창원대로 향해야 했다.
그게 ‘바람직’하리라, 이곳 교감선생님이 깐깐하다고 하는데, 이런 분위기라면 아침에
이 학교에서 캠페인을 했다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식의 마찰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야영 안된다’고 말씀 하시는 수위아저씨의 말씀에 대해서 그냥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네~’ 하고만 하고 왔다.
저녁에 야영지 확보가 안 되었을 때는 새로 찾는 것 보다는 좀 멀어도 기존에 야영지가
확보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능률적이다. 괜히 야영지 찾으려고 무거운 짐 매고
낑낑 거리고 다니다가 몇 시간 허비하고 진만 뺄 수 있다.
그래서 다시 길을 돌아 40여분을 뛰다 시피 씩씩대며 창원대에 야영하기 위해 왔다.
몹시 배가 고프고 기력도 빠졌으니, 학교 기숙사 식당에 가서 김치라도 좀 얻어서
밥이라도 왕창 해 먹으리라~
흘러 내리는 땀을 딱아 내리면서 기숙사 동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문이 마침 열려 있어서 식당 아주머니에게 ‘김치 한 쪼각’만 주시라고 하니..
식당음식은 외부인 주는 것이 아니란다.
그것이 아주머니가 하신 말씀의 전부였다.
역시 사무적으로 반응하신다.
6시부터 7시 50분까지 창원을 동서로 가르며 ‘야영지’ ‘김치보급’ 투쟁에 실패하고 나니
갑자기 진이 팍~ 하고 빠져 나갔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있다가 다시 걸으려니
맥이 빠져서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 묵는 사이에 한 두건 있을까 말까한 일이 이곳에서 하루사이 너덧 건 발생을 하고 나니 힘이 빠진다.
봐뒀던 창원대 한쪽 구석에 텐트를 치고 난 후에, 이상스레 밥 맛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저녁 먹기를 포기한다.
어차피 김치조달이 안되었기 때문에 밥 해봐야 맨밥 먹어야할 상황이니...
그러고 보니 입이 고급이 되었지... 작년 9,10월 달에는 맨밥만으로도 불평 없이
잘 때웠는데, ‘급식혁명’이라는 대 사건을 통해서 반찬통을 마련한 후 부터는
반찬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단 말이지.
하여간
종종 박대 받으면서 느끼는 아픔은 단순히 ‘텐트칠 공간’ ‘편리’ ‘쌀’ ‘김치’를
제공해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단호하고 사무적인 ‘안된다’는 말 이외의
다른 정감어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는 이러 저러해서 텐트를 칠 수 없네.’ ‘규정상 이곳 부식은 줄 수 없네’라는 말 뒤에
‘하여간 어떻게 되어야할 텐데... 안쓰럽구만...’ 이런 말이라도 한번 해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그렇게만 따스히 반응해 준다면 되돌아서서 ‘다른 곳’을 찾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안된다’ ‘규정상 안된다’는 서무적인 투의 말 이외의 다른 말을 해줄 필요조차
못 느끼는 분들을 대하고 뒤돌아서려면 마음이 아려온다.
만약
내가 ‘그들의 세계’ 속의 일원이라면... ‘규칙, 규제’에 철저하고, ‘정형화’된 그들의
습성이 내 삶과 잘 맞물려 가리라. 그래서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톱니바퀴처럼 관계가
잘~ 조화될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볼 때 ‘현대사회’속의 일원이 아닌 나의 생존을 위한 습성은
‘그들’의 ‘규칙, 규제, 원칙’등에 반하며,
그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 들어갈 여유가 없음을 발견한다.
이런 분위기이기만 하다면 나 같은 사람은 굶어죽기 십상이다.
하기사 하나라도 더 ‘채우고 높이기’위한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현대 문명 속에서...
아무것도 채우지 못했고 높지 않은 나 같은 ‘나그네’ ‘거지’가 무엇을 기대하리요...
* 참고로 그 우체국 옆의 ‘ㅇ’ 초등학교에서의 야영이 실패한 것은 ‘둥글이 야영교본’의
지침을 어긴 결과이다. 텐트를 치려면 어둑해질 무렵 그냥 학교 구석에 숨어들어가서
치고 자면 되는 일이고, 수위아저씨에게 걸리면 ‘동정’을 호소할 일이지...
뭐하로 가서 ‘양해’를 구하다가 그런 ‘뻔한 결과’를 얻는가? 자업자득이야.
암... 둥글이 야영교본을 따랐어야 해... 그렇지...
내일은 좀 교본 대로 잘하자!
의지가 다져지니 솔솔 배가 고파 오는군...
쌩라면이나 빠개 먹어야겠다.
[대도시 학교와 시골 학교 수위아저씨 권한의 차이]
** [대도시 학교]의 경우는 수위아저씨가 ‘규정’을 내세워 텐트 칠 것을 금지하지만,
[시골 학교]의 수위아저씨가 텐트 칠 것을 허락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은,
‘현대문화’와 ‘전통문화’의 차이이기도 한 듯 하다.
대도시 학교의 수위아저씨는 철저하게 관료화되고 위계질서화 된 조직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드셨어도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대해서 ‘재량권’을 발동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 시골학교의 수위아저씨는 전통사회에서의 ‘나이든 어른’의 위엄을 갖고 그 역할을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가령 도시학교 수위아저씨가 철저히 학교 관리만 하는데 비해
시골학교 수위아저씨는 아이들에게도 권한행사를 하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원래 시골적이고 전원적인 사고방식이 나그네의 삶을 이해해
주실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자신이 지키고 있는 학교에 한 나그네가 와서 텐트를
칠 수 있는 ‘재량권’을 ‘자유롭게’ 행사하시는 것이다. 교장선생님 눈치 같은 것은
전혀 볼 생각도 하지 않으시면서...
10월 22일
까치는 흔히들 ‘반가운 손님’이 오는 것을 알리는 길조로 알려져 있다.
6시나 되었을까? 아직 단잠에 젖어 있는데,
옆에서 까치 우는 소리가 시끄럽다.
나무 위에서 우는 것도 아니고, 지붕 위에서 우는 것도 아니고
텐트 바로 옆에 2,3 m까지 다가와서 ‘깍깍’ 거린다.
텐트 지퍼를 열고 고개를 내미니, 날아가서 인근 숲의 나무 위에서 울어대다가,
지퍼를 닫고 누우니 다시 바닥으로 내려와 옆에서 ‘깍깍’ 거린다.
그 우는 소리가 흔히 나무 위에서 듣는 소리가 아니라,
상당히 공격적이고 저돌적이다.
그러고 보니 지들 둥지가 바로 옆에 있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어떤 놈(둥글이)이
바닥에 둥지를 틀어 놓은 것이 못 마땅한 듯 싶었다.
ㅠㅜ 까치한테까지 박대 당하다니...
사람인심이 사납다 보니 동물들까지 보고 배우는 듯 하다.
[용남초등학교 활동]
창원대에서 2,30여분 정도를 걸어서 용남초등학교에 도착했다.
학생들이 2천 여명 정도 되는 학교이다.
큰 학교의 경우에는 상당히 관료화되고 사무적이며, 학교환경청결의 문제에
교장-교감선생님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캠페인 중에 한 두 마디 들을 ‘각오’를 하고 정문 앞에 섰다.
[용남초등학교 정문 풍경]
하지만 캠페인은 시종일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아이들이 ‘밀려올 것’을 걱정했지만, 등교하는 아이들이 두개의 등교 길을 통해서
양쪽으로 분산되는 이유로 분비지는 않았다.
아이들에게 스티커를 나눠주면서는 더 갖고 싶어하거나, 친구들 나눠줄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바닥에 펼쳐 놓은 스티커를)‘원한다면 종류별로 가져가라’고 항상 얘기한다.
그런데 유독 이곳의 아이들은 많이 관심을 가지고 많이씩 들고 가는 것이다.
하여간 나눠준 스티커가 진입로 바닥에 좀 버려져 있는 것 같았고...
신속히 처리하지 않았다가는 야단을 맞을 우려고 있어서
최후의 스티커를 나눠준 후에 후다닥 학교를 돌면서 청소를 시작했다.
한 바퀴 삥~ 돌고 휴지 봉다리를 버리려고 하는데... 여선생님 한분이 관심을 보여주신다.
‘어떤 계기로 하냐’는 등의 ‘핵심’적인 문제를 물어 오시는 것이,
평범하고 의례적인 관심은 아니신 듯 했다.
그런 분과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었는데, 마침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하라고 하신다. ^>^ 거절하지 않고 들어간다.
우유며 빵이며 가득 가득 탁자에 진열된다.
안 그래도 전날 보급투쟁이 실패하는 바람에 밥을 못해서 아침까지 굶었는데,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출장준비를 하셔야 했기에 많은 말씀은 못 나눴는데...
진지하게 살피시고 묻는 질문 질문이 사람을 깊이 볼 줄 아시는 분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배울 것이 많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져서 연락처를 달라해서 받아 챙겼다.
선생님께서는 연락처를 적어주시면서 말씀하신다.
‘제가 연락처 같은 것을 메모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지는 않는데...
눈이 너무 맑아서 적어드립니다’ ^>^
말씀을 나누고 3층에서 아래로 내려오시는데 배웅 까지 해 주셨다.
그런데 대뜸 지갑에서 돈을 꺼내시더니 ‘점심 따뜻하게 드시라’고 하신다.
알게 된지 한 시간도 안 된 사람에게 이런 친절을 배 풀 수 있음이라...
작년 9월부터 23개 시군을 거쳐서 수 많은 학교를 헤쳐 왔는데,
차 대접, 빵 대접은 한 번씩 받아 봤어도 점심값 후원은 또 처음이었다.
‘스티커 값으로 보태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점심 때에 깜빡 그 결의를 잊고 된장찌개 사 먹는데 바로 그 지폐를 사용했다.
전날 겪었던 삭막함을 털고, 따스한 온기를 받아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역시...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라...
‘어제’와 다른 또 다른 하루일 뿐이다.
빚 많이 지고 다닌다.
어이 이를 다 갚을꼬...
--- 광 고 ---
2주 전에 뽑은 스티커 만장이 바닥나는 상황여서
다시 11종류 총 1만1천장을 다시 주문했습니다.
창원에서만 스티커를 7천장을 배포해야 합니다. 10일이면 바닥이 나죠.
돈 억수로 듭니다. ㅠㅜ
겨울 내 벌어뒀던 통장이 바닥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고향 분들 빼고, 아는 분들 빼고...
생판 저를 모르시지만 저의 활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후원을 요청드립니다.
아이들에게 스티커를 나눠주고 상가 돌아다니면서 캠페인을 하는 활동은 참으로 ‘별 볼일 없는’ 미미한 활동입니다.
하지만 만들어진 스티커를 아이들에게 건네면서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주세요’라고 외치는 이 활동을 통해서, 게 중의 아이들이 ‘인간과 자연’의 문제에 대해서 그나마 좀 더
‘수용력 있는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아이들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욕심이 만들어낸 인간과 자연환경 파괴의 문제를 아이들이 인식하고, ‘채우려는 욕심보다 비우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작은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활동은 특별한 단체나 조직에서 행하는 활동이 아니고
그냥 세상에 관심을 가진 개인이 하는 활동입니다.
따라서 캠페인 중에 돈 떨어지면 활동을 중단하고 벌이를 해서 활동비를 충당하고 있는데...
그렇게 ‘돈 벌 시간’ 때문에 활동기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유로, 아마 현재와 같이 ‘돈 벌고’ ‘활동하고’를 반복한다면 앞으로 족히 15년은 길바닥에서 살아야할 듯 싶습니다.
하지만 한분 한분의 후원이 있어서 ‘돈 벌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인다면 앞으로 5,6년 내에는 활동이 끝나지 않을까 합니다.
ㅠㅡ 저도 빨리 끝내고 노후를 준비해야죠.
참고로 4월 20일부터 5월 20일까지 세분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
개인의 활동에 대해서 - 세 분 후원해주시면 많이 하신 것이고, 다음 달은 한명 더 불 것이라고 기대를 하는데... 아뭏튼 이런 수준이라면 15년 이상 걸립니다. ㅎㅎ
천원 이천원이라도 좋습니다.
활동에 지지를 하신다면 후원 부탁드립니다.
농협 : 090-12-023267 (예금주: 박성수)
후원에 대한 보답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만나서 여러분이 전해주신 따스한 마음을 건네는 것입니다.
제 고향분들이나, 지인 말고 ‘생판 모르시는 분’의 후원을 기다리겠습니다.
[**관 전산실 문 닫을 시간여서 아래 매점으로 김치 얻으로 가야해서 이만 줄입니다.]
...(1시간 후)...
[**관 매점에서 김치보급투쟁에 실패하고 난 후에...]
하여간 후원 부탁드립니다.
--- 광고 끝 ---
[ 맨밥의 청춘 ]
‘쪽팔림은 한순간~ 만족은 두 끼니’라는 슬로우건을 머릿속에 되뇌이면서
이런 저런 손님들의 시선을 무릅쓰고 모 ‘공공’시설의 매점에 들어갔었다.
‘저녁에 밥을 해 먹는데 반찬이 없어서 김치 좀 얻을 수 있는지’ 양해를 구했는데,
‘좀 그렇네요...’라는 답변이 되돌아와서 머리를 긁적이고 나왔다.
‘공공’ 시설에서 마저 김치한쪽 건네주지 않을 상황이면,
‘장사하기 위한’ 가게에서 김치를 얻을 수 있는 확률은 더 낮다.
김치를 얻으려 거리를 배회하다 보니 문이 삐끔히 열려져 있는 어느 부동산 사무실
한쪽으로 ‘밥통’과 냉장고가 눈에 들어온다. 사무실에서 밥을 해 먹는 듯 하다.
문을 마저 열어젖히고 이런 저런 사정 얘기 하면서 김치한쪼가리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미안하다면서 김치가 없다고 하신다.
‘아이구 아까워라...’ 이집은 김치만 있었으면 실제로 줬을 집이었는데...
다시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근처 음식점이 눈에 띄어서 안으로 들어간다.
김치한쪼가리 좀 얻을 수 있는가를 물으려고 했다.
물은 것은 아니고 그냥 물으려고 들어갔다.
헌데 질문도 채 하기 전에... 대충 행색을 보고 눈짐작을 하시더니,
‘아직 (저녁장사)개시도 안했습니다’라고 쏘아 붙이신다.
자신감이 팍 떨어진다.
이런 때 김치 한 쪼가리 얻으려고 괜히 더 몇 곳 다니면서 머퉁이를 먹으면,
저녁 내내 그 음습한 텐트 속에서 암울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리라...
(소심한 둥글이..ㅠㅜ)
김치보급투쟁을 중단하고 근처 학교 구석으로 찾아 들어간다.
이런 중대형 도시에서 ‘이런 일’을 겪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리라.
작년 추석 즈음을 생각해 보자.
어느 인심 좋은 마을에서는 새들을 위한 까치밥을 주렁주렁 그대로 달아둔 덕에
길을 가면서만 너 덧가지 과일들을 배불리 따 먹었지 않았는가.
그런 동네에서는 그 풍만한 인심을 - 부른 배를 통해서 경험했을 수 있었던 것 만큼,
그게 가능하지 않은 분위기의 동네에서 배를 굶주리는 것은 당연하리라.
‘지역마다’의 인심을 ‘몸소’ 체험하고 느껴야 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유랑의 길을 떠나온 이유이리라.
김치는 없어도 그래도 쌀은 있다. 몇 일 전에 후한 인심으로 쌀을 가득 퍼주신
모 ‘공공시설’ 주방 아주머니 덕에 그래도 쌀 주머니는 터질 지경이다.
[ 주머니 터질 만큼 얻은 쌀]
(더군다나 이날 아침 용남초등학교 선생님이 밥 값 지원해 주신 덕에 점심 먹으면서
반찬을 배에 많이 담아 뒀지 않는가)
어쨋튼 밥이나 잔뜩 해 먹자.
이 맨밥을 먹어야 하는 것은 내가 몸소 경험해야 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이니...
[ ‘식사구획도’ - 중앙선 왼쪽은 저녁밥, 오른쪽은 아침밥 / 반찬 없음ㅠㅜ]
라면이나 남겨뒀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맨밥에 스프라도 쳐 먹으면 좀 입맛이
돋아질 것을...
전날에도 보급투쟁이 실패해서 저녁 밥 못 해먹고 있다가, 저녁 늦게 배가 고파서
쌩라면을 빠개 먹었었다.
그게 마지막 남았던 라면이었었는데, 깜빡 잊고 낮에 라면을 사 놓지 않았다.
이 밀려오는 궁색함 ㅠㅜ
그래도 쌀 맛은 참 좋다. ^^
[ 밥을 해먹을 것이냐? 라면을 끓여먹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저녁에 ‘밥’을 해 먹을 때는 ‘라면’을 해 먹을 수 없다. 늘상 둘 중에 하나를
선택 해야 한다. 이유는 냄비가 하나이기 때문이고, 주변에 수도시설이 없을 때는
‘물 조달’과 ‘설 걷’이 문제 등이 복잡하게 맞물리기 때문이다.
냄비를 하나 더 사야할까?
...
견유학파의 시조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으로서 물을 떠 먹을 때 쓰는
표주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개가 물웅덩이에서 혀로 물을 떠 먹는 것을 보고,
이를 직접 ‘흉내’내 본다. 이후 표주박이 없이도 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유일한 재산을 버렸단다.
그래서 세인들은 디오게네스가 물먹는 모습이 ‘개 같다’는 의미에서 개‘견’자를 써서
견유학파라고 칭했다 한다.
디오게네스의 견유학파를 잇는 21세기의 굵직한 실천사상가 ^^ 둥글이가,
그깟 라면 한 숟가락 밥에 말아 먹기 위해서 냄비를 하나 더 장만해야겠는가. ㅋㅋ
[ 상가 캠페인 중 ]
22일은 오후 점심밥 먹고 난 후부터 돌아다니면서 상가 캠페인을 했다.
원래 오전에 가게 문을 연 직후가 가게가 한가하고 말도 잘 받아주곤 해서
상가캠페인은 오전을 선호하지만, 오전에는 볼일 좀 보느라고 오후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저런 손님내지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고,
장부정리하시는 분들... 식사하시는 분들... 피곤한 눈을 하신 분들이 많이 있어서 활동이
그리 원활하지는 않았다.
재밌는 분도 만났다.
중간에 한분은 5분 정도 열심히 설명을 드리자,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셨다. 그래서 ‘하이튼 결론은 우리가 좀 소유, 소비 욕구를 줄이면서
나머지 평생을 살아가야 우리 후손들이 그래도 씨라도 남게 된다는 것이죠...’ 하고
말씀을 드리니, 의아한 표정 가득하시다.
‘더 없어요?’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예 뭐가요?’
‘더 없냐고요.’
‘네... 끝났는데요.’
‘... 저는 또 뭐 팔로 다니는 사람인 줄 알고요.’
@.@
그냥 순수한 취지로 돌아다니면서 활동을 한다고 말씀 드리니까,
신뢰가득 한 눈빛으로 쳐다보시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좀 더’ 말발이 먹힌다.
내친 김에 몇 말씀 더 드리고 왔다.
햇빛도 따가운 터에 밥 먹고 나서 돌아다니다 보니 피곤이 몰려와서
kt 건물 앞에 벤치가 있길래 누워서 한숨 잤다.
그런데 핸드폰이 날아온 문자를 받은 신호음을 내뿜는다.
‘띠 디디용~’
문자를 열어보고 ‘까무짝’ 놀랐다.
(아래)
[ 도시민들의 과격 반응의 의미 ]
아침에 초등생 캠페인을 끝내고 나서는 오전에 전단지를 가지고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설문조사’형식을 빌어서 ‘환경-인류의 재앙’에 대한 설명을 하고 다닌다.
[ 상가를 돌면서 사용하는 전단지 전단지]
식후의 나른함을 견디며 상가를 한 시간 쯤 돌아다니다가, 피곤이 몰려와서 잠시
건물 한 켠의 벤치에 누워서 한숨 자려는데 문자가 날라왔다.
[ 날아 온 문자...]
@.@
오늘은 상가를 돌면서, 어제는 대학교를 돌면서 전단지 ‘종이’를 배포했었는데...
아마 그 중에 한명이 전단지의 내용에 ‘불만’스러운가보다.
과거 내 사는 지역에서 * ‘새만금’(아래 잡글란에 첨부)과 * ‘핵폐기장’(아래 잡글란에 첨부)
건 반대한다고 하고 다닐 때는 물론 이런 저런 비난의 문자, 전화 등을 종종 받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사는 지역 자체가 정치적/경제적으로 소외된 지역이다 보니,
많은 지역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있고, 고향에 남아 있는 이들도 먹고 살 것이 없는
상황에서 처해 있어 자괴감과 상실감이 가득하다.
따라서 우선 ‘당장 생각하기에’ 새만금 사업과 핵폐기장 사업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역적’ 취급해야 한다고 여길만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그러한 발신자 추적이 안 되는 문자, 전화 등을 받아야 했고 게 중에는
면전에서 ‘저렇게 지역발전 저해하는 놈은 찢어 죽여야혀’ 라는 말까지도 듣곤 했다.
내 사는 지역에서의 이러한 반응은 극히 자연스러웠다. 왜냐하면 일반시민들의
경우에는 TV 등의 언론과 정치인들, 행정가를 통해서 ‘현실’이 만들어지는데,
이권이 걸린 ‘언론사, 정치인, 행정가’들이 똘똘 뭉쳐서 국책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역발전을 저해하는 세력’이라고 일찌감치 낙인찍어 놓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조건반응으로 나와 같이 새만금과 핵폐기장 반대를 하는 이들에게 적대감을
갖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날아 온 문자는 너무 뜬금없다.
앞으로의 환경폐해의 문제를 정리해놓은 전단지를 받은 이로부터 왜? 이런 문자를
받아야 했을까?
이는 아마, ‘개발’과 대립된 의미의 ‘환경보호’를 강조함으로 인해서 ‘그’ 자신의
‘먹고 살 문제’에 대한 조바심을 더해준 듯 하다.
그 상실감과 당혹감으로 인해서 이를 ‘분출’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도시민들 특유의 ‘공격성’ 이 그대로 뿜어져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아마 이는 ‘일반인’이 아니라, 취업전의 대학생의 소행인 듯 하다.
미래에 대한 불확신과 불안감이 그 나이대의 뿜어지는 열정과 맞물려,
다듬어지지 않은 공격적인 표현을 서슴치 않았는 가 싶다.
만약 그가 후배와 한자리에 있는 상황에서 내가 뿌린 전단지를 손에 들었다면...
‘야... 너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우선 내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뭔 종이가 아깝게 후세대의 문제를 정리한 전단지를 가져다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나?’
라고 쏘아붙이고 후배의 뒷 통수를 한대 때리면서 ‘안그러냐?’ 하는 질문에 대한
지지발언을 받은 후에, 문자를 날렸을 수도 있었다.
하여간 이렇게 중도형 도시에는 유독히 악제가 많다.
[5월 23일 용호초등학교 활동]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 남은 밥을 물 부어 먹는다.
앞으로는 소금이라도 좀 담아가지고 다녀야겠다.
두 끼니 연속 맨밥으로 떼우려니 속이 울렁거린다.
용호초등학교는 캠페인 하기가 특히 수월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학교로 넘어오는 육교 통로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아이들이 많이
밀려오는 이유로, 학교 정문에 서서 선생님들 대면할 필요 없이,
그렇게 캠페인을 할 수 있었다.
[ 용호초등학교로 향하는 육고통로사진]
[ 밤풍경]
스티커를 종류별로 가져가는 아이들이 역시 많았는데,
학교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몇 번을 집어가는 녀석들도 있었다.
녀석들에게는 항시 ‘친구들과도 나눠가져야 해’라고 주의를 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음을 안다.
다른 아이들 손에 들어가 작은 자극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녀석들의 탐욕? 때문에 그르칠
수는 없으리라...
한 녀석이 스티커를 30여장 손에 쥐고 있길래, 옆에 구부려 앉아서 반절 정도 빼앗아서
다시 추려 놓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스티커를 한 장씩 나눠준다.
[극과 극]
중대형도시이자, 계획도시 창원에서 ‘남다른 박대’와 ‘남다른 배려’를 경험하면서
왜? 이런 극과 극의 모습이 공존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다른 소형도시나 시골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성향’ ‘배려심’ 등이 대체로
‘평준화’되어 있는 듯 하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 사이에서는 이정도의 정은 있어야지’
하는 수준의 암묵적인 ‘기준’이 있다.
따라서 그 ‘기준’에 특별히 벗어나는 쌀쌀맞은 이를 만나는 일도 거의 없고,
특별히 살갑게 대하면서 큰 친절을 배푸는 이들도 거의 만나기 힘이 들다.
그냥 시종일관 ‘구수’하고, 평범한 일상과 같은 만남이 지속될 뿐이다.
하지만 중대형 도시의 경우에는 ‘정’ ‘배려심’이 제각각이다.
순간의 판단으로 인해서 막대한 손익이 따를 수 있음에 의해서 발달된 정신적 '효율성‘과
’규칙‘ ’규율‘ 등을 엄수해야만이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에 대한 ’관료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의식의 근저에 깔린 ‘하나라도 더 갖고 높아지려는’
욕망 등이 얽히고 섥히면서 상당히 메마른 정서를 가지는 것이 중대형 도시 사람들의
특징인 듯 하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자신이 빠져들 수 있는 함정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야 말로 톱니바퀴의 일부분이 되어서 차갑고 딱딱한 정서를 갖고 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갖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자아가 위축이 되지만,
반면 그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기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끝없이 자신을
뒤흔드는 현실에 맞서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관점으로 삶에 임한다.
이렇다 보니 중대형도시인들의 경우에는 소형도시나 시골사람들에 비해서,
차갑고 쌀쌀 맞은 정도가 심한 사람들이 많은가 하면, 그 반대 쪽에는 시골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식당에서 밥을 ‘얻어’먹고...]
민방위 훈련을 끝내고 나서도 머리 아픈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아침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몇 일간 김치 보급투쟁 등의 실패와 가중된
스트레스에 따른 심신의 균형의 상실임으로 판단하여, 우선 신체의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한 ‘영양보급’차원에서 도서관 주변의 음식점을 찾아 나섰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는 많은데, 음식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한참 걷고 어찌 저찌 해서 반송초등학교 삼거리의 지하 식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안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더니 아주머니가 무슨 활동하냐고 물어 오시는 것이다.
의례 식당에 들어가면 일하시는 분들이 일순간 발동한 호기심에서 별 관심 없이
그렇게 한마디씩 물어오는 경우가 있기에 그냥 별다른 생각 없이 ‘캠페인 다닌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한참 후에도 또 관심있게 물어오신다.
이래 저래 말씀을 나누다 보니 이야기가 통한다.
환경오염의 문제, 후손들의 미래의 문제에 대해서 사장님 부부들이 많이 고민을 하신
흔적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가게 내에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놓여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새것, 빠른 것’만 좋아하는 현대인들의 습성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신단다.
말씀 나누는 도중에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좋은 말씀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 지역에 와서 거렁뱅이 취급당하는 것에 안타까움이 많았는데, 그런 문제까지를
이해해 주시면서 높이 평가해 주신다.
밥값을 계산하려니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이런 것 말고 있겠느냐?’하시면서 밥값을
계산을 거부하신다.
그래도 밥장사하시는 분들이 ‘밥 계산을 안하시면 어쩌냐’고 하니, 손사래를 치시며
거부하신다.
밥 든든히 먹고 사장님 부부의 넉넉한 인심과 이야기들을 듣고 나가니,
머리 아픈 것이 가시는 듯 싶었다.
[ 가게 사진 -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 표지]
5월 24일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부처는 스스로 얘기했듯이 ‘신’이 아니다.
다만 ‘깨달음을 얻은 자’일 뿐이다.
부처는 ‘고통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무상-무아’하라는 가르침을 전했다.
문제는 이 ‘무상-무아’라는 말이
‘모든 것이 덧없고 - 나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무상’의 의미는 ‘항상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고,
‘무아’라는 말은 ‘나는 없다’는 ‘허무주의’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런 식의 나는 없다’는 말로서 ‘세태에 물든 자아’를 정화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항상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금은보화와 권력 등에 연연하면서
잡을 수 없는 것을 탐하지 말고,
‘그런 식의 나’는 없기 때문에 쓸데없는 자존심과 체면, 열등감 우열감 속에서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석가의 가르침은 예수의 가르침과 같이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변질
되기 시작해서, 결국 ‘채우고 높이기 위한 종교’의 색을 뒤짚어 쓴 바가 없지 않다.
하여간 불교도인이나 기독교인이나, 2500년 전에 한 시대를 살았던 한 인물 덕분에
하루 편하게 쉴 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교회에서의 환대]
오후 다섯시 쯤에 [대양교회]를 지나쳐 가는 중에 안에 사람이 북적대는 것 같 길래,
김치 좀 얻으러 갔다가 후한 밥 대접을 받고 왔다.
김치만 좀 얻어서 나오려고 했는데, 그곳 장로님이 급구 식당으로 인도해주시는 바람에
마침 체육대회 끝나고 교인들이 식사하는 참에 한 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저런 분들이 반찬이며, 디져트며, 음료수 등을 꼼꼼히 챙겨주셨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어서 스스럼 없는 관계가 된 몇몇 목사님이 운영하는 교회 말고,
이런 저런 교회를 많이 들렸어도 교회에서 밥 얻어 먹기는 처음이다.
-
후한 대접을 받고나서 야영지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저녁부터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오전부터 걱정이 있었던 참이었다.
공사장이나, 지붕 있는 주차장 등... 비를 피해서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이곳 저 곳을 두리번 거렸다.
반송동 지구 공사장을 기웃거렸는데, 한 참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숨어들어가기가
용의하지 않을 듯 했다.
조금 더 내려와보니 [반송제일교회]가 눈에 띈다. 4,5 층 되는 건물인 듯 한데,
주차장 자리 쪽에 텐트를 칠만할 듯 하다.
교회 인심 여지껏 야박한 것을 잘 알아오던 중이었지만,
그래도 설마 주차장 자리에도 못 치게 하랴...
들어가서 교회에 계신 분에게 말씀 드리는 중에 마침 목사님이 내려오신다.
상황을 말씀 드리니, 위에 방이 있다고 거기서 하루 묵고 가라고 하신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생판 모르고 찾아간 교회에서 하루 묵고 가는 기회는 참으로
이례적이었다.
방에 들어가서 목사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참으로 사심이 없고, 겸손하며,
사려 깊으신 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상당수의 목사님들은 대체로 영생놀음과 교세 확장에만 신경 쓰시느라,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의 문제, 세상의 문제, 환경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쓸
시간이 없곤 하다.
하지만 반송제일교회목사님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문제에도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의 영성을 받아들일 것을 조심스럽게 권유하시는 중간 중간에 참으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성경과 합치시키시는 시도를 하셨다. ‘현실적으로’도 많은
숙고를 해오신 분이라고 여겨졌다.
’결혼은 했냐?’고 목사님은 질문해 오신다.
‘이래서 결혼하겠어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힘들죠’라고 답변 드리니,
사도바울이 평생을 홀로 유량하며 포교했고, 그도 텐트에 기거했다는 점을 강조하신다.
전번 진해 일지의 도입부에 ‘나의 평생에 유랑과 캠페인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텐트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썼던 성경 시편의 패러디가 머릿가에
스친다. ㅎㅎ
샤워시설이 있어서 목욕하고 빨래하고 온돌바닥에다 말리고 했다.
너무 복이 겨워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5월 25일
반송초등학교 캠페인
정문 입구가 양분되어 있어서 그 중 한쪽을 택해서 캠페인을 했다.
옆으로 선생님들과, 선생님들 차량 등이 지나쳐갔지만, 문제 삼는 분들은 없었다.
스티커를 건네줘도 무뚝뚝하게 아무런 대꾸도 않고 지나쳐 가는 아이들이 너덧이 되었고,
몇 장씩 집어가는 아이들도 상당히 되었다.
스티커를 거의다 나눠주는 상황에 하루 숙직서고 집으로 가시는 수위아저씨로부터
‘휴지 떨어지니 그만하고 가라’고 야단을 맞았지만, ‘복도에 떨어진 휴지까지 들어가서
다 줍는다는 약속’하에 묵인을 받아서 활동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한차례 삥 돌면서 휴지를 다 주웠는데 유리창 등에 붙여진 것도 몇 개 있었다.
(이 다음날에 가보니 이곳저곳에 스티커 휴지가 떨어져 있었고,
기둥에도 몇 개 붙여 있었다.)
딜레마다...
물론 이러한 ‘폐해’가 그리 심한 것은 아니고, 학교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캠페인의 ‘결과’ 학교 환경이 조금이라도 더 지저분해진다는 것 자체가...
신중히 고민해봐야할 듯 하다.
-
‘자전거 도시’ 관련한 자료를 좀 얻을까 해서 창원시청에 갔다.
창원은 2008년 환경올림픽으로 불리우는 ‘람사’회의가 열리는 곳인데,
2010년까지 자전거 보급률 20%대로 올려서 지역을 자전거 도시화 하려는 계획에 따라
‘새창원 기획단’까지를 구성해서 열심히 힘쓰고 있었다.
[자전거 도시 창원에는 자전거 도로가 곳곳에 잘 닦여져 있다.]
몇 일 전에 창원에서 민방위 훈련 받으면서 창원을 홍보하는 동영상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어서 연락을 하고 자료를 받을까 해서 갔다.
새창원 기획단의 친절한 담당 공무원과 과장님이 직접 차를 대접해 주셔서 한잔 하면서
말씀을 나눴고, 나올 때는 관련 자료까지 얻을 수 있었다.
-
전날 교회 사랑방에서 너무 편하게 자다가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가?
몸이 나른하고 상태가 안 좋다.
창원시청 민원실에 프린터기가 작동이 안되서 경남도청으로 향하는데 몸이 늘어져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도청에서 전단지 좀 복사하고 나서 도청 구내식당에서
밥 사 먹고, 다시 돌아오다가 용지공원 숲 평상에 누워서 한숨 잤다.
일어나서 상가 캠페인을 다니려다가 도저히 몸이 따르지 않아 다시 용지공원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그 늘어진 몸은 추려지지가 않았다.
하루 종일 ‘어기적 거렸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몸이 풀어진 하루였다.
[ 나 의 개념 ]
우리는 흔히 ‘나’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어렸을 적에도 ‘나’라는 존재를 둘러싼 세상이 빚어내는 문제들에 대처 해 나가면서
아련한 의문을 들게 만들기는 하지만,
특히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뿜어져 나오는 호르몬의 영향은 갖은 감정적 격동과 의식의
집중력강화, 회의감을 교차시키며, ‘나’라는 존재에 대한 사색을 심화시킨다.
교육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 등에서 [자아](나)개념을 나누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나’의 개념은 사춘기를 분기점으로 세 부류로 갈라지는 듯 하다.
첫째는 아주 경제/사회적인 관점의 ‘나’ 이다.
이러한 이들의 '나‘는 주로 ’체면‘과 ’위신‘ ’우열감‘의 작용으로 움직이고,
대중소비사회의 충실한 하나의 부품으로서 단지 사회에 끼워 맞춰진 하나의 블록내지는
기계의 톱니바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이들은 사회, 환경의 문제에 대해서 ‘자발성’을 갖고 움직이거나,
능동적인 힘으로 뭔가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경제사회 구조 내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성실히’ 살아가면 그뿐이다.
둘째는 철학적 관점의 ‘나’이다.
이러한 ‘나’의 개념을 가진 이들은 '본질론' '개념론'적인 차원에서의 '나'의 탐구에 몰입한다.
이들은 고도의 ‘사색’과 ‘명상’의 기능을 이용하여 ‘나의 이데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탐구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다’라든지, ‘나는 없다’는 답을 낸다.
이들 대부분이 '현실'의 문제(타인, 사회, 환경)에 대해서 별달리 고민하지 않거나,
설령 고민을 한다 할지라도 막연한 추상성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질 자체가 관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머릿속을
충만케 하는 그 어떤 개념 - 나’의 갈구를 최 우선으로 두기 때문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종종 현실 은둔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그러한 ‘관념적 나’의 개념이
세계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설정되면서, ‘극단적 회의주의’ ‘허무주의’로 치닫는 경우도
종종 있다.
셋째는 실존-주체적 관점의 ‘나’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에 우뚝 ‘홀로선’ 존재임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중심에 우뚝선다’는 표현은 ‘성취-승리’의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홀로 태어나서- 홀로 살다- 홀로 가야 할’ 외로운 인생의 본질이 표현된 말이다.
이들의 정신은 현실과 괴리되어 있지 않고, ‘비루한 현실’과의 끝없는 맞 부딪힘을
통해서 늘상 단련되어 있다. 이들의 ‘주체-개인주의’는 결과적인 ‘공동체’(하나됨)에 대한
갈구인데, 각자가 그렇게 외롭게 홀로서서 그 자기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을 수만
있다면, 마찬가지로 그러한 과정을 거친 ‘다른 개인’들과 탄탄히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실존’의 정수는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는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여 ‘하나 됨’에 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세계’와 ‘우주’에 대해 무관심하고,
둘째 부류의 철학적 ‘나’의 개념을 가진 이들은 흔히들 ‘세계’ ‘우주’와 자아를
일치시키는 막연한 관념적 이상을 꿈꾸지만,
이 셋째 부류의 실존-주체적 관점의 ‘나’의 개념을 가진 이들은 ‘비루한 실천’을 통해서
그 자아의 ‘현실적 확대(인류-자연으로)’를 시도한다.
물론 이 세 부류가 완전히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사람에 따라 ‘비중’의 차이에
의해서 ‘굳이’ 구분 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중에 ‘어떠한 나’의 개념을 갖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본인이 원치 않고,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 ‘나’의 개념을 갖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5월26일
작은 마을의 정자 옆에서 텐트를 치고 하루 묵고,
신선한 공기와 산새들 소리에 새벽을 맞고 싶은 바램이 간절할 뿐이다.
아침에 슬리퍼 끄셔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뭐냐’면서 텐트 한쪽이 난폭하게 들린다.
수위아저씨이리라.
긴급하게 텐트 지퍼를 열고 나가서 사정 말씀을 드린다.
‘허락 없이 텐트를 쳤다’고 뭐라 하시며 빨리 나가란다.
창원에서 맞는 이 ‘역동적’인 하루의 시작...
창원 시청이 위치한 중심가 주변 초등학교에 스티커 4천장을 이미 배포했지만,
인구 규모상 2천여장 정도를 더 배포할 듯 해서 창원의 북서쪽 ‘봉곡동’쪽으로 야영지를
옮겨야 할 듯 했다. 하지만 스티커가 도착되어 있을 봉곡동 우체국이 토요일이라
쉬는 날이어서, 우체국 앞까지 갔다가 다시 걸어서 50여분 거리의 창원대쪽으로 향했다.
봉곡동에 야영지를 구축하면 될 일이지만, 애써 다시 돌아간 것은 대학교 건물구석만큼
야영하기 좋은 장소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좋은 자리’ 봐 놓은 곳도 있고...
5월 27
반송제일교회에 오전 11시 40분쯤 도착했다.
전날 저녁에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아이들에게도 환경에 대한 문제 좀 얘기해 주고, 점심도 드시라고...
예배 체질이 아녀서 일부로 좀 늦게 도착했는데 예배가 한 참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교회 예배실 바깥 의자에 앉아있었다. 마침 사모님이 발견하시고는 들어오시라고 한다.
목사님께서 예배를 집도하시면서 시종일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흐느끼신다.
어디서 저러한 ‘감성’이 솟아나시는 것일까...
몇 일 전에 밤에 말씀을 나눌 때는 ‘현실적’인 문제를 ‘과학적’으로 고민하시면서 성경의
‘실천성’을 말씀하시길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예배를 집도하시면서 뵌 모습은 전혀 다른 또 한 면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무한한 겸손과 신 앞에 내려놓으신 마음이, 한 없는 ‘수용성’ ‘합리성’
‘감성’을 만들어 내는 듯 했다. ‘적당히 내려놓은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기질’에 맞게
‘이성적’이던지, ‘감성적’이던지 한편으로 치닫곤 하는데... 목사님은 ‘온전히’ 내려 놓으셔서
그런지, 그 ‘양자’(이성과 감성)를 신께 선물 받은 듯 했다.
예배 끝나기 직전 ‘안내’시간에는
나를 교인들에게 소개도 시켜주시고, 찬송이 울려퍼질 때는 ‘잘 왔다’며 직접 내 손에
장미꽃 한송이를 선물해 주신다.
[ 목사님이 선물주신 꽃 한송이 ]
식사를 하면서는 삼성에 다니시는 중역한분과 모 중학교 교장선생님 등과 말씀을 나눴는데,
유머감각도 있으시고 호탕하신 성격이 참 좋았다.
밥을 먹고는 봉곡동 쪽으로 본격적으로 야영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인사를 드리고
교회에서 나와야 했다.
목사님은 ‘자료’(스티커)를 쓰신다고 좀 달라고 하신다.(전날 전화할 때부터 그러셨다.)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우편으로 보내드린다고 약속드렸는데...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만든 스티커를 신도들과 ‘공유’하려고 그리 신경 쓰시는 모습이 참으로 겸손하고
비운이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시는 듯 했다.
목사님은 창원에 있는 중에는 언제나 교회로 오시라는 말씀을 말미에 하셨는데,
이런 분이면 오지 말라고 해도 애써서 찾아뵙고 말씀을 청해야 하리라.
하여간 목사님 덕분에 풍만한 한때를 보낼 수 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 한 무리가 모레 밭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다.
모레성을 쌓고 있다. 다가가서 말을 건다.
20여분 정도를 옆에서 환경 관련한 이야기를 해줬다.
딴짓하고 안들었다면 대충 하다 말았을 텐데, 상당히 집중력 있게 듣는 듯 해서,
구구 절절한 이야기를 해댔다.
녀석들에게 ‘너희들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으니,
그 중에 한 녀석이 ‘환경이 파괴되었을 때’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닌 듯 했다.
앞으로 결혼도 않고, 곤충과 살 꺼란다.
[ 모레장난을 하고 있던 아이들...]
녀석들과 잡담을 하고 나서 다시 학교 스텐드에 와 앉아 있는데,
여자애들 10여명이 내 바로 옆에 앉아서 서로들 이야기를 나눈다.
보아 하니 ‘일진’의 무리들인 듯 하다.
선배 세명이 후들을 하나씩 세워두고 학교 생활에 대해서 묻는다.
험악한 상황은 아니고, 그냥 후배들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는 분위기이다.
한 아이는 화장실에서 애를 때렸다가 정학 당할 뻔한 이야기 등등을 했다.
방황하는 영혼들이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갑갑해졌다.
어린 마음에 ‘채우고’ ‘높아지고’ ‘이기려는’... 하지만 그것이 원하는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끝없는 상실감 속에서 그렇게 서로를 ‘안위’할 수 밖에 없는 ‘연대’...
‘폭력의 힘’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바탕으로 내면의 갈증을 덜어보려는 위태로운
아이들의 방황...
자본과 권력의 문화가 위세를 떨치는 ‘도시’에서, 필연적으로 그 ‘문화’로부터 소외됨으로
압박을 받는 아이들이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자기들만의 문화’.
어른의 탓이리라.
채우고 높이려는 것만을 권하고, 비우고 낮춰야할 필요성을 한번도 제대로 얘기해 보지
않은 어른들의 탓...
[야영지 구축을 위해]
오후에 내내 머무르며 야영지 삼으려했던 학교에는 방황하는 친구들이 저녁 늦게까지
들끓을 듯하여, 20여분 정도 떨어진 모 초등학교로 향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내에
텐트칠 공간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그 바로 옆 중학교로 다시 이동했다.
이곳 중학교 구석에 그래도 은폐되는 공간이 있다. 그래서 우선 쌀을 씻어서 담궈 놓고
텐트를 치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쓰리빠 끄시는 소리’가 들린다. 학교 내에서 쓰리빠
끄시고 다니는 사람은 주로 ‘수위아저씨’이다.
뒤를 돌아보니 ‘뭐하냐?’고 하신다.
둥글이 야영교본에 나와 있는대로 머리를 긁적이며 아양을 떨고 그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조아리며 사정 얘기를 드린다.
하지만 말씀 내내 그의 표정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고, 그 눈동자는 화석과 같이 미동이
없었다. 불길하다.
이내 그의 입이 열리고 ‘사무적’인 투로 한마디 말이 뿜어져 나온다.
‘학교 내에서는 텐트를 칠 수 없다’는 말.
상황 끝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알았다며 즉시 텐트를 걷는다.
물에 불리고 있던 쌀 처리가 곤욕이다. 물을 좀 빼 내고 텐트 위에 냄비 채 반듯이
끼워 넣는다. 배낭이 기울어지거나 하면 배낭 안이 난리가 되리라... ㅠㅜ
치던 텐트를 걷어가지고 나오기는 또 처음이다.
그나마 바로 옆에 공사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재개발하는 공사장 인 듯 했다. 사방에 가구 부서져서 널부러져있고,
유리 파편이 바닥에 가득한 그 ‘횡횡’한 공간의 한 가운데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묵었다.
[황망한 공간 - 핵공격으로 폐허가 되어 생물의 자취가 사라진 도시를 연상케 한다.]
5월 28일
봉곡우체국에 스티커를 찾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지나가시던 한 분이 ‘뭐하시는 분’이
냐고 물어 오신다.
이런 저런 캠페인을 한다고 말씀 드리니 관심 있게 들이시더니, 이런 저런 지역사,
문화적인 특색에 대해서 세심하게 짚어 주신다.
삶의 현상, 인간의 문제, 환경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신 분이었고
사회에 대한 건전한 비판정신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많은 말씀은 못 나눴지만,
참 독특하고 만남이었다. 연락처를 적어 남겼다.
- 스티커 분류
우체국에 총 1만 천장의 스티커가 도착했다.
진해에서 찍은 갈메기 사진이 인상적이라고 하셨던 분의 뜻을 수렴해서,
1 종류 스티커를 추가해서 총 11종류의 스티커를 한 번에 뽑았다.
묵직한 박스를 개봉해서 우체국 한쪽에서 분류조합작업을 시작했다.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에 치이면서 배분 작업이 쉽지 않아서
2시간동안을 쪼그리고 앉아서 끙끙 거렸다.
땀도 나고, 머리도 멍멍하고... 우체국직원들 눈치도 보이고 해서 여간 곤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구 등이 맘에 안 드는 부분을 수정해서 새로 뽑은 것이니 만큼,
아이들에게 나눠줄 것이 기대가 된다.
아이들에게 스티커 나눠주면서 한가할 때 ‘그림’ ‘문구’ 등을 살필라치면 스티커를
만들려고 도안할 때는 발견할 수 없었던 문제점이 보이곤 한다. 그래서 수정의 수정을
가하게 되는데, 이번에 뽑아진 것들은 서 너번씩 수정된 것으로 대체로 맘에 든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기다려라 아이들아!!!
[ 방황하는 아이들]
봉곡동우체국에서 스티커 분류 마치고 주변 학교에서 야영하려고 숨어들어가 있는데,
건물 뒤쪽에서 중학교 정도 되는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모습이 보인다.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녀석들은 내가 기웃기웃 하자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일어서서 학교
바깥으로 빠지려고 한다.
‘왜 도망가~’ 하며 웃으며 다가가서 말을 붙였다.
발길을 세 녀석이 멀뚱히 선다.
‘담배피우면 안 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잡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바른 삶인지’에 대한 강의를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우면 폐가 썩을 수 있다는 것과,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친구들로서 인간과 자연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 좀 많이 갖고
살아 주십사 하고 부탁을 올렸다. ‘내가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할 권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잘 들어 준 것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굳이’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 원하지 않았지만, ‘채우고’ ‘높이려는’ 문화 속에서 끝없는
경쟁의 스트레스와 상실감, 열등감 등을 가지면서 숨 막히는 하루를 살아 내고
있을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파트 단지와 더불어, 숨막히는 질서와 규율이 존재하는 이러한
중대형 도시에서 ‘성취감’을 느낄 근거를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은 당연스레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집이 가난하고, 공부도 잘 못하고, 주변에 자신의 감성을
받아줄 수 있는 어른들이 없을 때에는 특히 그렇다.
청소년들의 뿜어지는 젊음의 혈기가 잘만 유도하면, 그 마음 안에 세계를 담을만한
큰 그릇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하지만, 청소년기를 안 좋은 환경/문화/자극에서
보내면서 ‘소유욕’과 ‘권력욕’에 의한 상실감에 시달린다면 극도로 편협한 사고를
갖게 될 확률이 높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쫓는 젊음의 혈기’가 적절한 ‘분출점’을 찾지 못하고
위축된 상태에서 ‘고착’되어 버리면 그의 삶은 이후로 회한으로 가득찰 것이지만,
그 ‘분출점’을 제대로 찾아 이를 적절히 뿜어낸다면, 그에게도 좋고 세상에도 좋으리라.
이에 일명 ‘어른들’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상당수의 부모와 선생님들은 인류와 세계로 뻗힐 수 있는 [아이들의 자아]를
‘자본과 권력’의 속성 하에 위치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서 끼워 맞추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 듯 하다.
그래서 하나 같이 그러한 ‘판박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열과 성의를 다하고 있다.
아마 ‘그들(어른)의 눈’에는
‘사회에 적응한 사람’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방탕아’ 두 부류의 사람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식과 제자들을 ‘사회에 적응’시키려고 그리 최선을 다하는 것일 게다.
이 역시 ‘그들의 부모’들로부터 ‘제한된 것’만을 전해 받은 ‘악순환’이리라.
하여간 별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 ‘넓은 시야’를
제공해 주는 것만큼 필요한 일은 없을 것이기에 작은 자극이 될까 해서 그런 얘기들을
주저리 해댔다. 그 전해 받은 말들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아이들은 넓은
자아를 갖게 될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이 또래 녀석들은 ‘자기’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녀석 한 녀석 꼼꼼히 살피면서 ‘내가 좀 사람 볼 줄을 아는데, 너희들은 정말 총명하게
생겼다’ 라고 운을 띄우며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 녀석은 감추는 것인지 실지로 그런 것인지 ‘없다’고 얘기를 했고,
한 녀석은 ‘검사’가 된다한다.
그리고 한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없다’고 했다가 몇 번 부추기니, ‘룸싸롱운영’을 한댄다.
물론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집중력이 기복이 심해서 내가 했던 얘기를 돌아서면 다
잊어버릴 수가 있지만, 아이들에게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인사하고 짐 있는
쪽으로 돌아올 때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반응하는 듯 했다.
‘어른의 역할’에 대해서 늘상 고민한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4월 29일 - 대운초등학교 활동
상북초등학교 캠페인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7시도되기 전부터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는 것이다.
7시 10분 쯤 학교 정문에 서니 아이들이 운동장에 즐비하다.
수학여행 간단다.
으큭~~~
스티커 몇 뭉치가 배낭 안에 들어있어서 무게가 상당했고, 시간도 촉박하고 해서
다른 학교로 도보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대운초등학교로 향했다.
이곳 대운초등학교는 참으로 인상적이게도 잡스런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동상은 안보였고,
특별한 동상이 한쪽에 세워져 있었다.
[ 대운 초교의 특별한 동상]
이런 멋진 동상이 세워져 있는 학교는 뭔가 다르리라.
옆문 한쪽이 사람만 오갈 수 있는 통행로에 닿아 있어서 그 자리에 위치하고 섰다.
차량 통행도 없고, 활동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 대운초등학교 옆문 계단 아래 스티커 사열 - 한쪽에는 비닐봉지에 쓰레기가
담겨져 있다. 혹시나 선생님께서 ‘지저분해집니다. 그만하세요’라고 제지 할 경우를 위한
‘준비물?’이다. 제지하는 성생님에 대해서 ‘이렇게 다른 휴지까지 다 줍고 활동을 하기
때문에 떨어진 스티커도 다 줍고 갈 껍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며, 캠페인 활동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계책.]
그런데 스티커를 몇 장도 채 못 나눠준 상황에서 여 선생님 한분이 나오신다.
싸늘한 표정을 하진 선생님이셨는데, 말씀에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고 ‘휴지가 많이
떨어진다고 그만 하셨으면’ 하신다. 죄송하다고 고개 숙여 사죄드리고, ‘저기 보시는
것 처럼 바닥에 떨어진 다른 휴지를 다 주웠거든요’ 라며 운을 띄우면서 ‘끝나고 갈 때
복도까지 다 훑어서 주워갈께요’라고 맹세를 올린다.
선생님은 영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아이들도 관심 없이 생각하는데...(왜 하냐?)’고 들어가신다.
휴~ 다행이다. 그만 하라고 좀 더 강하게 나오셨으면 짐을 싸서 가야 했으리라.
하지만 뒷골이 땡기고, 머릿속이 멍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항시 뇌압이 극대화 되곤 한다.
초반부터 이런 상황이면, 또 다른 선생님이 문제 삼을 여지가 많다.
아이들에게 따스한 미소와 여유를 가지고 스티커를 나눠줘야 하는데,
쫓기는 마음으로 기계적인 말과 손동작만이 연속된다.
다른 선생님이 나타나서 한마디 할 것 같은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활동 끝나고서는 학교를 빙 돌면서 그 전에 버려졌던 휴지와 당일 버려진 스티커를
주웠는데, (아이들이 좀 줍기도 했겠지만) 다른 학교에 비해서 스티커도 몇 개
떨어지지도 않은 듯 했다.
선생님이 하셨던 ‘아이들도 관심 없이 생각하는데...’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는 참으로 딜레마이다. 선생님이 스티커의 내용에 담겨진 ‘인간과 자연사랑’
‘자아의 확대와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의미를 부여하면 할 수록
그 의미가 극대화 되지만, 선생님이 관심 없이 생각하면 그 순간부로 그 건네진
스티커는 쓰레기가 되기 때문이다.
음료수 하나 사먹을 것도 아껴 2600원 택시비까지 들여 와서 한 활동이 물거품이 된 듯
싶어서 짐을 챙겨 학교를 나서려 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 갑작스러운 만남 ]
창원전문대학을 가로질러 가는 중에 그 정문 앞에 ‘교육개혁’등과 관련한 많은 플랭
‘자유롭게’ 붙어 있길래, 그 흐트러진 질서가 숨통을 열어 놓는 듯 하여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오신다.
중절모를 눌러쓴 중년신사분이신데, 나를 안다고 하신다.
‘어디서 보셨을까?’
상가에서 전단지 뿌릴 때? 아니면 학교에 스티커 나눠줄 때 보셨나?
말씀을 나누다 보니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내 홈페이지와 내가 종종 들려서 글을 남겨 놓는 싸이트에 종종 들르시면서 글을 보셨단다.
그래서 과거부터 알고 계셨단다.
생명부지의 분이 길거리에서 알아봐주시고 말을 걸어오시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분은 순수한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현재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계셨는데,
수업 들어가는 찰나에 나를 보게 된 것이었다.
수업 시간 때문에 연락처만 서로 주고 받았고 다섯시쯤 해서 다시 뵜다.
‘김선생’님 이셨는데, 시종일관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상대방을 지그시 주시하고
호응하시며 말을 받아주시는 모습에 참 넉넉함이 배여 나오고 있었다.
맛있는 쌈밥을 얻어먹으면서 말씀 나눈 후에 저녁에 다시 뵙기로 했다.
잠자리를 알아봐주신다는 것이다.
이분이 묵으시는 제실(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향했다.
집은 따로 계시는데, 잠만 이곳 제실에서 주무신단다.
창원시가지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있는
터여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는 구수한 풍경의 농촌마을이 펼쳐졌다.
10분도 안되는 거리 걷는 사이에 공기의 냄새도 완전히 변해 있었다.
도착해서 보니 제실 주변에는 대나무장막이 삥둘러 펼쳐져 있고, 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고요와 정막의 세계였다.
그러고 보니 김선생님은 이곳에서 고독을 즐기시는 듯 했다.
50이 넘은 나이에 결혼도 않고 혼자 살고 계셨는데, 낮에 말씀 중에 친구나 연인이나
그 누구도 자신만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없음을 강조하셨던 기억이 났다.
김선생님은 오직 자기 자신을 지긋히 관조함을 통해서 그 외로움 - 나라는 실체를
대면해야한다고 언듯 말씀하셨던 것이다.
뭔가 많은 사연이 있는 삶을 사셨을 듯 한데, 여쭤보면 ‘그냥 한일 없이 이리나이 먹었네요’
라는 말씀만 하신다.
제실 위에 텐트를 치고 신선한 공기와 고요 속에 하루를 묵을 수 있었다.
[ 제실 평상위에 텐트를 친 정경]
5월 30일 ‘ㅅ’ 초등학교 활동
김선생님께서는 아침에 일찍 등산을 가신다고 해서 저녁에 미리 인사를 여쭸었다.
창원에서의 마지막 밤을 참으로 편안하게 보내고 짐을 정리해서 숙소로부터
마지막 활동지인 ‘ㅅ’ 초등학교로 향했다.
김선생님 숙소에서 20여분 떨어진 거리였다.
초등학교 명을 안 붙이고 자음표기 ‘ㅅ’ 으로 쓴 것을 보고 눈치 채는 사람은
눈치 챘겠지만, 뭔가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달리 이곳 아이들은 질서의식이 부족한 듯 했다.
스티커를 받아서 10여m 가면서 뜯어 버리는 아이들도 유독 많았고,
벽에 붙이는 아이들도 많았으며,
건네주는 것에 아무런 반응도 않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아이들도 많았다.
활동 중간에 한차례 버려진 스티커 조각을 줍고 난 후에 다시 스티커를 나눠주기를
반복했지만, 시간이 조금지난 후에 또 많이 버려져 있어서 캠페인을 중단하고 학교
정화작업을 시작했다. 캠페인이 다 끝나기 전에 상황을 종료하고 청소를 시작한 것은
몹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왜 이렇게 무질서한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몇 일 전부터 이 학교를 두 차례 다녀가면서 확인한 것은 우선 이 학교가
‘은폐’된 공간이 많아 방황하는 중고등학생들이 몰려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군것질을 하며 ‘회포’를 풀기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을 것이다.
몇 일 전에도 운동장에 병 깨진 파편이 널려있어서 한참 주운 적이 있었는데,
특히나 중고등학생들이 몰려서 먹고 놀고 하면서 천지 사방에 휴지를 버리고 있었다.
운동장 구석구석에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휴지를 버리는 듯 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에 의해서 ‘무질서’가 훈련되는 이 상황이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 머리아프도다~
창원에서의 마지막 활동도 이렇게 종료 되었다.
[ 모 초등학교 앞 가게에서 판박이 세 자매]
유난히 박대를 많이 받았지만, 또 유난히 환대도 많이 받은 지역 창원...
국가주도의 자본과 권력의 집중이 만들어낸 특이한 지역성을 뼈져리게 경험하는 특이한
시간이 되었다.
- 기타 창원에서의 풍경 -
[과자봉지를 하나 들고 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권력을 의미한다 - 친구가
과자봉지를 나타나는 순간부터 주변의 아이들의 그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유순’ ‘굴종’적인 양상을 띈다. 몇 번 떼를 쓰고 나서 과자 한 쪼가리를 얻어먹는 친구]
[거꾸로 오래 매달리기 시합]
[도서관 들어가는 길목]
[손자와 함께]
[누워서 낮 잠자는 중]
[창원시내 한쪽에서... 오래된 골동품 차]
[성당벽면에 붙은 성프란치스코의 기도]
[밤이 되어가는 풍경]
2007년 5월 30일 경상남도 창원에서...
---창원에서의 잡글 ---
[ 예비군 훈련 /민방위 교육에서의 자기 찾기? -]
병역을 마친 ‘자’는 다음해부터 ‘예비군’으로 편성된다.
그래서 8년간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되고, 그 후로는 4년간은 1년 한차례 민방위교육을,
그 이후로는 40세까지 1년에 한번의 ‘소집’을 받게 된다. 그리고는 ‘동원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민방위 교육]은 남북 분단 상황 등에 대처할 필요 등에 의한 국가의
국민 동원의 최 막바지에서 국가가 병역의 의무를 가진 이에게 부과하는 부역의 의무이다.
즉 ‘총칼들과 나라를 지키기에는 이미 군기가 빠질 대로 빠진 자’들에 대한 막바지
국가주의 세뇌 교육이 바로 민방위 훈련이다.
[34 민방공대피소 민방위 교육장 - 지하에 마련된 음습한 전체주의 교육의 현장]
민방위 교육의 대상인 나는 전체주의적인 동원교육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는 있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같이 확고한 의지로 이를 거부하고 국가에 맞설 역량이
안 되기 때문에 교육 통지서가 올 때는 복잡한 심경으로 꾸역 꾸역 교육장으로
향하곤 한다.
4시간 동안 화생방, 재난, 안보 교육 등을 받는데, 나는 이러한 동원된 훈련/교육 때에는
늘상 ‘난감한’ 상황을 접하곤 한다.
나 같은 ‘개인주의 - 실존 - 주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체주의/국가주의적에 반감을
갖게 되어, 이러한 국가적 동원 교육에 대한 반발감이 가져지지만,
문제는 이러한 훈련/교육을 ‘개인’이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훈련/교육’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에 고뇌가 시작된다.
그러한 교육 현장에는 [전체주의/국가주의적인 가치/관념]과 함께, 그것을 실행하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사람들’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교육을 실행하는 ‘개인'에게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내 고뇌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고뇌는 구체적으로 이렇다.
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 교육]을 무시하고, 그 고리타분한 집합주의에 무언의 항변을
하는 뜻에서도 그냥 엎드려 자거나 옆 사람과 잡담을 해야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내 자신이 개인주의자로서, 그러한 [교육을 실행하는 ‘개인’(실존)]을
존중하는 뜻에서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며 그 개인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어느 한쪽을 택해도 ‘모순’상황이 발생한다.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개인주의자를 자차해서
엎드려 자는 것은 다른 ‘개인’(강사)을 철저히 무시하는 격이 되는 것이고,
이는 ‘개인주의자’로서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반대로 충실한 개인주의자로서 상대방(강사)의 개인성을 존중해주고자 강의에
‘집중’을 하는 것은 전체주의-집합주의를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관념과 실재가 복잡히 엉키고, 집단과 개인이 교차 중첩되는 현실에서 나는 종종 혼돈을
경험하곤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대체로 ‘후자’(강사 등의 지시와 교육에 집중하는 것)
의 길을 택한다.
모순적이게도 그것이 (또 하나의 변수인) ‘예비군/민방위’들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
‘집합주의’ 문화에 가장 ‘적절히’ 저항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강제동원된 예비군, 민방위들은 대체로 자발성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불려왔다’는
생각으로 현역병도우미들과 상근예비역도우미들의 지시 등에 대해서도 반말로
거부하거나 저항하면서 하나의 ‘전체적인 문화’를 형성한다.
이들의 게으름과 나태는 ‘예비군/민방위 교육’에 대한 저항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귀찮고 지루한 것을 싫어하는 습성에서 기인한다. 그 결과로 ‘훈련과 교육을 실행하는’
애꿋은 ‘현역도우미’ ‘강사’ 등만 고초를 겪는다.
실지로 예비군, 민방위들은 ‘국가’에 의해서 훈련장이나 교육장까지 동원되어 불려오기는
했지만, 그 불려온 현장에서 [국가가 강요하는 전체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태만의 문화]를 형성한다. 문제는 그러한 태만의 문화 역시
각 개인의 ‘이기심’ 이 집합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전체주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국가주의]의 기반을 받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는, 각기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있는 ‘내안의 파시즘’(임지현교수)이다.
따라서 ‘이율배반적’이게도,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에 반감을 가진 나는 조교, 도우미,
강사의 지시를 ‘주체적’?으로 따름으로 그들 예비군/민방위가 만들어낸 ‘전체주의’를
깨려는 시도를한다.
그래서 나는 예비군 훈련 때에는 늘상 앞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현역병 도우미들 지시에
충실히 따라 ‘선배님들 줄 좀 서주십시요’라는 요청에 가장 기준을 잡곤 했고 @.@,
민방위 교육 때에는 강사의 이야기에 모여 있는 교육생 중에 거의 혼자서 ‘호응’을
이루려고 노력하곤 한다.
물론 그 ‘중간 중간’에 강사들이 ‘국가주의’ ‘집합주의’적인 관점의 이야기들을 할 때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거나, 인상을 살짝 구기거나, 머리를 긁적이는 식으로 무언의 반발을
하곤 한다. 이러한 나의 반응이 강사에게 적극적으로 수렴 될리는 없을 것이지만,
나는 다만 그러한 ‘모순적인 상황’에서 나름대로 방식으로 깨여있고자 힘쓰는 것이다.
나의 이러한 주체적 자발성?은 그 훈련장과 교육장 내에서 ‘국가주의’에 부응하는
노력으로도 보일 수 있다. 내가 그들(강사 등)을 호응함으로 인해서 (그 결과는 미미하지만)
국가는 강제동원 효과의 필요성을 재확인 할 것이고, 강제동원이 되풀이될 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러한 ‘국가주의’는 인간의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이기적인 습성’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권력’과 ‘자본’에 맞물린 결과이다.
국가주의에 반기를 들고자 한다면, 정면으로 투쟁하는 방법이 있기도 하겠으나,
그러한 국가주의의 기반을 받치고 있는 각기의 인간의 심리... 즉, ‘주체적이지 못하고,
이기주의적이며 자기편의적인 발상’ - 내 안의 파시즘 - 을 우선 분쇄하는 노력을
통해서도 국가주의의 기반을 흔들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비군/민방위 교육생들이 만들어낸 ‘태만의 문화’(주체적이지 못하고,
자기편의적인)는 전복되어야할 필요가 생기는 마당에 필연적으로 ‘적’?(강사)과
호응하면서 그 근간을 뒤흔들고픈 것이다.
물론 예비군과 민방위교육생들의 ‘전체주의적인 태만의 문화’를 ‘분쇄’하려는 목적은
모두가 바른 자세와 빛나는 눈동자로 예비군 훈련과 민방위 교육을 ‘일사분란하게’
받게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궁극의 지향점은 예비군, 민방위 교육생들이 ‘주체적’ ‘능동적’으로 교육에 임하면서,
반대질문 공세를 퍼 붓는 등으로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최정예 주체 양성’에 있다. @.@
그러한 능동적 ‘주체성’은 앞서 말했던 대로, 자기 편의적인 이기성을 버리고,
타인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해줄 수 있는 성숙한 인간미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이의 모범?을 보이고자, 강사의 질문에 대한 100여명 교육생의
싸늘하고 차가운 정적을 깨고, 난감해 하는 강사를 향해서 나름대로 성실한 답변을
해보이곤 한다.
(나 역시 주체적이지 못한 이유로...)이로 인한 연쇄반응으로 인해서 ‘주체’가 깨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복잡하게 ‘인간’과 ‘사회’가 맞물리고, ‘실존’과 ‘관념’이 어우러지며, 인간의 심리가
사회적인 체계로 확대되는 그 역동적 관계성 속에서 나는 다만 그러한 방법으로라도
전체주의적 질서에 저항하고자 한다.
* 핵폐기장 사업
대다수의 이들은 TV에서 수시로 나오는 ‘네모난 병원’ - ‘원전센터’(핵쓰레기장) 광고에
현혹되곤 한다. 경쾌한 색조와 구도, 음악이 절묘한 삼박자를 만들어 내는 광고가
핵쓰레기장에 당장이라도 가서 살고픈 충동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는 감성공학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1.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선 그 ‘광고’를 누가 내 보내는지 알아야 한다.
광고를 낸 ‘한국수력원자력 주식회사’는 수십조원 규모의 회사이다.
이 회사는 ‘공기업’도 아니고 ‘반절은 사기업’이다.
생각해 보라. 정부의 각 부처도 ‘부처이기주의’ 로 인해서 국민들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부서의 확대만 위해서 노력하는데, 반절은 사기업인 기업이 국민을 위해서
원자력 사업을 할 것이며, 국민들의 알권리를 위해서 ‘네모난 병원’에 들어가면 안전하고
문제가 없다고 핵폐기장 선전을 할 것인가?
2. 그렇더라도 ‘어차피 에너지를 써야 하지 않는가?’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 따라서 핵폐기장을 반대하고 원자력을 반대하는 이들은 원자력 의존도
40%가 넘는 한국에서 현 시간 부로 원자력 발전을 전면 금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앞으로 핵쓰레기는 우리 후손 만만년(길게는 수천만년)에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에,
‘핵쓰레기를 줄이는 방향의 에너지 정책’ 즉 원자력발전을 점차 축소하는 정책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다음의 사례를 보면 명확히 이해될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1979년 드리마일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에 그 큰 나라에서 단 한 개의 원자로도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의 [에너지성]에서는 ‘원자력 에너지는 오히려 다른 에너지보다 효율성도
떨어지고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사양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사양산업’이 된 핵산업을 미국에서 (구닥다리전투기 압력 줘서 팔아 먹듯이)
한국사회에 이식을 시켰던 것이‘고, 돈벌이를 위해서는 윤리적 의식이 없는 수 많은
이들이 달라 붙어서 엄청난 자본을 이용해서 ‘핵산업만이 한국 에너지산업의 미래’라는
식의 도식을 국민들의 머릿속에 각인 시켰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원자력 발전소 하나에 2조가 투입되고 원자력 석박사들 150여명이
달라 붙을 수 있는 노다지를 ‘핵산업계’가 포기하겠는가?
일본 동경 대학 등에서는 핵산업을 사양산업이라고 해서 핵관련 학과가 폐지되고 있지만,
유독 한국의 경우에만 핵관련 학과/부서가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이권이 있는 곳에 ‘윤리의식 제쳐두고’ 벌떼 같이 달라붙는 한국인들의 특성이
여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3.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 거릴 이들도 ‘그렇더라도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쓰레기를 어딘가는 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핵폐기장을 반대하는 것은 이기주의다‘라
는 입장은 고수할 수 있다. 이 역시 핵산업계에 철저히 세뇌된 결과이다.
정부가 핵폐기장 유치를 위해서 그리 힘쓴 것은 현재 핵쓰레기 저장공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선 핵폐기장을 만들어 놓고 앞으로 10년 동안 16기의 원전을 더 추가
증축하려는 세계 최대의 원자력 확대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이다.
유리고형화 기술로 인해서 핵쓰레기를 10분의 1, 20분의 1로 압축하는 기술이
만들어져서 앞으로 핵쓰레기 저장공간은 2,30년은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재떨이를 만들어 내야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로 더 많은 핵발전소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핵폐기장을 2005년에 유치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산업자원부의 공식입장이다.)
그러나 과연... 현재 우리가 에너지를 펑펑 쓰는 댓가로...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 보다
두배 세배 더 많은 핵쓰레기 방사능에 누출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세대 간 형평성에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여지껏 수십년간 ‘반핵단체’들은 이렇게 근본적인 에너지 정책에 대한 고민도
없이 막무가네식으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추진하는 핵발전 사업을 ‘반대’했던 것이지,
‘우리 지역에 핵폐기장 안된다’는 식으로 핵폐기장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100년 대계의 길을 가야하는 교육부의 경우에도 자신들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5년을 내다보는 교육정책을 못 세운다고 하는데,
실지로 ‘산자부’와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의 경우에는 자신부처의 이익을 위해서,
끝없는 말바꾸기와 지역 찢어놓기, 외유 활동 등을 통해서 시민단체 측으로부터 신뢰를
잃을 대로 잃은 상황이다.
일 예로, 2004년 말 ‘산자부장관’은 ‘앞으로 반핵단체들과 논의를 통해서 핵폐기장문제를
처리하겠다’라며 부안군민들에 대한 실질적인 항복 문서를 썼다.
하지만 합의서에 서약한지 6개월도 안되어서 이를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2005년
핵폐기장 유치 공모가 시작되었고, 그 직후로 군산 등의 4개 지역에서 극단적인 대립과
지역갈등이 빚어졌다.
이렇기 때문에도 시민단체들은 정부조직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도장찍은 합의서도 우습게 폐기조치 하는 자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4.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앞서 논의되었던 대로 ‘핵산업계’가 자신들을 위해서 핵산업의 방향을 설정하고
추진해야할 것이 아니라, 세대간의 형평성까지를 고려해서 ‘에너지 정책’에 대한
전국민적인 논의-합의가 있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점점 늘어나는 에너지 소비에 대해서 ‘필요가 있으니 수요를 충당한다’ 고
하면서 무턱대고 핵산업을 확대하는 것은 안그래도 심화되는 지구온난화 현상을 부추기면서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좀 더 ‘신속히’ 좀 먹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이러한 ‘무한소유’ ‘무한소비’의 욕구를 부추겨서 몰락하는 인류를 만들어내는
‘한물간 후기산업시대적인 에너지의 소비는 최대한 줄어야 한다.
우리의 소비 방식 자체를 전환하면서, 에너지 절약화 정책 등을 통해서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 새만금 사업
부안에서 신시도와 군산을 잊는 33Km 세계 최장 방조제 둑을 쌓고 그 내부를 ‘농토’와
‘산업단지’로 만들려는 사업.
[이 천혜의 갯벌을 다 매꾼단다.]
[‘농토’화 계획의 문제점] - 세계 5대 갯벌인 새만금 갯벌의 경우에는 갈퀴로 긁기만 하면
은 끝없이 해산물이 쏟아져 나오는 그것 자체가 ‘밭’임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안지으면
‘보상’까지 해주는 ‘휴경보상제’를 실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농토’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러한 상식적이지 않은 사업이 추진되는 이유는 새만금 사업의 ‘주관부서’인 ‘농림부’의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농림부의 경우에는 그곳에 해산물이 아무리 무한대로
쏟아지더라도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갯벌에 흙을 덮어서
쓰지도 않을 ‘농토’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농림부는 엄청난 국민세금이 자신들의 부서로 쏟아지는 이익을 얻게 된다.
철 밥통 공무원들은 그런 국책사업을 통해서 국민의 이익과는 무관한 자신들의 세를
확대하는데 전념한다.
[‘산업단지’ 계획의 문제점] - 농토가 아닌 ‘산업단지’를 만드는 사업의 현실성도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선 주관부서인 ‘농림부’가 자신들의 밥줄을 내 놓을 것인가는
미지수이고, 설령 산업단지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기업이 들어와서 입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현재 새만금 한쪽이 연결되는 군산의 산업단지 분양률은 30% 도 되지 않는다.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위해서 사회적 인프라를 만들어 낼 생각은 않고,
무조건 땅(공간)만 만들어 낸다고, 과연 그들이 원하는 발전이 따를까?
새만금 사업은 시민 세금을 낭비하고, 환경만 파괴하는 대표적인 국책사업이다.
[새만금 사업 개요]
1. 경제기획원(87) - 사업타당성이 없다고 발표
2. 대통령직 인수위원회(98) - 3대 부실사업으로 규정
3. 지속가능위원회(2001) - 사업타당성 없는 사업 이라고 발표
4. 환경부(2004) -‘환경피해와 경제적 손해가 따를 것’
5. 사업타당성, 설계도 한번 없이 막가파식으로 추진하는 사업
6. 단 한번의 시민공청회도 없이 추진되는 사업
7. 새만금 사업장에 [돌 납품하는 이들이 만든단체]가 추진에 앞장섬
8. 시민들마저 ‘추진만 되면’ 천지개벽이 될 것으로 착각
그렇담 왜? 새만금 사업이 계속 진행되는 것인가?
첫째, 앞서 말했듯이 이는 ‘공익’과 관계 없는 ‘부처’(농림부/농촌공사 등) 이기주의
때문이다.
둘째, 정치인들의 이익 때문이다. 즉 헐벗고 굶주린 전북 주민들을 대상으로
‘표를 얻어서 당선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당신들을 배불리 먹여 살려준다’고
공언하는 것이다.
아래 사진을 보라.
[모 정치인의 모습 - 지역의 갈등을 봉합할 생각은 못하고,
앞장서서 지역 분열을 조장하는 댓가로 얻는 의원직. ]
이 사람은 도의원에 출마한 사람으로서 2006년 지방선거 기간 동안에
저 플랭을 자랑스럽게 선거사무실 벽면에 붙여 놓았다.
그는 ‘왜? 새만금 사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기술적으로 얘기하면서
시민들을 설득하지 않는다.
‘논리’ ‘합리’ ‘기술적인 사실’ 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선동’하고, ‘표’를 얻기 위한 ‘전략’만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이들이 앞장서서 배고픈 전라도민을 향해서 마치 새만금 사업만 성사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라고 난리 법석을 떠니, 배고파서 눈이 뒤집힌 도민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껌뻑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이들은 ‘새만금을 반대하는 이들은 지역발전을 저해하는 세력’이라고
‘선동’하면서, 행정깡패까지 동원해서 반대 단체들을 두들겨 패곤 했는데...
이것은 ‘오직’ 자신들의 이권을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한 반대단체들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고조하면서 자신들이 마치 ‘지역발전의 선구주자’인 것 처럼 이미지화
해야 이들은 ‘당선’된다. 위의 사진의 삭발투쟁한 인물도 당연히 도의원에 당선되었다.
혹시나 ‘다른 지역’ 사람들이 전라도에서 빚어진 이 처참한 현실에 대해서 혀를 끌끌
차는 동정으로 일관할 것이라면 그러한 값싼 동정은 사양한다.
이것은 전라도지역을 희생시켜서 다른 지역의 발전을 꽤한 결과로 ‘소외된 전라도민들의
상실감’이 촉발되어서 발생된 불행이지, 전라도민들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 발생하는
사건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전라도’의 현실을 보면서 혀를 차야할 것이 아니라,
미안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첫댓글 ㅎㅎㅎ 재미있는 한편으로 너무도 복잡한 세상의 뒷모습을 보는것 같다.
우연히 보게되었네요...12년전 살았던곳...잊었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는거 같아 좋네요...안민고개..용지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