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까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을 맡았던 박철곤씨(57)는 소문난 달변가이자 중재자다.
절대 팔짱을 풀지 않으려는 상대를 만나도 박 전 차장의 논리 앞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박 전 차장은 또 누구보다 차분하다. 어릴 적부터 질곡 많은 삶을 묵묵하게 헤쳐온 인생역정이
지금의 그를 만든 듯 싶었다.
그는 스스로 '고시 3관왕 출신'이라는 우스갯소리를 잊지않는다. 검정고시를 두차례 합격했고,
행정고시를 거쳐 공직에 입문했다는 그의 이력이 눈에 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크게 냉혹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정이 많은 사람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후자에 해당되는 것같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공직을
떠났지만 후배들에게 후한 점수를 받고 있는 것도 쓴소리보다는 후배들에 대한 배려심을 앞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진안군 백운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지긋지긋한 가난과의 싸움에 시달려야 했다. "5대조가
이조참판을 지냈고 할아버지도 인근 3개면에 적지않은 땅을 소유했었다"는 그는 "일제시대들어
가세가 급격히 기운데다, 부친이 징용의 후유증에 시달린 탓에 굶기를 밥먹듯 했다"면서 "어릴 때의
기억때문인지, 지금도 밥을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고,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포만감이 없다"고
말했다.
"배를 곯아본 사람은 많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릴 땐 날콩을 먹기도 했어요. 비린내 나는
날콩이 고소하다고 여길 만큼 가난이 심했었죠. 한겨울에도 냉방에서 밤을 자야했던 탓에 아침에
일어나면 굳어버린 손가락을 펴는게 다반사였어요"
진안 백운초등을 졸업한 뒤 '전액 장학금'을 약속받고 전주의 한 사립중에 입학한 그는 "재건학생회
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험지를 빼긴 뒤 자퇴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고교입학자격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긴 뒤 부산진고를 졸업했다. 2년제 방송통신대를 졸업한 그는 대학편입학
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한양대에 편입했다.
그는 "한양대에 편입한 뒤에야 '돈걱정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이뤘다"면서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4학년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시험으로 가난의 수렁을 극복한 셈이지만 신문배달과 우유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가야 했던 탓에 당시의 나이가 서른살이었다.
고시동기들에 비해 나이는 많았지만 승진은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일중독'을 즐겼기 때문
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 정문에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는데, 예나 지금
이나 그 문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공직에 입문한 직후 '어떤 공직자로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잊지 않았아요. 공직자가 권력이나 돈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공직자의 길은 명예를 얻는 것'이라
는 결론을 내렸고, '내 후대에 내 이름을 얘기할때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는 결심을 했죠"
그는 "공직에 몸담는 동안 돈 생기는 자리는 탐하지 않았고, 소위 '끝발있는 자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특유의 성실함을 앞세워 승승장구했던 그는 특히 '국무총리실의 산증인' 또는 '총리
실의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총리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에 힘입어 '총리실에서 사무관,
과장, 국장, 조정관, 차관 등을 거친 유일한 공직자'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 1982년 총무서 소청심사위 행정사무관으로 공무원생활을 시작한 그는 대통령자문 부패방지기획단
기획운영심의관, 사회문화조정관실 복지노동심의관 등을 거쳤고 국무총리실에만 23년을 재직했다. 그에
대해 '국정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실무경험을 앞세워 국정현안을 깔끔하게 조율했다'는 평가
가 꼬리표 처럼 따라다닐 정도다.
그는 "주변에서 '일을 몰고 다닌다'는 얘기가 많았다"면서 "후배들 사이에서 '박철곤하고 일하면 고생은
하지만 보상은 확실히 해준다'는 말도 적지않았다"고 말했다.
국무차장에 재임당시 그가 남긴 족적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여수세계박람회 정부지원실무위원장을 역임
하며 여수세계박람회의 토대를 제공했고, 기후변화, 노사갈등, 쌀직불금 부정수급 등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책마련에 주력했다. 먹을거리안전확보T/F팀장을 맡을 당시에는 김제에서 발생한 조류독감 확산방지를
위해 동분서주해 40일만에 조류독감사태를 종결시켜 관가의 화제를 낳았었다.
국무차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특임교수, 조폐공사 비상임이사, 세종시민간합동위
민간위원, 이명박 정부 정무직 퇴임자모임인 선진한반도포럼 간사 등을 맡으며 여전히 바쁜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는게 주변의 평가다.
그는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한발짝 물러난 뒤에야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면서
"고향 선후배의 성원에 어긋나지 않도록 고향발전의 밀알을 자임하겠다"고 말했다.
박철곤 정무직공무원
- 출생
- 1952년 5월 30일 (만58세) | 용띠, 쌍둥이자리
경력
경력 리스트
2008 ~ 2009 |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
2003 ~ |
국무총리국무조정실 총괄심의관 |
2005 ~ |
국무조정실 규제개혁조정관 |
1999 ~ |
국무총리국무조정실 외교안보·의정심의관 |
2004 ~ |
국무총리국무조정실 심사평가조정관 |
2002 ~ |
국무총리국무조정실 복지노동심의관 |
2001 ~ |
국무총리국무조정실 부패방지기획단 기획운영심의관 |
1999 ~ |
국무총리국무조정실 일반행정심의관 |
2007 ~ |
국무총리국무조정실 기획관리조정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