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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실린 한겨레 신문 글입니다.
성균관 대학이 국립대학이 되지 못하고 특별법 지위도 유지되지 못하고 관주도 아래에 제례 장묘문화 등의 혼란스러운 현상으로 발전한 것은 일제 강점기 그들에 아부하여 황도유학 운운하고 독립지사들의 정신적 피를 일제에 팔아벅은 사이비 유학자의 농단으로 광복이후 자유당 독재정권에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데서 기인합니다. 김삼웅 선생의 이글을 읽어 보시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시론] 한국방송 이사장의 몰역사적 언설
등록 :2014-10-28 18:41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최근 백범 김구 선생을 폄훼하는 언설이 도를 더해 간다. 사인이 연구 목적에서 또는 공명심에서 비판하는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공인이 정치적 의도에서 사실왜곡을 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것도 친일파 후손이라면 심각성은 더하다. 이인호 <한국방송>(KBS) 이사장의 백범 폄훼와 “해방 후 친일청산이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는 등 일련의 몰역사적 언설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임은 물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한다.
그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김구 선생을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것은 맞지 않다”며 “1948년 대한민국 독립에는 반대하셨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건 맞지 않다고 한 것”이라 부연했다. 백범은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1943년엔 중국 장제스 총통을 움직여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는 등 독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1급 공로자다. 다만 그는 분단정부 대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암살되었다. 백범은 1962년 건국훈장을 받았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며 최고 등급은 ‘대한민국장’인데, 김구·안중근·이승만 등에게 수여되었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온 겨레의 열망이었다. 그래서 제헌헌법 제101조에 특별법 제정을 명시하고 반민족행위특별법을 만들었다.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반민특위가 짓밟히고, 그 결과 일제의 유산 청산에 실패했다. 제헌국회 의원들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서 반민법을 제정했다는 말인가.
이인호 이사장은 조부의 친일행적에 대해 “그 정도가 친일이라면 일제 때 중산층은 모두 친일”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국정감사장에서는 “(조부가) 일본에 타협하고 체제에 안주했으며 광의에서 보면 친일”이라고 답변했다. 5·16 쿠데타 직후 유도회와 성균관 임시사무소 대표 김석원씨는 이 이사장의 조부인 이명세 등 3인을 혁명검찰에 고발했다. 고발장에는 “일제 말기 총독부 사령을 받아 경학원 사성이 된 이명세는 일제에 아부하기 위하여 황도유학을 제창하고 전국 유림들을 소위 명륜연성소에 몰아넣어 조선신궁에 참배시키는 등 유림을 동원시켜 일제에 충성을 다하다가 … 이승만이 귀국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두둔함에 또다시 뻔뻔스럽게 유도회에 뛰어들어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을 모취한 후…”라고 해방 후까지의 행적을 담고 있다.
나는 한때 이인호 교수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역사를 학문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사료의 발굴·채집·검토와 분석에 충실하고 사료와 사료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추리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개입되지 않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일뿐이다”(<지식인과 역사의식> 33쪽)라는 대목엔 밑줄까지 그었다.
돌이켜보면 이 이사장의 편견 탓만이 아닐지 모른다.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대한 폄훼와 편견은 세를 타고 있다. 1948년 정부 수립을 ‘건국절’로 내세우고, 독립운동가 대신 친일파들을 ‘건국의 주역’으로 삼고자 한다. 뉴라이트-어버이연합-엄마부대-일베-서북청년단으로 이어지는 극우집단의 돌출현상은 민주화의 역행과 함께 ‘편견’에 가득 찬 ‘역사학자’들의 역사왜곡에서 시작되고 대통령이 이들을 중용하면서 세력을 늘려 간다. 1950년대 독일의 역사수정주의에서 발아된 것을 일본 우익이 표절하고 다시 한국 족벌신문이 차용한 이른바 ‘국가정체성 이론’을 기치로 내걸고 이를 비판하면 빨갱이·종북으로 몰아친다. 권좌의 안락의자가 좋다고 역사를 왜곡하면 반드시 글로써 심판을 받게 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2017.11.25일 한겨레 사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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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이사진의 파렴치한 행위로 감사원의 지적을 받았습니다.
서민들은 2,500원의 수신료를 전지료금에 부가하여 수신료를 또박따박 내고있습니다.
제가 9년전 시골집 노모가 병환으로 요양시설가셔 티브이 시청안한다고 수차이야기하여도 전기요금 합산으로 강제징수해간 일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거두어 제대로 쓴가? 누가 확인하는가 의심이 있었는데 이제 알고보니 기막힌 일입니다. 사설은 만사지틴입니다.
ㅡ 사설의 글 ㅡ
감사원이 24일 업무추진비를 사적 용도로 사용한 혐의로 <한국방송>의 이인호 이사장 등 이사진 10명에 대해 해임 등 인사 조처하라고 방송통신위원회에 통보했다. 감사원 발표로만 보면 이인호 이사장이 2800여만원(의심액 포함)을 개인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 사실상 이 이사장을 해임하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감사원이 지난달 17일부터 보름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 이사장의 경우 법인카드로 백화점에서 선물을 구입하는 등 1400여만원어치를 증빙자료 없이 사용하고 집 근처에서 식사하는 등 모두 161차례에 걸쳐 2800여만원어치를 부당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이사 전체의 부당 사용액 8천여만원 가운데 가장 많은 액수다. 국민 시청료를 맘대로 썼다면 그 책임을 엄히 물어야 한다.
이번 감사 결과가 아니더라도 한국방송은 국민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그 책임은 고대영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물론 이인호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진에게도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박근혜 정권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세월호 관련 보도’ 외압을 행사한 사실은 음성파일을 통해 온 국민에게 공개됐다. 대통령이 공영방송 보도국장 인사에 간섭하려 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명박 정권 때는 청와대와 국정원이 앞장서 ‘인적쇄신 추진방안’ 문건을 만들고 ‘반정부’나 ‘국정 지원에 소극적’이란 이유로 기자 등을 취재·제작 현장에서 내쫓았다. 국정원 정보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관련 보도협조 명목으로 고대영 사장(당시 보도국장)에게 200만원을 건넸다는 진술까지 했다.
한국방송 파행이 80일 이상 계속되는데도 이사회는 정상화 노력은커녕 사퇴 요구를 받는 고 사장을 감싸고 있다. 방통위는 공영방송을 망가뜨리고 공금까지 사적으로 사용한 이인호 이사장을 해임하는 등 한국방송 정상화에 나서는 게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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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합니다. 이문호 이사장의 뻔뻔함이 조부의 피를 물려받은 탓인가요 . 조부덕분에 고등교육을 받고서 하는 행위니 이해할 만하지요.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부호들이 강요에 의하여 전쟁물자 공납 부역을 한 것은 자기재산 지키려는 부득이 함이 있었다는 말은 차라리 다소의 설득력이 있다하겠지만 , 총독부로 부터 경학원 사성의 벼슬을 받고 황도유학을 선도 주창하다가 광복이후 자유당 독재 이승만 정권에 아부하여 유림들을 이승만 삼선 지지에 협조할 것을 강요하여 반대한 김창숙 조국현 김찬영 등 정통유림의 지도층을 몰아내고 최찬익을 성균관장에 추대하여 최근까지 유림지도 조직의 혼란상이 이어져 우리나라 전통문화 계승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의 헌법적 가치를 도외시 하게된 단초를 제공한 조부의 친일 행적의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한 망언이라 규탄한다.
추록
살아있는친일의역사친일파와그후손들을추적하고기록하다
친일과 망각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Newsstapa/김용진+박중석+심인보 지음/다람
3장 성공의 비밀
1: 다른 세상
……kbs 전이사장 이인호씨 얘기다…..이인호씨는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냈고, 아버지는 조흥은행에 들어가 감사까지 올랐다. 우리나라에 대학도 은행도 몇 개 없던 시절이다. 집안분위도 좋았다…책이 귀했던 시절, 그녀의 집에는 책들이 많았다….공부도 잘했다.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1956년, 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던 때, 잿더미가 되어버린 작은 나라의 수도에서 머나먼 제국의 중심부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새벽마다 하얀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거리를 종종 걸어 다녔을 앳된 얼굴의 여대생, 그가 얼마나 특권적 존재일지 떠올려보라.
서울대를 세 학기 다닌 뒤 유학을 떠났다. 웰슬리Wellesley 대학, 미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 중 하나인 힐러리 클린턴이 졸업한 미국 동부의 여자 명문 대학이다. 당시 학비와 기숙사비는 한 해 2천 달러가 넘었다. 한국의 일인당 국민 소득은 50~60달러 밖에 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때 2천 달러를 지금의 국민 소득과 비교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100만 달러, 10억 원 정도가 된다. 다소 과장된 수치 같지만 지금도 이 대학의 4년 학비와 기숙사 비를 합치면 3억 원이 넘는다. 사실 이인호 이사장은 그 시절에 장학금을 받아 학비를 내고 아이 돌보기 등의 현지 아르바이트로 책값과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집안의 뒷받침이 전혀 없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 아이 돌보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인호의 할아버지는 “네가 남의 집 식모살이라니”라며 한탄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
전 kbs이사장 이인호 이사장의 할아버지 이명세는 1893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 초반이던 1918년 26살의 나이로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서기 겸 통역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몇 군데 법원에서 서기 및 통역 업무를 담당하다 은행권으로 옮겼다….은행권 경력을 쌓은 뒤 40세부터 각종 기업의 취체(대표)역을 지냈다. 그 후 47세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유학(儒學)계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조선유도인연합회의 상임 참사를 지내더니, 2년 뒤인 1941년에 상임 이사가 됐다. 뿐만 아니라 조선 유림연합회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1944년에는 경학원(經學院)의 사성 자리에 올랐다.
왜관계에서 경력을 시작한 뒤 금융, 경제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이명세가 뜬금없이 유학계 인사가 됐을까? 그것도 매우 중요한 직책을 연달아 맡으면서 말이다.
그 답은 이명세가 몸담았던 단체들의 성격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유도연합회는 500년 동안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학(儒學)을 식민지배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어용단체다. 얼마나 심한 어용단체였는지는, 이 단체의 총재가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무통감인 오노 로쿠이치로였다는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유림연합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단체의 강령은, ‘천명황도존정국시(闡明皇道尊定國是)’, 즉 천황의 도를 천명하고 국시를 존중해 세울 것, ‘후원황군앙양국위(後援皇軍昻揚國威)’, 즉 천황의 군대를 후원하고 국위를 떨칠 것 등이었다.
이명세가‘사성’의 자리까지 오른 경학원은, 일제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강제로 없애고 대신 만든 어용 유학 교육기관이다. ‘사성’은 대제학(大提學) 바로 아래 직위로 당시 3명뿐이었다. 일제는 식민 통치의 정신적 동원 기구로 유학을 활용하기 위해 유학계 장악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유학에는 조예가 없지만 일본어를 장하고 말을 잘듣는 이명세를 이용한 것이다.
이명세의 주요 역할은 일제의 침략전쟁과 징병제 시행을 정당화하고 이를 홍보하는것이었다. 이른바 ‘일제의 나팔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일제의 나팔수’로 활약한 근거는 곳곳의 문헌에 남아있다. 우선, 이명세가 조선 유도연합회 기관지인『유도(儒道)』 창간호에 쓴 기고문을 보자, 제목부터 ‘동아 공영권, 유교의 역할’로 어용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우리 황군은 인의를 위하여 싸우기 때문에 무적이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고 말한 선현의 격언이 현재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일제 침략군을 옹호하기위해 엉뚱하게도 맹자(孟子) ‘양혜왕편’을 인용한 것이다. 양혜왕편의 ‘인자무적’ 다음에는 ‘불기살인자능일지不嗜殺人者能一之’, 즉 ‘사람 죽이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가 (천하를)통일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뒤따른다. 무력보다는 도덕의 힘이 중요하다는 맹자의 말씀을 일제의 무력을 찬양하고 승리를 기원하는데 가져다 썼으니 얼마나 얄팍하고 비굴한 아첨의 말인가.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하겠다는 일제의 방침이 결정되자, 이명세는 1943년 1월 ‘축 징병제 실시’란 한시를 써서 발표했다. 제목부터 노골적인 일제 찬양의 뜻을 담고 있다.
축 징병제 실시
해마다 북벌(北伐)하고 또 남정(南征)하다가
이제야 반도에 새로이 징병제 실시하네.
내외가 일체가 되어 은혜를 고루 입으니
앞뒤로 서로 호응하며 한목소리로 의를 외치네.
집안에선 아들 난 것 중요하다는 걸 더욱 깨닫고
나라 위해 적과 싸워 죽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리
우리들은 유감없으나 바라는 것 있으니
하루빨리 전란 끝내고 승평의 시대로 돌아오는 것이라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와같은 취지의 강연을 하는 것이 이명세의 주요 임무였다. 경력으로 봤을 때 전혀 ‘유학자’라고 할 수 없는 이명세가 유학의 이름을 팔아 반민족 행위를 하고 돌아다닌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진짜유학자들은 의병을 조직하고 일제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일제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며 옥살이를 했고 결국 죽거나 해외로 망명해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실제로 이명세가 유학의 이름으로 혹세무민하던1940년대,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고 불리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감옥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사실상 연금 상태에 있었다. 이 시기에 김창숙 선생이 남긴 시 한 편은 이명세와 같은 무리에게 던지는 준엄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아구탄(餓狗歎)
잔상스럽다
주린개여
무얼하자고
꼬리를 흔드느냐
먹고남은 뼈다귀
던져준다 기뻐하지만
살이찌면 반드시
때려서죽이리라
놀라운 것은 이런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명세가 해방뒤에도 승승장구 한다는 것이다. 해방이 되자 유학계는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친일 잔재를 청산한다. 김창숙 선생은 이명세 같은 친일 유학자들을 내쫓은 뒤 전국의 유생들을 조직하여 향교의 재산을 되찾고, 성균관 대학교를 설립한 뒤 초대 총장이 됐다. 그러나 그 후 김창숙 선생이 이승만을 겨냥해 ‘하야 성명서’를 발표하고 투옥되는 등 이승만의 독재에서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자, 이승만은 결국 ‘유도회 사건’을 일으켜 김창숙 선생을 성균관 대학교와 유도회에서 쫓아냈다. 이때 대활약한 인물이 바로 이명세다.
이른바 ‘재단파’ 라는 조직이 정치깡패까지 동원해 유도회에서 난입하고 사무실을 점거하며 ‘유도회 대표자대회’를 난장판으로 만들게 된다. 그들은 김창숙 선생 등의 정통파를 퇴장시키고 경찰의 비호 속에서 유도회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 중심인물이 바로 이명세였다. 이렇게 유도회 권력을 장악한 이명세는 기독교 신자인 대통령 이승만을 유도회 총재에 추대하고 역시 기독교 신자인 부통령 이기붕을 최고 고문에 앉힌 뒤, 자기 자신은 성균관 재단 이사장 자리를 탈취한다. 유학 중인 손녀 이인호에게 ‘네가 남의 집 식모살이라니’라며 한탄하는 애정 어린 편지를 보냈던 것은 바로 이 시기였을 것이다. 이명세의 친일 행적에 대해 반민규명위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이명세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7호“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4권
첫댓글 일반게시판 147호 글과 연관하여 읽어 보시면 뜻이 더욱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