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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평화는 사랑입니다.!
함께한 5박 6일, 행복했습니다. 순례걸음을 반추하며 역사의 그날로 함께 걸어 보겠습니다. 아주 천천히 생각하며….
1784년 조선 천주교는 북경 북 당에서 이승훈을 최초 세례자로 탄생시킵니다. 이후 많은 고난 끝에 정 하상, 유 진길, 지 황의 노력 끝에 주 문모 신부님을 조선 천주교회로 모셔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이후 1835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천주교를 위하여 입국하신 모방신부님은 방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하여 고심하며 여러 신자들과 의견 나눔 끝에 세 명의 소년을 선발합니다. 그들은 바로 최 양업, 최 방제, 김 대건 입니다. 1836년 정 약종의 아들 정하상이 머물고 있던 한양 집에는 모방신부님이 거처하고 계셨습니다. 1836년 2월 6일 최 양업 소년이 최초로 신학 생으로 선발되어 모방 신부님 이 계신 집에 처음 도착합니다. 그리고 바로 라틴어를 모방(Maubant, 羅, 1803- 1839)신부님에게 배웁니다. 이어서 3월 14일 최 방제 소년이 도착하고 그리고 몇 개월 후 7월 11일 모방 신부님이 계신 집에 김대건 소년이 도착합니다. 대건 소년은 용인 은이 골에서 4월 모방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학 생으로 선발되는 영광을 얻은 소년입니다. 이렇게 모인 세 소년은 1936년 모방신부가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십자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순종과 복종 서약을 갖습니다.
조선천주교의 꿈나무인 세 소년은 1836년 12월 3일 유방제(파치피코) 신부와 함께 조선 교회의 밀사로 중국으로 가는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에게 당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만주 봉황성 책문에 머물고 있던 샤스탕 선교사에게 세 소년을 안내하라 합니다. 12월 28일 도착한 세 소년과 조선 천주교 밀사와 유방제 신부님은 샤스탕 신부님과 만납니다. 샤스탕(Chastant. 1803- 1839) 신부님은 중국인 밀사 두 명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본부에 세 소년을 안내하도록 한 후 조선에 입국합니다. 두 명의 밀사와 책문을 출발한 세 소년은 1837년 6월 7일(음력 5월 5일) 마카오에 도착합니다. 세 소년이 걸어 갔던 길을 추정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 – 평양 – 의주 – 변문 – 심양 – 마가자 – 서만자 – 장치까지 1690km( 4200리) 와 변문에서 마카오까지 1780km( 4400리) 는 어떤 육로를 이용하였는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다만 서울에서 변문까지 걸린 일자는 187일이며 변문에서 마카오까지는 162일간 걸렸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당시 마카오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본부에서 조선천주교를 위하여 임시로 조선 대목구 신학교를 세웠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 신학교 교장신부 칼르리(Callery, 1810- 1862) 와 르그레즈와( Legregeois1801-1866), 리브선교사들에게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역사, 문화사, 지리과학, 기화학,등등 교양학과 철학과, 교리, 성가, 신학 등을 배우게 되지만 현지 사정으로 중단하게 된다. 1839년 마카오 민란으로 수업을 중단한 후 필리핀 다낭으로 피신하여 도미니코 수도원장 초청으로 롬롬보이 농장으로 가 공부를 계속한다.
1839년 11월 필리핀 롤롬보이 농장에서 철수하여 마카오로 돌아 온다. 1840년 1월 8일 메스트르 신부가 마카오에 도착하여 조선 신학생을 지도하기 시작한다. 1840년 조선 신학생들은 19세되던 해에 베르뇌 신부에게 철학 수업을 받는다. 이어서 1841년부터는 신학과정에 입문하고 1842년 2월 15일 , 김대건과 스승 메스트르는 프랑스함대 에리곤호(함장 세실)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 필리핀에 도착한 후 3월 10일 마닐라를 출발하여 상해로 향한다. 또한 최양업 신학생은 4월 26일 파리본부에 계신 스승 신부 르그레즈 신부에게 서한을 발송 한다. 그리고 1842년 7월 17일 만주 선교사 브르뉘에르(De la Bruniere, 1816- 1846)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 파보리호에 탑승하여 마카오를 출발 8월 27일 양자강 부근 오송항에 도착한다. 8월 27일 김대건 과 메스트르 신부 일행은 세실함장과 함께 남경조약에 입회 한 후 관광을 한다. 8월 31일에는 최양업 브릐니에르 신부와 김대건 메스트르 신부와 상봉한다.
1842년 9월 10일, 최양업 신학생 스승 부튀니에르 신부와 함께 강남 대목구장 베시 주교를 만남, 9월 17일은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스승신부와 함께 상해 도착함, 10월 2일 베시 주교 주선으로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붕돠 브뤼니에르 신부와함께 창가루 섬으로 출발함, 10월 12일, 최양업 신학생과 브뤼니에르 신부 창가루 섬 출항
1842년 5월 19일 최양업 신학생 파리본부 르그레즈 스승신부에게 두번 째 서한 발송 하고, 4월에서 12월 사이 성사를 집행랄 수 있는 성직에 오르기 위한 7 서품중 단계적으로 5품까지 받는다. ( 삭발례(Tonsura), 1품 수문품(守門品), 2품 강경품( 講經品), 3품 구마품(驅摩品), 4품 시종품(侍從品), 5품 차부제품(次副祭品), 까지 단계적으로 받는다.
12월 10일경 소팔가자 교우촌에서 7년 6개월 간 ( 1837년 - 1844년 12월)의 소정의 신학교 과정을 마친 후 페레올 주교로부터 6품(大品) 인 부제품을 받는다.
1845년부터 1861년 까지의 두 사제의 고난과 은총의 걸음
1845년 1월 1일, 조선 입국을 위해 변문으로 향함, 1월 15일 조선입국 성공 한양도착, 5월 28일 김대건부제 상해로 뱃길로 떠남
8월 17일 금가항에서 사제서품 받음, 8월 24일 황당에서 최초 미사 집전, 8월 31일 상해 출발 조선으로 출발하였으나 표류끝에 제주도에 도착함, 다시 출항하여 충남 강경부근 나바위에 페레올 다블뤼 신부와 함께 도착함, 11월부터 12월 까지 한양을 순방하고 고향인 은이와 부근 은석골, 텃골, 단내, 먹뱅이, 한덕골, 한터, 주막골, 고추골, 용바위, 미리내 등등에 흩어져 교우촌을 형성한 신자들을 찾아 성사와 전교에 매진하였다. 1845년 12월경 16세의 소년으로 사제가 되기위하여 머나면 땅 마카오, 필리핀, 상해, 만주, 북간도 등등을 떠돌던 김대건은 10년만에 청년사제가되어 고향으로 돌아 왔다. 주교님께서 고향인 용인 은이를 임시본당으로하여 전교하고 특별히 어머니를 찿아 자식의 본분을 다하라는 간곡한 배려의 덕분이었다. 1946년 4월 8일 어머니 우르슬라와 친구, 그리고 교우들과 함께 부활절미사를 집전함. 1846년 5월 14일 최양업 신부와 스승인 메스트로 신부를 입국시킬 목적으로 상해로 가 편지를 전달 한후 돌아 오다 백령도 부근 순위도에서 체포된 안드레아 신부는 옹진 해주감옥을 거쳐 한양으로 압송된다. 조정에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통외 위험분자로 몰아서 군문효수형을 내린다. 1846년 9월 16일 한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한양성 밖 새남터 형장에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참수치명 한다. 이 후 1856년 신부님 동생 김난식 처 안동김씨도 29세로 요절하고 1864년 어머니 우르슬라 마저 선종하게 이르자 김난식은 프란치스코(1827- 1873)는 고향을 떠나 전라도 회문산 먹구니골에 들어가 고독한 수도자처럼 살다 1873년 43살 나이로 선종함함으로서 김대건 안드레아 직계가문은 멸절하게 된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하여 훈춘으로 감, 만주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풀려남,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가 신학생을 지도하기 시작함,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양업 부제는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에서의 애통한 소식에 대해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며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서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양업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한국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그 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는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이후
귀국 즉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 여 리를 걸어다니며 신자 3,815명을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 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어진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한국 천주교회를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걸려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
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신부의 신심과 열심,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시 그는 최 신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 신부의 선종 후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성대하게 장례가 치루어졌고 그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만주로 가는 하늘 길은 이외로 맑았다. 은빛 날개가 빛을 받아 반짝이며 빛과 바람을 가르고 구름을 휘저으며 북으로 날아 갔다 고도를 높일수록 고막을 꽈리처럼 부풀게하여 거북하였다. 굉음과 잿빛 구름 위를 날던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 것은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한 후 1시간 10분 지난 뒤었다. 은박지에 쌓여 나온 소찬과 쌀밥 기내식을 먹은 후 커피를 받아 마시고 컵을 반환한 후 비행기는 착륙하기 위한 방향을 틀었다. 꼬리가 근사하게 곡선을 이루며 활주로와 마주 섰다. 투우과 투우사가 서로 긴장하며 마주한 것처럼 비행기도 활주로와 마주한 후 내려 앉자 마자 굉음을 내기 시작하였다. 역회전이 걸리자 괴상한 굉음이 비행기에서 쏱아져 나왔다. 그리고 안내방송이..... 밸틀를 풀자 비로서 안도감이 몰려 왔다. 자리를 털고 일서서 비행기 밖으로 나와 화물을 찿기 위하여 콘베아밸트 회전기를 찾아 나섰다. 다가가 짐을 찾기 시작하였다. 내가 다가서자 잠시 후 슈트케이스가 보였다. 허리를 굽혀 화물을 바로 세운 후 바퀴에 중심을 올려 놓고 걷기 시작하였다. 힁단보도를 건너 주차장으로 가 3박 4일을 함께 할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자 공항청사 정면에 장춘공항이란 글이 크게 보였다. 붉은 색 글씨가 참 생소하게 느껴졌다. 난 중국을 여행하면서 가장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첫 째는 붉은색 큰 글씨와 둘 째는 큰 목청으로 하는 대화(싸우는 듯한 말)며 마지막으론 사람보다 차량이 우선하는 태도다. 이번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번 여행지는 우리나라와 변경인 만주지방이기 때문에 옛 우리들의 생활방식 등을 추억할 수 있어 위로가 도리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린 드디어 순례의 첫 지점인 장춘에
(長春)에 도착한 것이다. 낮익은 소녀같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 가이드 여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순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차가 우리들의 첫 미사 참례가 있을 소팔가자로 출발하자 세계 어느곳을 가도 한결같은 현지 가이드처럼 순례씨도 들뜬 톤으로 유창하게 설명해 나갔다. 소팔가자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교우촌이다. 조선의 입국이 막히자 조선 입국을 위하여 서양선교사나 김대건, 최양업 신부께서 거처하시던 곳이다.
장춘에서 70리 거리에 있는 소팔가자, 1796년 포교가 시작되었고 1838년 북경교구로부터 요동 대목구로 분리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 관리를 받게 된다.소속으로 바뀐다. 원래 작은 교우촌이었던 마을은 만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베롤르(Verolles), 주교가 1841년 토지를 매입, 성당을 짓고 만주일대 전교의 거점으로 삼는다.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고 최양업, 김대건 신학생의 스승인 메스트르 신부와 조선의 꿈나무인 최양업, 김대건 신학생들이 이곳에 머물게 된 동기는 조선의 입국을 위한 거점으로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1844년 조선입국을 위한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주교의 명을 받고 김대건신학생은 훈춘, 경원까지 2개월간 탐사를 하며 조선에서 온 밀사를 만나지만 영의치 않음을 알고 소팔가자로 다시 돌아 온다. 이후 최양업 부제도 조선 입국을 위하여 소팔가자를 거쳐 훈춘 일대로 메스트로 스승과 탐문하다 관헌에게 체포되지만 곧 풀려나기도 한다.
소팔가자 마을은 파리외방전교회 만주일대 전교 거점이며, 조선입국을 위한 선교사와 김대건, 최양업신부, 조선밀사들의 거점이었으며 임시로 조선교구 본부 역활을 했던 한국천주교에 중요한 성지다. 또한 조선천주교의 꿈나무였던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들이 공부를하고 부제서품을 받았던 유서 깊은 곳에 도착하였다.
소팔가자 성당은 1868년 건랍 후 의화단 사건으로 1900년 파괴되었으며 1908년 재건 되었으나 지금은 조감도처럼 신축중이다.
장춘교구 소팔가자 성당은 지금 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으나 공사자금 관계로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소팔가자 성당이 완공되면 작은자의 몫 순례단들과 5박 6일 일정을 함께 해 주신 주향민 신부님께서 주임신부님으로 부임하실 수 있는 성당이다. 소팔가자에 도착한 후 공사현장을 살펴 본 후 우린 현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기념관으로 이동하여 순례 첫미사를 드렸다.
주례사제이신 주향민 신부님은 중국 한족으로서 수원교구와 인연을 맺은 후 수원카돌릭 신학교를 졸업하셨다.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가 수원가톨릭 신학교 총장신부님 등 한국 신부님이 다수 참석하신 가운데 장춘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셨다. 순례단이 미사를 드린 건물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기념관으로 기념관과 양로시설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기념관은 부족한 자료로 사진으로 대신하고 있다. 새남터 성당, 절두산, 미리내 등등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된 곳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16살의 소년은 고향과 부모곁을 떠나 마카오, 필리핀 등을 전전하며 사제로서의 교양과 덕을 쌓기 위하여 노력하다 신학생 후반 성년이 되어 이곳에 와 신학공부를 한 후 부제서품을 받게 된다. 얼마나 고단한 여정이었던가! 생각하니 미사시간내내 마음이 짠하였다.
성체를 중심으로 모여 기도한 후 ....
현지 기념관 근무자와 신부님을 모신 후 기념관 현판 아래에서 기념촬영을 끝내고 현지인들이 평일 미사를 지내는 임시 성당을 찾았다. 마을 구락부로 사용하는 건물을 임시로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중국은 올림픽 후 종교자유가 개선되었지만 전교는 엄하게 금하고 있는 국가다. 김대건 기념관은 당시 신부님이 머물던 방 위에 세워진 건물로서 약 2500평이다. 1997년부터 시작하여 2005년 완성된 건물은 소팔가자 김대건 성인 성역화 사업회에서 주관하였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아편과 같다하였다. 공산이념을 신앙처럼 믿어야지 종교에 대하여는 거부감이 크다. 공산당원이 되기 위하여는 종교와 관련된 적을 갖아서는 안된다. 한중수교 후 그리고 올림픽 후 종교정책에 많은 변화가 뒤 따랐지만 아직도 전교행위는 철저하게 금하고 있는 것이 중국의 종교정책이다. 평일 미사가 진행되는 소팔가자 인민구락부 내부다. 많은 사람이들이 모여 미사참례를 하고 있었다. 언어는 다르지만 기도속에 담긴 뜻은 알게 모르게 다가 왔다.
미사가 파견 성가를 끝으로 끝난 후 현지 주임 신부님과 동행 신부님과 인사를 나누시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마을 사거리에 조성된 평화를 상징하는 기념탑이다. 비들기가 바라 보는 방향이 바로 소팔가자 김대건로이다. 이곳을 찾을 때 걸어 들어오고 걸어 나갔을 이 길을 걷기로 하였다.
미루나무 가로수에 달린 나무잎들이 미풍에 흔들거렸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저기 보이는 끝길까지 걷고 싶었지만 100m 정도 걸어 김대건로를 알리는 석문까지 걷기로 하였다.
이 길은 1999년 7월 12일, 길림성 인민정부와 한국 가톨릭 가락동 성당( 주임신부, 최선웅)의 우호증진을 위하여 함께 건설한 길이다. 라는 글이 모니카 자매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같다. 현재 모니카 자매님 본당이 바로 가락동 성당이다. 그 마음에 공감하기 위하여 기념비에 앉게 한 후 사진을 만들었다.
순레자들의 마음도 묶어 김대건로에 항상 머물게 하려는 마음을 염원하며 샷다를 눌렀다. 이곳에 머물며 조선의 사제가 되고 사목과 전교를 위하여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던 그들의 영광스런 고난을 떠올렸다.
소팔가자 성지를 참례한 후 다음 일정을 위하여 장춘으로 다시 돌아 가 개원 명도 호텔로 이동하였다.
식사와 이동중에는 룸메이트끼리 함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서로 챙길 수 있으므로 전체 팀웍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룸메이트를 만들면서 고민하지 않고 단박에 짜맞췄다. 그 동안 수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추억들이 그런 능력을 나에게 부여한 것이다. 작은자의 몫 성지순례와 걸음여행을 통하여 개개인의 성품과 성향을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어 같은 짝을 만들수 있었다. 서로 모여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끝낸 후 각자 지정된 방으로 흩어졌다. 휴식은 내일을 위한 충전이다.
순례 둘째날~
여행은 누가 처음 시작하였을가? 이런 의문을 갖은 적이 있었다. 그걸 한문을 통하여 풀었다. 한문으로 여행(旅行)을 써 보면 군사여와 다닐행을 조합하여 적게 된다. 군사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일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렇다면 순례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점을 갖게 된다. 종교의 전도를 위하여 이곳저곳을 다니다 그곳의 국법과 충돌하여 박해를 받다 순교한 현장을 방문하여 순교의 뜻을 기리며 지금과 내일의 나의 종교관을 살펴 보는 종교적 묵상의 시간인 것이다. 나는 이번 순례의 제목으로 바다의 별을 뽑았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께서 육로가 막히자 바닷길을 선택하셨었다.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던 조선박해 시기는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겐 암흑의 시기였으며 교회 또한 침묵의 시기였다. 그러나 열린 교회를 통하여 신앙의 전도를 위하여 어떤 고난에게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갔다. 거센 풍랑에 흔들리는 일편주 라파엘호에 의지한채 황해에 떠 있던 배에서는 끝없는 기도소리만 들렸었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늘엔 별이 떠 풍랑을 잠재웠다. 암흑의 시간을 기도로서 이겨낸 선조들의 모습을 바다의 별로 간주하기 위함이다. 난파 직전 해류따라 제주도에 도착한 선지자들은 다시 배을 띄운다. 그리고 충남 나바위에 도착한 후 13개월의 가장 잛은 성사와 전교의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지금도 우리들을 장춘으로 불러들일 만큼 거센영향력으로 부활하신 분이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인 것이다. 이런저런 사유들을 장춘 새벽 아침 산책을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였다. 장춘의 새벽은 짙은 안개로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호텔 주변을 돌아본 후 식당으로 갔다.
여행, 성지순례중, 섭취하고 휴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잠자리가 불편하거나 섭취하는 음식에 불편이 따르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충분한 휴식은 아니더라도 수면시간은 제대로 이뤄져야 하고 음식 또한 적정량의 에너지를 하는 것이 좋다. 순례자들은 예정된 시간에 맞춰 식당에 모였다. 안부를 묻고 단원들의 행색을 살폈다. 리더는 대원들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관찰에 따라 느껴지는 정황들을 파악한 후 기억하고 있어야 일정을 물흐르듯 소화할 수 있다. 아직 모든 것이 초반인 관계로 걱정할 수준의 내색은 발견 할 수 없었다. 둘러본 후 나의 자리로 옮겨 앉은 후 기호하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와 조찬을 챙겼다.
장춘~~ 봄을 알리는 꽃이 오래토록 핀다하여 붙여진 이름, 장춘은 자동차, 영화산업의 도시이며 길림성 성도이며 1932-1945년간 청나라 마지막황제 부이가 머물던 만주국 수도였다. 조선 사람들이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후 울분과 독립을 염원하며 떠돌던 곳이다. 이런 곳에서 미사 참례! 감동이면서도 역사에 대한 교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의식하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는 민족이다. 역사는 어떤형태로든 반복된다.
차로 이동하여 도착한 장춘 주교좌 성당, 현지 신자들도 여러명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다. 흰색톤으로 마감된 장춘 주교좌 성당! 고딕풍의 전형적인 성당으로 내부 중앙 양 옆으로 주기둥이 배열되어 있다. 한국천주교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명동성당 내부와 흡사하다. 잠시 시간을 내어 성당 외형을 찍은 후 내부로 들어 서서 성수로서 재속 삶 안에서 물든 여러가지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씻어냈다.
오늘도 주례사제는 주베드로 신부님이시다. 시작과 끝날까지 함께해 주실 것이다.
순례내내 성가 반주자로 수고해 주신 데레사 자매님,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 고맙습니다.~~
주신부님께서 입당성가와 더불어 제대에 오르신 후. 미사는 물흐르듯 사랑이 넘치고 은총이 가득한 가운데 이어져 나갔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서
입당송은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하느님 성자의 어머니 동정마리아를 저희 어머니요 모후로 모시게 하셨으니....
제1 독서는 수산나 자매님께서 낭낭한 목소리로
주님께서 대를 이울 구언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 그가 다윗의 어버지인 이사야다. 롯기의 말씀입니다. 2,1-3,8-11: 4,13-17.
영성체송: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시나이다.
파견성가 후, 제대앞에 모두 모여 순례의 환희심을 단체사진으로 정리하였다.
성모님께 인사들 드리려 찾은 성모동굴 신자석과 성모님 사이를 갈라 놓은 듯한 붉은 천 글이 방해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공덕을 기울이라는 이야기지만..... 작은 나무 푯말을 만들어 놓았더라면... 더 좋았을 덴데
오늘은 바쁜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길림으로 이동하여 길림 주교좌 성당을 견학한 후 부근 신학원과 성직자 묘역을 참배해야 한다. 이어서 내일 백두산 등정을 위하여 이도까지 이동하여 숙박해야 하는 관계로 서들러야 한다. 서들러 차에 올랐다. 길림으로 가는 길엔 옥수수 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중학시절 외국과 관련된 세계사 시간에 외운 내용, 만주는 옥수수, 수수, 조, 콩 산지라는 기억이 떠 올랐다.
긴 시간을 달린 끝에 길림 주교좌 성당을 방문하였다. 고딕풍의 고색 창연한 성당 모퉁이에 예수님이 사랑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 안아 주시는 모습으로 서 계셨다. 성호를 긋고 다가 가 인사를 드렸다. 길림 주교좌 성당은 1917년부터 착공하여 1926년 완공된다. 프랑스인들이 설계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건물은 준공되지만 이곳 역시 문화혁명이란 종교적 환난을 극복할 수 없었다. 반파된 성당은 접근할 수 없게 되었지만 1980년 종교 자유화 조치가 된 후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지금은 자유롭게 미사 참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비신자들에겐 결혼식장소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들이 방문하는 중에도 성대하게 결혼식이 올려 지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우린 강변으로 나가 잠시 머물며 여러장의 사진을 남겼다.
결혼식이 끝난 후 우린 성당으로 입당하여 신부님의 설명을 듣고 성당내부를 살펴 보았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게 꾸며진 곳곳에 여러 조형물과 성물들이 눈길을 끌었다.
개인적인 사진을 만들어 준 후 난 맨마지막으로 걸어 나왔다. 어디를 보아도 성심이 드러나는 성당이다. 강물을 바라 보고 계시는 성모님이 보여 다가 갔다. 요즈음 몇개월째 나의 의식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가 있다. 나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훨훨털어 버리겠지만 아이들과 관련된 일인지라 쉽게 떨치지도 못하고 이궁리 저 궁리를 하며 가슴앎이중이다. 좌우 형편이 모두 막힌 형극인지라 ..... 자세를 잡고 화살기도로서 성모님의 응원을 청해 보았다. 금명간에 답을 주시리라 의심 않는다. 성호를 긋고 차로 돌아와 올라탔다.
차는 길림 신학교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전형적인 중국인 용모를 지닌 기사는 신중하고 말 수가 전혀 없는 사내다. 집중적으로 먼 길을 달려야 하는 고된 하루가 지속적으로 쌓일텐데 그를 향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그를 돕고 싶어 휴지통을 비우곤 하였다. 장춘을 떠나기 직전 호텔 정원에 비치된 휴지통에 쓰레기를 버리로 가자 급하게 따라 오더니 미안하다 표현하며 쑥스러워 한다.
현재 길림 신학교에는 50명이 사제의 길을 걷고자 공부중이다. 이 신학교는 문화혁명이란 암흑시기에 페쇄되었다가 1987년 11월 길림주교 이설송 신부님께서 설립하신 후 1990년 7월에 길림성모동산으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한 동안 200명 가량 신학생이 수학하였으며 그 중 56명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 지금 우리들과 동행하시는 주향민 신부님도 이곳 신학교에서 수학을 하셨어야 하나 수원교구와 인연을 맺은 후 수원 가톨릭 신학교 졸업하신 후 중국에서 서품을 받으셨다. 길림신학교가 있는 성모동산은 중국에서 유명한 성지로서 수많은 중국 순례객들이 찾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길림교구 소속 성직자들의 묘원이 있는 곳이기도 한다. 다시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과 그 안에서 자라는 옥수수, 강원도 비탈에서 자라는 옥수수와 비교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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