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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외로운 결단
눅 11:1-4 23:34
2008년에 공중파로 방영된 <용서, 그 먼길 끝에 당신이 있습니까?> 라는 제목의 2부작 다큐멘터리 드라마 - 사랑하는 가족을 하루아침에 살인자에게 잃고, 상실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유가족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방영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2003년 희대의 연쇄살인마 유영철이 21명을 살인한 희대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 살인자에게 세 명의 가족(어머니, 아내, 4대독자의 아들)을 잃은 고정원씨의 이야기입니다. 사건이 나고 10개월 만에 유영철이 검거된 후 한강으로 가서 자살을 결심했던 그였지만, 유영철을 용서해주고 죽기로 결심했지만 유영철을 용서하는 순간 다시 삶에 대한 욕구가 생겼다고 고백했습니다. 용서를 하고 나니 다른 사람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후 유영철에게 직접 서신을 교환하고 사형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사실 용서를 해 준 이후에도 여전히 괴로움이 많습니다. 이 날 사고에서 죽음을 면한 가족은 결혼한 두 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용서하는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두 딸과의 관계마저 소원해졌고 때때로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용서를 해주고도 어느 하나 속이 시원한 것이 없고 괴로움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자신의 가족을 죽인 유영철을 용서하고 싶다는 고정원씨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정원씨는 고백하기를 용서를 하는 길이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했습니다. (용서, 그 먼 길 끝에 당신이 있습니까 다큐드라마를 보기를 원하면 다음 주소로 가시면 됩니다.)
포항에 있을 때 포항교도소를 드나들며 교화활동에 동참을 했습니다. 어느 날 교도소 내로 재소자들을 접견하기 위해 사무실에 갔는데 아주 엣띠어 보이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말이 없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나이 20살을 갓 넘은 어린 나이에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청년입니다. 무엇인가 질문을 해도 묵묵히 쳐다보고 있는 그 친구가 안쓰러워 보여 다가갔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에 술 먹고 귀가를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야단을 치자 술김에 휘두른 칼에 아버지가 숨졌습니다. 그리고 소년원을 거쳐서 성인이 되자 교도소로 이감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 그의 어머니가 염려가 되어서 어머니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답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께 편지는 주고받느냐고 했을 때 전혀 서신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만기출소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어머니께 용서를 빌라고 강권했습니다. 출소하면 어머니를 찾아가야 할텐데, 남편 잃은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하고 용서를 먼저 구하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저는 그 형제가 출소한 후에 어떻게 살 것인지 너무나 염려가 되고 궁금도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던 중에 그 형제의 폰으로 문자를 보내었더니 다행히 직장에 다니며 잘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정에서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자녀들이 그들의 마음에 사랑과 인정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하고 출세와 잔소리로만 키워 온 부모를 용서할 수만 있다면, 이 시대의 자녀들에게 가슴 아픈 소외를 경험한 부모들이 불효자식들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현대의 가정이 지금 보다는 더욱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을 사는 아내들이 자신의 남편들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남편들이 아내를 용서할 수만 있다면 오늘 이 시대의 가정 풍경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실천하지 못하는 한, 가정의 회복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용서를 실천하지 않으면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의 회복과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 용서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1. 이해는 용서의 불씨이다.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용서를 실천하는 최고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용서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인인 줄도 모르는 인류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라는 용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눅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여기에서 중요한 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동일한 현장에서 동일한 시간에 죄의 용서를 탄원하는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이 되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서로 가지려고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용서의 첫걸음은 죄인의 무지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을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자신의 죄됨을 안다면 용서를 먼저 구했을 것이고 자신이 죄인됨을 안다면 죄의 길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로마병정들에게 “당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하고 질문을 한다면 그들은 안다고 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하는 일을 그들이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알지 못해서 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몰랐습니까? 그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는 그 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이 하는 이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고전 2:8)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베드로도 말했습니다.
(행 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몰랐다는 것, 무지가 죄를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 무지를 용납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지하여서 이렇게 한 그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별 수 없는 죄인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 우리를 고통 가운데로 몰고 간 사람들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된 행위 그 자체를 정단화해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지금 하는 행동이, 지금 하는 그 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실수를 하고 나면 그 실수를 묻어버리기 때문에 또 다른 거짓을 하고 큰 잘못으로 옮겨갑니다. 그 때마다 역지사지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나도 그였다면 ‘그럴 수 있을꺼야’ 하고 이해를 하려고 노력해 봅니다. 사랑했던 사람들, 믿었던 사람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을 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하고 몸부림치며 고통을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실까? 아마도 “그럴 수도 있지 죄인은 무지하니까?”하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상에서조차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한 일입니다”라고 하셨던 주님의 그 이해심을 배워보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간의 관계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작은 말인 것 같지만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크게 다가올 때도 많습니다. 사랑해도 하나가 되기가 어렵지만 이해하면 누구나 쉽게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라는 단어는 폭이 넓고 깊어, 나이가 들어야만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다양성을 인정하면 더 많은 사람과 사물과 사연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아름다움의 시작입니다.
“ 이해하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성경주석, 잠 14:29)
이 이해가 용서의 시작이고 십자가의 닮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2. 기도는 용서의 시작이다.
살면서 용서가 안되는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그것을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을 가슴에 원한으로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해결하셨습니까?
어느 교회에 있을 때입니다. 그분은 부산에서 300여명의 직원들이 일하는 회사의 사장님사모님이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부산중앙교회에서 3주간동안 실시했던 예언전도회에 참석하면서 이분은 재림교인이 되었습니다. 광안리 교회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광안리교회가 가장 전성기였던 시절에 그 한가운데에 있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함께 장로교회에 다녔던 동서가 사장인 남편에게 보증을 부탁해 왔습니다. 사장님은 아무 생각없이 그가 기독교인이니까? 그리고 동서니까? 하는 마음에 보증을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은행으로부터 독촉장이 도착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보증을 서도록 하고 동서는 재산을 정리하여 미국으로 도망간 후였습니다. 사장님은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서 은행에서 요구하는 빚과 직원들의 퇴직금을 정산했습니다. 대연동에 있던 자신의 그 아름다운 집도 정리하고 휴식을 위해 농장관리인이 관리하던 경주의 농장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회사를 정리할 때에는 그간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준 직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모든 재산을 내어놓고 퇴직금을 다 챙겨서 회사를 정리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동서가 용서가 되지 않고 가슴에 한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즈음부터 그에게 당뇨, 혈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종종 그를 방문하여서 “사장님,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용서할 마음이 생기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하고 매번 종용을 했었습니다.
용서의 시작은 기도입니다. 많은 경우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용서의 사역을 시작한 증표입니다. 그러나 그 누군가를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를 하고 싶지 않은 상대라 할지라도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이 예수 닮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순종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하는 마음이 생길 때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 그렇지 않다는 이 감정은 감정을 넘어서서 의지적으로 용서하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이런 의지적인 반응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의 출발점이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기도문에서 용서의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과 더불어서 우리에게 기도의 정석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눅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죄 용서에 관한 기도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들을 내가 용서를 해준 것처럼 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나에게 죄를 범한 자들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의 칼을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이웃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분은 말씀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그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이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눅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에 성공한 사람은 용서의 기도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용서가 도무지 않되면 “주님 용서가 안됩니다”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셔서 용서할 마음을 주시고 용서할 용기를 주십니다.
네덜란드의 믿음의 여린 코리 텐 붐여사를 아시지요? 코리는 전쟁 중에 유대인들을 숨겨두었다가 화근이 되어 독일이 침략했을 때 독일 군인들에게 잡혀서 라벤슨부르크 수용소에서 처참한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여자로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고통을 이길 수 없었던 언니 베티는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코리는 극적으로 살았지만 독일이란 말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독일 국기와 지도만 보아도 온 몸이 아파오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어려운 명령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독일인을 사랑하라. 독일을 찾아가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라. 독일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얘기해라. 독일인들에게 치유의 복음을 전파해라. 용서의 복음을 전파해라.”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강권하심 때문에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한 번은 그의 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의 설교를 듣고 감동 받았던 사람들이 코리 여사의 손등에 키스하기 위하여 줄을 서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큼 한 낯익은 얼굴이 있었습니다. 바로 라벤슨부르크 수용소의 그 간수, 자기 몸에 모질게 고문을 가하던 그 간수, 발가벗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주던 바로 그 간수였습니다. 언니가 고통 가운데 죽어가던 그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코리 할머니는 그 당시의 감정을 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내 피가 거꾸로 용솟음쳐 올랐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도 내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해라.’
‘아니 하나님, 할 수 없어요.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
‘아니다. 코리야 용서해라.’
그러는 중에 그 사람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용서해라. 이것은 나의 명령이다. 용서해라.’
그 순간 나의 힘으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으나 나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그 간수가 내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서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하였는데, 나는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했고 기도하자 용서의 능력을 주셨다
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더욱 놀라운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용서를 결단하고 용서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원한을 남겨놓은 사람도 기도하면 주님께서 용서할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가 된 마음에서만 천국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표현 – 용서의 마침이다.
세상에서 어떤 것은 표현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표현해야만 전달되는 것이 있습니다. 표현하지 않으면 결코 전달되지 않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용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표현되지 않는 한 상대방이 용서받았는지 사랑받고 있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옛 시인이 남긴 말 중에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다.
노래는 불릴 때까지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표현될 때까지 사랑이 아니다.
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 특별히 저를 포함하여 경상도 사람들이 극복해야할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표현의 빈곤을 극복해야 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잘 못합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은 본문에서 공개적으로 용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을 마음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시는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공개적으로 표현하시고 증명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표현하기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두란노 교회의 아버지 학교에서 발간한 책 <아버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라는 책에 보면 저자는 어릴 대 아버지에게 늘 폭력을 당하고 자란 기억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버지의 분노는 언제나 가정을 공포의 도가니로 있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가 아버지와 씨름을 하며 서로의 배를 만지며 재미있다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아버지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세월이 지난 그가 아버지학교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듣지 못한 자신이지만 사랑의 표현을 위해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23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처음으로 낳아주시고 기도 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래 열심히 해라’ 하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아버지 할 말이 있는데요”하고 말을 꺼집어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연습했던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서 23년만에 처음으로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그 고백 때문에 울고 감격하던 그날, 그 고백과 동시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또 흘러 갔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던 중에 아버지를 한번 안아드려야겠다는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는 책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구정 날 부모님 댁에 세배를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오늘은 아버지를 안아드리리라 결심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해 세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제 너는 사역자가 되었으니 주 안에서 사역을 잘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때 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하고 꼭 한번 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하고 자리를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앉아 계시는 아버지와 내가 서 있는 거리가 불과 1.5m 도 안되는데 그 거리가 마치 요단강같이 아니 홍해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뻗어져야 할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못하게 되면 나는 진정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 속으로 강하게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어 앉아 계시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난 울면서 ‘아버지, 사랑하고 감사해요’라고 말하고 아버지 품에 안겼다. 그때 하염없이 울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그때 아버지 역시 당신의 아버지에게 한번도 사랑의 안김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나를 안아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품이 너무 좋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좋았다. 옆에 게신 어머니도 울고 뒤에 있던 아내도 울고 … 그곳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거기서 천국을 경험했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어떤 불필요한 긴장감이나 어색함이 더 이상 없었다. 진정한 평안과 기쁨만이 충만했다. … 최근에 나는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어디셔요?’
‘여기 월 마트다. 그런데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뭔데요?’
(한동안 침묵이 지난 후에 들려온 말은)‘희성이 나 너 사랑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황급히 전화를 끊으셨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용서의 결단과 사랑의 표현이 이루어지는 순간 천국이 임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이 천국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이해하고 기도하고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천국은 이 땅에서 맛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하늘천국의 소천국이 우리의 가정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천국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