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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주일설교
2024.04.21 일 오후 6:09 ・ 80분 51초
계속 고 근데 지금 이제 제가 설교하고 있는 거는 기독교 기독교 안에 로마서 17장에 대한 지난주에 소개해드린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로마서 7장이 신자의 경험이다. 하나는 아니다.
이거는 불신자의 경우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의 경우이다.
이 두 가지인데 첫 번째가 틀렸다. 두 번째가 맞다.
그러면서 첫 번째가 왜 틀렸는지, 두 번째 견해가 왜 옳은지 그거를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거를 보여주는 거.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려가지고 로마서 7장은 신자의 경험이 아니다.
로마서 8장은 신자의 경험이다. 이거를 100% 증명해도 남는 문제가 있어요.
그건 뭐냐 그러면 우리의 경험상 정말 우리는 로마서 7장과 관계가 없는가 또 우리의 경험상 정말 우리는 로마서 8장을 경험했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그냥 그 해방을 경험했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옥경 목사님은 경험했을 거예요.
옥경 목사님은 경험했겠지만 솔직히 나는 아니야.
로마서 7장은 완전히 내 곁을 지나갔나 로마서 8장은 완벽한 나의 경험인가 난 그렇지 않아요.
저는 늘 죄하고 싸우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늘 죄하고 싸우고 늘 기도하고 늘 조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면서 살아가지 해방했다.
난 그거 모르겠어요. 내 경험상으로 모르겠어. 해방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드렸는데 해방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너무 잘못 이해하고 있다.
해방이 뭐냐 이거 뭐지 해방이 뭐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해방이 아니에요.
그런 해방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거는 성화 내지는 완전 성화예요.
해방은 뭐냐 뒤에 6절에 보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죠 육신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가시면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이 7장의 제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 본다라.
그래서 원하는 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요 제법 이 재해에서 포로된 상태 여기서 해방된 걸 말하는 거.
딱 여기서 그 이상으로 생각하면 안 돼. 암만 말씀대로 살려도 안 되고, 암만 죄를 지으려도 안 되고 여기서 해방됐다는 거.
그래서 해방됐으니까 우리는 해방되었네. 그래서 이제는 뭐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 들어서 이렇게 살고 그거 아니에요?
로마서 8장은 그런 해방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정확하게 해보세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해방됐다고 말씀드려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만 율법의 을 이룰 수 있어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는 해방됐다.
이게 아니야.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 돼.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 돼.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을 따라야 돼. 그러면 어떻게 성령을 따라 행해요?
우리가 거듭났지만
영혼은 거듭났지만 몸이 거듭나지 않았어요. 몸의 구속이 8장 23절에 있는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죠? 그래서 몸에는 구원받은 사람도 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있고 우리가 평생 싸우는 게 이 세 가지 하고 싸우는 거 아니에요?
우리 속에 있는 정욕 욕심, 육신의 정욕, 안목의 능욕, 이생의 자랑 이 세 가지랑 싸우는 거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새 생명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그죠 그러나 육신은 아직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에 정력이 올라온다고 욕심이 올라온다고 그렇죠.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말씀대로 살려고 그러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몸을 쳐야지 그게 마을이 자기 따귀 때리고 자기 어퍼컷 날리고 이런 게 아니지.
그럼 몸을 친다는 거 뭐야 이 몸에서 올라오는 육신의 종족 암묵의 종족 이상의 자랑 이걸 치는 거지 믿습니까?
그걸 치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을 쫓아 행하는 거야.
육신의 욕심을 이루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면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소원을 익혀주시는데 그 하나님의 소원대로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단하고 노력하고 나아가는 거예요.
믿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거.
그러니까 우리가 로마서 8장 1절 2절을 너무 오해했다.
너무 과하게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 해방은 없다.
그런 해방은 8장 23절에 나오는 것이다. 몸의 구속이 이루어졌을 때, 몸에 구속이 이루어졌을 때 8장 23절에 나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전 세계 이제 학계가 신학계가 주석 쓴 주경 신학자들이 전이냐 후냐 이거 가지고 싸우는 거거든.
로마서 7장이 전이냐 후냐 구원받기 전이냐 후냐 이거 갖고 싸우는 거.
그래서 나도 전이냐 후냐 이거 갖고 싸웠어. 이게 구원받기 전이냐 후냐 그런데 전이냐 후냐로 관점에서 봤을 때는 전이 아니라 후다.
이게 이제 압도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거야. 근데 둘 다 설득력이 굉장히 강해요.
둘 다 그래서 다 헷갈리는 거야. 옥한우 목사님도 이랬다 저랬다.
그러고 막 많이 헷갈리는 거야. 그런데 이제 오늘 아침에 갑자기 원고 다 읽고 있는데 갑자기 성 로마서 7장 말씀이 뭔가가 떠오르는 거야.
이게 뭐지? 그래서 7장을 읽고 8장을 읽었는데
이거냐 이거냐 그게 아니더라고.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고.
로마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얘기가 처음으로 그게 보이는데 이거냐 이거냐 이런 얘기가.
아니 우리는 우리 잣대를 가지고 이게 맞냐 이게 맞냐 늘 이러고 있었던 거야.
이 학계 전체가 그러고 있었던 거예. 근데 그게 아니야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다른 얘기 비로소 바울이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가 막 보이는 거야.
지금 교회 가야 되는데 가야 되는데 막 보이는 거야.
그래서 열심히 졌고 열심히 졌고 그다음에 바빠 샤워를 했는데 샴푸를 쓸 수가 없어.
그럴 시간이 없어. 물로 샤워하고 그다음에 오면서도 차 안에서도 허장 목사님하고 연결해가지고 핸드폰 틀어놓고 지금부터 녹음해라.
그래서 막 녹음하고 교회 올 때까지 녹음하고 그러다 올라왔어요.
제가 볼 때는 이게 성경이 굉장히 어려워서 이렇게 착각할 수도 있고 저렇게 착각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세계적인 학자들도 다 견해가 나눠지는 거고 이런 문제가 있는데
이미 이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게 축적돼 있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난 다음에 지금 이게 되는 거기 때문에 굉장히 가능성이 높아요.
아침에 갑자기 깨닫게 해주신 것이 이거는 이 해석이 옳으냐 이 해석이 옳으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존재하지 않는 초유의 해석이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 초유의 해석인데 근데 그게 정답일 가능성이 지금 90%가 넘어요.
그래서 이제 이런 내용들을 가지고 일단 허장 목사님들한테 적은 걸 다 설명할 시간도 없고 핵심 포인트만 이렇게 설명하면서 또 추가 설명하는 거 떠오르는 것들 막 녹음 잠깐 이렇게 하면서 왔는데 그것만 딱 들어도 이제 허장 목사님들이 상당히 실력이 있거든요.
우리 교수들 중에 이동기 목사님 빼고 부목사하고 허장 목사가 제일 실력이 있거든 문 목사하고 허장 목사가 제일 실력이 있는데 들어보더니 이거네요.
이거네요. 이제 이게 100% 모든 게 조화가 되네.
성경적으로 우리의 경험적으로 모든 것이 100% 조화가 되는
바로 이거네요. 오늘 이제 예배를 마치고 나면 설교를 마치고 나면 제가 이제 이동기 목사님한테 전화를 할 거예요.
왜냐하면 이동기 목사님의 실력도 있지만 어떤 학자적인 능력이 있지만 내가 이동기 목사님한테 어떤 이런 새로운 것들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해서 의견을 나누는 이유는 깐깐하기 때문이에요.
아주 까탈스러워. 보통 보통 부목사님들은 자기 견해가 있다가도 또 제가 이제 허튼 소리를 안 하니까 성경 갖고 논리적으로 근거를 대면서 딱 얘기하니까 특히 우리 진 목사님 다른 말하다가도 내가 이렇게 되면 그거네요.
그거네요. 그게 맞습니다. 그게 공감이 됩니다.
불이 올라옵니다. 그 불의 사람 이잖아. 불의 사람 불이 올라옵니다.
막. 근데 이동기 목사님은 내가 설명하면 쉽게 동의를 안 해.
쉽게 동의를 안 하고 이거는 그럼 목사님 어떻게 된 거예요?
저거는 목사님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건 어떻게 된 거예요?
근데 내가 볼 때 너무 뻔한 건데 자꾸 질문해. 그러면 짜증이 나.
그건 이래서 이런 거고 그건 이래서 이런 거고 그건 이렇게 잘 못 알아듣냐고.
근데 되게 깐깐하거든. 근데 헛발질을 많이 하지만 어떤 것들은요.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탁탁 지적해 주거든. 정말 그런 면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답을 찾아야 이게 완벽한 답이 되겠네.
또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다른 목사님들은 동의만 해.
은혜만 받아 감동만 받고 막 감탄사만 연별해 막 감탄 삼아 연발하는데 이동기 목사님은 목사님 거기에다가 이런 설명을 곁들이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보면 참 괜찮은 거야. 그럼 이것도 녹음해라.
이것도 녹음해라. 그래서 이제 제가 이동기 목사님하고 대화를 많이 해요.
근데 이게 이제 굉장히 오래도록 연구하고 연구가 축적돼 있는 거라서 초반이면 초반일수록 앞만 맞다고 생각해도 틀릴 가능성들이 상대적으로 높아요.
후반으로 갈수록 이게 정말 맞다 그러면 그게 맞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져.
근데 지금 이제 맞을 가능성이 한 90% 이상은 높아진 상태.
그래서
어쩌면 다음 주에 제가 설교 못할 수도 있어요. 이제 우리 집사람하고 결혼 몇 주년이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여행도 가고 그랬지만 지금 여행 가기 싫어 이것 때문에 그래도 약속이 잡혀 있어서 어쩔 수 없지만 갔다 와서 이게 이제 새로운 개회가 맞다.
그러면 이제 이동규 목사님하고도 또 견해도 나누고 점검도 해보고 변수가 전혀 없고 이게 지금 벌써 맞는데 이게 맞다.
그러면 이 원고를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돼. 원고를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되기 때문에 그게 한 줄 가지고는 아마 불가능할 거예요.
양도 그렇고 양도 방대한 약이고 한두 가지는 불가능할 가능성이 많아서 제가 최대한 설교하려고 노력은 하겠습니다만 다음 주에 이제 설교를 못할 가능성은 있고요.
만약에 오늘 아침에 깨달아진 게 제가 볼 때는 90%에서 99% 90%에서 99%는 이게 맞는데 이 새로운 초유의 견해가 맞는데
이게 맞다 그러면 오늘 전하는 거는 100% 맞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면 오늘 전하는 것도 다 수정을 해야 돼. 그러면 오늘 설교를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들어갈까요?
오늘 설교를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그렇다고 오늘의 설교가 가치가 없는 건 아니야.
오늘 설교는 만약에 더 깊이 연구를 해가지고 꼼꼼히 다 따져봐서 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이게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이러면 이게 이제 그대로 유효한 것이고 이제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이 새로운 견해가 정말 100% 맞는 거구나.
그래서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거는 저 이제 정말 완벽한 해석으로 들어가는 거거든.
이게 이제 정말 이거는 뭐 이게 좀 좀 설명을 드리면 성경을 계속 연구하다 보면 사람들이 뭐든지 하다 보면 발전이 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혜도 주시고 계시도 주시고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만 그거 외에도 이 사람의 두뇌가 발전돼
성경의 난제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분별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이게 발전기 이게 천재적으로 발전이 되는 아닌 것도 그런 거로 만들어버려 아닌 것도 그런 것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도록 이게 천재적으로 발전이 돼버려.
그래서 이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완벽한 해석처럼 느껴지는 그런 설명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근데 이제 그런 설명들이 처음에 올 때에는 흥분이 되고 이게 이제 답이 새로운 차원으로 단계로 진입을 한 거니까 이게 완벽하다 이렇게 느껴지는데 시간이 계속 지나다 보면 뭔가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게 있어.
근데 이 로마서 7장이 그래 거기에 대해서 완벽하게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설명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왜 현재 시제를 썼을까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설명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뭔가 찜찜한 거 그런데 왜 나를 비롯해 수많은 신자들이 로마서 7장에서 또 공감대를 느끼는 부분이 있을까 그럼 전부 가짜일까?
그런데 왜 로마서 8장에 대해서 완벽한 동의가 안 될까 경험상 완벽한 동의가 안 될까 이게 대부분의 사람들이거든.
김옥규 목사님과 그의 아이들 빼고 이게 대부분의 상태거든.
그죠 그러니까 이게 찜찜한 거야. 뭔가 이게 정확하지가 않다.
성경적으로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이게 뭔가 정확하지가 않다.
그런 해석을 가지고 우리가 죄와 싸우고 그다음에 거룩을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더 애쓰고 그리고 나아가는 거는 좋은 일이지만 성경이 이렇게 뻥치는 것처럼 얘기할까 근데 지금 이제 새로운 해석에 의하면 그런 모든 것이 완전히 해결이 되고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이 되고 구원파적인 구원론도 다 차단이 되고
구원파적인 구원론 그것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거 아니에요?
로마서 7장처럼 살아도 천국 갈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런 것들 다 차단이 돼. 그런 것들이 다 차단이 되면서도 너무 구원받은 상태를 이 수준을 높여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게 만들고 이런 것들도 다 해결이 되고 그리고 성경 성경에 이제 모든 구절들 요한일서에 의하면 뭐예요?
우리가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 들어가죠.
맞죠 아버지 뜻대로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게 뭐예요?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히 사는 걸 말하는 건 아니죠 그거는 완전 성화죠.
그건 구원받은 상태가 아니거든. 그럼 행함 있는 삶 믿음이라는 게 뭐예요?
아버지대로 사는 거지 덥죠 아버지 뜻대로 사는 거지.
근데 어떻게 아버지 뜻대로 사는 거예요?
요한일서에 그런 게 굉장히 많은데 하나님께서 난 자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의를 행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세상을 이긴다 이런 말씀들이 쭉 나와 있어요.
뭘 말하는 거예요? 세상을 완벽하게 이기는 거, 완벽하게 죄를 안 짓는 거, 완벽하게 그를 행하지 않는 거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여기서 이제 얻어낸 공통적인 결론이 있다.
공통적인 결론 그게 뭐냐 습관적인 자가 없는 거다.
근데 사실상 우리 교회는 이게 허물어졌어. 습관적인 죄가 없는 게 구원받은 게 아니라 거의 거의 온전히 거룩해야 구원받은 것처럼 거기에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죽였어야 구원받은 것처럼 이 기준이 성경보다 높아져서 그래서 습관적인 죄가 없어야 천국에 간다.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어도 그런 얘기를 잘 안 해. 설교하면서 그렇죠 나도 그런 얘기를 잘 안 해.
나도 거기 세뇌가 돼서 그런 얘기를 잘 안 하고 딴 사람도 그런 얘기를 잘 안 해.
그리고 높은 기준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거는 중요하지만 그게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박준수 목사님의 사후 체험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내가 이걸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이제 설교를 들어가려고 그랬는데 이 설교는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돼요.
할 수 있을 만큼만 하면 되고 박정수 목사님의 사후 체험을 보면 박정수 목사님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피를 흘리고 막 입으로 막 피를 흘리고 이제 죽었죠.
죽어서 이제 하나님 앞에 가게 됐어요. 천국 문 앞에 가게 됐어요.
죽고 이제 자기 자신을 봤죠. 자기 자신을 봤는데 자신이 깨끗한 신옷을 입고 있어요.
구원받았다는 거지. 깨끗한. 그런데 박정수 목사님이 그게 놀랐다 그랬어요.
왜냐면 자기는 죄가 있었다. 자기에게는 잘못하고 있는 어떤 죄들이 있었다.
근데 자기가 신옷을 입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때 나는 그게 상당히 약간 거슬리더라고.
근데 이거는 죽고 난 다음에 실체를 본 거잖아요. 그럼 이게 뭐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천국 간다는 얘기냐 그러면 예수님이 거짓말한 게 되고 성경이 그지 그런 얘기가 아니죠.
그럼 그게 뭐겠어요? 습관적인 죄가 아니었던 거지 습관적인 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 피로 그거를 다 덮어주시고 가브레엘 천사를 만나다 롤랜드 복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그죠 예수님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완전히 흠없고 거룩하게 완전한 자로 그렇게 하나님이 보고 신옷을 입혀주시고 인정하시는 거지 그래서 성경 그대로 구원론이 정확하게 정립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는 이 구원파적인 복음을 전한 거는 칼빈이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만 칼빈의 후예인 장로교 목사나 신학자들이 특히 한국이 이 구원파 쪽으로 빠져버렸어요.
그다음에 루터가 야고보서를 부인하고 루터를 통해서 구원파적인 게 개신교 안에 암쪽으로 너무 많이 퍼졌고
그런 면도 있어요. 그러나 이와 반대로 물론 칼빈주의자 중에 청교도들은 굉장히 회개나 행함이 있는 한 믿음이나 거룩을 추구해야 될 거나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거나 굉장히 강력하게 외쳤죠.
조라든 에드워드를 비롯해가지고 그죠 청교도들 한마디로 말해서 리차드 백스터나 청교도들 존 오앤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외쳤어요.
그다음에 이제 이 칼빈주의 반대 진영에서 이거를 강력하게 외쳤죠.
그게 이제 대표적으로 존 웨슬리하고 찰스핀이에요.
존 웨슬리하고 찰스피니 그죠? 그래서 존 웨슬리가 그걸 강력하게 외쳤어요.
참된 믿음이나 거듭남이나 그저 천국 갈 자의 자격이나 또 찰스피니가 그걸 강력하게 외쳤어요.
근데 존 웨슬리의 책을 저는 거의 다 읽었습니다. 찰스피니의 책도 다 읽었습니다.
주요한 사람들의 책은 다 읽었어요. 그런데 존 웨슬리와 찰스피니, 존나든 에드워드의 책도 굉장히 많이 읽었어요.
존나덴 에드워드나 청교도들, 리차드 백스터나 존 오엔이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봤어요.
근데 이렇게 또 구원파적으로 흐르지 않고 제대로 구원론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
지나치다는 거 지나치다. 지나치게 이 회개의 기준을 높여놨다.
믿음의 기준을 높여놨다. 거듭 다음의 특징을 높여놨다.
그게 영혼들에게 되게 해롭진 않아. 높은 기준을 가지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천국 넉넉히 들어가고 그죠 천국 넉넉히 들어가고 또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고 이분들이 참 종이야.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야. 그 분의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문제는 없어.
그러나 가장 좋은 거는 성경적인 거야. 가감하지 말라고.
좌로나오라에 치우치지 말라고. 가장 좋은 글은 성경적인 거, 가장 유익한 것은 성경적인 거 이해가 되십니까?
성경적인 게 가장 유익합니다. 제가 좀 전에 뭐라 그랬어요?
만약에 오늘 아침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생각나게 해주신 이것이 옳다면 구원파적인 그런 요소들도 다 배격이 돼.
그리고 너무 지나친 기준 때문에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도 다 해결이 돼.
그러면서 사람들이 구원파적인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고 또 안정감을 가지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어.
사실 여러분 간단한 예로 우리 교회 성도님들하고 바울의 고백을 비교해 보세요.
우리 교회 성도들하고 신약교회 성도들의 고백을 비교해 보세요.
우리 교회 성도들의 고백은 너무 부정적이야.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가짜입니다. 나는 멀었습니다. 죽어야 됩니다.
바울의 고백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그런 요소들이 다 있지만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상당히 긍정적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 또 바울이 또 베드로가, 요한이, 야고보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걸 봐도 그런 경고들이 우리 교회처럼 장로교회처럼 다른 교회처럼 우리는 구원받으까 다 이렇게 말 안 해.
정말 바른 믿음을 가져야 되고, 순종해야 되고, 거룩해야 되고, 구원바라는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고 그런 것들을 우리 교회처럼 강력하게 외칩니다.
근데
바울 서신을 똑바로 보세요. 그것만 잊지 않아. 너희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희는 복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너희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죠 성경 똑바로 보세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많아 모든 서신에 그 두 가지가 두루 이렇게 두루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런데 존 웨슬리나 찰스핀이나 청교도들은 부정적인 쪽의 메시지만 너무 이렇게 치우쳐 있어.
그다음에 성하고 구원의 경계선이 없어 마치 성화된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처럼 그렇게 돼버려 있다면 이게 경계선이 막 막 겹쳐지고 심미하단 말이에요.
또 우리 교회도 그래 우리 교회 목회자들 설교나 설교하는 거나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는 거 들어보면 너무 부정적이야 너무 부정적이야.
이거 바른 거 아니에요? 이거 바른 거 아니고 이거 성경적인 거 아니에요?
여러분 기준은 성경이에요. 믿습니까? 기준은 성경이야 기준은 우리 교회가 아니야 기준은 우리들이 아니야 기준은 성경이야 기준은 예수님이야.
기준은 바울이고 기준은 사도들이고 믿습니까? 그 사도들은요.
외식하는 자 예수님 그 외식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지만 이 뱀들아 독살이 새끼들 옛날에 많이 했지 요샌 잘 안 해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옛날에는 아주 교회에 아주 지긋지긋한 썩은 목사들이랑 싸우느라고 아주 그게 속에서 막 그냥 자동으로 올라왔는데 그렇긴 하지만 예수님 제자들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들이 누가 크냐고 서로 싸우고 시기하고 그죠 나중에 막 배신도 하고 예수님이 책망합니다.
책망하고 권면하고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 예수님이 제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아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이래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그리고 균형이 필요합니다.
균형이 필요해 성경적이 되는 게 필요해. 지금 우리 교회가 뭐 잘못된 길을 걸었느냐 그렇지 않아요 존 에슬리가 하나님의 참족인 것처럼 찰스피니가 하나님이 강력하게 쓰신 교회사에서도 아주 두드러진 하나님의 참종 중의 참종이었던 것처럼 또 존나드는 에드워드 이야 조지 히피들드라 수많은 청교도들이 진실한 사람들이었고 참정이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여러분 그 길을 걸어왔어요.
그런 유형의 메시지를 전해왔어요. 그러나 더 완전해질 필요가 있다.
성경적으로 더 정확해질 필요가 있다. 믿습니까?
더 완전해질 필요가 있고 더 정확해질 필요가 있다.
그런 이제 섬세한 그런 섬세한 분별과 적립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깨닫게 해주셔서 제가 잘 모르겠는데 한 6페이지 정도 이렇게 막 적다가 나왔는데 그거 녹음도 좀 하고 그랬는데 그게 맞을 가능성이 저는 굉장히 높다고 봐요.
굉장히 높다고 보는데 거의 맞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제 이게 전부 검토해보기 전에 모르는 거라서
갑자기 오늘 설교 원고 보다 끝무렵에 갑자기 뜬금없이 항상 성령께서 그러시던 내가 뭘 연구하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자셔.
그냥 갑자기 로마서 7장 구절이 떠오르면서 이거 다시 봐야 되는 거 아니야 이게 전혀 우리가 바울하고 따로 놀고 있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뭐 얘기했는지 잊어버렸어요. 아무튼 이제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대만 하지 말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 연구가 보통은 이제 목사님들이 이렇게 안 해요.
그죠 설교하러 나와서 그거 설교하지 갑자기 그게 뭐 이런 목사님들이 거의 없어 여러분들이 봤어요.
거의 없을 걸 근데 우리 교회는 이게 자주 벌어지는 일이야 우리는 정답에 맞춰서 설교하지 않다는 거야.
정해져 있는 대로 설교하고 내가 옳다는 대로 우리는 성경이 진짜 뭐라고 말하는지 알기를 원하는 거야.
하나님 말씀에 참된 의미를 깨닫기 원하. 그거를 막 설교 준비하고 연구할 때뿐만 아니라 그냥 교정할 때에도 설교 나오기 전까지도 항상 열린 마음으로 씨름하는 거.
다른 사람은 틀렸고 나는 맞아. 이런 게 우리는 전혀 없어 전혀 없어.
그래서 언제든 이 사람이 맞는 것 같으면 내가 틀린 거 아니야.
저게 맞는 거 아니야. 그리고 파고 들어가는 거야.
또 내가 틀린 거 아니야 저게 맞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이거는 여러분 굉장히 긍정적인 일입니다.
굉장히 긍정적인 일이고 굉장히 복된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고 오늘 설교를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만약에 오늘 갑자기 시작된 하나님께서 주신 그런 책상과 아이디어와 깨달음과 해석들이 맞다면 그러면 오늘 전해야 될 말씀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한 건데 이 설교를 왜 해야 되느냐 간단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들으면 돼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되는 상황에서 7장을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그거로 본 거는 틀린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도 천국 간다.
그렇게 믿는 거는 잘못된 것이다. 믿습니까? 그거를 이것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는 이것이 여전히 유효하고 또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일단 들으시고 결과는 시험 발표 나는 것처럼 바이 토론도 해보고 더 깊이 하나하나 따져보고 연구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 어려워요. 성경은 참 어려워 한국말이 아니야.
번역을 했어도 한국말이 아니야. 한국말처럼 이렇게 문법이 단순하질 않아 읽으면 단어나 그죠 표현들이나 이 문장이 우리에게 익숙하고 이렇게 탁 의미가 들어오는 이게 아니야.
그래서 굉장히 성경은 어려워요. 굉장히 어렵고 견해들도 다양하고 그래서 저도 최선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거는 불가능하다고 항상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이렇게 뭔가 이렇게 이런 설교하기 전에 이런 깨달음이 오는 것도 여러분들이 3차 기도회를 통해서 빡시게 기도해 주셔서 그런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분 계속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과도기를 겪는다 할지라도 이게 제대로 정립됐을 때 여러분들이 누리게 될 영적인 유익 그건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그대로 정확하게 바르게 정립했을 때 이 메시지가 퍼져나감으로써 이게 초유의 해석이라 그랬잖아.
지금 이런 게 아니야 주석이나 무슨 교계에 나와 있는 해석이 아니야.
근데 이게 내가 볼 때는 지금 진짜 맞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퍼져나갔을 때 이 개신교 전체가 그 메시지를 통해서 받게 될 유익은 그것은 어마어마한 거 그것은 어마어마한 거래서 믿습니까?
여러분들이 다 그 일에 동참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두 번째로 지난 시간에 이어서 로마서 7장이 신자의 상태가 아님을 보여주는 10가지 증거 10가지랜다.
오늘 큰일 났다. 로마서 7장이 신자의 상태가 아님을 보여주는 10가지 증거 이거를 되는 데까지만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대한 견해 중에 대표적인 게 두 가지예요.
대표적인 게 두 가지인데 찰스피니치에도 그게 나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하게 핵심만 말하면 본문이 그리스도인 경험의 축소판이다.
이런 견해가 하나 있고
이게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그러니까 바울도 그랬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아도 우리도 구원받은 자야 우리도 천국 가는 자야 이런 결론을 도출해 구원파적인 결론을 도출해낸 이런 견해가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이게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아니다.
죄를 깨달은 죄인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았지만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지는 않은 율법을 통해서 각성이 되고 죄를 깨달았지만 보험을 내려서 구원받지 않은 그러니까 율법 아래에 있지 은혜 아래에 있지는 않은 그런 사람의 경험이다.
이게 이제 두 번째 견해예요. 이 두 가지 견해가 대표적인 견해인데요.
저는 신학생 때부터 굉장히 오래됐죠. 신학생 때부터 이제 후자를 믿었어요.
신학생 때부터 찰스 피니의 책이 제게 계기가 됐던 것 같고요.
그래서 이제 그때부터 이제 후자를 믿었는데 그러나 워낙 본문이 난해하기 때문에 그 후에도 오래도록 그러니까 오래도록 이런 건 1년 2년 5년이 아니라 10년 20년 30년 40년
그 애도 오래도록 정말로 그런가 정말로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그애가 맞는 건가 정말 그러한가 마음을 열고 언제든지 내가 내가 생각하는 견해가 틀리면 바로잡겠다 받아들이겠다.
그런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계속 연구를 하세요. 그 연구만 계속한 건 아니지만 계속 연구했어요.
그러면서 이 두 번째 견해가 옳다는 거를 지지하는 그런 많은 증거들을 알게 되고 또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 그것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 10가지를 여러분들하고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따라 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속사도 교부들이 가졌던 신뢰할 수 있는 견해다.
속사도 교부들 이게 누굴까요? 여러분 석사도 속사도 교부들이 누구예요?
또 우리 전도사님 속사도교부들이 누구냐 이게 누구냐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제자들입니다.
바꿔 말해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입 속사도 버들은 사도들의 제자입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직접 듣고 사도들에게 가르침 받은 사람 엄청난 특권이죠.
그죠 엄청난 특권이지
예수님의 제자들의 제자들 그러니깐 사도들 이후에 사도들 직후에 교회 지도자들 그 사람들이 이러면 속사도 교부들이에요.
그런데 이 속사도 교부들이 모두가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느냐 이거는 중생하지 못한 자의 경험이다.
그렇게 이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쳤어요.
이건 이제 차이스피니의 책에도 그런 사설이 나오고 그 유명한 신학자인 더글라스 무의 책에도 보니깐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초기에 교부들은 대부분 이 절들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묘사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이 구원받은 사람의 상태다.
이 견해는 새로운 것이 신상품이에요. 비교적 이건 새로운 것이에요.
로마서가 쓰이고 난 다음에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난 다음에 적어도 3세기 동안 적어도 3세기 동안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전부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 채 경험이다. 그렇게 주장했다는 게 역사적인 사실이에요.
그래서 저는
본문이 중생하지 못한 자의 경험이라는 견해가 옳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따라 하겠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법과의 결혼 생활을 묘사했다.
이 성경이라는 거는요. 해석이 되기 전까지는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어렵고 힘들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어렵고 힘들어.
일단 해석이 딱 되면 너무 쉬워 너무 쉬워 제가 오전에 깨달은 것이 옳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그것이 너무 쉬워 집에서 우리 교회까지 10분이 안 걸려요.
10분 정도밖에 안 걸려요. 그래서 절반 이상 그것도 와가지고 절반 이상 와서 허장 목사님께 우리 집사람 보고 전화 좀 해봐라.
그래서 내가 깨달은 거를 5분이 안 되게 설명했어요.
근데 그거로 충분한 거야.
이 어려운 난제가 그냥 그거로 충분한 거야. 그거로 허장 목사님이 이거 이거구나.
이제 이게 진짜 완벽한 해석이구나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로마서 7장을 깨달은 게 뭔지 여러분들이 이해시키는 거는 깨닫는 게 힘들지 굉장히 쉬워요.
몇 분만 내가 얘기하면 돼. 그럼 여러분들이 다 공감할 걸 정말 그래 이게 이 얘기구나 이렇게 될 거예요.
근데 안 해요. 그렇게 그렇게 싸게 당길 수는 없어.
수십 년에 걸쳐서 도달한 거를 수십 년에 걸쳐서 그게 축적이 돼서 또 항상 발전하고 발전하고 그래서 터져서 알게 된 거를 그렇게 값없이 그렇게 값없이 여러분에게 던져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이 갑자기 나서 좀 얘기해 봤고요. 어차피 오늘 설교를 원고 가지고 제대로 다 못해요.
그래서
아무튼 여러분 7장 서두에 보면 두 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는 율법과의 결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결혼이에요.
다른 견해들도 있는데 저는 이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문제 가지고 깊이 씨름해 봤는데 지금은 이제 다 잊어버려서 몰라요.
어디는 써 있을 텐데 아무튼 하나는 율법과의 결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결혼이에요.
이거를 염두에 두고 7장과 8장을 읽어보세요. 서두에 나오는 7장 율법과의 결혼 그리스도와의 결혼 그러면 여러분 7장과 8장에 어떻게 해버리죠?
7장과 8장에 어떻게 봐요? 본문은 즉 7장은 14절에서 25절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율법과의 비참한 결혼생활.
그다음에 로마서 8장 초반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 그걸 묘사한 걸로 보이지 않나요?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견해가 바뀌어도 이거는 틀리지 않아요.
그거하고 이렇게 통하기 때문에 거기서 조금만 이렇게 교정해 주면 돼.
그거하고 통하기 때문에 견해가 새로운 결례가 맞다.
그래도 이게 날아가고 그러는 건 아니에요. 실제로 여러분 7장은 율법과의 결혼 생활을 말하는 거고 그다음에 8장은 그리스도와의 결혼 생활을 말하는 것이에요.
교정은 이게 맞다면 교정은 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본문은 거듭난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는 거죠.
그죠? 그걸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세 번째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본문을 신자의 경험으로 보는 것은 바울의 목적에 위배된다.
사람들이 본문을 오해하는 이유가 뭐냐 그러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놓친 거예요.
바울이 지금 뭘 말하고 각 구절은 그 요점을 설명하는 세부 사항이잖아요.
근데 바울이 이런 말들을 할 때 로마서 7장 14절에서 25절을 얘기할 때 자기가 설명하려고 하는 요점이 있어 그 요점을 파악을 해야 각 구절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는데
그 요점을 놓쳐버리고 그냥 각 구절을 읽는 거예요.
그러면서 각 구절에 나오는 단어나 문구나 표현들을 보고 이건 이런 뜻이야 저런 뜻이야.
이렇게 추론하다 보니까 여러분 정확하게 이 바울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삼천포로 빠지는 거예요.
이게 원칙이거든요. 어떤 글을 해석할 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뭐냐 항상 저자가 말하고 있는 요점이 뭔지를 파악해야 돼.
지금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뭐냐 그 요점을 파악해야 돼.
그래서 요점하고 무관한 해석을 하면 안 돼. 요점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하면 그건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난 거니까 저자가 그런 의도로 이 말을 이 구절을 말하지 않았다는 게 되잖아.
그 요점하고 무관한 해석을 하거나 일관성이 없는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돼.
어떤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을 한다. 그러면 그 각 구절들이 어떤 일관성이 있게 돼 있거든요.
일관성이 없는 이 단어 보니까 이런 뜻이야. 이 문구 보니까 이런 뜻이야.
이리저리 막 튀어나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는 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뭔지를 알아야 그 요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어떤 글이든지 그거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 요점이 뭔가 뭘까요?
이게 정말 중요한 거야. 이게 새로운 해석이 맞아도 진짜 조금만 다듬어주면 돼.
바울이 본문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뭘까요?
그 요점이 어디에 나타나 있냐면 로마서 7장 5절과 6절에 나타나 있는 거예요.
거기에 보니까 이렇게 돼 있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육신의 이 들을 때에는 율법으로 맺는 죄의 종족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해야 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오.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왜 갑자기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오늘 제가 오전에 생각난 게 이 구절이야.
갑자기 이 구절이 생각난 거예요. 그러면서 그러면서 7장 발정이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어떤 각도와 수준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힌트였어요. 이게 발단이 이 설교 원고를 이제 보고 있는데 바로 이 구절이 떠올랐어요.
이게 참 중요한 구절입니다. 근데 여기서 그건 여러분들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래서 이 구절 갖고 한번 해석해 보라는 거예요. 스스로 내가 아침에 깨달은 게 뭔지 로마서 로마서 7장과 8장이 아무튼 간에 그러면 여기 보니까는 육신에 있을 때 이런 말이 나오잖아요.
육신에 있을 때는 구원받기 전입니다. 그다음에 이제는 이거는 구원받고 난 후를 뜻하는 거예요.
그런데 전에는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섬겼지만 이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왜 율법 조문에 묵은 거를 섬기면 안 돼요. 왜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안 돼요 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돼 새로운 방법인데 영으로 섬겨야 돼.
그 영은 성령을 말하는 거야.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해서 신앙생활해야 돼.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해서 죄하고 싸워야 돼.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해야 돼요.
왜 그래야 돼요.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
율법은 죄를 깨닫게만 하지 율법으로는 우리가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바울이 지금 로마서 7장, 로마서 8장을 얘기할 때 근본 목적이 뭐냐 그의 근본적인 의도가 뭐냐 이거를 알리는 거예요.
율법적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돼. 율법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어.
영이 새로운 것 성령으로 신앙생활해야 돼.
성령으로 죄와 싸워야 돼. 성령으로 성령으로 순종하려고 해야 돼.
그래야만 승산이 있어. 그래야만 이길 수 있어. 그래야만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수 있어.
바울의 목적이 바로 여러분 그것이에요. 또 바울이 뭘 예증하길 원했느냐 이거를 예증하길 원한 것이 때문에 믿는 자가 아니라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의 경험을 취해서 예로 들어야 했던 거예요.
믿는 자를 예로 드는 게 아니라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의 경험을 취해서 예를 들어야.
그러므로 7장 7절 이후에 본문까지 포함해가지고, 7장 7절 이후에 모든 설명과 예정은 율법 아래 있는 자에 대한 것이다.
이 구원받은 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에 있는 자에 대한 것이다.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본문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묘사한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상태가 아니라는 거죠. 그리스도인의 상태가 아니에요.
정교한
해석이 맞다면 새로운 해석이 맞다면 정교한 수정들은 다 필요합니다.
아무튼 이게 그리스도인 상태가 아니에요. 만약에 본문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면 바울이 전혀 의도하지 않고 있는 거를 증명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바울의 의도가 뭐예요? 율법이 죄의 권세를 깨뜨릴 수 없다.
율법이 죄를 이기게 만들 수 없다. 율법이 순종하게 할 수 없다 이거잖아요.
그죠? 이게 바울의 의도예요. 근데 만약에 본문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돼버리면 율법이 아니라 복음도 복음이 주는 새 생명도 복음을 믿을 때 우리가 임하는 성령도 죄를 이기게 할 수가 없다 이런 얘기가 돼버리는 거 말씀대로 살 수 있게 살 수 있게 할 수가 없다.
그런 결론이 되기 때문에 이게 바울의 의도가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여러분 본문을 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아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게 이한수 교수님 책에도 저하고의 견해가 같은 설명들이 자세히 돼 있는데 생략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따라가겠습니다. 본문은 육신에 속한 사람에 대한 묘사다.
7장 5절에 보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미 말씀드렸어요. 여기서 육신이 있을 때는 율법 아래에 있을 때를 뜻한다 그랬어요.
율법 아래에 있을 때 구원받기 전 율법 아래에 있을 때를 뜻한다.
그래 근데 14절에 보니깐 다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이것은 본문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 왜냐하면 5절하고 같잖아요.
5절에 육신이 있을 때에는 그게 예수 믿기 전인데 나는 육신에 속하여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5절과 같기 때문에 그래서 토마스 슐라이너도 7장 5절에서 육신에 있는 자들과 7장 14절에서 육신에 속한 나의 고백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
연속성이 있다. 서로 다른 얘기가 아니라 같은 얘기다.
덥죠 같은 얘기다. 뭐 그렇게 말을 했어요. 구원이라는 거는 율법으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율법으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원은 율법에서 벗어나야 돼.
율법에서 벗어나서 어디로 가요? 예수님께로 가야 돼.
구원은 율법을 먹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14절에 보여주듯이 본문은 율법 아래에 있을 때의 상태를 기록한 것이라는 거예요.
육신에 속했다는 게 율법 아래에 있는 상태인 게 5절에 나오기 때문에 이게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상태를 기록한 거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여러분 구원받은 신자의 경험이
아니라는 결론이 여기서 나오게 되는 거 한편 이 육신에 속하여 이 단어가 중요한데 이 표현이 중요한데 이 표현은 성경에 보면 로마서하고 고린도전서에만 나와요.
로마서하고 고린도전서에만 나오는데 고린도전서에서는 구원받은 자를 뜻했죠.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3절에 보면 육신에 속한 자가 나옵니다.
본문처럼 육신에 속한 자 육신에 속한 자로다 육신에 속하여 이런 말이 나와요.
이 사람들이 누구냐 시기도 해요. 분쟁도 합니다.
근데 뭐예요? 불신자들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다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이다.
그래서 구원의 기준이 무조건 높아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이다. 여러분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이에요.
기록돼 있는 그대로 바꿔 말해서 거듭난 신자들이에요.
맞죠? 거듭난 신자들
그렇기 때문에 이걸 알고 있는 많은 신학자나 목사님들이 14절에 육신에 속하여 이것도 미성숙한 그리스도인 아니야 이렇게 생각한다고 그러니까 14절 이하 25절 본문이 이게 신자의 경험 아니야 이렇게 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거든요.
그러나 그 가능성은 제로예요. 제로 14절에 육신에 있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 육신에 속한 자 그들을 뜻할 가능성은 완전히 제로입니다.
왜냐 그러면 그 이유가 뭐냐면은 만약에 여러분 그렇게 보면은 바울이 어떻게 돼요?
영적인 어린아이가 돼버려요.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바울은 영적인 아이예요.
확신하죠.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보면 바울은 영적인 아비예요.
일반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않다. 자신이 아비라.
그러 바울은 여러분 영적인 어린 아이가 아니라 영적인 아비예요.
또 영적인 어린아이가 전화 왔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까 로마서를 로마서를 쓸 수 있겠어요?
영적인 어린아이가 로마서를 쓸 수는 없는 것이죠.
더 결정적인 사실이 뭐냐면요. 근접 문맥이 중요한데 이거는 뭐 멀리 떨어져 있는 거고 하나는 로마서에 하나는 고르데르랜서에 그죠 그거보다 이제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게 근접 문맥이 중요한데 근접 문맥에 보니까 육신에 속했다는 표현들이 전부 구원받지 못한 자를 뜻했다는 거.
예를 들어서 아까 읽어드린 로마서 7장 5절에 보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다 설명했죠.
구원받지 않은 자 그다음에 로마서 8장 8절과 9절에도 보니까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신자는 성령이 거하는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신자의 몸과 마음을 성전이라 그래요.
성령이 와서 거하시기 때문이에요. 그죠 근데 성령이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자연인 불신자,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서 성경에서 바울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다음에 성령이 예수 믿고 성령이 그 안에 들어온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 대해서는 육신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영에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해 육신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영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육신에 있는 자라는 단어의 표현이 지금 14절에 육신에 있는 자가 무슨 뜻이냐 그러는데 그전에 5절에서도 불신자고 그 이후에 8장 8절에서도 불신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14절에서도 불신자를 뜻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문은 구원받은 자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로
벌써 12시가 넘었어요. 다섯 번째로 따라해 보겠다.
본문은 죄의 종이 된 사람을 묘사한 것이다. 14절에 보면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죄 아래 팔렸도다. 이 본문을 신장의 경험으로 보는 주석가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게 이 부분이에요.
왜냐면 죄아르에 팔렸도다. 이 문구가 문제예요.
이 굉장히 강한 표현이잖아. 죄아르에 팔렸도다.
죄아르에 팔렸다는 게 뭐예요? 노예로 팔렸다 그러 죄 알에 팔렸다.
죄에게 팔렸다. 죄의 노예로 팔렸다. 죄의 노예다.
그런 뜻 아니에요 죄의 노예다. 여기 여러분 불확실한 점이 없어요.
죄가 상전이고 나는 노예다. 이게 이 말의 실제적인 의미예요.
그 뒤에 나오는 고백도 그거를 뒷받침해 주는데, 15절에 17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게 무슨 표현이겠어요? 원하는 걸 못해 원치 않아도 할 수밖에 없어.
종입니다. 자유인은 원하는 거 할 수 있어요. 그죠?
원치 않는 거 안 할 수 있어요. 종은 선택권이 없어요.
주인이 시키면 해야 돼. 원한다고 못해 주인이 안 시키면 못해.
원치 않아도 해야 돼. 주님이 시키면 해야 돼. 노의 상태를 말하는 거야.
종 된 상태를 말하는 거.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게 무슨 책임 회피처럼 죄에 대한 책임 회피처럼 보이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고 죄가 나를 장악했고 나는 죄의 지배를 받은 노예다.
그런 뜻입니다.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이렇게 하게 만든다.
죄를 나는 죄가 나를 장악하고 있다. 나는 죄의 노예된 상태다.
그걸 말하는 거예요.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그건 여러분 신자가 죄의 노예라는 것은 로마서 6장과
모순이기 때문이에요. 로마서 6장이 신자를 뭐라고 묘사하느냐 6절 7절에 보니까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14절에 보니까는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1절 18절에 보니까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로부터 해방되어 이렇게 말했어요.
22 22절에 그 이전에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거 하고 모순이잖아요. 너무 명백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로이드 존즈도 그런 주장에 대해서 참 참 어떻게 이걸 이제 요약을 하려 그래요 이거 다 읽어줄 시간이 없고 이걸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을 보느냐 어이가 없는 주장이다.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요. 또 신자가 죄의 노예라는 것은 로마서 7장과도 모순입니다.
로마서 7장 4절에 6절에 보니까는 이는 다른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오.
율법 재물에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렇게 말했거든요.
여기 육신이 있을 때는 구원받기 전이고 14절에도 육신에 속하여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에 이건 여러분 구원받기 전으로 볼 수밖에 없죠.
아무튼 여기에 보면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이지 죄의 종으로 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로마서 7장하고도 모순이라는 겁니다.
또한 신자가 죄의 노예라는 것은 로마서 8장하고도 모순이죠.
8장에 뭐라고 놔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 대해서 말하면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그러면서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장에서는 이게 훨씬 더 분명해요.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해방됐다.
해방이라는 단어를 조율을 잘해야 되지만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해방됐다. 성령을 따라 행하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노예가 아니다. 먼저 그 뒤의 구절들도 쭉 살펴보면 계속 그게 두 번 세 번 계속 그리스도인이 그런 존재라는 게 반복이 됩니다.
8절 9절, 14절 이런 걸 보면 반복이 되는데 생략하고요.
이상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드린 것처럼 본문이 거듭난 사람의 경험이라는 견해는 로마서 6장 이하 8장과 모순이 되는 거예요.
로마서 6장 이하 8장은 그리스도인들을 죄의 노예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본문은 그리스도인을 죄에게 팔렸고 죄의 노예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을 묘사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제 마지막 여섯 번째로 그래도 설교하는 건 고해야 왜냐면 지금 여섯 번째가 아까워가지고요.
여섯 번째에서 중요한 얘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조금 아까워서 요약을 해가면서 잘 설명을 하겠습니다.
따라해보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나
지키지는 못한다. 22절 23절에 보니까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해요.
그리고 지킬 수 있나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 도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지키지는 못해 어떤 학자들은 22절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거는 거듭난 사람이다.
그래서 본문은 거듭난 자의 경험이다 이렇게 주장하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거듭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나와요.
에스겔서 33장 31절이야 32절이 그거고, 마가복음 6장 20절, 로마서 2장 17절 18절이 그거고, 또 마가복음 12장 37절에 그런 것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여기 이 구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해 설교 듣는 거를 즐거워해요.
말씀을 달게 여겨요. 근데 다 회개한 사람이냐 다 구원받은 사람이냐 아니라는 거예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이처럼 여러분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율법을 듣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설교 듣는 거를 좋아한다.
설교에 은혜 받는다. 이것만 가지고 그 사람이 거듭났다.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 그렇게 보면 안 된다.
더구나 이게 중요한 게 뭐냐면요. 따라해 볼까요?
죄의 경중은 죄의 경중은 우리가 누리는 빛과 정비를 한다.
죄의 경중은 우리가 누리는 빛과 정비를 합니다. 성경에는 그걸 보여주는 말씀이 굉장히 많아요.
사도행전 17장 30절에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왜 간과하여 왜 관대하게 대합니까?
모르기 때문에 모르고 죄를 우상숭배하고 모르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 이해되십니까?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요한복음 9장 41절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죄가 있는데,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행하기 때문에 죄가 있다.
그런 얘기죠. 디보드 7장 13절에 보면 바울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국유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 알지 못하고 행하였습니다.
바울이 행한 죄를 생각하면 심판받아 마땅하고 지옥에 던져 마땅한데, 왜 하나님은 바울을 용서하시고 왜 하나님은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쓰셨는가 그건 몰라서 그렇게 한 거예요.
몰라서 주님을 모르고, 진리를 모르고 몰라서 지 딴에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생각하는데 의도가 나쁜 게 아니라 몰라서 그렇게 한 거야.
요한복음 15장 22절 24절에 보면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리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가 없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의 죄가 없었으려니와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텐데 죄가 아예 없다는 거 아니에요 다 죄인이고 멸망보다 지옥에 갑니다.
그 죄가 더 크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그 죄가 더 중하지 않아서 그런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교회 설교를 듣고 회개하지 않는다.
타교의 신자보다 죄가 더 큰 거예요. 불신자보다 죄가 더 큰 거예요.
더 큰 심판을 받은 거예요. 여기 나오잖아요.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중에 한 여러분들이 사사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과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다.
그냥 기적을 보는 것만 좋아하고 예언받는 거나 좋아하고 회개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러분은 타교의 신자보다 더 죄가 큰 거예요.
여러분은 타교회 신자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타교회 다니다가 지옥 가는 사람하고 우리 교회 다니다가 지옥 가는 사람하고 형편이 많이 다릅니다.
우리 교회 다니다가 지옥 가는 사람은 더 무서운 곳에 갑니다.
빨리 교회 옮겨야 되겠다.
그러면 안 되지. 생각을 그렇게 가지면 안 돼. 그러니까 빨리 교회 옮겨야 돼.
이게 아니고 어떤 생각을 가져야 돼 제대로 신앙생활해야 되겠다.
제대로 신앙생활했다. 열심히 죄와 싸우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고 제대로 신앙생활해야 되겠다.
여러분 제대로 신앙하는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7장 13절에 보니까는 이런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이 죄되게 하려 함이라 계명이 있기 때문에 죄가 심이 죄된 거야.
모르고 했으면 모르는데 계명이 있기 때문에 죄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계명이 있기 때문에 죄가 심히 죄 되게.
누가복음 12장 47절, 48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적은 많이 맞을 것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교회는 풍성한 교회야 터져도 많이 터져 많이 맞을 것이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적은 적게 맞으리라 물어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더 많은 거를 요구하실 거예요.
더 많은 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는 대강대강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다니는 곳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은 다른 교회 대강대강 신하다가 지옥 가는 거고, 사랑하는 교회는 제대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이 받는 게 아니라 많은 상을 받는 믿습니까?
넉넉히 구원을 받고 많은 상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 야고보서 3장 1절에 그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분 때문에 율법을 즐거하거나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이 구원받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왜 율법을 즐거워하니까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러니까 그걸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하죠. 그리스도인이 그거는 구원받은 거를 보여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사악한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가 얼마나 사악한가 그의 죄가 완화함이 더 부각이 될 뿐이에요.
그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차에스피는 죄 불량이라는 설교 죄의 불량, 죄의 경중, 어떤 죄가 더 큰 죄냐 죄의 불량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조명은 조명은 죄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이며, 조명의 불량이 죄의 불량을 재는 척도가 된다.
우리 교회에서는 찬란한 빛이 비추고 있어요. 말씀에 다른 교회보다 7배는 찬란한 빛이 비추고 있어요.
여러분 이게 완성되지 않은 설교를 지금 여러분들에게 한 부분을 나누는 거예요.
이게 만만해 보입니까? 그렇다고 그래서 그렇지 않죠 제가 아침에 깨달았다는 것은 완벽한 거를 말하는 거지 그냥 뭐 허접스럽게 뭘 깨닫고 깨달았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7배나 찬란한 빛이 비추고 있어요.
우리 교회 다니면서 회개 안 한다. 7배나 더 죄가 커요.
우리 교회 다니면서 행함 있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7배나 더 죄가 커요. 여러분 믿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정말 정신 차리고 제대로 신앙생활 해야 되는 거예요.
명문 고등학교나 명문 대학에 간 사람들은 다른 대학이나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다릅니다.
필사적으로 공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 때 우리는 교회를 하버드보다 명문을 다니고 있다 맞는 말입니다.
하버드생이 그거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수한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는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했지만 담임 목사님의 메시지하고 그 세계적인 교수들이 비교가 안 된다.
거기서 배울 게 없다. 사랑하는 교회의 메시지가 그걸 완전히 초월해 있다.
프린스톤이나 고등 코넬이나 거기서 공부를 했지만 비교가 안 된다.
늘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되 여러분 작심하고
믿습니까? 작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차이스피니의 제 불량이라는 이제 설교 거의 다 끝났어요.
다 끝났습니다. 찰스피니가 설교해 보니까 그가 외쳤는데 참 마음에 와닿는 게 맞더라고요.
몇 부분을 제가 읽어드리길 원하는데, 기독교 세계에서 이교도들을 욕하고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지역들 중에서 기독교계가 가장 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목사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기독교인들이다.
무신론자들은 몰라서 죄를 짓는데, 타 종교인들은 몰라서 죄를 짓는데 기독교인들과 목사들은 알면서도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죄인들은 누구냐 회개하지 않은 목사들이다.
회개하지 않은 신자들이다. 명목상의 교회는 기독교계에서 가장 죄악된 부분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명목상의 신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예수님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계를 피하겠느냐 회칠한 담이고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의식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그들을 내치신 것처럼 우리의 자녀가 죄 속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교도나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기뻐하지 말아야 된다.
부모 따라 교회 다니면서 회개하지 않았다. 죄 가운데 산다.
차라리 이 교도로 태어난 게 낫다는 거예요. 어차피 지옥에 갈 것이지만 덜 무서운 지옥에 간다는 거야.
부모 따라 교회 다니면서 대강대강 신앙생활하고 여러분 차라리 이교도로 태어난 게 낫다.
차라리 노예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게 낫다. 우리가 누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조건이나 환경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야. 이런 얘기를 계속하면서 그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찰스 피디가 이렇게 외쳤어요.
왜 당신은 회개하지 않습니까?
왜 즉시 내가 지금까지 범죄한 것으로도 범죄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더 이상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죄인이요. 왜 당신은 그렇게 살려고 합니까? 당신은 왜 곧바로 깊은 지옥으로 가려고 합니까?
만일 우리가 당신을 찾으러 당신이 떨어져 있는 그 깊은 지옥에까지 가려면 당신보다 죄가 적은 수많은 버림받은 영혼들을 해치고 천년이나 내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 죄인이요. 당신이 범한 죄를 처벌할 지옥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이렇게 여러분 그 설교를 절교하면서 마치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설교를 잘 들으니까 내가 말씀 듣는 걸 좋아하니까 나는 거듭난 사람이다 이렇게 착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야고보 사도가 한 말을 기억하라는 것이에요. 야고보서 1장 22절에 보니까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내가 설교 듣는 걸 좋아하니깐,
내가 설교를 예배에 이렇게 열심히 하면서 설교 들으니까 나는 진짜야.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야. 나는 천국에 갈 거야. 그게 자기를 속이는 거라는 거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자신을 속이는 목사들이 이 한국 땅에 각 교단 안에 우글우글해 똥뚝하니 구대기처럼 우글우글해.
교회들마다 자신을 속이는 신자들이 장로와 권사와 집사와 신자들이 똥뚜간의 구대기처럼 우글우글한 것이 한국교회고 이 시대의 개신교회입니다.
이 시대의 개신교회 이게 전체 교회의 아주 심각한 문제예요.
간증하는 사람들이 다 교회 안에서 80% 정도가 지옥의 길 갈 것이라는 것에 일치하고 있잖아요.
실제로 천국과 지옥 간 사람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간증이 그 점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잖아요.
또 우리는 야고보의 말과 함께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이야. 27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결론이에요.
결론 이건 바뀔 수가 없어. 그냥 결론이에요.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설교를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의 설교를 듣고 행하지 않은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의 부딪침에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랬어.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왜 그랬을까요? 그냥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 무너짐이 심하다. 그 무너짐이 불신자보다 더 심하다.
무너진 건 멸망이에요. 그 멸망이 그가 받은 심판이 그가 받을 멸망이 그가 받을 지옥의 형벌이 불신자보다도 심하다.
불교 신자보다도 심하다. 유교 신자보다도 심하다.
이슬람 교인보다도 심하다. 여러분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요. 자기 목숨을 잃고자 않으면 얻을 것이오.
얻고자 하면 잊으리라. 목숨 걸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 다닌다고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신앙생활은 여러분 목숨 걸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목숨 걸고 하는 거예요.
신앙생활은 취미가 아니에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기도했다고 몸이 변화됩니까? 성령 충만 받았다고 몸이 변화됩니까?
기도하면 육신의 경력이 사라집니까? 암흑의 능력이 사라집니까?
이성의 장이 사라집니까? 그런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어요.
성령 충만할 때 그거를 찍어 들을 수 있고, 적게 느낄 수는 있어도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다고 그 몸에서 육신의 능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안무의 능력이 사라지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이상의 자랑에 사라진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이기심이 사라지는 사람, 탐심이 사라지는 사람, 교만이 사라지는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예수님보다 더 잘 부활합니다. 걸핏하면 부활합니다.
걸핏하면 걸핏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그게 육신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부인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마음에 쳐서 복종시키라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기도함으로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거예요.
항상 깨어 계시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신앙생활하고 계시죠?
우리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저는 그렇게 신앙생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신앙생활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그렇지 않죠 바꿔야 돼요. 기도해야 됩니다.
예배에 참석한 의무 갖고 안 돼요. 날마다 기도해야 됩니다.
믿습니까?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됩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됩니다. 성령을 의지해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거예요. 죄사은 사망이기 때문에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무지한 사람들이 전도할 때 사용하지만 그거를 신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거는 기독교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욕심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아라.
거듭났지만 욕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 욕심을 방치하지 말아라.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너 죄 지었으니까 지옥 이런 거 아니다.
니가 습관적인 죄를 짓는 거 아닌 이상 니가 죄 지었다고 지옥 가고 이런 거 아니다.
그런데 그 죄를 방치해서 죄가 장성하면 죄가 힘을 얻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면 그 죄가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예수님 믿기 전에 회개하기 전처럼 습관적인 죄가 되면 사망을 낳느니라.
제사은 사망이오 사망을 낳느니라. 너는 둘째 사망인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너는 둘째 사망인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게 야고보가 한 야고보서 1장 15절 말씀의 진짜 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있겠지만 회개하지 않은 분들은 오늘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날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자기 부인하고 날마다 죄와 싸우고, 날마다 성령 충만을 구하고,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고 여러분 승리하는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여러분 천국에 가서 큰 자가 돼야 되지 않겠어요.
세상에서는 그렇게 성공해서 큰 자가 되려고 그러면서 큰 자가 돼도 죽는데 큰 자가 돼도 죽는데 제가 지난주에 충격을 받았어요.
애니 성교의 이혜경 대표님이 심하버 목사님이 암에 걸려가지고 치료가 불가능해서 거기 협동목회를 하다가 후임 목사가 됐어요.
후임 목사가 된 지 몇 달 안 됐어요. 그래서 지난주에 총회 마치고 부산에 있는데 그날 소천하셨다는 거예요.
사람은 여러분 언제 죽을지 몰라요. 성공하면 안 죽습니까?
담임 목사 되면 안 죽습니까? 부자 되면 안 죽습니까?
유명해지면 안 죽습니까? 결국 늙어가고 죽는 거예요.
왜 일시적인 성공에는 목을 매면서 왜 영원한 성공에 관심이 없는가 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데 관심이 없는가 왜 천국에서 상 받고 면류관 받는데 관심이 없는가 왜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지 않는가?
그게 진짜 성공인데 대강대강 신앙생활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믿을 뿐만 아니라 정말 성령 충만하고 정말 성화되고 정말 예수님 답고 정말 예수님 사랑하고 믿습니까?
정말 온전한 자가 되고, 정말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큰일 나는 자로 하나님 손에 붙잡혀서 사도들처럼 사용되다가 천국에서 큰 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들은 말씀 기억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삼창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희야 주희야
주영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 자리에 강력하게 임하여 계신 주님 주님께 감사드리고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여보 아버지요. 하나님이여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 그 주님의 음성에 하나님이 우리의 귀가 열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말씀을 듣고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요.
반드시 하나님의 이 말씀 그대로 우리의 심령에 새기고 하나님 우리가 열매 맺는 그러한 삶 살 수 있도록 주님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 아버지 우리가 날마다 아버 아버지의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여 불순종의 죄악을 절대로 받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이 시간에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어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의 것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야 헛된 욕심 우리 안에 인세는 모든 죄들이 있다는 이 시간 완전히 끊어내고 하나님이여 우리가 반드시 하늘에 속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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