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친구들과 보낸 하루
문 남선
인천의 남항 부두에서 바다낚시를 끝내고 귀가하던 차 안에서다. 운전석엔 남편이 조수석엔 내가 뒷자리엔 둘째와 양 옆으로 동료인 월샴과 테넌트가 탔다. 깔깔 낄낄대는 또래의 웃음소리로 차안은 소란스러웠다.
그들의 입은 마치 배터리의 힘으로 움직이는 전자인형의 입 같았다. 쉼 없이 웃고 장난치고 노래하는 통에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는데 더구나 차 안이고 보니 그들 소리는 차라리 소음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우리 가족 은 대체적으로 잘 웃고 말도 많은 편인데 그들과 비교하면 속된말로 아예 쨉이 안됐다. 아들의 엄마! 하는 소리를 흉내 내며 장난기 많은 그들은 자꾸만 내게 엄마! 엄마!하며 불렀다. 그래 눈이 푸르면 어떻고 또 코가 좀 크면 어떠냐? 아들의 친구라면 국적 불문하고 모두 내 아들이겠지……. 하는 생각에 나는 미소 지으며 짧은 영어로 대답했다.
둘째의 성격이 자유분방한 편이다보니 미군들과의 친교가 꽤 두터운 편이다. 동료 여군 생일엔 잊지 않고 선물을 하고 미국에서 그들 가족이 오면 시간을 내서 비원, 인사동, 63빌딩 등의 안내도 해주며 개를 좋아하는 미군들을 위해 면목동의 개시장까지 동행하며 자주 개도 사주곤 한다.
테넌트가 우리 집에 놀러가고 싶다고 했다. 그들 역시 어린 군인들이라 상관들이 있는 통제 된 부대엔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못하는 그들로선 이곳저곳 다니기도 만만치 않을 터이니 아들과 조금이라도 더 동행하고 싶어 했다.
생일날 아들이 잡은 우럭(왼편으로부터 아들, 테넌트, 월샴)
테넌트는 미군들이 자주 가는 압구정동의 hooters란 레스토랑에서 자기가 저녁을 쏘겠다며 같이 가자고했다. 어른이 아이의 접대를 받는 다는 것은 동양 문화의 사고방식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다. 집에 가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해 주는 것 또한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래서 목동의 TGI나 차이나식 음식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모두 중국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해서 예정에 없던 저녁 식사를 위해 중국 음식점으로 향했다.
중국 음식점샹하이 주차장에 도착했을 무렵 월샴이 무척 궁금했던지 우리 부부가 결혼 한지 얼마나 됐냐고 물어 보았다. 별 생각 없이 twenty five years 라고 대답했다. 계산이 얼른 안 되는지 아니면 더 확인 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지 몇 년도에 결혼했냐고 다시 물었다. 1984년도라고 얘기했더니 뭔가를 한참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 아이의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은 만 하루가 지나서였다.
그것은 필시 동양과 서양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궁금증의 발로였으리라. 월샴은 아들의 룸메이트로 아들과 동갑인 23살이다. 몇 차례 막사를 방문해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우리 부부의 모습에서 그는 당연히 친부모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세하게 신경써주는 것을 보고 정말 훌륭한 계부 내지는 계모일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혹시 친부모일지도 모른다는 의문 또한 가졌을법하다.
아이가 성인이 될 무렵까지 함께 사는 부부가 10%도 안 될 미국 문화상식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 문화의 잣대로 보면 그 오랜 시간 한 사람하고만 산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 아니겠는가. 그날의 질문과 표정 그리고 뉘앙스로 봐선 아마 내 짐작이 맞을 듯싶다.
식당에서 그들은 무척 밝고 쾌활했다. 거의 10여분 꼴로 시간만 나면 생일축하 한다.며 노래하고 멘트하며 아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일찌감치 독립하여 홀로 서기한 강한 모습과 자유분방함이 배여 있었다. 하지만 혈육이란 연결고리에 의해 서로의 마음을 쏟는 동양적인 문화에 어쩌면 그들도 부러워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 버락 오바마의 어머니는 18살에 오바마를 낳고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오바마가 서너 살 때 해변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사진을 찍은 그때가 생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라고 얘기했다. 아마 친부 친모의 정이 그리웠기에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는 어머니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어머니란 단어가 주는 에너지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차이가 우리 국민의 개인적인 우수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의 핏줄에 대한 집착과 가없는 자식 사랑은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것 같다. 세계적인 은반의 요정 김 연아의 뒤에는 모든 생을 딸을 위해 바친 그의 어머니가 있었고, 골프선수 박 세리의 뒤에는 역시 모든 희생을 바친 박 세리의 아버지가 있듯이…….
자유분방하고 너무나 밝았던 그 아이들이 나는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우리와 그들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부질없는 생각 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2008년 3월 18일
첫댓글 작년 이맘때 3월 15일 아들의 생일날. 나의 2차 동위원소 치료가 끝난지 몇달도 안지났을때였지요. 아들의 생일을 맞이하여 오래도록 잊지못할 추억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었지요. 아들이 어른이 되고 훗날 엄마가 죽더라도 아들의 가슴에 진하게 남아있을 추억을 ..... 그래서 작은 배를 타고 바다낚시를 갔습니다. 그날 하루 아들의 미국 친구들과 하루를 보낸 뒤 써뒀던 글이에요. 벌써 일년이 지났군요.
언니 애가 작은아들이지 요놈은 뭔가 할놈같다 언니 니랑 많이 닮았제 우리 고마제도 닮은거같고
잘 봐둬라. 내가 봐도 보통놈은 아니다. 10년을 토굴에서 콩 열조각씩 먹고 지내신 큰 스님도 내게 살짝 귀뜀하셨다(허걱! 이거 천기 누설 아닌지 모르것넹) 아마도 크게 될거야. 꿈도 야무지고, 야심차고 기획력과 추진력도 있고 포용력 있고 보스 기질도 대단하고..... 가끔씩 너무 강한 성격을 나타내는 그 점만(난 늘 물같은 사람이 이긴다고 가르치거덩) 보완하면 뭐가 돼도 될거라 확신한다. 지금 내가 그리 키우고있다.
선배님의 자식 사랑 남 못지 않네요 대단합니다. 뭔가 꼭 한 인물 할 것아요 ...나중에 모른척 하기 없깁니다.
아이고 고마워요. 본시 속썩인 놈이 효자란 말 있지요? 한동안 그리도 속을 많이 섞이더니.... 이것저것 많은 경험 쌓느라 아마도 그리 한 것 같아요. 이런 일 아니라도 모른 척하긴요? 입산이란 한 배를 탄 것만도 우리는 하나입니다. ㅎㅎㅎㅎㅎ
잘 읽고 갑니다.부럽네요 영어는 아주 저절로 터득할듯 아들이랑 아들친구들..보기 좋습니다.
영어는요. 언젠가는 국제화 시대가 온다는 걸 미리 내다 본 아들의 애미 되는 사람이 극성을 부리면서 학원 한번 안 보내고 보행기 타고 있을 때부터 갈켰어요. 한동안 우리 가정에 우여 곡절이 많았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영어대회가 열리면 영어 만큼은 전교 1,2 등을 두 형제가 도맡아놓고 했어요. 꼭 외국을 가야 잘 하는 건 아니에요. 애들 영어 가르치기 힘든 사람 내게 연락해요. 알켜줄게요. ㅎㅎㅎㅎ
낚시 참 재미 있는데 땡기는 손맛 이 기분 누가 알까,,,,,,,,,,,,잘 읽고 갑니다 ,,,,,,
종순이 너도 낚시 좋아하니? 옛날에 어릴 적에 아버지 따라 주먹밥 싸갖꼬 새벽부터 낚시간 적 있었는데.... 난 지루해서 혼났었는데...
낚시에 취미 부터면 주일 마다 고기 잡으로 가고 싶죠 심하면 이것도 병 된다구요 머던지 조금씩만 과하면 모던게 안 좋지요,,,, 아쿠아 누님도 한번 취미로 낚시 같이 즐겨요,,,,,,,,,,
남편이 낚시 취미라면 나도 같이 즐긴텐디... 이 영감은 취미가 낚시가 아니라서 유감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