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협물이나 무협소설에서 '강호'(江湖)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게 장철 스타일의 시대물이든 [영웅본색] 류의 현대 홍콩 느와르이든 간에 뭔가 남성적인 미학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홍콩영화에서 만나보게 되는 '강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그 스펙트럼이 넓다. [와호장룡]이나 [영웅본색]에서만 '강호'가 운위되는 것이 아니라 '고혹자'시리즈와 '타락천사'에서도 강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중국 지도책에서 '강호'를 찾기는 어려워도 '강호'를 다룬 영화나 소설은 부지기수이다. 올해 봄 '강호'를 다룬 영화, 제목마저 '강호' 그 자체인 [강호]가 홍콩에서 개봉되었다. 작년 [무간도]로 '강호'에 대한 재미를 본 홍콩 영화판은 다시 한 번 막강 캐스트로 '강호'의 도를 읊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두 개의 사건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암흑가의 최대 보스 유덕화가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경찰(공안)에 자수하고 갱생의 길을 걷기로 한다. 부하들에게 모두 새 길을 가자고 하지만 그의 오른팔 장학우와 중간 보스(증지위, 서소강, 묘교위)들이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긴다. 유덕화의 사랑스런 아내 오천련은 방금 아들을 낳았다. 이들은 새로운 삶을 원하지만 강호에 나도는 소문이 흉흉하다. "솔잎만 먹어야지.."라며 손 씻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보스 유덕화를 죽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 배후는 바로 장학우라는 말도 나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흑사회 똘마니 여문락과 그를 따르는 진관희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방금 조폭 사회에서 제비뽑기로 여문락이 거물을 죽이는 임무를 맡게 된다. 영화는 이 두 이야기를 절묘하게 배치한다. 관객은 자연스레 여문락이 유덕화를 죽이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한다. 과연 여문락이 유덕화를 죽이는가, 아니면 장학우가 배신자인가.. 관객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 영화는 확실히 홍콩 강호편(江湖片) 전통에 한국영화의 겉멋을 너무 많이 이어받은 것 같다. 부산영화제에 한국을 찾은 감독은 얼버무렸지만 확실히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것없다]의 40계단 살인사건 장면과 곽경택 감독의 [친구]의 라스트신을 뚜렷하게 답습하였다. 분위기도 마치 코폴라 감독의 [대부] 마냥 폼을 잡는다.
영화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암흑가의 이야기를 교차시켰다고 하지만 언뜻 보아도 맹점이 있다. 여문락이 제비를 뽑고, 여자를 하나 사귀고, 그 여자를 위해 편의점을 털고, 총을 입수하고, 진관희를 돕고... 등등 일련의 행동은 하루에 이루어지기에 너무 많은 일이다. (우겨 넣었다고 하기엔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그러니 당연히 시간의 교착일 것이다. 물론, 이것의 진실 여부는 '범인은 절름발이다!'에 해당하는 악의적 스포일러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미덕은 결국 그 시간교착일 뿐이니 할 말이 없다. 직접 확인하시라!!!
홍콩 영화사에 있어 이 영화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 전 해, [푸부](福伯)라는 저예산 영화로 홍콩 느와르를 이어왔던 제작자 증지위는 다시 한 번 느와르로 권토중래를 노린다. 제작비 3,000만元을 들인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국 영화시장이 필수이다.
홍콩-중국 합작 영화가 중국에서 제대로 개봉되려면 현실적으로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다. 당연히 주제가 권선징악이어야 하며, 중국에는 아직까지 '등급제도'가 없는 관계로 모든 인민들이 모두 공평하게 볼 수 있는 수준의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말은 곧 과도한 폭력, 농도 짙은 성애장면을 잘라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증지위는 이 영화를 중국에서 개봉시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세 번이나 자신의 영화를 짜깁기했지만 결국 이 영화는 중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하나 웃기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칼에 맞은 여문락 뒤로 경찰차가 한 대 지나간다. 이것은 정의가 이긴다는 '중국식 권선징악'의 한 상징적 표현이란다. 우와!!!!
유덕화와 장학우는 [열혈남아], [아비정전] 이후 실로 오랜만에 함께 공연한다. 유덕화와 오천련 커플도 비장미 철철 넘치는 [천장지구] 이후 다시 한 번 팬들을 찾는다. 이 영화에서 여문락의 어머니로 아주 잠깐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는 혜영홍이다. 증지위와 함께 중간보스 연기를 하는 배우는 묘교위, 서소강이다. 두문택의 출연은 뜬금없지만 임설의 출연은 재미있다. 두기봉 영화 [P.T.U.]에서 총을 잃어버린 경찰로 나오더니 이 영화에서도 총을 빼앗기는 불쌍한 역을 맡아 관객을 미소짓게 만든다.
아마도 이 영화도 현대 영화답게 PPL을 많이 활용했다. 그런데 20년 전 사용하던 핸드폰이 너무 앞서간다.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 진관희가 '개'와 썸싱을 일으킬 뻔한 장면은 홍콩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진관희의 프로정신이 놀랍다.
아마도 이 영화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듯' 흑사회 운명은 죽어도 흑사회 운명이란 걸 보여줄 모양이었다. 홍콩도 우리처럼 도박판이나 조폭마을에서 달아나기가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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