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로서 새 출발을 하는 P선생께엊그제까지 ‘P박사’하든 교수들이 갑자기 ‘P교수’라고 호칭하는 걸 보니 교수 발령을 받기는 받았나 보네. 호칭에서 실감이 나는가? 아무튼 진심으로 축하한다네.그런데 아직도 나는 자네를 여전히 ‘P선생’이라고 하는 이유는 알고 있겠지? 교수는 직업 또는 직급을 나타내는 말이고 ‘선생’ 혹은 ‘선생님’이 호칭어로 더 적합하다는 얘기를 잊지 않았을 터이고, 이제 함께 학문하는 학자로서 서로 존중하는 의미까지 담는다면 여전히 ‘P선생’이라고 불러도 서운하지 않겠지?아무튼, 교수가 된 P선생!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박사학위를 받고서 이제야 혼자서도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이지 학문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았듯이, 교수 발령을 받았으니 이제는 기존의 연구 이외에 교육과 봉사의 책무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굳이 교수의 실적 평가 때문이 아니라도 대학교수의 사명은 자기 학문 분야에 대한 연구와 학생교육 그리고 사회적·국가적 봉사이니 세심하게 계획을 세워보게나. 정년까지 긴 세월 같지만 10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면 3번의 기회밖에 없다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찾아오는 연구년을 자식 어학연수를 위한 기간으로 보내지 말고 자기 비약을 위한 준비된 기간이 되도록 계획을 미리 세우게나.이미 경험하였겠지만, 연구계획을 세울 때 한의학 전공자로서 가장 갈등이 생기는 점도 고려하게나. 학문의 근대적 방법론 도입이 늦어진 까닭에 연구결과가 학생교육에 바로 이어지지 않는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 고민하게나. 아니 간극을 메우기보다 간극이 없는 연구로 교육과 바로 이어지도록 노력해 보게나. 소위 SCI급 논문을 아무리 쓴들 한의학 교육에 필요한 교재 개발이나 기초 혹은 임상의 지식과 연결되지 않게 되면, 최신연구에 몰두하느라 학부교육에 흥미를 잃거나 학부교육에 치중하다 타 학문 분야와 소통의 도구나 언어를 잃고 교수직에 회의를 품게 되는 선배교수들의 전철을 밟지 말길 바라네.기초학을 선택한 P선생!늘 기초의학에 뜻을 둔 이상 개원가 동기들과 자주 만나지 말라는 지적을 이제는 이해가 된다는 얘기에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함이 든다네. 동기들보다 자네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기초의학을 선택하여 받은 첫 월급부터 가족이 생긴 지금까지 동기들과의 생활에서 겪게 되는 격차를 회복할 수 없는데 그 고충은 같은 학문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위로하는 수밖에 없다네. 아니, 이해된다니까 당부하지만, 장남이고 맞벌이도 아니면서 고향도 아닌 곳에서 교수가 된 자네는 진정한 학자들과 교류하기를 바라네.시대가 아무리 돈! 돈! 하지만 돈으로 할 수 없는, 진정으로 존경하는 제자 한 두 사람을 키우는 일은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만큼이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수십억의 연구비를 투자할 사람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며 환자와 국가를 위해 기여할 연구주제를 만들기 위하여 묵묵히 연구실에서 자기 노력을 하며 스스로 즐기는 학자를 생각하게나. 비록 그런 모습으로 지도하지 못하였지만, 세상의 학자 중에는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음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학자는 studied도 아니고, will study도 아니고, studying하는 분임을 가까이서 지켜보지 않았는가? 자네는 그리하게.학자가 될 P선생!늘 연구에 즐거워하고 새로운 연구결과를 학생들에게 전하는 기쁨에 행복해하는 학자가 되려면 연구나 교육도 중요하지만, 배포와 양심을 가져야 한다네. 학문적 배포는 무엇일까? 자네는 한의학에 대한 인기가 추락하고 있고, 한의사의 미래가 불투명하며, 한의학이 주류의학이 아니라는 내외의 평가에 수긍하는가? 자네가 입학할 당시의 수능성적이 최고점이었다고들 하는데, 지금의 인기도 결코 낮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네. 우리나라의 짧은 근대화시기에 최고의 인재들이 몰렸던 전공이 화공, 기계, 전기전자로 유행하였음을 볼 때 그 인기 또한 시대적 흐름이라고 보는데, 의학 ·치의학과 더불어 한의학은 다소간의 격차가 있었지만 한 묶음으로 유행하였지 큰 차이는 없었다고 보네. 다만, 자신의 학문을 자랑스럽게 스스로 선택했느냐 아니면 인기에 편승하거나 자신의 선택한 전공으로 진학할 수 없어서 대체전공으로 선택했느냐의 차이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네. 스스로 선택한 학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학자가 되리라는 배포는 인기나 비주류를 극복할 수 있고 자신이 스스로 미래의 희망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네. 자네의 품성이나 대학 진학의 계기를 볼 때 충분히 그러한 배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선배로서 학자의 양심에 대하여 당부하겠네. 내 자신이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당부하는 것이 아니지만 앞으로 이러한 점을 조심하게나. 첫째, 연구에서의 양심은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이네. 요즈음 학자로서 도덕성 운운하는 과정에서 ‘기여도 없는 논문의 저자’, ‘자기논문의 자기표절’, ‘대학원생 논문의 재투고 혹은 쪼개기’, ‘출처도 밝히지 않은 번역문으로 만든 저술’ 등은 쉽게 말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 거짓말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라네. 시중의 도둑질과 학자의 도둑질은 격이 다르고, 스스로 지켜야 하는 엄격함이 학자의 양심에 있어야 한다네. 일반인들은 ‘자기표절’의 비양심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내용을 재생성함으로써 학계를 어지럽히는 사실과 자기검증이 이루어지지 않는 교수는 학자로서의 양심이 없는 것이라네. 아무리 실적으로 평가를 하더라도 양으로 남의 눈을 가릴 수 없지 않겠는가? 전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라도 검색이 가능한 기록으로 남는 논문에 양심을 담게나. 그리고 지나친 나의 엄격함 탓인지 모르지만, 괜찮은 논문만 고집하느라 양적으로 부족하더라도 주눅 들지도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기 바라네. 그렇게 버텨야지만 언젠가 누구에게나 ‘아 그 친구 제대로 하는 사람이야’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네. 지금부터 학자적 배포를 가지고 준비하길 바라네.둘째, 교육에서의 양심은 원칙과 포용이라네. 당장의 인기보다 먼 훗날에도 수긍할 수 있는 원칙을 지키고 진정 반성하는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용서하는 아량을 갖추길 바란다네. 이 부분에서 나는 원칙은 지키려고 노력하였지만 포용은 제대로 하지 못한 젊은 시절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네. 가까이서 보았으니 잘 하리라 생각한다네. 행복한 학자가 되어야 할 P선생!조교로 근무하면서 다른 연구실 대학원생들이나 조교들이 다 퇴근할 때 밤늦게 연구실을 지키며 인턴들과 함께 야간 간식을 먹느라 살이 찌고, 왜 나만 이래야 하는가를 다른 대학에 가보고 다들 그렇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였었지? 그리고 지금도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 연구실 가까이 집을 구해서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있다고 하면서 잘 지낸다는 이야기를 이제는 하지 말게나. 평생을 해야 할 공부를 젊은 시절 혈기로만 버틸 수 없으니 이제는 주말에는 체력관리와 취미에 시간을 할애하게나. 재작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들렀을 때 대학원생들이 교수들과 함께 일찍 일을 마무리하고 축구를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네. 긴 시간을 두고 장거리 마라톤을 준비하는 학자들은 우리처럼 단기승부에 급급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연구실에 오래 버티는 것을 자제하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네. 교수직은 자기가 좋아서 하지만 가족이나 제자들이 함께 행복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네. 가족이 행복해야 자신의 연구를 지속할 수 있고, 행복한 학자의 모습에 반해야 기초의학에 남을 제자를 키울 수 있는 행운이 따른다네. 나는 자네와 같은 복덩이가 저절로 굴러 들어왔지만, 점점 기초의학 진학을 회피하는 현실에 행복해 보이지 않고 재미도 없고 삶 또한 부러워 보이지 않는다면 - 실상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 - 제자에게 자신의 연구 분야를 이어가도록 할 수 없다네. 그러니 건강에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운동과 취미를 당장 시작하게나. 그리고 KAIST 총장을 역임하였던 러플린 교수의 첫 질문처럼 ‘당신이 하는 연구가 돈이 되는 연구’인지도 늘 생각하게나. 당장의 돈이 아니라 가치를 생산하여 재투자를 만드는 행복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게나.눈물을 글썽이게 한 꾸중도 받아 주었던 P선생!오늘도 부드러운 덕담보다 깐깐한 잔소리가 많았네. 나의 허물이 있음에도 더 큰 허물을 탓하며 자네에게 당부하는 것이 모순이지만, 자네는 동료와 후배교수들과 함께 당당한 대학자가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의 준비를 기대하기 때문임을 이해하겠지? 철없이 지나온 시절에 후회와 자책이 남는 것은 수긍할 만한 꾸중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또 다시 잔소리를 하였다네. 선배교수들처럼 딸깍발이가 무엇인지도 몰라 그저 권위로만 지도하였던 교수가 아니라 진정 모범이 되어 자네를 꼭 닮은 제자를 얻게 되길 기대함도 이해하겠지?아무튼 자네는 이제 막 교수로서 새롭게 시작하였고, 더구나 대학원 진학 이후 학위를 마칠 때까지 좋은 동료들과 교류하며 마음껏 능력을 펼쳐 보았기에, 자네 스스로 한의계의 훌륭한 학자가 될 것이고 되어야 한다는 바람으로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네. 나의 잔소리는 접고, 정약용 선생께서 15살이었던 제자 황상에게 학문에 임하는 자세에 대하여 말한 글을 옮겨 전하니 자네도 황상처럼 60여년은 아니지만 정년까지 마음에 새겨보게나. 새롭게 출발하는 첫날 그 마음에 마음가짐을 확고히 다잡아 보게나. ‘學者有大病三 汝無是也 一敏於記誦 其弊也忽 二銳於述作 其弊也浮 三捷於悟解 其弊也荒 夫鈍而鑿之者 其孔也闊 滯而疏之者 其流也沛 而磨之者 其光也澤 曰鑿之奈何 曰勤 曰疏之奈何 曰勤 磨之奈何 曰勤 曰若之何其勤也 曰秉心確’조만간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강의’나 김영식 교수의 ‘과학, 역사 그리고 과학사’를 교수발령 기념으로 선물을 할테니 ‘과학과 기술’, ‘이론과 임상’, ‘기초와 임상’에 대하여 고민을 한번 하고 오랜만에 만나 발령기념 건배를 하며 밤새 토론 한번 하세나. 양산 캠퍼스 연구실에서 권영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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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규 교수 | | |
첫댓글 감히 댓글을 달아도 되는 건지 잘모르겠지만.. 교수님.... 너무 감동적인 글입니다. 저희과 기초 교수님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게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느끼는 만큼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