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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생태마을 조성사업도 추진되어 주민의 생활환경이나 의식, 체험시설 및 프로그램, 마을 기획과 운영능력이 앞서가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야영장과 교육장 회의실 식당 화장실 샤워장 등을 완비한 용오름 산장이 있다. 동서양 악기를 체험할 수 있는 마리소리골 악기박물관, 모둘자리 관광농원, 홍천테마파크(구 예술촌) 등이 있어 관광지와 숙박 시설이 다양하다. 30분의 거리로 접근성이 뛰어나고 철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야생화와 산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청정 나물 등 오감으로 사계절 농촌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마을이다.
제주불교성지순례길 '정진의 길'
#존자암 존자암이 위치하고 있는 영실은 녹음이 우거지고 흰 구름과 안개가 감도는 여름철이 되면 신선과 선녀가 금방이라도 내려 와 노닐다 갈 것 같이 시원한 바람을 잡아주고 가을이면 기암절벽사이로 단풍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이루는 곳이다. 이렇듯 영실은 사계절 각각 그 빛깔이 달라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귀포시 하원동에 소재 불래오름 남서 능선 1,300m 지점 계곡 남동향에 위치해 있는 존자암은 제주에 삼성(고·양·부)이 처음 일어난 탐라국 시대 때 창건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특히 존자암은 부처님의 16아라한 중 발타라존자가 불법을 전하기 위해 제주도에 와 수행하면서 불교를 전하였던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불교성지 순례 정진의 길은 오백나한이 상주하는 나한산(羅漢山) 한라산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영실 존자암에서부터 선덕사까지 참나를 찾아 떠나는 길이다. #하원수로길 그 후 주변 도로들이 개설되기 전까지는 한라산 등반코스로 이용했던 길이었다. 이 길은 영실 존자암과 불래오름, 숯가마터, 무오항일발상지 법정사, 화전마을터전 등 역사, 문화와 관련된 유적들이 산재해 있어 조상들의 삶의 추억이 깃든 생태문화 탐방로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움막을 짓고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대표적인 산열매인 표고버섯과 시로미, 그리고 오미자를 채취하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조선시대 때 제주로 유배 온 충암 김정이가 남긴 ‘제주풍토록’에는 토산물 중에 표고가 가장 많다는 기록이 있듯이 한라산의 기후와 토양은 표고 발육에 가장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표고의 수확이 대부분 추운 겨울에 이루어지는데, 표고 재배사를 둘러보면서 표고 채취를 위해 산속을 헤매던 백성들의 고초를 생각하며 걷다보면 불교성지순례 정진의 길에서 나 자신은 본래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오항일항쟁발상지 법정사지 하원수로길을 걷다보면 자연과 함께 옛 제주사람들이 삶을 돌아보고 선연들이 애국애민정신을 통해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 그리고 삶의 방향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한라산 둘레길 #하치마키 도로 그리고 1931년부터는 일제는 제주도를 태평양전쟁의 발진과 본토방위의 기지로 삼아 인적, 물적, 동원에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전황이 악화되자 제주도를 전쟁터로 만들어 이곳으로 연합군을 유인하여 최후의 결전지로 삼기 위해 전도의 오름과 골짜기는 물론이고 평야와 해안까지 방공호를 구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배경으로 한라산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한라산중허리 400∼900고지에서 도민들을 동원하여 군용트럭이 다닐 수 있도록 군사도로를 개설하였다. 한라산에 머리띠를 두른 형국이라는 뜻의 하치마키 도로를 개설하여 당시에 한라산을 위시하여 제주의 처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장소이다. 불교성지순례 정진의 길은 이곳에서 역사의 아픔과 민초들의 고통을 돌아보며 걷다보면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
구산봉
서귀포시 하원동과 대포동 경계에서 북쪽으로는 법화사에 걸쳐져 있으며 하원마을 서쪽 일주도로 가
까이에 위치한 나지막한 오름으로,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어서 구산망(拘山望), 구산봉(拘山峰)이
라 부른다.남북으로 길게 누운 등성마루 양끝에 두봉우리를 이루며, 동쪽사면 상부는 비교적 평탄하
동남향으로 다소 우묵진 말굽형 화구를 이루고 있다.
산정부에는 해송과 잡목이 가시덤불과 우거지고, 동쪽사면 상부는 비교적 평탄한 풀밭을 이루면서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오름 중턱에는 삼나무가 조림되어 있다.
- 오름명의 유래 : 개가 노루를 잡으려고 뛰어 오다가 앞에 범(범섬)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곳에 주저
앉았다는 형국설에 따라 만들어진 이름이라 전해져 있고, 한자이름도 한자뜻을 빌어 표기한 것이다.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1653년]에는 “동해방호소에는 객사와 군기고가 있는데, 정덕 경오년(1510년)에 가래방호소를 여기로 옮겼다. 차귀성에는 영차 1명이 있으나, 동해방호소에는 단지 대정 1인만 근무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해성은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으며, 석축으로 주위가 500척이요 높이는 8척이며 성안에 샘물이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샘이란 '동이수‘[동해수]를 가리킨다.
동해방호소 동남쪽 ‘개오름’[구산봉]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봉수대는 오름 정상에 만들었는데, 형태는 흙이나 바위로 타원형의 둑을 쌓고 중앙에 봉화를 올릴 수 있도록 대를 구축하여 외적의 침입 시 봉화나 횃불로 신호하는 통신 감시 체계였다. 구산봉수는 동으로 삼매봉수[서귀포시 삼매봉], 서로는 호산봉수[안덕면 월라봉]와 교신했다.
동해방호소는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1700년대],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1709년], 「대정군지도」[1872년] 등을 보면 대포 지역 중산간 지역에 있었다. 대포동 301번지 일대로 회수마을과 하원마을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2012년 현재 방호소나 동해성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으나, 당시 주둔 군사 및 지역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동수’라는 샘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샘 주변이 모두 매립되어 인근 과수원의 농업용수로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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