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아이를 ‘나 혼자’ 낳고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 없는 산동네 문간방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사람이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이 외롭거나 가난하거나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답답하거나 할 때 무엇이 그런 ‘슬픔’들을 덜 억울하게 할 수 있을까. ‘글’은 그런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 공선옥, <생의 한데에서 불안에 떨며> 중에서 - 알라딘
그때 내가 읽은 대부분의 책은 할리우드영화의 문법을 소개했고, 예술을 논할 때 유럽영화의 감독들을 예로 들었다. 나는 이 책들을 그냥 외웠다. 그것이 내가 배운 방식이다. 이해를 통해서 배움을 청한다는 고상한 방법도 있지만 그러나 일정한 수준까지는 결국 암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시를 느끼기 위해서 그냥 입에 붙을 만큼 외우는 것은 한 가지 방법이다. 그래서 대화를 하다 무심코 내 마음대로 인용할 만큼이 될 때 문득 그 시가 이해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 정성일, <영화,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중에서 - 알라딘
화상당한 열사들의 시신, 그 장렬한 죽음의 마지막 순간, 의문사한 이들의 사진으로 남은 주검의 끔찍함들 그리고 비통한 장례식과 장례투쟁……. 그때 생각했던 것이 죽은 자와의 약속이었다. 산 자들과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살아가면서 약속을 바꿀 수도 있지만, 죽은 자와의 약속은 그럴 수가 없다. 다만 지켜야 할 뿐이다. 그 죽음 앞에서 맹세했던 일들, 그 순간의 뜨거운 눈물과 함께 다짐했던 일들, 목울대가 아프도록 울면서 마지막 이별 앞에서 했던 약속들, 그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의리다.
- 박래군, <인권운동, 나의 영원한 숙제> 중에서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