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망산
바다가 잘 보인다고 해망산(海望山)이라 했다. 비봉면 유포리에 넓게 앉은 해발 125.8m의 산으로 태행산의 자락이 유포리에 이르러 바다를 만난다. 군자만으로 잠겨 들기 전 슬몃 솟았다.
고려시대 인천부 이포면 지역으로 바다가 넓게 펼쳐지고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버들개”, “버들무지”라 했는데 1895년(고종32) 때 남양군 <미지곳면>으로 편입 되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유지동”과 “대장골”을 한데 묶어 유포리(柳浦里)란 이름으로 수원군 비봉면에 속하여 오늘날 화성시 비봉면 유포리라는 행정명을 갖게 되었다.
유포1리 ‘유지' 마을과 ‘대장굴’ 포함50~60호의 한산이씨들이 많고 유포2리 ‘버들무지’ 각성의 45호 정도가 살고 있으며 일제시기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주민이 가장 많았을 때는 120가구 거주하던 큰 마을 이기기도 하였다.
해망산 산자락이 비봉면을 넘어 남양의 장전동, 시동, 비봉의 남전리 일대로 뻗어 내린다.
시화호물막이 공사 이전에는 어업과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일대 마을들은 매우 활기찬 생산 활동을 하였으나 물막이 공사가 완공되면서 바다가 사라짐으로 일부 개벌은 논으로 일구어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해망산 기슭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는 청동기 시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임짐왜란의 격동으로 문화와 인식의 개혁 전환을 맞아 인구의 이동이 크게 나타난다.
해망산이 이루고 있는 풍수를 살펴보면 동남향으로 “대장곡(大將谷),대장골”은 버들무지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으로 손꼽는다. 또한, “유지동”(柳枝洞)은 대장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앵소유지형(鶯巢柳枝形)이라 하여 버들가지에 꾀꼬리가 집을 짓는 형극으로 유지동(柳枝洞)이라 한다.
대장골 마을에 한산이씨 종가가 있다. 집주인 이성원씨는 한산 이씨 해상공파 13대손으로 6대 조부 때 나라에서 효자문이 내려져 대문에 설치되어 있다. 이성원의 증조부가 진사를 지냈기 때문에 진사댁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장골은 대장이 날 수도 있다. 혹은 대장이 나왔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고 한다. 해망산의 어느 바위에 커다란 발자국이 있는데 진인(혹은, 대장)의 발자국이라 한다. 좀더 연관지어 옛날 해망산 기슭마을에 날개달린 아기장수가 태어났으나 이웃의 발고로 죽임을 당하고 어느날 하늘을 날아다니며 울던 말이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한, 시화호 남측 일대에는 발자국 설화가 많이 나타난다. 송산면 지화리 의 할미바위의 “소정방이” 발자국 이야기하며 천등리와 삼존리 문산강의 발자국, 마도 송정리(하일마을)에 있다던 발자국 이야기가 더불어 남아 있다. 불과 몇십년 아니, 몇 년 전만해도 더러는 볼 수 있었다던 그 발자국들은 근래의 개발사업으로 이미 모두가 보존 작업 없이 해체 파괴되었다. 하여 덧붙여 말하기 그 발자국의 주인은 더 이상 이곳에서 살수가 없어 떠났다고 한다. 진정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지켜주던 진인이 있었고 지금은 떠났다면 얼마나 허전한 일인가? 이런 말이 있다.
“신화가 있어 사람들은 모여 살고 신화가 깨진다면 사람들은 흩어질 수밖에 없다”
해망산의 식생은 해안가의 식생 그대로였다. 해안가의 잡풀 덤불이 무성했고 산에는 사람들이 나무를 뜯어 때어 척박하나마 정감이 넘치는... 70년 이전 땔감을 산에서 구하던 시절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남벌된 산을 구제 녹화하기 위해 심어진 리기테다 소나무는 너무 밀식되어 30~40년이 넘었건만 녹화는 이루었지만 재목으로는 구실을 못한다. 낮은 지대는 농경지로 개간되었던 흔적들이 산 입구 군데군데 보인다.
해망산의 특이점은 다른 산에 비해 활엽잡목이 비교적 덜 발달되었다는 점과 조선소나무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예전에 땔감으로 채취로 황폐화 되어 1970년대 조림이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 후반 많은 사람들이 떠남으로 또한, 인근 지역 대부분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이면서 숲이 온전하게 보전되었을 것이다.
이제 해망산을 바라보던 바다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초원이 조성되고 다양한 동식물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인근 일대가 또 커다란 격변을 맞게 될 것이다. <유니버셜스튜디오> 유치 지역으로 화두 되면서 땅값이며 인심 또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류의 삶의 터전 바다를 버린 인간들의 환락유희를 위한 자연의 황폐화는 여전히 마수처럼 도사리고 있다.
해망산 산정에 오르면 너설바위가 뒹구는 공터가 있어 사위가 조망된다. 옛날 사람들은 이 산에 올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를 모시고 산에 의지하며 살았으리라.
발걸음 한시간여 굳이 쉼자리를 찾지 않아도 될만큼 험하지 않다. 느릿느릿 등산로를 따라 오르며 짐짓 생각에 잠긴다.
연평바다로 조기잡이 나간 정인이 무사귀환 하기를 치성 드리기 위해 올랐을 그 간절함을...
떠나간 진인은 언제쯤이나 마음 놓고 돌아 올수는 있을까?
‘08. 7.
화성향토문화지킴이 박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