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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소한 영토와 불과 40만 명 남짓한 인구를 가지고 있는 브루나이는 평소 세계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국가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놀라운 나라이기도 하다. 이 나라의 1인당 GDP는 무려 5만 달러 이상이고, 국왕인 술탄은 미국의 빌 게이츠(Bill Gates)보다 더한 자산가로 무려 5천 대 이상의 최고급 외제차를 보유한 세계 제일의 갑부이기 때문이다. 브루나이는 칼리만탄(Kalimantan) 북부의 해저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로부터 거두는 세입 덕분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상 교육, 무상 의료, 노약자 연금, 빈곤층 주택을 제공하는 등 세계에서 으뜸가는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브루나이는 전 세계적으로 오직 4개국만이 유지하고 있는 절대왕정 체제 국가이지만 높은 복지 제도를 유지하는 절대왕권에 대한 브루나이 국민들의 지지는 압도적이어서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정당들은 자체 해산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브루나이는 공식 국명이 느가라 브루나이 다루살람(Negara Brunei Darussalam)으로, 이슬람 왕정 체제를 바탕으로 한다. 수도는 반다르스리브가완(Bandar Seri Begawan)이다. 국토 면적은 5,756제곱킬로미터(km²)로 매우 협소한 편이며 전 국토의 70%가량이 밀림으로 덮여 있고, 전형적인 열대우림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 2013년 집계로 41만여 명밖에 안되지만, 1인당 GDP가 2012년 기준으로 51,760달러로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 인구 중 대략 67%가량이 믈라유 인종(Melayu 人種)1)이고, 11% 정도가 화인이며, 기타 외국으로부터 유입된 인구가 소수 있다. 1929년 세리아(Seria) 지역에서 발견된 해상 유전은 브루나이 왕가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고,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약 1%가량을 생산해 내는 유전은 다양한 국민 복지를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
현 국왕(Yang Di-Pertuan Negara Brunei Darussalam)인 하사날 볼키아(Paduka Seri Baginda Sultan Haji Hassanal Bolkiah Mu’izzaddin Waddaulah)는 브루나이 왕가의 제29대 술탄이다. 1967년 즉위한 하사날 볼키아 국왕은 이슬람의 수장은 물론이고 수상이자 국방부 및 재무부 장관으로 재임 중이며, 국가와 정부의 실질적인 최고 수반이다. 명목상 정당이 있지만 1962년 왕실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 사건 이후 실질적인 정당 활동은 거의 없으며, 1984년 브루나이가 영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획득한 이래 브루나이 왕가는 확고한 권력을 구축해 왔다.
국왕이 이슬람 수장을 겸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브루나이는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다. 14세기에 수피 계열의 이슬람교를 수용한 이래 브루나이는 동남아시아에서 대표적인 이슬람국이 되었다. 인구의 일부를 차지하는 화인들은 도교나 불교 또는 기독교 등을 믿는데, 인근의 다 인종 국가인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에 비해 종교적 관용이 비교적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종 분쟁이나 종교 분쟁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슬람 국가답게 나이트 클럽, 영화관, 콘서트장 같은 것이 많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저녁 10시만 되면 거리가 한적해진다.
브루나이는 수많은 아름다운 건축물로도 유명한데, 특히 금으로 돔을 장식한 오마르 사이푸딘 모스크(Omar Ali Saifuddin Mosque)가 눈길을 끈다. 선왕의 이름을 딴 이 모스크는 왕실과 이슬람이 강하게 결부된 브루나이의 현재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외에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누룰 이만(Nurul Iman)궁전이나 왕실 유물관(Royal Regalia Building) 등도 현재 브루나이 왕가가 가진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다.
브루나이 왕국 이전의 역사나 왕국의 성립 연도는 불명확하다. 다만 동남아시아 역사를 구성할 때 자주 이용하는 고대 중국 사료에 따르면, 10세기경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푸니(P’o-ni)라는 국가와 무역 관계가 있었는데 이 국가를 브루나이의 전신으로 추측한다. 이슬람 도입 이전의 브루나이 지역은 인도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보이며, 9세기 이후 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팔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일어난 스리비자야(Srivijaya) 왕조와 자바의 마자파히트 (Majapahit) 왕조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알려진다. 15세기에 이르러 브루나이는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건국 신화(Shaer Awang Semaun)에 따르면, 천상에서 현재의 림방(Limbang) 강 근처로 큰 알이 하나 떨어졌는데 여기에서 한 젊은 남자(Sultan Dewan Emas Kayangan)가 출현했다. 이 남자는 한 여인과 혼인해 아들을 낳은 후 아들에게 반지와 쪽지를 남겨놓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 또 아들을 낳고 반지와 쪽지를 남겨 놓는 것을 반복했다. 이런 식으로 무려 14개 지역에서 14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이후 이 아들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 여정에서 서로 만나 형제임을 깨닫고 힘을 합쳐 칼리만탄 해안 지역을 복속하고 브루나이를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이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알락 버타타르(Alak Betatar)가 바로 브루나이의 초대 술탄인 무하마드 샤(Muhammad Shah)인데, 술탄으로 즉위한 시기가 대략 136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브루나이 왕가를 계승해 왔다. 이 시기라면 브루나이는 동남아시아에서도 매우 빠르게 이슬람을 도입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서 브루나이는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의 고급 문명을 받아들이며 이슬람 국가로서 막대한 권위를 얻게 되었다.
15~1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브루나이는 칼리만탄의 거의 전 지역과 필리핀 군도의 남쪽에까지 영역을 넓혔다. 특히 제15대 볼키아(Bolkiah, 1473~1521년) 국왕의 통치 아래 브루나이는 마닐라까지 복속하며 가장 강대해졌다. 그러나 이후 왕국의 영역은 점차 축소되었고,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과 왕위 계승 문제 등의 복잡한 내부 문제로 나라의 세력이 쇠퇴해져 갔다.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이 새롭게 칼리만탄 북쪽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브루나이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839년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Omar Ali Saifuddin II)는 사라왁(Sarawak)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대가로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에게 사라왁에 대한 통치권을 할양하였다. 그 후 제임스 브룩은 조카인 찰스 브룩(Charles Brooke)과 함께 백인왕(White Rajah)으로 군림하였다. 1878년 사바(Sabah) 지역에 영국의 북보르네오회사(Chartered North Borneo Company)가 세워지면서 브루나이 왕국은 광대한 영토의 대부분을 잃고 소국이 되었다.
영국은 1888년 사바, 사라왁, 브루나이를 자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하고 1906년에 이르러 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술탄은 종교와 관습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 권력을 상실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인 1941년 브루나이는 동남아시아를 점령한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전쟁이 끝난 후 복귀한 영국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다시 받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까지 브루나이 술탄인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Omar Ali Saifuddien III)는 영국이 영국보르네오연맹(British Borneo Federation)이나 말레이시아로 영토를 합병시키려는 노력에 끈질기게 대항했다. 게다가 1962년 인도네시아 또한 브루나이와 말레이시아의 합병을 지지하며 브루나이 인민당이 일으킨 반란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주변국에 대한 우려로 인해 술탄 사이푸딘 3세는 브루나이 주변국들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독립을 속속 이룬 것과는 달리 고의적으로 영국의 보호를 선택하며 점진적인 독립을 추진했다. 1959년 헌법을 공포하고, 외교와 국방 분야를 제외하고는 왕국의 실권을 되찾았으며, 1979년 영국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와 국방을 포함하여 전 분야에 완전한 주권을 회복함으로써 결국 1984년 온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브루나이는 술탄이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는 나라로, 이런 것이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을 안팎으로 받아왔다. 국가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사건은 1962년 브루나이 인민당(Parti Rakyat Brunei)이 일으킨 반란 사건인데, 그 주동자들은 국가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브루나이를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두고 있었다.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는 영국에 지원을 요청하여 반란을 일주일 만에 진압하였고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이후로 브루나이 왕실은 비상조치법을 발표하여 의회를 보류하고 정당을 탄압했다. 또한 그 후로 사회 안정과 안보에 위협이 되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이유로 왕실은 비상조치법을 2년마다 갱신해 왔다. 독립 직후 정당에 대한 탄압이 많이 완화되자 1985년 브루나이 국가민주당(BNDP: Brunei National Democratic Party)이 수립되어 입헌군주 하의 의회민주주의의 수립과 비상조치법 철회 및 선거의 부활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왕가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주요 장관직의 수반이었고, 게다가 이미 술탄이 베푸는 엄청난 범주의 복지 정책에 익숙해진 국민들은 이런 정당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기에 결국 1988년 정당 등록이 취소되고 말았다.
이외에도 몇몇 정당들이 왕가 비판을 회피하려는 유화정책 속에서 정당 활동을 벌였으나 역시 대중의 무관심으로 등록이 취소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정당은 국민개발당(the National Development Party)밖에 없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 브루나이에도 많은 국민들이 선거제 수정과 참여 민주주의를 원했지만, 2004년 발표된 헌법 개정안을 보면 술탄의 권력이 오히려 강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과거 입법의회 의원은 부분적으로 선출직이었지만 2004년에는 임명직으로 개정되었으며, 의원 중에는 술탄과 술탄의 형제 그리고 왕세자를 비롯한 여러 명의 왕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술탄인 하사날 볼키아는 1990년 독립 선언 때부터 존재했던 이념인 ‘믈라유 이슬람 군주제 (Melayu Islam Beraja)’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천명하고 이것을 술탄의 정치적 정당성의 기반으로 삼았다. 헌법보다 높은 지위에 상정된 이 국가 이데올로기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상정하고, 말레이 인종의 권위와 특권을 지지하며, 세습군주제를 정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브루나이 국왕은 금요 기도일마다 전국의 모스크를 돌아다니며 예배를 드림으로써 자신이 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과 이슬람에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 왔는데, 이는 “부모와 이슬람, 그리고 군주제에 대한 충성과 존경심”에 바탕을 둔 브루나이의 오랜 전통적 사회윤리를 유지하려면 필수적인 행보라 하겠다. 브루나이에 가면 스스로 차를 몰고 모스크와 여러 회사를 돌아다니며 친히 인사를 건네는 국왕과 그를 환영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국왕의 생일인 1월 15일은 브루나이 달력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하였다.
브루나이 왕가는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완화하고자 기술 관료나 기타의 교육받은 지식인 계층을 정부 요직에 앉힘으로써 신 엘리트들과 일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다. 또한 그럼으로써 술탄은 왕실과 전통 엘리트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고 했다. 국가는 브루나이의 최대 고용주로, 약 25%의 브루나이인들이 정부에서 일하며, 정부는 이들의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해 준다.
정부가 제공하는 엄청난 규모의 복지 정책은 정치 참여에의 국민적 부재에도 불구하고 왕가를 유지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되어 왔다. 세계 최고의 부자로 알려진 술탄은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통해 국민들에게 광범위한 복지 혜택을 주고 있다. 우선 전 국민은 납세의 의무가 없으며, 초·중·고 무상 교육을 누리고, 국립대학에 진학하는 자국민 학생은 전원 장학금 혜택을 받는다. 정부 공무원에게 무료로 주택을 임대해 주며, 기타 국민들을 위한 다양한 주거 보조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또한 저소득층이나 기타의 소외 계층을 위한 보조금 지급과 노인 연금 등을 통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최소화하고 있다.
왕실이 이슬람의 수호자로, 그리고 경제적 지원자로 스스로를 규정한 것은 자체적인 딜레마를 생성하기도 했다.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국왕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존재로 국민들에게 각인되다 보니, 각종 권력형 스캔들이 불거지면 다른 정치인들보다 이미지에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법이다.
특히 외환 위기 이후 계속된 국제 유가의 하락으로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13년간 재무장관직에 있던 술탄의 동생인 제프리(Jeffrey) 왕자가 실정과 횡령으로 막대한 국고 손실을 일으켰던 스캔들은 술탄에 대한 신뢰를 크게 추락시켰다. 이에 대한 방어로 술탄이 제프리 왕자를 직접 고소하면서 사태의 대응에 나섰으나, 오히려 사법적 처리 과정에서 국왕의 사치스러운 면모도 함께 밝혀져 브루나이 왕실이 전 세계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2007년 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Forbes)가 자산을 약 220억 달러로 추산함으로써 세계 제1의 부호 자리에 오른 볼키아 국왕은 자동차 수집광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600대가 넘는 롤스로이스와 450대의 페라리, 530여 대의 메르세데스 등 무려 5천 대가 넘는 최고급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또한 에어버스와 보잉기를 소유하고 있으며, 베벌리힐스와 뉴욕과 런던 등 세계 도처에 호텔, 목장, 보석상도 보유하고 있다.
술탄의 거처인 누룰 궁전은 바티칸 궁보다 훨씬 넓은 세계 최대의 규모에 무려 1,700개가 넘는 방이 있고, 22캐럿의 순금 장식이 되어 있는 돔이 있으며, 출입문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 왕실 생일 파티에는 세계적 가수들인 마이클 잭슨과 휘트니 휴스턴 등이 초대되기도 했다. 제프리 왕자도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하여 횡령 사건 이후 재산을 경매 처분하였는데, 이 경매는 세기의 세일로 불릴 만큼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게다가 국왕과 제프리 왕자의 여자 관계도 구설수에 올랐다. 젊은 시절 잘생긴 외모로 플레이보이라 불리던 하사날 국왕은 술탄이 2명의 왕비를 둘 수 있다는 왕실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첫째 부인 이외에 두 명의 말레이시아 출신 여성들과 결혼과 이혼을 감행했다. 두 번째 결혼은 항공사 승무원 출신 여성과, 세 번째 결혼은 말레이시아 텔레비전 진행자와 하였으나 모두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제프리 왕자도 왕실 파티에 미스 필리핀과 미스 아메리카를 초청하는가 하면 런던의 플레이보이 건물에서 수많은 미인들과 소란한 파티를 즐기는 등 세계적인 플레이보이의 이미지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술탄제가 국가적으로 많은 순기능을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왕의 너그러운 호혜 정치는 이웃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에서 볼 수 있는 인종적, 종족적 분쟁을 억제하는 듯하다. 브루나이는 종교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분쟁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화인들은 비록 시민권 획득 문제 등으로 차별을 느낀다 하더라도 이런 문제를 정치화함으로써 이제껏 누려 온 여러 가지 혜택에서 제외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Al Marhum Duli Yang Teramat Mulia Paduka Seri Begawan Sultan Sir Haji Omar Ali Saifuddien Saadul Khairi Waddien Ibni Al Marhum Sultan Muhammad Jamalul Alam II, 1914~ 1986년) 는 근대 브루나이를 건설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1950년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브루나이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오마르의 왕위 계승은 브루나이 역사에 있어서 분수령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영국 주재관의 권위에 도전하였고, 자신의 정치력과 외교력을 동원하여 두 가지 원칙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그 두 원칙이란 자신의 왕가가 계속 군주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브루나이가 말레이인의 이슬람 군주국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 지인들과의 인맥을 십분 활용하여 영국과 브루나이 간 조약을 계속 갱신하였고, 결국 1959년 독자적인 브루나이 헌법을 선포함으로써 1984년 브루나이 독립의 포석을 놓았다. 또한 1962년 인민당 반란 사건 이후 외교관계가 경색되고 국가가 고립되자 원활한 정권 유지를 위해 20대 초반인 아들 하사날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섭정을 함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잘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의 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브루나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현재의 브루나이 국가를 이룬 장본인이다.
술탄 하사날 볼키아 국왕술탄 하사날 볼키아
1946년 7월 15일에 태어난 하사날 볼키아 국왕(Sultan Haji Hassanal Bolkiah Mu'izzaddin Waddaulah ibni Al-Marhum Sultan Haji Omar Ali Saifuddien Sa'adul Khairi Waddien, 1946년~현재)은 1967년 21세의 나이로 술탄에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므로 브루나이 현대사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유년 시절부터 브루나이와 말레이시아의 학교에서 서민들과 어울려 교육을 받았던 하사날은 1961년 왕세자로 봉해진 뒤 영국의 왕실사관학교(Royal Military College)에 입학했다.
일찍 왕위에 오른 하사날은 아버지가 배후에서 섭정을 펼치자 정치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전 세계 유명 슈퍼카 수집가, 비행기 조종사, 그리고 플레이보이로서 명성을 쌓게 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국가에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1962년 인민당 반란과 그 주동자의 체포 사건 이후 브루나이는 외교적으로 비민주적인 독재국가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는 연방을 거부한 브루나이를 향해 말레이시아가 펼친 음해 공작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하사날 국왕은 말레이시아 왕족들과 취미인 폴로 경기를 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고, 그 후 말레이시아 총리가 브루나이 왕실의 혼인 행사에 참석하는 등 이전의 불편한 관계가 개선되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관계를 개선한 하사날은 인도네시아의 권고에 따라 아세안(ASEAN)에도 가입하였고, 특히 싱가포르와는 깊은 우호 관계를 다졌다.
1970년대 석유 가격의 상승은 하사날 국왕에게 호재로 다가왔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그는 ‘하사날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하여 브루나이 국제공항 건설과 로열 브루나이 항공의 설립, 무아라(Muara) 지역의 국제무역항 건설을 단행하였고 무상 교육과 의료 제도의 정비와 같은 광범위한 국민 복지 시설의 제도화를 현실화하였다. 브루나이의 독립 이후 하사날 국왕은 유엔, 영연방, 이슬람 협력 기구, 아세안 등에 가입하여 주권국으로서 대외적 입지를 강화하였고, 또한 수도 인근 무아라 브사르(Muara Besar) 섬의 항만 시설 건설, 숭아이 리앙(Sungai Liang) 산업 지구 건설, IT 기술 개발 등 다양한 개발 정책을 펼쳐 절대왕정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