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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칠백리길 낙동강을 건넜다
낯설지 않은 상주 시외버스터미널이다.
옮기고, 헐고, 새로 짓는 동안에도 백두대간 북상과 남하를 거듭
하느라 꾸준히 드나들었는데 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니까.
터미널에서 산지기님을 맞았다.
그는 영남대로 10일째를 나와 동행하려고 먼 서울에서 내려오는
Volunteer다.
드디어 '나홀로'가 아니다.
서울 떠난지 9일 만에 처음으로 겸상(兼床)했고 대간 종주길에
단골이던 찜질방 천지연에서도 둘이었다.
그런데도 왜 서먹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을까.
벗이 멀리에서 나를 위해 스스로 찾아왔는데(有朋自遠方來)...
산지기님과의 교분은 도봉산이 내게 준 선물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멀리 보이게 되었다.
그가 두번의 친상을 당했는데도 까마득히 모른 후부터다.
옛부터 불공대천수구간에만 그랬다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그런 그가 나의 만류에도 내려와 나와 같이 있지 않은가.
한 없이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백암단편 71번글 참조)
새벽 첫 버스편(06:25)으로 어제 끊은 백두점에 갔다.
상주시(尙州) 낙동면(洛東) 상촌리(上村) 백두점(白頭店)은 영남
대로상의 주막 이름이다.
주모의 두발이 백발이라 그렇게 불렀는데 마을 이름도 덩달아서
백두점이 되었다는 것.
성골고개 이후의 영남대로 옛길은 삼랑진(밀양)한하고 대부분이
25번국도에 흡수되었다.
25번국도는 보다 넓고(4차선) 직선화된 신25번국도의 출현으로
다시 옛길로 강등되고 말았다.
자욱한 안개가 시계를 가렸으나 길떠날 정도는 돼 다행이었다.
첫번째 만나는 구산(九山), 뒷쪽에 아홉 봉(峰)이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다 해서 구산이라는 마을이 어림될 뿐이었다.
한양가는 영남대로 길목에 한 불상이 있었는데 나그네들이 소원
성취를 빌었다 하여 부처당-부치당(대동지지 佛峴 혹은 佛堂)인
고개도, 마을도 뿌옇기만 했다.
영남대로를 흡수한 국도가 신25번국도에 다시 흡수되어 평평한
4차선이 된 고개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소음만 요란할 뿐.
아직 10리도 못갔고 안개가 여전한데 잠시 쉬어가야 했다.
속도감이 나지 않는데다 자주 끊기면 동행자가 지루하고 맥빠질
것이 자명하다.
삼남대로때 한방이님께 미안했던 것 처럼 산지기님께도 그랬다.
더 완강히 사양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할까.
아직도 물안개 속에 잠겨 있는 낙동강을 오순도순 둘이 건넜다.
나룻배가 아닌 낙단교를 밟고 갔다.
아마 상주시 낙동면(洛東)과 의성군 단밀면(丹密)을 잇는다 해서
낙단교(洛丹)일 것이다.
기념비의 기록에 의하면 1986년에 건립된 다리다.
그 때가지는 가로막은 물길 700리 낙동강을 오직 나룻배에 의존
했으니 상주, 의성 모두 얼마나 불편했을까.
강은 물론 뭍과 섬을 연결하는 교량들 덕에 섬들이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낙단교 준공기념비
水柳禹鄕
도착한 단밀면 낙정리(洛井)는 옛날엔 문경 유곡역(察訪 本驛)의
속역인 낙동역, 역말(驛村)이었다.
옛 이름은 낙동강의 동쪽에 있다 하여 낙동이었는데 강나루에 우
물집이라는 객주(여인숙)가 들어섬으로서 낙정으로 바뀌었단다.
낙정리에는 자연마을 양정(良井)도 있다.
맑고 깨끗한 우물물이 풍부하게 솟아나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영남대로에서 좀 떨어져 있긴 하나 수정(水井)도 있다.
수정 같이 맑은 물이 솟아나서 수정이라 했다는 것.
그러고 보면 옛날에도 낙동강 수질이 좋지 않았던 건 아닌지.
이즈음은 구미 공단으로 인해 오염됐다지만.
우리는 낙정리에 접어들자 마자 길가 커다란 감나무에 주렁주렁
한 탐스런 단감에 잠시 홀려 있었다.
주인이 알아차렸는지 기척을 해왔다.
차라리 잘 됐다 싶어 이실직고하고 허락받아 감 2개를 땄다.
처음엔 한 개만 쌀짝 하려 했는데.
의성군의 영남대로는 낙정리가 알파와 오메가다.
곧 구미시 도개면(桃開面)이 되니까.
10시 반이 넘어서야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넓어져 갔다.
답답함은 면했으나 낙동역과 해평면으로 넘어가는 돌고개(石峴:
대동지지) 어간, 각 10리 중간 지점에 있는 것으로 된 홍덕(紅德:
대동지지)을 찾는데 실패했다.
마을들을 눈여겨 살피며 갔으나 도개면 어디에도 없을뿐 아니라
비슷한 이름도, 아는 이도 없으니 대책이 없지 않은가.
신, 구 25번국도가 합류하여 돌고개를 넘는다.
고개는 확장 공사중에 깎일 대로 깎여 이름뿐이다.
고개 넘어 해평면(海平) 일선리(一善)에 내려섰다.
휴게소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다.
산지기님도 소식형(小食型) 체질임을 함께 해온 산행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별 부담 없이 예까지 온 것이다.
그가 서울에서 가지고 온 매실주와 안주도 식탁에 올랐다.
식사의 행복은 역시 외상(獨床)보다는 화기있는 겸상에 있다.
걷기는 홀로 하고 식사만 함께 하는 방법은 없을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던가.
식후경은 水柳禹鄕(수류우향) 표지석이 발산하는 인력에 이끌려
일선리 문화재마을에 들리는 일이었다.
안동 임하땜에 수몰된 무실리(水谷) 전주류씨네의 새 마을이다.
'수류우향'은 水谷의 柳씨 일가가 조상의 혼이 어린 故鄕을 떠나
새로 터전을 잡은 타관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단다.
1987년 전후에 70 여호가 여기로 옮겨왔는데 이건(移建) 건물중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10여점이나 된다니 하마터면 이 소중한
자산들이 수장될 뻔 했다.
대형 댐 건설로 인한 수몰민의 이주마을이 전국에 걸쳐 참 많다.
보상비 때문에 생긴 가슴아픈 사연도 많은데 역시 선비정신인가.
거금의 보상비를 거머쥔 수몰민들이 사기꾼과 주색잡기의 타깃
(target)이 되어 새 터전을 잡기는 커녕 패가 망신한 이가 수두룩
한데 그들은 잘 정착했으며 문화재들 까지 지키고 있으니까.
수류우향
해평면의 영남대로
좀 나아가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앞에 당도했다.
술 취해 강뚝에 쓰러져 잠든 주인, 뚝을 태우는 불, 강물에 몸을
적셔 불을 끄고 죽는 개 등 스토리 전개는 전국적으로 한 판이다.
단지, 무덤을 만들어 준 것으로 끝난 이 의구총은 통영별로 전북
임실군 오수(獒樹)의 의견(義犬)보다 전개가 미진하다.
무덤에서 나무가 나와 무성하게 자랐다는 단 한 줄 차이지만 그
효과는 지대한 차이를 보이는데.
그 나무를 獒樹(개나무)라 명명했고 나아가 지명까지 됐으니까.
1/ 의구총 2/ 낙산리 고분군
낙산리는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다.
우선 칠창리가 그러하다.
왕건은 냉산(冷山 691.6m) 태조봉에 숭신산성을 쌓고 후백제의
견훤과 일전을 벌인 적이 있다.
그 때에 병기와 군량미를 비축하기 위해 일곱 개의 창고(七倉)를
지었는데 그 곳이 낙산리 칠창마을이다.
고분군을 지나면 낙동강과 가장 인접한 옛 나루터다.
견훤과의 전투에서 대승한 왕건이 나루를 건널 때 승전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나의 나루'(余津)라 소리쳤는데 지금의 여진마을
(대동지지의 餘次里?)이다.
고려의 나루(麗津)라고도 하며 이웃에는 원촌(院村)도 있다.
낙산리(洛山) 200여기의 고분군(古墳群:사적 제336호)은 원(原)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의 여러 종류와 다양한 형태의 무덤
으로 이 일대를 지배했던 토착세력의 집단 묘지로 추정된단다.
海東最初伽聖地太祖山桃李寺(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
산문(山門)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탐방하고 싶으나 왕복 10km가 넘는 거리가 문제됐기 때문이다.
도리사는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19대 눌지왕 때) 고구려의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처음 세웠다는 해동불교의 발상지다.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곳이어서 桃李寺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절이다.
산지기님(태조산 도리사 입구)
포기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으나 영향역(迎香驛:대동지지)이었던
산양리(山陽) 연향(延香)마을 앞에서 또 쉬다 가야 했다.
그래도 산지기님과의 동행이라 해서 많이 봐주는가.
경이롭게 양호한 편이니까.
다시 십리를 가서 해평면 월호리(月湖)에 당도했다.
해평현(縣) 당시에는 관아의 창고가 있었으며(有倉:대동지지)
지금은 면사무소를 비롯해 관청과 학교 등이 집중되어 있다.
얼마쯤 더 가다가 고리실(古里谷)이라고도 불리는 괴곡리(槐谷)
가게에서 휴식을 취할 겸 막걸리를 마셨다.
도로에서 벼를 말리던 주인이 우리의 권(勸)으로 합석했다.
주인이 주호(酒豪)임엔 틀림 없으나 어떤 허물이 있기 때문일가.
일터에서 돌아온 아내가 종심(從心)에 접어든 영감을 객(客)들인
우리 면전에서 호되게 몰아세웠다.
무골호인형의 이 영감이 고양이 앞의 쥐걸음하고 있는 것이 하도
딱해 우리 탓이라고 변명을 해줘도 막무가내였다.
정녕, 아내한테 매맞는 영감은 아닌지.
나와 우리의 차이
우리는 마시던 막걸리를 그대로 놔둔채 이 해괴망칙한 현장에서
나와 산동면 경계인 괴곡삼거리까지 나아갔다.
혼자라면 좀 더 진행해도 되겠으나 산지기님의 귀경을 고려해서
마감하고 옥계동(玉溪)으로 넘어갔다.
늙은 나그네의 행복한 식탁, 겸상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여전히 무거운 마음인가.
함께 걸은 80여리에도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인가.
훗날 그의 친구 S가 자기 실수로 돌린 것처럼 경황 없는 상주를
대신한 S가 원망 들어야 할 일일 지도 모른다.
그 보다도, 거동 못하고 투병중이라는 이유로 내가 무심했던 건
아닌지 왜 자문해 보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나이에 비해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면서도 도덕규범과
윤리장전에 관한한 아무도 거들뜨려 하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에
여전히 포로가 되어 있다니?
산지기님이 무한히 고맙고 또 미안했다.
11시간여의 동행과 식사까지 선사한 산지기님은 갔다.
한참을 함께 기다리던 버스가 떠남으로서 늙은 나그네는 단 하루
만에 다시 홀로가 되었다.
'우리'의 시간은 겨우 24시간에 불과했다.
내게 있어서 '나'라는 단수와 '우리'라는 복수의 차는 하늘과 땅의
관계 만큼이나 크고 다르다.
수량의 비례관계가 아니고 자아(自我)의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관계다.
수량의 최면에 걸리지 않으려고 주의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러나, 전에 한방이님과의 삼남대로 때도 그랬듯이 '자기' 없는
'우리'의 하루도 가끔은 가질만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
혼자 걷는 걸음걸음이 바로 나의 사모곡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까 힘차게 걸어야 하는 이유도 자명하다.
그리고 걷는 비로 그 곳이 늘 나의 선방(禪房)이며 수도원이다.
나의 피정(避靜)의 집이며 기도소다.
가끔은 그런 진지하고 엄숙한 장소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충동이
당연히 일지 않겠는가. <계속>
첫댓글 짧은 생각으로 카페지기님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지난번 상주길에서 저는 별다른 눈치는 채지 못하고 몸이 좋지 않은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5월초 만난 이후로 서먹한 마음은 없어진 것으로 알겠습니다. 지난주는 고향에 갔다왔습니다. 고향에 있는 10개 국민학교에서 저와 같은 해에 졸업한 친구들이 모여 체육대회를 시작한 지 벌써 18년이 되었습니다. 타지에 나가 있던 많은 동무들과 함께 고향에 갈 때마다 친구들의 환대와 고향음식 맛에 시간가는줄 모르고 지내고 옵니다. 이번에 배구를 하다 발목에 약간 부상(삠)을 입고 절뚝거리고 있습니다. 중순경 댁에 계시면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Be careful ! 셋째週에는 쭈욱 집에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