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제승의 출가
승산 양제승(1925.10.20~ )의 본명은 승현. 승현은 남원군 수지면 고평리에서 양씨 집안의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승현이 아홉 살 때, 대가족에 어려운 살림으로 빚에 쪼달리며 농사를 짓고 살다가 아버지는 이곳에서 도저히 발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게를 벗어 던지고 전주로 나왔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행상을 하였고 제승은 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행상을 하여 시골 할아버지의 빚도 청산하고 아버지는 전주 태평동에 잡화점(전 한국은행 자리)을 차렸다.
승현은 말이 없고 내성적인 소년으로 자랐다. 그는 외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향에서 십리 떨어진 주천면의 외조부는 유가의 선비로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고 예절이 발라 주위의 존경을 받는 어른이었다. 승현은 처음에 목표하였던 전주사범학교에 떨어지고 이리농림학교로 진학하면서 그의 인생은 다른 방향의 노선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승현은 매일 전주와 이리를 기차로 통학하였다. 그는 워낙 내성적이어서 심리적 갈등이 심해 우울증 증세가 있었다. 보통 사람은 아침부터 눈이 떨어지면 다른 사람 잘못만 보이는데 그는 자신의 내부에 관심이 가 있었다. 무슨 일 하나를 잘못하면 심적 고통이 심했다.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볼 때 말은 아니하였지만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그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일종의 법박 같은 것이었는데 그는 이런 답답함을 독서를 통해 풀려고 하였다. 그는 주로 철학 계통의 일서를 읽었다. 학업 도중인 열아홉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게 되면서 승현은 혈연의 단절이라는 허무감에 오랫동안 사로잡혔다. 그로부터 일본 불교의 도원선사나 백은선사의 법어 등을 접하게 되었고 막연하나마 한줄기 위안을 얻었다. 독서를 통해 생존의 근원적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누구나 소년시절엔 추억과 낭만의 아름다움을 갖기 마련이지만 그 무렵 그는 온통 마음의 갈등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승현은 학과 공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시험기간에도 그는 선사들의 법어 탐독에 더 열중하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참으로 헛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침중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시 체제의 학교는 생산 보국 증강에 적극 가세하던 판이라 한 학급당 5~6필지씩 영농 책임이 주어졌다. 못자리를 만들고 모를 심고 김을 매고 나락 베고 타작하는 일을 모두 학생들이 담당하였다. 승현은 농림학교 재학중인 5년 동안(1940~1944) 학교답이 있는 황등까지 거의 매일 왕복하였는데 그 실습답은 현재 총부유지답이 있던 황등호수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자주 왕래하다보니 신룡벌의 ‘불법연구회’ 간판이 눈에 익었고 금강원에 기르는 원숭이 구경을 하기 위해 구내로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큰 성인이 주석하고 계신 줄은 몰랐다. 이 무렵 그는 종교엔 관심이 없었고 급우들 중 누구 하나 불법연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도 없었다.
승현이 불법연구회 입회하게 된 것은 해방되기 1년 전 전주 태평동 옆집 친구 정용철에 의해서였다. 용철은 승현보다 한 살 위에 그 집은 철물점을 하였다. 승현의 답답한 속을 듣고 용철은 ‘불법연구회에 가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교동에 있는 불법연구회 회관으로 이끌었다.
해방되기 8개월 전인 1944년 12월 승현은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어수선한 시국 정세로 앞당겨 졸업하게 되었다. 농림학교 졸업하고 그가 취직한 곳은 전북식량검사소(농산물 검사소)였다. 검사소 고원 자격으로 몇 달 다니다 해방이 되자 그만 두고 승현은 교동 불법연구회 회관에 자주 찾아갔다. 여기서 승현은 제승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회관 식구들은 매일 일과처럼 전재 구호사업에 나가고 텅빈 법당에 그는 혼자 남아 <불교정전>과 <회보>를 탐독하였다.
어느날 양제승이 회관으로 가는 길에 이상한 체험을 하였다. 도청을 지나 남문으로 오다가 마치 나무통이 밑이 빠지듯이, 꽁꽁 얽어맨 동아줄에서 풀리듯 스스로 알 수 없는 속박과 구속감에서 풀려나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해방이 되고 첫해 겨울에 용철은 제승에게 총부에 열리는 교무선에 입선하자고 제의하였다. 그 친구는 친절하게도 제승에게 선방에서 입을 광목에 먹물 들인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까지 장만해 주었다.
여기서 제승은 선방에 나오신 정산종사를 첨 뵈웠다. 대중에 응하시는 법사님의 환한 모습, 교리의 강령을 잡아 주는 문답 시간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 선 기간에 제승은 선 동기생 김치국을 만났고, 또 사산 선생께 인사드린 일도 잊을 수 없었다. 총부의 상당히 높으신 어른인 듯한 그 원로 선생은 얌전하게 생긴 앳된 젊은이로부터 제주 양씨이고 법명이 건질 제濟 탈 승乘자라는 인사를 받고 “나는 오씨오”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총부의 정돈되고 소박한 그 훈훈하고 신선한 분위기에 제승은 내심 감동이 벅찼다. 총부 선방의 법 동지들로부터 ‘제승’이라는 법명으로 불리우기 시작하면서 승현은 비로소 거듭 난 사람으로서 전무출신 할 각오를 굳혔다.
1개월 동안 선을 나면서 제승은 우주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성주괴공의 어김 없는 철칙과 인과보응의 뚜렷한 섭리 속에서 개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하였고 어머니의 죽음과 일제의 압박과 좌우의 격돌에 대해서도 관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질적인 삶을 알기 위해, 또 자신의 미래를 보다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전무출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남이 출가할 뜻을 밝히자, 아버지는 가게 문을 닫고 그 뜻을 포기할 것을 다짐 받기 위해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그럴수록 제승은 내심에 출가할 뜻을 더욱 굳혔다. 제승은 아버지가 출타할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때가 왔다. 용철이네 집의 낮은 담을 넘어 제승은 전주역으로 내달렸다. 도중에 우뚝 걸음을 머추고 제승은 뒤따라 올 아버지를 생각하고 덕진역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 일은 아버지께 몹시 큰 충격을 주었다. 원기31년(1946) 4월, 출가 이후로 아버지는 한번도 장남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한번은 친척이 찾아왔다. 귀가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제승을 보고 그 친척은 이렇게 말했다.
“니가 지금은 이래도 서른세살만 되면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 이 말이 제승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제승은 총무부 서기 일을 보았다. 총부 젊은이들 중에서 제승은 드러났다. 동네 대항 축구대회 양제승은 총부 팀의 풀백을 맡았다. 응원의 힘에 의해서기도 했겠지만 사람하고 오는 공을 그는 민첩하게 잘 막았다.
또래의 젊은이들은 거의 유일학림 학업중에 있었고, 사무실에는 최정균 정고선 송영봉 박성경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뒤에 유일학림 2기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총부 구내에는 남자들의 경우 유일학림의 상산 학장, 숭산 학감을 제외하고 중학 이상의 학벌을 가진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제승은 유일학림에 입학할 필요을 느끼지 않았고 총부 사무를 보았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좌선하기에 열중하였다. 그는 어느 선서에 본 ‘정좌 3년이면 도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제승은 선을 어떻게 하는 방법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정좌만 하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쑤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제승은 좌선만 하면 무엇인가 깨달음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더욱 선을 했고, 무엇을 어떻게 선하는 줄 모르면서 앞 뒤 돌아보지 않고 용맹 정진하였다.
어찌된 일인지 제승은 이 무렵부터 좌선을 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력이 떨어졌다. 공부 길이 잘못 들은 것으로 판단한 어른들은 이를 걱정하여 그를 산업부로 보냈다. 원기32년 제승은 총무부 서기에서 전작 주임으로 승진되었다. 어른들은 제승이 활동이 많은 곳으로 가면 그 중세가 덜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것이 폐결핵의 초기 증세인 줄은 몰랐다. 제승은 식당 쌀을 내는 일도 하였고 유일정미소 관리도 하였다.
오뉴월의 어느 날, 제승은 철길 옆 길다란 밭에서 보리를 베다가 학질에 걸렸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숙소에 돌아와 이불을 둘러쓰고 누웠다. 겹겹이 이불을 내 덮어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고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하였다. 제 생각과 달리 몸은 사정없이 떨려 제승은 ‘원래 한 물건도 없는데 무엇이 이렇게 떨고 있는가’하고 골똘한 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학질을 앓고 난 뒤에도 제승의 집심 공부는 계속되었다. 그 해 모내기철에 학림생들이 주가 되어 모를 심는데 양제승 전작주임은 소달구지에 점심을 싣고 논으로 내갔다.
점심을 먹고 전작 주임이 못줄을 잡았다. 이때 제승은 저 자신도 주체못할 변화가 일어났다. 평소 과묵한 그가 말문이 터진 것이다.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걷잡을 수 없는 벅찬 기운으로 제승은 빈 그릇을 거두어 달구지에 타고 총부로 돌아왔다. 그는 마음과 행동에 아무 거릴낄 것이 없었다. 양제승 전작주임은 소달구지에 올라 탄 채 식당 안으로 진입하였다. 그의 거침없는 행동에 공양원들이 질겁하여 소리 질렀다.
이 변화는 제승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어느 곳에 구속된 바 없었다. 어디에 거릴낄 것이 없으므로 과감하게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그야말로 구만리 장천에 훨훨 날개 짓을 하는 대붕의 심경이었다.
총부 근동 마을 공터에서 청년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양제승이 느닷없이 이곳에 뛰어들어 공을 차며 무엇이라 외쳐댔다. 경기 방해꾼이 나타나자 그들은 그를 떼밀어냈다. 말을 듣지 않자 때리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에 구애받지 않았다. 제승은 두드려 맞아도 아프지도 않았고 그들이 밉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고 총부 동지들은 그를 미친 것으로 간주했지만 제승의 마음은 전연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당시 심경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오히려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분명히 그랬다. 만물을 보아도 즐거웠고 나라는 상도 없었다. 아마 텅빈 경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송대에서 기거했는데 모두가 걸리는 것이 없었다. 깊은 잠을 자면서도 내 의식은 돌아눕는 행동을 알게 되었다. 잠을 자면서도 확실하게 내가 움직이는 것을 알았다. 夢中一如 熟眠一如라는 말이 있다. 나는 진정한 견성이라면 熟眠一如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현상에 대해 제승은 후일 이렇게 성찰하였다.
“견성 후에는 반드시 보임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보임을 할 줄 몰랐고 반짝하는 그 경지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제재가 따랐고 살다보니 알맹이는 없어지고 껍질만 남게 된 것이다. 견성후의 보임은 수도자의 당연한 과정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수도의 길인 줄을 몰랐다. 선에 골몰하다 보니 그런 경지를 체험한 것이다. 아주 소중한 신앙 체험이었다.”
양제승은 일흔이 넘는 지금도 아무 것도 구애 구속되지 않고 대자유를 호흡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지금도 그때 그 경지를 회복 못하였음을 아쉬워하며 보임 공부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공부 지경을 이해 못하는 동지들은 그를 구속하기 시작하였다. 주변의 모든 시선들이 감시의 눈이 되었으며, 특히 이광호와 정진호가 앞장서서 사사 건건 그를 제재하고 나섰다. 강제로 약을 먹이기도 하고 침을 놓기도 하였다.
제승은 조용한 곳으로 옮겨 살고 싶었다. 아무도 구속받지 않은 곳에 가 살고 싶었다. 그래서 한남동 서울출장소에 계시는 정산종사님을 뵈러 갔다.
정산종사는 경을 외우고 있었다.
“법사님, 저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올렸더니 정산종사는
“응, 왔냐”
그럴 뿐 별 다른 말씀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었다. 치성하였던 제승의 기개가 법사님 앞에서 저도 모르게 수그러지고 심상해졌다.
어렵게 출가하여 진리를 깨치려고 몸부림치던 그는 동란이 발발하던 그해에 전주 집으로 돌아왔다. 심신은 지쳐 건강을 추스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지만 아버지는 장남을 집안에 붙들기 위해 부랴부랴 결혼을 서둘렀다. 1950년 3월,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을 때 맞선 한번 보지 못하고 유법진이라는 처녀와 결혼하였다. 신부는 원불교를 전연 알지 못하였고 서방님이 가슴속에 어떤 포부를 가지고 있는지를 전연 모른 체 시집을 왔다.
결혼과 폐결핵, 이것은 모닥불 위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건강이 악화되어 그는 사경을 헤맸다. 고향 남원 수지로 돌아가 요양하고 이듬해 1.4후퇴 때 전주에 와서 계속 치료를 하였다. 스토렙토마이신 주사로 병마를 퇴치해 나갔다. 사가에서 2년여 투병 생활을 하였다.
첫댓글 "수계농원60년사"책에서 우.리. 스.승.님.이신 승산사님 부분을 발췌하여 올립니다 ........ 실은 조금 망설이다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준우 부처님... 그런데 띄어 쓰기를 좀 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 글은 만덕산 성지 쪽으로 옮겨 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
소중한 글을 대하였습니다. 위법망구하신 종사님의 모습에 다시한번 정신을 차립니다..준우 부처님 감사합니다..^^
승산 종사님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케 하네요 준우 부처님 감사 합니다
준우 부처님 이 글을 만덕산 성지쪽으로 옮김니다. ^^
종사님께 말씀으로 받들던 옛 이야기가 더 속속들이 다가오네요^^ 감사합니다.
오..귀한 이야기..준우부처님 감사!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소중한 참으로 귀한 말씀임니다
부처님들! 동선때 만나고 모두 보고 싶고 만덕산으로 마구 달려가고 싶답니다. 귀연부처님 잘계시죠. 감동의글 감사 합니다.
소중한 글 참으로 감사 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