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5월의 숲
정석준
나는 언제나 햇살이 투명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사물을 깊이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햇살은 계절마다, 시간마다, 우리에게 다른 색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 년 중 햇살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봄날이고, 그때 햇살의 색은 시리도록 눈부신 연두색이라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뭇잎을 키우는 것은 뿌리만이 아니라 하늘의 태양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하늘과 땅과 태양과 바람이 함께 모여 이룬 5월의 숲은 생명의 조화로 아름다웠다.
이른 아침 참새들의 지저귐 소리에 눈을 뜨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길에 나섰다.동구 밖 숲길을 지나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5월의 숲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숲은 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내가 귀를 기울이는 곳마다 아름다운 생명의 합창을 강물처럼 펼쳐보여 주었다. 숲은 텅 빈 마음의 빈 손을 내밀기만 해도 내게 연두색 햇살을 한웅큼 줄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가진 것이 없어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시간도 공간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도 사라져 버리고, 있는 것이라고는 눈부신 5월의 숲과의 교감뿐이었다. 아름다운 숲과 텅 빈 마음이 만나 이루는 교감은 ‘황홀’ 그 자체였다. 그것은 때묻지 않은 행복이었다.
행복은 ‘내’가 없어질 때 내게 온다. 내가 있고, 네가 있다고 분별할 때 행복은 오지 않는다. 너와 내가 있을 때, 너와 나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생긴다. 그 거리는 때로 투쟁이고 , 때로 분별이고, 때로 소유가 된다. 또한 그 거리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느낄 수 없다. 그 거리는 결국 불행을 의미한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서로를 의지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네가 없으므로 나 또한 없는 것이 우리들 이 사는 세상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서로 공경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하늘과 바람과 강물과 태양과 이웃,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을 섬기고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불행이라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타인의 슬픔을 제거하고,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자비는 모두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진리에 근거해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한 생명으로 볼 수 없다면 끝없는 자비의 실천은 가능하지 않다. 자비란 결국 잃어버린 생명의 모습을 찾아 함께 생명의 길을 향해 떠나자는 격려와 당위를 의미한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시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생명이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역시 모두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진리를 열어 보이시고, 중생들이 그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진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는 눈이 멀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오늘 나는 눈 먼 사람들의 세상을 본다. 같이 나누어야 행복의 자리에서 나만의 독식을 외치는 사람들의 불행한 모습을, 편리를 위해 아무런 주저없이 파괴를 일삼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 불편을 감수하고 손해를 견딘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다가 결국 모두가 큰 아픔을 겪는 세상을….
모든 것은 인연을 따른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너를 떠난 나는 없다. 너의 행복 위에서만 나는 행복할 수 있다.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 일깨워 주셨다. 너의 모습에 비친 나의 모습이 아름다울 때 오늘 나의 삶에는 향기가 넘치고, 너의 모습에 비친 나의 모습이 탐욕스러울 때, 오늘 나의 그릇된 삶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삶의 거울이고, 나는 생명의 조화 속에서만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한다.
5월의 숲 앞에서 내가 진정 행복한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진리의 빛을 이제 비로소 만났기 때문이다. 5월의 숲은 그 진리의 빛으로 눈부시다.
(경주문학 제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