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한 대도회 인천과 수원을 나드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이 협궤열차는 해방 이후에도 고작 부천 가는 버스 외에 변변한 버스노선이 없었던
고즈넉한 안산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향수를 자극하는 매개가 되었다.
사리와 소래포구는 수인선 덕분에 싱싱한 갯것들을 수원과 인천 사람들에게 팔 수 있어 명성을 얻었다.
사리를 비롯한 경기연안 포구들의 주요한 생계는 새우잡이였다.
오뉴월에 잡은 새우는 포구에 닿자마자 인근 농촌마을 아낙들의 손에 의해
대·중·소로 분류되는데,
새우 이외의 꽃게를 비롯한 바닷고기들은 '잡어' 취급을 받아 아주머니들이 가져온
함지에 품삯으로 얹혀졌다.
분류된 새우는 곧바로 염장을 하여 새우젖이 되고
꽃게를 비롯한 나머지 것들은 포구 인근 마을에서 꽃게찜이나 생선구이가 되었다. 하루만 지나도 상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바로 먹어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리나 소래포구는 새우 뿐 아니라 꽃게와 생선들도
도회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곧장 팔 수 있어 여타 포구보다 흥청거리게 되고, 인근의 배들도 사리와 소래포구에 닻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고잔신도시
서해안의 역사는 아주 오래 동안 개펄을 막아
논을 늘려온 세월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안산은 개펄을 막아 세워진 도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전철 고잔역에서 중앙역~한양대역을 잇는 남쪽, 서울 여의도 면적의 3배쯤 되는
드넓은 평야가 '고잔들'이다.
서해안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마을 이름이 '고잔'이다.
고지 밖의 '곶밖', 혹은 '꽃밭'과는 달리 고지 안쪽의 안온한 마을이라는 뜻일 것이다. 안산의 고잔도 예외가 아니다.
고잔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을 일제시기에 막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벌판이 되었고 그 뜰의 동남단으로 유명한 사리 포구가 위치해 있었다.
그 사리포구가 있던 자리는 호수공원이 되었고
안산에서 논이 가장 많아 살기 좋았던 고잔들은
1992년 이래 고층아파트가 들어 찬 고잔신도시가 되었다.
전혀 바다와 관계없을 것 같은 와동도 고깃배가 들어오던 방죽마을이었고,
지금의 공단역 일대도 둔배미라는 큰 포구였으며,
시청 동쪽 성포동은 전통시대부터 이름난 포구였다.
따라서 안산을 동서로 관통하는 전철 안산선의 남쪽,
즉 안산시의 거의 절반이 바닷물이 들락거렸던 땅이었던 셈이다.
개펄이 논으로, 다시 아파트 단지로 바뀌는 상전벽해의 역사적 변화를 안산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안산, 한국산업사회의 바로미터
수인선의 혜택을 받는 몇몇 포구를 제외하고는 여느 서해안 마을들처럼 반농반어의
한적한 마을이었던 시흥시 수암면과 군자면, 화성시 반월면 일대는
1976년부터 시작된 반월 신공업도시 개발로 하여 안산은 시작되었다.
호주의 캔버라를 모델로 자족형 도시로 계획된 안산은 1977년 이래 반월국가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지금은 국회의원을 4명씩이나 뽑는 경기도 제일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반월공단건설 이래 30여년간 안산의 변화와 발전은
한국 산업사회의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연료가 연탄에서 석유제품으로 바뀌면서
강원도 탄광지역의 광부들이 대거 자리 잡은 곳도 안산이었고,
9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한 곳도 안산이었다.
더욱이 시화공단이 조성되어 규모가 확대되면서
경기도를 대표하는 공업도시가 되었고,
경기남부지역에서 신갈~안산간 고속도로를 비롯하여
서해안 고속도로 등 가장 도로교통망이 좋은 도시이기도 하다.
안산은 또한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안산역 앞 원곡본동사무소 일대는 국경없는 마을이 된 지 오래다.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중국 등 10여개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수 만명이 만들어내는 문화는 안산의 또 다른 자산이다.
안산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원곡이 전철과 공단이 조성되면서
상권을 다른 곳으로 빼앗기면서 공동화되자
그 빈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메우고 있는 셈이다.
#상록수와 느티나무
안산은 반월공단이 조성되면서 인구가 팽창하였고, 따라서 토박이 보다 외지의 이주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신흥도시다. 따라서 지역적 정체성을 문화적 자부심으로 바꾸는 작업에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상록수역에서 이제 상록구까지 안산은 채영신 아니 최용신(崔容信)을 기리고 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헌신한 젊은 여교사로 그려졌던 그는 당대 농촌계몽운동이라는 시대적 슬로건의 영웅이 되었고, 이미 전설이 되었다. 함남 원산 태생으로 샘골교회 야학교사로 활동한 3년, 26살의 짧은 생은 불꽃같았다. 그러나 최용신을 기리는 만큼 안산에서는 염석주를 기억해야 한다.
최용신의 죽음 이후 1천여명의 추도 속에 사회장을 엄수한 것도 염석주였고, 샘골학원 이사장으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도 그였다. 신간회 수원지회 간사와 부회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던 그는 당시 반월이 수원군이었던 만큼 반월 뿐 아니라 수원군을 대표하는 유지이자 지도자였다. 실상 염석주가 없었다면 최용신도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최용신이 상록수라면 거대한 느티나무였던 염석주를 안산은 기려야 한다.
물론 안산의 가장 탁월한 문화적 자산은 성호 이익 선생이다. 원효·의상·다산 정약용 등과 더불어 한국을 움직인 위대한 사상가 10명 가운데 한 명인 성호 이익과 그의 사상을 안산은 더욱 크게 자랑해야 한다. 성호기념관의 정은란 학예사에 거는 기대가 여기에 있다.
#수적(水賊)이라 불렸던 의병들
한말 의병들의 투쟁이 경기도 산하를 뜨겁게 할 때 이 땅에서 수적(水賊)으로 불리던 의병들이 있었다. 강화에서부터 인천 앞바다 영종도와 군자만 앞바다 대부도, 영흥도 등 경기연안을 근거로 삼아 의병투쟁을 지속한 수적의 존재는 경기연안의 지역적 특성을 장점으로 활용한 예가 된다.
이 일대 해안은 서울과 가까워 삼남에서 올라오는 세곡선과 인천에서 선적된 화물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있어왔던 수적이 의병과 결합하면서 일본에게 위협이 되었다. 그들의 근거지가 대부도였다.
대부도에 배 두 척을 대고 뱃길을 봉쇄한 뒤 섬 안의 부민에게서 약 백만냥을 거두어 갈 정도로 담대한 활동을 펼쳤던 신경춘, 정주원 의병부대는 각처 섬으로
산개와 분산을 통해
적의 추격을 피하고 뭍으로 공격을 집중함으로써 신출귀몰한 의병투쟁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이 또한 안산의 자랑으로 삼을 만 하다.
수적의 땅 대부도를 이제는 차로 달려가고 있다.〈한동민 중앙대 강사〉
◇여적
안산을 찾아가는 길에는 늘 설렘이 있다. 대학의 알량한 기득권을 버리고 건강한 노동자로 살아가고자 반월공단 공장노동자의 삶을 택한 벗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산은 꿈이 있는 도시다.
한국 산업의 급속한 성장의 또 다른 측면인 환경오염 문제는
한국 최대의 담수호를 자랑하던 시화호를
최초의 해수호로 만드는 쾌거를 이루지만
여전히 수도권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안산의 산업폐기물 처리소각장 7개는
악취와 시화호 오염의 주범으로 지적되고 있다.
공해유발 업소에 대한 지도 단속권이 경기도에 있고,
공장인허가권도 한국산업단지공단에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소중하다.
이런 점에서 시화호생명지킴이(대표·이계숙)의 주부 중심의 자원봉사활동은 안산의 또 다른 희망이다. 그래서 안산은 젊고 건강한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