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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1. “변하는 교회”, “교회를 믿을 것인가?”에 대하여
교회가 변한다고 할 때 이는 교회가 역사에 종속적이며, 문화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스 큉의 교회론이 현실에 뿌리내린 교회론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형교회, 즉 보이는 교회가 교회라는 말인데, 이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한스 큉은 이에 대한 실례를 교회사 전반에 거쳐 언급하고 있다. 고대교회에 있어서 핍박과 이단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느냐 라는 교회 존립의 문제는 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 인해 변화를 겪게 된다. 중세교회에 있어서는 교회법의 위치와 성직자의 지위를 어디에 두느냐 라는 문제가 교회의 변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 근대에 이르러서는 계몽주의와 신비주의 및 낭만주의 등의 영향 아래 교회는 변화하는 교회가 되어 왔다.
한스 큉은 변하는 교회의 현실적인 면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적인 면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서 찾고 있다. 그는 교회의 변하는 면과 변하지 않는 면을 “본질과 현실”의 문제로 언급하면서 양자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선호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필자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본질과 현실은 항상 상충되는 관계에 있는가, 즉 100% 본질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100%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없는가 라는 점에 있어서 말이다.
본질과 현실 사이의 한스 큉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생각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서 결론을 짓는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곧 한스 큉이 말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그는 아예 이 점을 전제하여 에큐메니즘이니 종교들간의 대화이니 라는 것들을 거론했다. 그의 말대로 교회가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면 세계 평화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러한 타협이 부득이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사명을 지시하시는 선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존하여 가능한 것이며, 교회는 스스로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요 15:5 참고). 더구나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되 그 가운데서 택자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교회가 의로운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세상에 대한 교회의 평가로 삼기 때문인 것이다(요 5:30 참고).
이상의 논지에서 교회가 절대화될 수 없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으니, 따라서 “교회를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다. 이 질문을 둘러싸고 장황한 논리가 전개되지만 결론적으로 한스 큉의 입장은 신앙이나 교회가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화된 신앙이 교회를 붕괴시킨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위험”이라고 언급하였다. 이 문구에 대하여 물론 필자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올바른 신앙이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였다”고 수정하고 싶지만, 개혁이라는 것이 교회의 하나 됨을 쪼개는 일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점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문구의 이면에 교회의 통일성이 간과되지는 않는지 제3자의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의 공교회를 위해 신앙의 타협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어떠면 신앙과 교회의 이러한 모순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갈등이 아닌가 생각된다.
2. “교회의 근원”, “교회와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한스 큉은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라는 르와시의 문구를 제시하면서 우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통치”에 대해 다룬 것은 어쩌면 그 가운데 “교회”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인 것 같다. 한스 큉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교회가 없었으나, 교회가 예수님을 근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근원이 되신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에 우리도 세운다는 의미에서의 근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이 제2의 교회를 탄생하게 했다는 점에서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입장을 그대로 다 수용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입장에 따를 경우 예수님께서는 교회 탄생의 이유를 제공한 후 교회에 대하여는 객체로 물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한스 큉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축소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가 가톨릭의 지나친 교권체계에 대한 비판의 의도가 있었음을 감안할 수 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교회를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할 때 비롯되는 교회지상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한스 큉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신약 교회를 구약 교회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며, 사도행전의 교회 설립의 역사를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스 큉은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그의 입장에 의하면 교회는 아래로부터 자라나는 반면 하나님나라는 위로부터 돌입한다. 창조의 목표는 교회가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 통치이며, 교회는 하나님 통치의 전단계도 아닌 전조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고대하며 그 나라를 향해 순례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한스 큉은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기에 스스로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따라서 좌절할지라도 교회가 결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고 일어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스 큉이 이와 같이 교회의 책임을 경시하는 듯 한 입장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나라는 교회가 아니고 교회 역시 하나님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교회를 이루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나라 백성이라고 자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교회의 임무는 막중한 것이다.
3.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피조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개념을 정리하면서 한스 큉은 하나님의 백성이 곧 교회라고 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교회이다.” 한스 큉은 이 명제에 따른 실천적인 요소들을 깊이 있게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성직화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신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할 뿐, 직분의 유무는 중요한 것이 못된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입장에 대해서는 우리 개신교 교인들 역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밖을 향해 사역자화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 제직화하고 있으며, 여기서 직분의 유무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어서 교회의 직분이 남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일부 교회는 목회자의 세습으로 인해, 헌금을 많이 한 중직자를 중심으로 개인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떤 교회가 강한 능력의 교회, 생명력이 있는 교회인가 라는 점에 있어서 한스 큉은 인간적인 자원이 부족할지라도 겸손히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교회가 강한 교회요, 인간적인 자원이 풍부함으로 스스로를 높이는 교회가 약한 교회라는 역설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표면적으로 보고 판단하여 후자의 교회를 더 강한 교회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이나 확고한 제도를 강한 교회의 평가 기준으로 삼고, 또 교회가 성령의 피조물이라고 할 때에도 우리는 이것을 겸허하게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교회가 성령의 전유물인양, 그리고 더 심하게는 은사를 받은 어떤 특정 성직자가 임의로 성령의 능력을 부린다고(?) 여겨질 때 그에 대해 신령하다는 찬사를 보낸다.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만하게 자신을 자유로운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하는 교회는 약한 교회”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허영이라는 본성은 교회관과 관련하여 이상주의를 꿈꾸며 ‘보이지 않는 교회’, ‘승리의 교회’ 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상주의의 교회관이 그릇된 것임을 강조하는 한스 큉의 입장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한스 큉이 교회를 성령과 동일시 혹은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교회를 성자 예수님과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취급할 만한 위험 요소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애의 연장선이나 강생의 계속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다. 가령 어떤 교회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처할 것 같으면 이런 교회는 한스 큉의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약한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반드시 전제하는 개념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와 같은 머리와 몸의 비유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교회를 따로 떼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한 적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는 한스 큉의 관찰은 아주 타당한 것 같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 한스 큉은 성만찬을 통해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한스 큉이 무형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칭한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답변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가령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 것처럼 말했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 있어서는 이율배반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성만찬에 있어서 화체설이냐 공재설이냐 기념설이냐 영적임재설이냐 라는 문제는 에큐메니즘을 표방하는 그가 껄끄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언급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을 성만찬과 연결시킨 그의 입장은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4. “교회의 단일성”, “보편성 ‧ 성성 ‧ 사도성”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를 개신교의 특징으로 돌리고,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은 가톨릭의 특징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성례를 강조한 나머지 말씀을 등한시 한 것이나 성례에 있어서 세례와 성찬 외에 인위적인 요소들을 첨부하여 7성례를 만든 것은 말씀과 성례를 가톨릭교회의 특징으로 제시함을 어불성설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에 대해 개신교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한스 큉의 입장에는 다소 오해의 요소가 있는 것 같다. 한스 큉은 교회의 이러한 속성들에 “개신교적 기준에는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렇게 말한 그가 또 말하기를 이러한 교회의 속성들은 본질 자체가 아니며, 그 속에 있어야 할 본질들이 빠지게 되면 이러한 속성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스 큉이 말하는 가톨릭만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교회의 속성이란 어떤 것인가?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가톨릭교회가 단지 어머니교회(?)라고 하는 명분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파들이 집나간 자식들이 될 것이며, 교회의 단일성에 피해를 끼친 분리주의자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다른 속성들을 희생해서까지 단일성을 이루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 한스 큉의 입장을 헌신짝처럼 취급할만한 오류들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그러한 오류들에 대해 눈감아야 한다면 이에 대해 진정한 교회의 단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에큐메니칼과 가톨릭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한스 큉의 입장에서는 하나 됨이 가능하겠지만,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여기서 교회의 단일성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 큉이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한다면 이는 본질이 빠진 교회의 속성(여기서는 단일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 한스 큉 자신의 입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거룩성과 관련하여 무엇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우선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요소가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를 언급함으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오해를 정정하고 있다. 한스 큉의 입장은 성역이나 성물이라는 개념이 있어서는 안 되며(이렇게 볼 때, ‘성지순례’라는 용어는 어불성설이며 기독교회에서는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세례와 성찬도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래로부터의 교회’는 거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로부터의 교회’이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 중 어느 편에 더 치중하는가? 한스 큉의 입장은 양자가 합쳐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거룩하고 죄많은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100% 하나님의 작품인 동시에 100%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 “순결한 창녀”라는 표현을 인용한 한스 큉의 입장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는 전혀 분리가 없는가? 한스 큉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더라도 교회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교부들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교회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장사치가 될 수도 있으며 창녀가 되어 몸을 팔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언제나 하나님의 보존, 구원, 사죄하는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부임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과연 ‘위로부터의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를 떠나지 않는가? 물론 한스 큉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떠나지 않으심을 강조했을 것이고 필자 역시 이 부분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란 일방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쌍방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입장을 곁들이자면 하나님의 임재가 옛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떠났듯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수 있으며, 원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을 버리셨듯이 돌감람나무인 교회를 버리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멀리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황금률은 성경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레미야 시대의 맹신을 떨쳐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5. “교회 내의 봉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봉사권과 연관되는 교회의 직분(특히 사제/주교)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교회 내의 봉사에 있어서의 수위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모든 신앙인들이 사제요, 성직자라는 만인제사장의 입장에도 동의하고 있다. 어쩌면 모순으로 보이는 이 양자에 대해 한스 큉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동시에 어느 편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전자에 따라 제도적인 교회의 직분관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제시했다면,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또 후자에 따라 이를 적극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스 큉은 이 양자의 입장을 항상 병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스 큉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나의 봉사권이 가진 부동한 두 측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즉 한 직분관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을 어떻게 절충시키는가 라는 실제 문제에 있어서 그가 장로교회의 정치를 언급하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물론 한스 큉이 가톨릭 측의 인물이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지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 밖을 향한 봉사와 관련하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해 언급하였다. 한스 큉의 일관된 관점은 교회를 세계 속의 교회로 보는 것이다. 그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떠 있는 중간 존재로 보지 않는다. 세계 속의 교회가 교회이며, 교회는 세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회가 세계 속에서 침묵함으로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바로 세상 속에서의 지배욕을 포기함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소위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권력과 정치에 결탁하여 추태를 보이는 상황에서 한스 큉의 이 말은 실로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그는 또 교회가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세계와 결합되고, 세계에 책임을 짐으로써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스 큉이 에큐메니즘에 치우친 학자임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 입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스 큉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본래의 과업이 복음전도라는 점이다. 한스 큉의 이 말은 바로 그 자신에게 가르쳐야 할 말이라고 생각된다. 순수한 복음전도가 어떻게 에큐메니즘과 결탁될 수 있는지 필자로서는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아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신대원에서 어려운 과제 제출을 잘 요약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