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1968년 나훈아 데뷔 앨범, 배호와 창법 비슷트로트 황제의 진짜 데뷔곡과 나이 논란 등록 : 2018-07-05 15:14
데뷔곡 66년 ‘천리길’로 알려졌으나 수록 앨범은 실체 확인되지 않아 음반으로 확인된 데뷔 연도는 68년 47년생 출생 정설이나 51년 기록도 나훈아의 얼굴이 나온 초기 앨범 재킷들. 가수의 역사는 음반으로 공식화된다. 아무리 오래 가수 생활을 했어도 음반을 발표해야 공식 데뷔를 한 것으로 인정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필자는 대중가요 음반 수집가들로부터 나훈아의 진짜 데뷔곡과 나이에 대해 무수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도 출생연도와 데뷔 연도 그리고 데뷔곡에 대해 논쟁이 있는 미스터리한 가수이다. 현재 인터넷 포털에 소개된 그의 프로필에는 1947년 출생, 데뷔곡은 1966년 ‘천리길’로 공식화돼 있다. 사실일까? 언론 자료에 등장하는 나훈아의 데뷔 과정을 살펴보자. 나훈아는 부산 초량초등학교 시절에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에서 2년 연속으로 1등을 차지하며 노래에 재능을 보였다. 대동중학교를 거쳐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해 형과 함께 장위동에서 하숙하면서 서라벌예고를 졸업했다. 그는 ‘오아시스 레코오드사’ 전속작곡가 심형섭, ‘맘모스 레코드사’ 작곡가 오영원 등 여러 작곡가 사무실을 다니며 가수 데뷔 기회를 엿봤다. 당시 오아시스 레코오드사의 마루를 닦고 작곡가들에게 세숫물까지 떠 바치는 고단한 생활을 했던 그는 배고프고 서러운 무명 시절을 감내했다. 어느 날, 장충동 녹음실에 심부름을 갔다. 마침 음반 녹음 예정인 가수가 나타나질 않자 녹음실 사람들은 반농담으로 가수 지망생인 그에게 노래를 시켰다. 투박한 경상도 청년의 순박한 이미지와 섹시한 남성적 매력이 담긴 음색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자리에서 타이틀곡으로 음반 녹음이 결정되면서 나훈아는 데뷔 기회를 잡았다. 최홍기가 본명이지만 ‘최훈’과 ‘나훈’(羅勳)을 거쳐 ‘나훈아’(羅勳兒)란 예명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팬 카페 ‘나사모’에 소개된 인터뷰 기사 ‘오효진의 인간 탐험’에는 나훈아가 1947년 2월11일, 부산시 동구 초량 2동 415번지 7통3반에서 태어난 것으로 소개돼 있다. 인터넷 포털의 인물 정보란과 생년월일은 같다. 인터뷰에서 나훈아는 “그때만 해도 한 곡 녹음해 판을 내는 데 6만원을 내야 했습니다. 나한테는 돈이고 뭐고 밥 사줘가면서 공짜로 내주겠다는 거였습니다. 김영광씨가 작곡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네 곡을 받았는데, 마장동 녹음실에서 녹음했어요”라고 말했다. 녹음실을 장충동으로 소개한 언론 기사와는 장소가 다르다. 신인 시절 나훈아가 무대에 선 모습. 이어 나훈아는 “그때만 해도 기계에 두 채널밖에 없어서 노래 한 곡에 한 군데만 틀려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어요. 연습 한 번 하고 녹음하면서 한 번도 안 틀리고 6분씩 네 곡을… 딱 30분 만에 끝내고 나와버렸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이 잘했다고 짜장면하고 탕수육을 사줘서, 그걸 실컷 먹었어요”라고 말했다. 데뷔곡과 첫 히트곡으로 나훈아와 그때 언론은 다 같이 ‘천리길’을 언급했다. 나훈아는 “여러 사람이 내는 엘피(LP)에 내 노래 ‘천리길’ 한 곡을 끼워넣어 먼저 낸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약속’을 차례로 낸 겁니다. ‘천리길’이 전국의 라디오에서 1위곡으로 올라갔을 때, 배호의 ‘황금의 눈’과 멜로디가 똑같다고 금지곡이 됐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데뷔곡으로 알려진 ‘천리길’이 수록된 1966년 발표된 나훈아의 음반은 실체가 확인된 적이 없다. ‘천리길’의 첫 버전은 1969년 5월29일 오아시스 레코오드사에서 제작한 컴필레이션(편집) 앨범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천리길’에 이어 발표했다는 4곡(‘약속’은 ‘약속했던 길’의 오류)은 모두 1968년과 1969년 발매된 음반들에 수록되어 있다. ‘천리길’이 막 히트하면서 1969년 7월5일 세광출판사에서 발행한 <대중가요 제40집>에 소개된 나훈아의 프로필은 흥미롭다. 노래책에는 나훈아의 본명은 최홍기이고 인터뷰에 소개된 동일한 본적과 그때 살았던 서울 충무로의 상세한 주소까지 나와 있다. 또한 가장 미스터리한 그의 생년월일은 인터뷰와 인터넷 포털에 등장하는 ‘1947년 2월11일’이 아닌 ‘1951년 2월11일’로 4살이나 어리게 소개돼 있다. 과거 ‘연예인의 나이는 고무줄 나이’라는 말이 있었듯 음반사 측에서 신인 가수 나훈아의 나이를 4살이나 줄여 홍보했을 수도 있다. 또한 항간에 나돌았던 1946년생인 라이벌 남진을 의식해 본래 나이로 수정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하긴 어렵다. 프로필에는 데뷔일이 1968년 7월27일, 데뷔곡은 ‘내 사랑’, 히트곡은 ‘천리길’로 소개되어 있다. 나훈아가 1966년이 아닌 1968년에 음반 데뷔한 것이 분명하기에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951년생(데뷔 나이 18살)보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47년생(데뷔 나이 21살)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난 부산의 신생아들은 1957년부터 뒤늦게 출생신고가 가능해지면서 실제 나이에 많은 오류가 있긴 했다. 1968년 나온 나훈아의 데뷔 앨범. ‘천리길’ 이전에 발표된 나훈아의 노래는 그가 처음 녹음했다고 밝힌 4곡보다 훨씬 많다. 1년 앞선 1968년에 발표된 음반도 2장이나 발견되었다. 음반으로 확인된 나훈아의 데뷔 연도는 1968년 8월16일이고 데뷔곡은 신인 가수로는 이례적으로 앨범의 타이틀곡을 장식한 ‘내 사랑’과 ‘약속했던 길’ 2곡으로 봐야 한다. 모두 작곡가 심형섭의 작품이다. 데뷔곡에서 나훈아는 배호와 유사한 창법을 구사해 다른 가수가 아닌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이는 데뷔 음반에서는 아직 자신만의 보컬 스타일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나훈아가 처음 녹음했다는 4곡에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 ‘내 사랑’은 없다. 아마도 당시의 많은 가수처럼 첫 히트를 기록한 ‘천리길’을 데뷔곡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오랜 은둔의 삶을 걸었던 나훈아는 트로트 가수로는 드물게 작사 작곡 능력이 있는 뮤지션이다. 시대를 초월해 사랑해주는 팬덤에다 토속적인 애절한 음색, 남성미 넘치는 다이내믹한 창법과 진지하게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그에게 독보적인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요인들이다. 지금까지 발표한 나훈아의 엘피 음반은 국내외를 포함해 100장이 넘게 확인된다. 그중 나훈아의 데뷔 초기 음반들은 음반수집가들에겐 군침 도는 고가의 ‘컬렉터스 아이템’으로 대접받고 있다. 최근 오랜 공백을 딛고 컴백한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는 개최하는 공연마다 완판 신화를 이어가며 거장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