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品 第一
6. 문수(文殊)보살이 답하다
(1) 과거의 사례 2
큰 법의 북을 치시며, 큰 법의 뜻을 연설하시리라 여겨집니다.
문수보살이 과거의 사례를 가지고 이렇게 일단 서론을 말씀하시고
여러 선남자들이여,
내가 과거에 여러 부처님 계신 곳에서 이런 상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이러한 광명을 놓으시고는 큰 법문을 말씀하셨습니다.
‘큰 법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들으십시오.
오늘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심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법문을 듣고 알게 하시려고
이러한 상서(祥瑞)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제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큰 법문이라고 했고, 또 믿기 어려운 법문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기 어려운 법문요.
정말 우리는 보통 인과의 이야기를 하면 옛날식의 인과법문이지요.
옛날식의 인과법문을 하면 그런데도 귀가 솔깃하고 재미있게 듣습니다.
그 정도 수준은 되지요.
그러나 모든 존재의 실상은 공하다, 텅 비어 없다, 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것은 믿기 어려운 거지요.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수없이 ‘안이비설신의’가 없다.
‘색성향미촉’도 없다. 눈도 귀도 코도 없다.
아니 눈과 귀와 코를 가지고 눈과 귀와 코도 없다.
눈과 귀와 코가 없으면 눈과 귀와 코가 없다 라는 소리를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믿기 어려운 거지요.
분명히 눈과 귀와 코를 가지고, 눈과 귀와 코가 없다고 그러니까
모순도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잖습니까? 그것이 믿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법! 그 믿기 어려운 법을 우리는 밤낮 없이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 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 무무명진,”
끊임없이 없다 없다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거지요.
버젓이 이렇게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싸울 줄 알고 좋아할 줄 알고
온갖 감각을 다 이렇게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삶을 영위해 가면서 없다고 하니
거짓말은 아닐테고 틀림없이 그러한 입장이 있을텐데,
그것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되니까 믿기 어렵다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제 부연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는 반야심경 기도를 기도라고 표현을 합니다마는,
반야심경 기도를 상당히 좋아해서 합니다.
반야심경 우리 불자치고 안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많이 읽지 않는 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 전에 반야심경을 열심히 가나오나 그렇게 읽다 보니까,
아주 간단하게 번역이 되더라구요.
반야심경이 글자 넉자로 그것도 우리말 글자 넉자로 요약해서 번역이 됐습니다.
그것이 뭔고하니 “나는 없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 하니까,
아주 외우기도 쉽고 뜻도 아주 마음에 와 닿고,
그 다음에 뭔가 나는 없다 반야심경이 제목까지 합쳐서 270자인데
넉자로 요약해서, “나는 없다”나는 없다 나는 없다.
마하반야바라밀다 하지 않고 그 때부터는 나는 없다. 나는 없다. 하니까
나는 없다 말속에 반야심경이 다 들어 있고,
또 그렇게 하니까 쉽게 내 가슴에 와 닿고,
그래서 그 순간부터 가슴이 그냥 텅 빈 것 같고 서늘하게,
그렇게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것을 아주 절실히 느꼈습니다.
참 묘한 일이지요.
그 오랫동안 반야심경 기도삼아 주력삼아 그렇게 했더니
넉자로 그것이 생략이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뜻은 더 가슴에 와 닿고 아주 나름대로 영험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전달이 제대로 안되어 가지고,
정말 우리가 감동을 못하는 그런 예들이 사실은 많지요.
그래서 우리 익숙한 불자들은 익은 낱말들이 그대로 우리들 것으로 돼 버렸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좋은 번역,
우리가 익숙하게 쓰고 있는 말로 번역해서 전달한다면,
훨씬 아주 효과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항상 합니다.
그래서 저도 경전 번역을 많이 하고 있는데,
늘 그것이 숙제고, 또 고민이고, 저의 어떤 화두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믿기 어려운 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쉽게 떠올린다면
바로 모든 존재는 공하다.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다,
여실히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참으로 믿기 어려운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어제 말씀 드린 내용인데요.
결국은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이것이 또한 믿기 어려운 것이다,
정말 믿기 어려운 거예요.
모든 사람들은 불자든 아니든 간에 부처님이라고 하면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위대한 지혜와 또 자비와 그리고 온갖 능력과 신통변화와
그 나름대로 부처님에 대한 그림이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처님을 우리는 상상하고 있는데,
그 위에다가 온갖 번뇌와 망상과 잘 생기고, 못생기고,
못생긴 모습, 가난한 모습, 무식하고 온갖 질투심과 모함과 시기심과
온갖 인간으로서 추한 모습들, 이런 것들 다 가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하니, 이 또한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것이 이 두 가지입니다.
‘사람이 부처님이다’하는 그것을 법화경에서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고,
또 모든 존재가 버젓이 이렇게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 라고 하고, 공 하다고 하는 것.
이것이 사실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젠가 우리가 믿어야 될 일이고, 이해해야 할 일이고,
느껴야 할 일이고, 가슴에 사무쳐야 할 일이고,
우리가 사물을 손으로 잡듯이 그렇게 손에 잡혀야 할 일이고 그런 과제입니다.
많은 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고, 또 사유를 하고
이러한 몸부림과 이러한 씨름과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들이 조금씩조금씩 이해가 되고, 또 느껴지면서
우리 가슴에 다가 오지 않겠나 하는 그런 기대를 하면서
우리가 이러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법문을 듣고 알게 하시려고 이러한 상서(祥瑞)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의 사례를 일월등명 부처님의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일월등명불’의 이야기 부처님의 명호가 특이합니다.
특이하지만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부처님 된 그런 의미를
‘일월등명’이라고 하는 말속에 다 담고 있지요.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
태양이라고 하는 날日자, 달이라고 하는 달 月자, 등불이라고 하는 등 燈,
그리고 밝을 明자, 일월등명 부처님입니다.
태양이 있어서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요,
또 달이 있어서 밤까지 환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이고,
달이 만약에 없다면 등불이라도 밝혀서 이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저는 이 법화경 공부를 하면서 일월등명불이라고 하는 이 이름!
이 하나의 의미만 우리가 이해한다 하더라도
불교를 어지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뭐겠습니까? 세상을 밝히는 도구 태양과 달과 등불입니다.
이렇게 까지 중중무진으로 거듭거듭 어떤 빛을 강조하는 부처님의 명호가,
우리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캄캄한 마음을 밝히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부처님 된 임무다, 불교가 해야 할 불교의 본 모습이
바로 지혜의 태양인 것이고, 지혜의 달인 것이고, 지혜의 등불인 것이다,
우리 마음으로부터 밝은 지혜가 생길 때 그것이 바로 불교가 해야 할 일이고
불교가 존재하게 된 까닭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또 이제 말씀 난 김에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일월등명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또 극락세계를 이야기할 때 뭡니까? 무량광이지요.
한량없는 빛이다 그랬습니다.
한량없는 빛 그 또한 지혜의 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업과 번뇌로 중중첩첩이 그야말로 큰 돌을 같다가 짓누르고,
그 위에다가 시멘트를 십 미터 이상 두껍게 시멘트를 하고 철판을 깔고
다시 또 무거운 돌을 누르고 이렇게 표현을 해도 모자랄 듯한 그런,
우리의 어떤 업장과 번뇌와 이러한 것으로 가리워져 있는데,
부처님이 보기에 그래서 그러한 어둠의 어리석음을 말하자면
지혜의 광명으로 밝히자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 마음이고, 불교의 본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표현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극락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뭐냐?
무량광부처님이 주재하는 나라다.
지혜의 빛이 있을 때 바로 극락이다. 간단히 표현하면 그런 것입니다.
그 반대로 지장경에서 지옥을 이야기 할 때는 어떻게 이야기 되어 있습니까?
햇빛도 달빛도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곳에 지옥이 있으니,
해 가지고 지옥이름이 수 십 가지가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해가 없다 달이 없다 해서 그래서 어두운 곳이겠습니까?
다 상징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이 법화경은 불교의 상징적인 표현이야 유명 하지마는,
특히 법화경에 있어서의 상징적인 그런 표현들은 참으로 뛰어납니다.
그리고 지장경의 햇빛도 달빛도 없는 캄캄한 곳에 지옥이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상징적으로 잘 표현 하고 잘 있습니까?
어리석은 마음 그것이 곧 지옥을 불러 온다 이 뜻이지요.
한량없는 지혜의 빛 그것은 곧 극락을 불러온다.
그래서 무량광 아닙니까 아미타불이...
그리고 부처님 중에 부처님인 법신불이라고 하는 비로자나불이
번역하면 무엇입니까? 광명변주지요.
지혜의 광명이 두루 비치다.
또 다른 번역은 대일여래(大日如來) 그렇게 합니다.
큰 大자 날 日자 큰 태양이 비치는 그런 부처님이다.
그것이 전부 태양을 두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하필이면 태양이다 달이다 그것은 사실은 하나의 비유로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고,
또 말씀드린 김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스승이 누굽니까?
금강경에 보면 연등불에게 수기를 받았다 그렇게 되있지요.
연등이 뭣입니까? 지혜의 등불을 밝히다. 아닙니까?
우리 초파일을 연등축제라 그렇게 하는데,
옛날 신라 때부터 연등 밝힐 연(燃)자,
태울 연(燃)자 불화(火)변에 그럴 연(然)자가 있는 그 연자를 써서,
연등이라고! 고래로 내려오면서 그렇게 전해 내려왔는데
근래 이름은 그대로 연등이라고 쓰면서 연꽃 연(蓮)자. 등불 등(燈)자로
그렇게 또 표현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것이 의미가 좁아집니다.
우리가 초파일에 등불을 밝힐 때 연꽃등만 밝힙니까?
연꽃등은 불과 몇 개 안되지요. 사실은 각양각색 수박등이다, 삼각등이다,
팔모등이다, 요즘 뭐 용등, 코끼리등, 축구공 등, 동자등, 부처님등, 신장등,
보살등 등의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든 등불을 밝힌다 하는 그런 의미가 연등인데
단순하게 그만 연꽃 연자 등불 등자로 그렇게 표현 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를 축소시키는 예인데,
서울에서 축제는 참 그럴듯하게 잘 행해지고 있는데,
이름을 그만 연꽃 연자 등불 등자로 그렇게 해 가지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 참 평소에 저가 마음에 섭섭해 했고,
건의도 했는데 좀 현대인들이 그만 알기는 알고 있으면서도
첫해에 그렇게 연꽃등불이다 라고 이렇게 표현을 해 가지고,
특히 영어로 그렇게 표현을 해 가지고 세계 사람들에게 소개가 되었다고 해서
고칠 수가 없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회의를 하고 그렇게 했음에도 그런데
이러한 본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분들이 많아짐으로 해서
이러한 의견이 확산이 되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래서 바르게 깨우쳐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노파심에서
이런 말씀까지 곁들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야기를 이렇게 연등축제에 까지 연결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런 연등부처님도 지혜의 등불을 밝히다 하는 뜻인데,
그것이 결국은 석가모니가 수기를 받을 수 있는 석가모니 스승이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석가모니 스승은 결국은 지혜의 등불이다.
우리 마음으로부터 지혜의 등불을 밝힌 그 사실이 부처님의 스승이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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