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 화산면민 백운계곡 야유회 다녀와서(2007.7.21)
며칠 전 핸드폰에 화산면민 야유회 행사가 있다는 메 세지가 떴다.
어떤 내용인가 궁금하던 차 총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참석 해 달라는 부탁이기에 몇 가지 내용을 물어 본다.
이야기인즉 재경 화산면민 모임인데 제자들과 후배들이 주가 될 모임 같았다.
듣는 순간 망 서려 지기 시작한다.
고향 떠나 온지 50여년이 되어 가니 만날 젊이 이들은 대부분 기억에 없는 것이 당연 할 것이고 세대도 차이가 많이 날 것이 분명하다. 겨우 알만한 후배들과 제자들의 몇 몇 있을 텐데 그 틈에서 행동이 매우 부자유스럽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태능 역 7번 출구에서 9시경 쉽게 승차 할 수 있다니 통행에는 큰 불편이 없을 것 같았다. 한편 어떤 모습의 누구를 만나게 될까? 어떤 화제가 있을까? 내가 모르는 고향 소식은 무엇이 있을까?
등에 솔깃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참석하기로 작심하고 실행 한다.
인성 관광버스(김주용)는 9;15분 쯤 예정된 장소에 25-6명을 태우고 도착 된다.
우리 연배는 2명 그 외는 제자 후배들이다. 대부분 화산초교 졸업생이며 그 외 면내초교 졸업생들도 있으며 4-50대 한창 각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거의 전부 다.
운행 중 총무는 마이크를 주면서 인사를 부탁한다.
‘42년 교직에 있었기에 마이크 잡으면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습관이나 오늘은 작심하고 간단히 인사 하겠다’고 하면서 나의 신상을 소개하고 ‘만나서 반갑다. 즐거운 하루가 되자’는 아주 짤막한 의례적인 인사로 가름했다.
차는 진접 내촌 일동 거쳐 11시가 좀 지나 백운계곡 ‘황해 약수 식당’에 도착한다. 등산 준비가 된 면민은 우산을 든 체 광덕산 근처 2시간 코스의 산행을 하고 돌아온다. 잔류된 10여명은 나름대로 친분 있는 사람 끼리 둘 셋 짝을 지어 이야기를 하게 된다.
회원들의 하는 일도 다양 하였다.
공직에 있는 사람은 휴가를 내고 찾았는가 하면 자영업 하는 사람은 문을 닫고 달려왔단다. 아무 가릴 것 없이 속 시원한 말을 틀 수 있는 죽마고우의 정 때문 일 것이다. 헤어지면 또 만나고 싶고 만나면 웃게 되고 웃다 보면 정이 새록새록 쌓이기 때문 일 것이다.
난 마침 아주 오랜만에 T와 마주 앉는다.
그가 어느 날 당한 끔직한 화재 사고 이야기에 어리둥절했다. 그 사고로 아들 둘을 잃고 말았단다. 정관 수술하여 다시 애를 갖기는 어려운 사정이었는데......
어려운 절차를 수차 걸쳐 가까스로 임신 했으나 그것마저 6개 월 만에 실패 하니 그 심정은 가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져며 오는것 같았다.온갖 노력 끝에 현재는 늦은 동이 가 중학 1년생이란다.
이런 절망 속에서 재생 하는 데는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따랐단다.
그러나 칠전팔기라 했다던 가 태풍이 지나가고 고요 속에 목동 하이페리온 2에 안착하여 정년의 날을 맞을 준비를 한단다. 그의 기적적인 인생 역정에 크게 박수를 보내면서 격려 하게 된다.
H는 남양주 진접에 F.R.P 제품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자영업이 어렵지만 천신만고 끝에 이제 자리 잡고 모습 갖추면서 경영한다는 반가운 이야기도 전해 듣는다.
K는 일동에서 농장(돼지)을 경영하는데 2천두를 사육하고 있단다. FTA로 어려움을 겪지만 자기 나름대로 연구하며 생산 현장에서 열심히 종사 하고 있음을 자신 있게 알려준다.
12시 반이 되면서 예약된 식당에서 먼저 잔류 회원들만 회식을 하게 된다. 백소주 마시는 것보다 섞어 마시는 습관이 있어 준비된 매실 액기스를 타서 소주 몇 순배 하며 고향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를 정겹게 나누게 되니 시간가는 줄 모른다.
향우회에서 부모 형제들의 안부 및 근황을 묻다보면 연계가 되어 고향의 폭넓은 소식을 접 하게 되니 자연 이야기는 길어지고 흥미 있어진다. 이래서 오늘 많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오리 탕으로 점심을 마치고 취기가 섞인 유흥 자리에서는 구성진 대중가요에 막춤등 묘기 등으로 스트레스를 날리는데 진면목을 한가지 씩 보여 준다.
내 순번도 있었다. ‘일 백 명이 보이지 않으면 노래하지 않는다’는 넉살을 깔고 자칭 주가를 올려본다. ‘울고 넘는 박달재’ 십팔 번을 불렀다. 젊은이들 앞에서 흘러간 노래였으나 그래도 반응은 괜찮아보였다. 앙콜도 나왔으니까......
교통 혼잡을 예상하고 16‘30분이 되니 철수 준비를 한다.
현장에서 헤 여지는 면민도 몇 사람 되니 서로 아쉬운 인사를 거듭하며 다음 기회에 만날 것을 굳게들 약속하는 모습이 보인다.
돌아오는 길 아마 내촌 마을쯤인 것 같다. 한창 푸르게 막자라는 벼논을 사이에 두고 스치듯 지나게 되니 문득 고향 생각에 젖게 된다.
지금쯤 은 벼가 한참 자라 자리개미 들판이 파 랄 것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경천지 상류 천에서 족대로 불거지 잡던 일, 고성 산 성터 밑에서 진달래 꺽 다가 엎어진 후유증으로 장기간 팔 쓰기가 어려워 공차지 못했던 추억들이 향우회에 묻히니 주마 등 처럼 떠오르는 순간 총무는 갑자기 마이크를 들이대며 마무리 인사를 강권한다.
끝 인사말 대신 고향을 등지고 언제나 향수를 그리는 사람들의 교향곡 ‘고향의 봄’을 같이 부르며 하나 된 공감대를 맛보게 했다.
우리사회가 학연 지연 혈연으로 얽혀져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역작용도 있지만 순 작용도 적 지 않다.
내 나이 벌써 인간 선배 쪽에 서게 되었는데 후배들에게 크게 보탬이 되지 못하였음이 아쉽고 때로는 부끄러움이 다가오기도 한다.
‘가르치는 일을 더 철저하게 할 것’을 하고 때늦게 되노여도 본다. 인간사회에서 ‘젊은이의 미래는 노년이요 노년의 과거는 젊은이’란다. 세월의 흐름만 탓하지 말고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듯이 내일을 위하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밀고 당기는 끈끈한 연이 우리가 바라는 사회 일 것이다. 향우회의 만남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최선을 다짐 해 본다.
나는 오늘 잘 참석 했다고 생각했다. 고향 후배들의 어려움도 알고 늦었지만 격려 해 줄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또 그들이 하는 사업을 소개 받고 가상한 용기를 주며 더욱 정진 할 것을 당부하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교육자로 살아왔다. 다 할 때까지 거쳐 간 그들에게 이렇게 격려하면서 정을 주고 지내야 하는 것이 나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해본다.
열악한 향우회 재정에 야유회 추진에 노고가 많았던 회장과 총무 그리고 인성관광 김주용 씨 에게 감사드리며 화산향우회의 무궁한 발전과 회원들의 힘찬 전진을 그리면서
백운계곡 야유회에 다녀온 소감을 간단히 피력 해 본다.
추 강 이 행 재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아는 것이 적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해야 할 일이 많음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사람은 불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