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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군산시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고귀만(사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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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성고무의 존재는 군산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고, 군산 시민들 사이에서도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40대 이상 군산시민들에게 그 기억이 아련히 남아 있을 뿐이다. 요즘이라면 흔하게 나오는 사사(社史) 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 경성고무는 역사 속에서 조차 그 존재를 찾기 힘든 고무신공장이다.
본보는 경성고무공업사를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아 경영하던 중 노동집약적인 신발업종 특성 때문에 경영권을 선경그룹에 넘기고 군산의 야구사, 대한민국 프로야구사에 큰 획을 남긴 이용일 전 경성고무 사장(전 KBO사무총장)을 인터뷰, 경성고무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 경성에서 온 이만수
군산 경성고무공업사를 키운 이만수 사장은 경성 사람이었다. 1891년생인 그는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에서 사업을 하며 재력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3남1녀 중 둘째 아들인 그는 전망있는 사업을 구상하던 중 마침 한일합방 전에 옥구군에서 관료로 일하던 이모부(이모)와의 인연을 계기로 군산으로 내려간다.
그가 경성에서 군산에 내려온 것은 1924년이었다. 33세의 이만수는 당시 2남 1녀를 두고 있었다.
1924년 당시 군산은 일제의 식량과 원료 공급기지로서 한창 번창 일로에 있는 신도시였다. 일본인들은 군산에 부두를 만들고,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생산된 쌀을 대거 수집해 오사카로 날랐다. 일제가 군산을 쌀 수탈 창구로 선택한 이유는 '군산항 축항 완성 이전에 3000톤급 기선이 완전하게 정박할 수 있었다'는 일본인들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초기 군산에서 쌀을 싣고 오사카로 간 화물선은 빈 배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사카와 고베는 당시 일본의 주요 기업들이 활발하게 가동되던 곳으로, 미쓰비시 등 일본의 주요기업 가운데 오사카 출신들이 세운 기업이 많다. 일본 기업인들은 군산으로 돌아가는 빈 배에 주목했다.
오사카 고베지역 기업인들은 군산에서 쌀을 싣고 온 뒤 돌아가는 빈 화물선에 조선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각종 상품을 선적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선진 문물이 뒤떨어져 있었고, 일찌감치 문호를 개방해 선진 문물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던 일본은 식민지화 한 조선에 자국 상품을 마음껏 팔아 이익을 챙겼다.
예를들어 일본인들은 조선에 방직공장을 세우지 않고 버텼다. 1913년 일본인이 조면기 32대를 설치하고 운영한 조선면화 이리공장은 익산지역 유일한 공장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면화농장과 조면공장을 운영하면서도 부가가치가 높은 방직공장은 선뜻 세우지 않았다. 조선에서 조면한 물량을 일본으로 가져간 뒤 방직공장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으로 만들어 조선에 역수출, 큰 이익을 챙기는 수법이었다.
빈 배에 화물을 실으면 정상 운임의 20∼30% 가격만 지불하면 됐기 때문에 군산항은 일본 상품이 들어오는 주요항구로 자리매김했다. 이 때문에 군산항은 갈수록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발전했다.
일본 상인들이 대거 몰리고, 군산항을 통해 오가는 화물량과 비례해 자금이 돌면서 은행 등 금융기관도 잇따라 들어섰다. 군산지역은 정미소와 주조장, 금융기관, 유곽 등이 많이 들어선다.
1920년대 이후 군산시내 주요 풍경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은 유곽과 요정은 이 지역 경제를 가늠하게 하는 것 중 하나로 꼽혔다. 당시 군산에는 5층짜리 유곽이 많았고, 일본 요정은 3층에 주로 자리잡았다.
군산에 일본 기업인, 상인들이 차고 넘치면서 군산시내 풍경은 일본화돼 갔다.
▲ 1932년 경성고무공업사 설립
비록 일제 강점하에 있었지만 군산은 번창하는 도시였고, 경성에서 내려온 이만수는 고무신 소매상점 문을 열었다. 성실 근면하고 정직한 성품의 이만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았다.
예나 지금이나 신발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생활필수 소모품이다. 이만수는 이같은 점을 주목하고 당장 큰 돈을 벌지는 못해도 꾸준히 장사를 하며 '저축하면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이만수는 주변 사람들이 "왜 다른 많은 사업 가운데 고무신 소매업을 시작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고무신은 썩지 않고, 아이들이 먹어 없애지도 않으니 판매가 조금 늦는다고 해도 크게 손해볼 일이 없지 않느냐"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고무신 사업은 요즘으로 말하면 휴대폰 사업과 엇비슷했다.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 다니던 사람들은 비오는 날에도 빗물이 들어오지 않는 고무신에 열광했다. 집전화만 사용하다 휴대폰에 열광하던 현대인들과 1920년대 조선인은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고무신은 각자 한켤레씩 가져야 하고, 수명이 영구적이지 않아 몇개월 또는 1-2년 정도면 새 신발을 사야 한다. 당시 조선사람들은 최신제품인 고무신을 신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고, 한 번 산 신발도 얼마 가지 않아 잃어버리거나 찢어지거나 닳아 구멍이 나면 재구매 해야 했다.
처음 고무신 소매업을 하던 이만수는 점차 사업 규모를 확장해 도매업을 영위했다. 근면 성실했던 이만수는 적정 자본이 마련되자 더 큰 사업을 구상했다. 고무신공장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만수는 1932년 11월 13일 일본인이 운영하던 신발공장을 매수, 합자회사 경성고무공업사를 설립했다. 당시 군산에서 조선인이 조선 자본으로 설립한 첫 기업이었다. 또 만월표 고무신의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