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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수행의 터를 빛내 주신 큰스님
굉혜(정우, 영월 망경산사 주지)
1) 도량불사의 지침을 주셨다.
관정 큰스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2001년 강원도 영월에서였다. 당시 나는 등인 스님과 함께 눈코 뜰 새 없이 도량불사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참선공간의 임법당과 스님들의 방사가 있는 복합 건물 한 동을 새로 지었는데 그 새 건물에 최초로 큰스님이 묵게 되었다.
우리와 평소 교류하는 다른 곳의 큰 절에서 수행하는 스님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큰스님 묵으실 방을 열심히 청소하였다. 큰스님을 맞이하는데 자기도 일조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매우 신심 나서 일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새로 만든 수행공간에 첫 손님으로 큰스님을 모신 것에 대해 우리는 매우 특별한 의미로 생각하였다.
등원 스님이 나를 큰스님에게 소개하셨다.
“앞으로 이 절 주지가 될 사람입니다.”
내가 삼배를 올리자 나에게 절 한번 할 때마다 한 마디씩 덕담을 해주셨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당시 나보다 먼저 삼배를 올린 등인 스님에게 하신 말씀이 더 크게 메아리로 남아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빨리 빨리 서두르십시오.”
다음날 큰스님은 우리들의 도량불사 터를 세심히 둘러보시고 앞으로 어떻게 하라고 일일이 일러주셨다. 우선 새로운 사찰의 이름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몇 가지 복안을 말씀드렸다. 수행대중스님들은 은둔과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아 울력을 일상화하며 검박한 생활을 유지하고, 건물도 매우 소박하게 지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도량의 명칭에 대해서 큰스님의 고견을 청하였다. 우리의 수행 터전이 깃들고 있는 높은 산의 이름이 망경대산(望景臺山)이고 정상 옆의 크게 보이는 봉우리가 금화산(金華山)이라는 별도의 산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산 이름 등을 따서 몇 가지 안을 먼저 소개해 드렸다.
① 望景臺寺(망경대사), 望景大寺(망경대사), 望景寺(망경사)
② 金華寺(금화사), 金華精舍(금화정사), 金華禪院(금화선원)
큰스님이 그려주신 가람 배치도
③ 如來寺(여래사), 如來精舍(여래정사), 如來禪院(여래선원)
큰스님은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제시된 안이 아닌 ‘망경산사(望景山寺)’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을 써 주셨다. 이로써 오늘날의 ‘망경산사’가 탄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려서 앞으로 불사를 진행할 때 가람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하나하나 자세하게 큰스님의 의견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곳은 매우 큰 가람 터다. 너희들의 바람대로 은둔하며 소박하게 살며 도량을 작게 지을 곳이 아니다. 이곳은 건강도 이루고 수행도 함께 이룰 수 있는 매우 수승한 곳이다. 앞으로 사람들이 많이 오는 큰 도량이 될 것이다.”
그런데 20여년이 다되어가는 지금, 이 깊은 오지에 아스팔트도로가 정비되었고, 박물관이 들어서고, ‘산악자전거’ 코스 등 두루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정 큰스님은 풍수지리에도 매우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등인스님의 수계
2002년 9월 큰스님은 아무런 사전 연락 없이 갑자기 인천공항으로 입국하게 되어 강거사님과 등원 스님, 등인 스님은 서둘러 공항까지 마중 나가 망경산사로 모시고 오셨다. 망경산사에서 이틀 밤 머물고 다시 중국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이 때 뜻하지 않게 등인 스님에게 수계를 하시게 되었다. 수계 날 대중스님들보다 일찍이 법당에 나오셔 우릴 기다리셨던 큰스님께서는 등인 스님에게만 계를 준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한 마리 거대한 용에게도 계를 주셨다고 해서 우리 모두 크게 놀랐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번 방문에는 다른 일정이 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등인 스님에게 수계만 하시고 강릉 백운사만 들리셨다 곧바로 출국하셨다. 그런데 큰스님은 제자 등인 스님에게 수계한 것에 대해 아주 만족해 하셨다.
“내가 아주 훌륭한 제자에게 수계하였다. 이제 안심이 된다!”
통역을 하는 강거사에게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등인 스님을 제자로 삼고 난 뒤 큰스님은 매우 달라져 보였다. 이미 법명을 큰 연꽃이란 뜻을 가진 굉련(宏蓮)이라고 받으셨는데, 한국에 오시면 아주 기분 좋은 소리로 “홍롄(중국식 발음), 홍롄”이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힘이 있었다. 앞전에 뵈었을 때는 늘 약간 구부정하시고 피곤하여 힘들어하시는 모습이었는데, 등인스님한테 수계한 이후에는 마치 젊음을 되찾은 것처럼 활발하게 보였다. 피로가 없어지고, 밝고 가벼워졌으며, 눈에서도 활기찬 빛이 났다. 그래서 내가 주위 스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큰스님은 마치 고시합격 통지 받은 사람 같다!”
3) 망경산사 관정 큰스님 친견법회
2002년 봄에 망경산사는 개산대재법회를 성대히 열었다. 당시 스님들이 많이 오셨고, 군수님을 비롯하여 지역사회 인사와 원근지역에서 오신 불자님들이 도량을 메웠다.
그해 10월, 관정법사님 초청 선지식 친견법회가 열렸다. 벌써부터 관정 큰스님과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큰 법회가 가능했다. 이 때 법회에서 큰스님은 법문을 하시고, 또 천도재도 하시고 불자님들을 위하여 마정수기도 해주셨는데 3일간이나 계속되는 행사였고, 이때도 많은 신도들이 참석하였다. 서울에서 영취사 신도들이 관광버스로 왔고, 영월지역 신도들도 많이 참석하였으며, 인근 부대의 군인들도 많이 참석하였다.
이때 스님들을 비롯하여 신도 분들이 100여명 가까이 마정수기를 받았다. 그 가운데 인상 깊은 스님은 건봉사에서 오신 만오(晩悟) 노스님이었다. 일생 염불수행을 하신 만오 스님은 특별히 큰스님을 뵙기 위해 최전방 휴전선 근방의 건봉사에서 영월까지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시며 오셔서 큰스님을 친견하시고 큰 환희심을 가지고 돌아가셨다. 관정 큰스님께서도 만오 노스님에게 특별히 격려해 주셨다.
“극락세계에 스님의 커다란 연꽃이 이미 피어나 있습니다!”
마정수기 받는 晩悟스님, 濾山 황해규 거사
법회 날 큰스님과 기념사진: 騰圓ㆍ靑夏ㆍ寬淨ㆍ騰仁ㆍ??ㆍ定佑(필자)
그날 만오 노스님은 한 불자님의 수고로 특별히 건봉사까지 모셔다드릴 수 있었고, 훗날 종로3가 비원 앞 아미타사에서 정토불교대학을 열 때 특별 초청법사로 모시게 된 인연이 되었다. 법회가 온전히 끝나고 망경산사 대중스님들은 관정 큰스님께 절을 올리며 그날 들어온 불전을 전부 전해드렸다. 당시 불전도 많이 들어와 큰스님도 매우 놀라셨다.
4) 서울 인사동 ‘여래선원’ 과 관정 큰스님
등인 스님을 비롯한 우리 몇 명은 명상을 하면서 동시에 참선을 했기 때문에 서울 인사동에 따로 법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래선원’이라 하고 함께 수행하는 도반들과 아는 스님들이 무상출입하였다. 이런 이유로 관정 큰스님께서도 자연스레 여래선원에 들리셨고, 보리향 보살님의 시주로 새로 모신 고불부처님 점안식까지 해 주셨다.
여래선원은 관정 큰스님께서 자유로이 왕래하시며 머무셨고, 우린 최선을 다하여 모셨다. 관정 큰스님께서 자주 머무시다 보니 입소문을 듣고 꽤 많은 불자님들이 친견하러 모여들었고, 그때마다 큰스님은 마정수기를 베풀고, 소참법문도 해 주셨다. 또 스님들이나 재가불자님들의 요청으로 천도재도 자주 하시게 되었다. 특히 2003~2004년 2년간은 서울에 오시면 이곳에 머무시는 시간이 많았고, 여래선원에 계시면서 지방에 일정이 생기면 지방에 다녀오시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이 때 관정 큰스님을 대중스님들과 함께 모시면서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큰스님께서 직접 주재하시는 천도재 의식은 천도하는 대상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떤 때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떤 때는 아주 일찍 끝난다. 그것은 영가를 불러와 앞에 앉히는 작업에서 시간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큰스님은 영가가 나올 때까지 다라니를 계속 외우신다. 어떤 때는 영가에게 꾸지람을 주시기도 하였다. 영가가 온 이후에야 유족에게 잔을 올리고 절 하도록 하신다. 만일 다른 곳에서 하는 식으로 영가가 좌정하기도 전에 잔을 올리고 절하면 안타까이 여기신다.
한 보살님이 북한에 두고 온 가족 2명의 천도재를 모시게 되었다. 이 보살님은 이별한 지 50년이 넘어 가족의 생사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집에서 제사를 모셔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은 이상하게 영가를 부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영가가 한 사람은 와서 천도를 했는데, 한 사람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걱정도 되고 궁금하여 큰스님에게 그 연유를 여쭈어 보았다.
“죽었더라도 이미 극락에 갔거나, 아니면 아직 살아있으면 오지 않는다.”
한 번은 천도재를 아주 빨리 끝낸 사람이 있어 여쭈어보았다.
“이 영가는 비구니 스님들이 옆에서 많이 도왔기 때문에 쉬웠다.”
끝나고 들어보니 이 보살은 한마음선원을 다녔는데, 그 절에서 재만 있으면 계속 재를 올리고, 자신의 조상뿐만 아니라 남의 재에도 참석하여 영가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기도를 받고 천도된 영가들이 모두 와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한 번은 재미동포 한 사람이 자신의 장성한 자녀가 신기가 많은 것을 걱정하며 큰스님께 상담하였다.
“당신의 따님에게는 수행하던 사람의 영가가 빙의되어 있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내가 그 영가를 천도하여 따님으로부터 떼어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실한 불자가 되겠습니까?”
여래선원 불상과 탱화 점안의식
여래선원에서 열린 천도재 법의식 주재
큰스님이 출국하시고 나서도 나는 거의 한 달간 천도재 하는 꿈이 계속 되었다. 큰스님을 모시고 열심히 천도재 일을 도와드리며 기도했더니 나의 업장도 많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스님과의 법연으로 나는 큰스님을 뵈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럴 때면 중국에서 홍거사를 통해서 큰스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하였다.
여래선원을 출입한 불자님들은 안국선원에 나가시는 한순남 보살님을 비롯하여 위강원한의원 전병롱 거사님이나 변호사 박병규 거사님 같은 많은 염불인들이 관정 큰스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고 인연을 맺었다. 큰스님은 여래선원에서 계시면서 편히 쉬시지도 못하셨다. 하루도 쉬시지 않고 찾아오는 많은 불자님들 때문이다.
5) 만경사(萬頃寺) 불사 회향법회 및 무주고혼 수륙대재
2003년 가을, 관정 큰스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는데 당시 큰스님은 세수 80살이셨다. 당시 망경산사는 벌써 지역사회 유명 인사들의 사찰방문이 잦았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는 인연교류가 있게 되어 대중스님들은 사찰이 뭔가 지역사회에 공헌도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월군은 ‘박물관 고을’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가질 정도로 박물관이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문화에 부응하여 박물관 설립 등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망경산사에는 법당 앞에 초원처럼 펼쳐진 넓은 밭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곳을 정비하며 큰스님을 모시고 도량주변 무주고혼 합동천도재를 몇 차례 지내게 되었다. 큰스님이 주재하시는 무주고혼 천도재가 시작되어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큰스님이 통역을 통해 병풍을 치라고 소리치셨다.
“빨리 법당안에 병풍을 둘러쳐라.”
“큰 대야에 물을 많이 퍼 와라.”
우리는 깜짝 놀라 서둘러 병풍을 둘러치고 물을 준비하는 큰스님의 지시에 따라 별도의 특별 관욕대를 설치하였다. 병풍에 물을 뿌리시며 의식을 계속 진행하시는 동안 큰스님께서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갑작스레 큰스님께서 눈가가 빨갛게 물들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시자 우리는 매우 긴장하였고, 무슨 영문인지 몹시 궁금하고 초조하였다. 통역을 하시는 강거사님도 매우 놀라워하였다. 드디어 천도재법식이 끝나면서 큰스님의 울음도 그쳤다. 우리는 큰스님 방에 모여 천도재 중에 갑작스레 특별 관욕대를 만드는 등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우신 까닭을 여쭸다. 통역으로부터 말이 전달되자마자 큰스님은 또다시 눈가를 붉히시며 눈물을 쏟으셨다. 큰스님은 우시면서 말씀하셨다.
“너무나 불쌍한 영가가 왔다. 여태까지 이렇게 헐벗고 불쌍한 무주고혼 영가는 처음이다.”
그 때 큰스님은 격앙되시어 우리들이 올리는 재비와 불전금마저 뿌리치셨고, 한동안 슬픔으로 서러워하셨다. 갑작스레 일어난 사태를 두루 맞닥뜨린 우리는 큰스님에 대해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관정 큰스님은 불보살님의 자비를 진정으로 구현하시는 분이시구나.
만경사(萬頃寺)는 망경대산 해발 900m에 위치한 사찰로 퇴락이 심하여 이미 사찰로서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2002년 봄부터 만경사 중창불사에 온 힘을 기울였다. 2003년 여름에 만경사까지 가는 오솔길이 확장되어 지프차의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해 가을 큰스님께서는 처음으로 만경사에 올라가셔서 도량을 둘러보셨다. 산신각에서는 삼배의 예도 올리셨다. 큰스님은 우리나라 전국 사찰을 다니시면서 산신각에 예를 올리시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큰스님께서 만경사 산신각에서 깍듯이 예를 표하시는 것이다. 이를 보고 특이한 일이라며 통역인 강거사가 놀라워하였다. 도량을 다 둘러보신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10년만 젊었다면 여기서 수행하며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드물게 보는 수행터다.”
만경사 불사회향법회에 참석하신 만봉 큰스님과 관정 큰스님
이듬해 2004년 모든 만경사 불사를 마치고 ‘만경사 중창불사 회향식 및 불상, 탱화 점안식’ 때도 큰스님께서 오셔서 법문을 해주시며 자리를 빛내 주셨다.
6) 큰스님과 함께 했던 나날과 몇 가지 숨은 이야기(逸話)
서울의 여래선원과 영월의 망경산사에 머무시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큰스님을 모시면서 몇 가지 일화가 있다.
<1> 폭설이 그치다.
2003년 2월 한국 방문 때는 서울 인사동 여래선원을 들려 망경산사에서 며칠 지내셨다가 아침부터 영월에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대구 광덕사로 가시기 위해 출발을 서두르셨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어 시야가 막힐 지경이었다. 오전 중에 출발하려는 짚차는 출발이 지체되어 낮이 되었고 일행은 초조한 마음이 되었다. 이 때 통역 강거사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관정법사님, 도사이시니까 하늘의 눈이 그치도록 하실 수도 있죠. 눈이 그쳐서 우리가 출발할 수 있게 좀 해주세요,”
큰스님은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다가 나오시면서 잔뜩 미소를 머금고 눈이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뻗으셨다. 그리고 하늘에 대고 마치 글을 쓰듯 오른 손을 휘저으시고 나서 이내 차에 오르셨다. 차는 더 지체할 수 없어서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하며 서서히 눈길을 빠져 내려갔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눈이 차츰 적어지더니 한 두 송이 날리는 수준으로 오후가 지나갔다. 후에 들은 소식은 기상대의 폭설예보와 함께 영월읍내 등 인근지역에 종일 폭설이었다고 한다.
<2> 죽게 되면 화장하여 중국에 보내다오.
한 번은 지방에서 법회 후 망경산사에 오셨는데 통역 강거사님과 큰스님 시봉한다면서 어느 보살님이 같이 수행한 것이다. 통역 강거사님 말씀이 큰스님께서 무릎이 불편하신데 저 보살님이 마사지를 잘하여 큰스님 곁에 따라다니며 마사지를 해주신다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도 매우 좋아하신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하룻밤 지나고 나서 강거사님이 그 보살님이랑 잠시 산보나간 틈에 큰스님께서는 우리에게 급히 메모를 써주셨다. 나이 여든이 넘으신 상태로 한국에서 힘든 법회 일정을 소화하고 계시는 큰스님께서는 못난 제자들에게 메시지를 내린 것이다. 메모의 내용은 이러했다.
“會死韓國, 請你身屍火葬, 送回中國. 謝謝. 師釋寬淨”
한국에서 죽게 되면 시신을 화장해서 중국으로 돌려보내주면 고맙겠다. 스승 석관정
한국에서 포교하다가 언제든지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매일 하루 몇 시간씩 법회와 마정수기를 하시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강행군이었지만 하루라도 그냥 쉬려 하지 않으셨던 큰스님은 이처럼 늘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큰스님의 뜻이 어디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통역 강거사님과 상의 끝에 그 시봉하는 보살님을 그냥 가시게 하였다. 사태를 훤히 보고 계시는 큰스님께서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콧노래도 부르시며 매우 태연하셨다.
<3> 머리 강제 수술의 후유증
한번은 한국에서의 초청 일정을 잘못아시고 한국에 오신 적이 있었다. 그러자 통역 강거사님은 인천공항에서 망경산사로 오는 차안에서 큰스님께 빈정거리는 투로 질문했다.
“아니 도인이 그것도 모르고 비행기 타고 무작정 한국 왔어요?”
그러자 큰스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전에 신통하다고 소문나서 정부 관리에게 불려가 과학적조사를 한답시고 내 머리를 수술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차례나 강제 수술 받은 것이다. 그 후유증이 매우 심했다. 전에 비해 능력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어찌 그것도 모르겠느냐?”.
<4> 큰스님의 간식거리
큰스님은 언제나 똑같은 여행용 가방에 똑같은 내용물을 넣고 다니신다. 가지고 오신 가사도 늘 같다. 어떤 때는 가사를 가져오시지 않아 등인 스님의 가사를 수하시고 법회에 참석하시기도 하였다. 큰스님은 언제나 어디로 가고 싶으면 바로 행각을 떠나셨다.
큰스님께서는 한국 음식도 잘 드셨다. 주로 올려드렸던 공양 메뉴는 잡곡밥에 된장국과 콩단백 채식이었다. 아침 공양은 주로 죽을 올렸는데, 그냥 흰쌀로만 쓴 죽이었다. 김치는 매워서 잡수시기 좀 불편해하셨고, 과일도 많이 드시지 않고 조금씩 드셨다. 간식으로는 주로 땅콩을 좋아하셔서 신선하고 품질좋은 날 땅콩을 구하여 쪄서 드렸다. 나중에는 해인향 보살님이 큰스님께 땅콩공양을 전담하였다. 그 밖에 삶은 옥수수와 삶은 콩도 잘 드셨다.
좀 난처했던 것은 불자님들이 공양물로 올리는 홍삼절편삼을 매우 좋아하셨다는 점이다. 홍삼절편삼은 당뇨가 있는 큰스님에게는 권장할 만한 것이 못되었으나 큰스님께서는 한국의 귀한 보약으로 아셔 꼭 챙겨 드실 정도였다.
평소에 잠깐씩 편히 쉬시다가도 불자님들이 방문하여 친견을 요청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사양하시지 않으시고 곧바로 맞이하시고 인사에 꼭 덕담을 해주셨다. 돌이켜보면 큰스님의 이런 소탈하신 성품은 큰스님의 참모습으로 수많은 불자님들과 격의 없이 가까이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오히려 수행하는 불자님들에게 용기를 많이 심어주신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명함 뿌리며 한국의 큰스님들만 만나고 가셨다면 이렇게까지 극락 수행법인 정토선 수행법이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5> 석고 본 뜨기
한번은 서울 인사동 여래선원에서 큰스님의 얼굴을 석고붕대로 본뜨기 한 일이 있었다. 우리와 잘 알고 지내는 만경사 법당의 비로자나부처님을 청동으로 조각했던 불모작가 ‘대안’거사님의 간곡한 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일 큰스님 입적하신 연후 동상이나 흉상을 제작하게 될 때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예비적인 조치상황임을 스님들에게 먼저 주지시켰고 이를 큰스님께 스님들이 조심스레 말씀드려 마침내 큰스님 허락을 받고 성사되어 이를 시행한 것이다.
무려 한 시간여 동안 큰스님은 꼼짝 못하고 누워계셔야 했다. 먼저 얼굴에 콜드크림을 바르고 석고붕대를 작게 잘라 미지근한 물에 묻혀 한 장씩 얼굴에 묻혀나가는 동안 고개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부동자세로 누워 간신히 호흡만 할 수 있는 답답하고 지루하며 매우 고단한 작업인 것이다. 고령의 큰스님께서는 약간은 불안하기도 하셔서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특히, 외국에서 옆에 제자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잘 모르는 허우대 큰 구레나룻 작가의 투박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 다소 두렵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의연히 그 작업을 끝내도록 몸을 맡기시는 수고로움을 감당하셨고, 마침내 작가가 마지막 얼굴 닦아드리며 끝났음을 말씀드리자 큰스님은 감긴 눈을 뜨시고 곁에 있는 우리를 둘러보시더니 “나 죽었다 살아났다!”하시며 다시 벌렁 누워 죽는 표정의 익살스런 세리모니를 하셨다. 우리 모두는 모처럼 큰소리로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어색한 분위기도 웃음으로 돌릴 수 있는 유머와 위트를 지니셔서 우리는 편안하고도 즐거이 시봉에 임할 수 있었다.
<6> 치료 거절
큰스님은 당뇨증세가 매우 심했다. 큰스님의 혈당수치를 보면 기겁하게 된다. 700~800을 나타내기도 했으니 입원치료 해야 할 상황이었다. 벌써 80살을 넘기신 세수의 노구를 이끌고 그러한 건강상태로 전국을 순회하며 빡빡한 일정을 강행군으로 소화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등원 스님이 중국 인터넷에 들어가 중국말로 된 당뇨병에 대한 내용을 뽑아서 큰스님께 보여드리며 병원에 가셔야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지만 괜찮다하시며 거절하시고서 병원에 가시지 않았다.
어느 날 인사동 여래선원에 계실 때 한가한 틈을 타서 등원스님이 병원에 미리 접수해놓고 큰스님을 모시고 갔다. 물론 병원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고 구경 가시자고 해서 모시고 간 것이다. 큰스님은 평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인사동 길을 걸으시면서 산보하시는 것도 좋아하였다. 병원에 들어가 차례가 되어 진료실의 의사와 접견하고자하면 큰스님께서는 괜한 일을 한다면서 그냥 나오시곤 하셨다.
<7> 용돈 하사금 오천 원
큰스님께서는 당신께 올리는 공양금(용채)과 불사금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하셨다. 단 한 푼도 허투루 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 철저한 금전 관리에 불평을 하는 제자들도 많이 생겨나기도 했다. 심지어 공양금을 드리면 불자님들 면전에서 공양금이 얼마인지 봉투에서 금전을 꺼내어 헤아리시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큰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시는 ‘너희들은 잘 살지 않느냐?’는 식이었다.
물론 우리는 큰스님이 개인적인 탐욕심으로 인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거부감이 나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큰스님께서 관련된 중국의 많은 사찰에 불사를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큰스님의 금전 다루시는 모습이나 처리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불만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스님들이 큰스님께 우리에게도 좀 용돈을 주시라고 졸라보는 일이 있었다.
하사금 5천원(2002년 9월 18일)
“관정 사부님, 한국의 이 제자에게도 용돈을 좀 나눠 주십시오.”
처음엔 미동도 않으시다가 여러 번 조르니 결국 큰스님께서 한국에서 용돈을 내려주시는 획기적인 일이 생겼다. 그런데 등인 스님께만 용돈을 하사하셨다. 그것도 달랑 천 원짜리 다섯 장! 하도 신기해서 지금도 당시 큰스님께 받은 돈을 절에 기념으로 보관하고 있다.
제자들이 보기에 통역은 평소 큰스님과 너무 허물없이 함부로 말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당시 중국에서는 스님들을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루는 통역하는 거사(이때는 홍거사였다)가 로또 번호를 알려달라고 졸랐다. ‘도사가 그것도 모르면 무슨 도사냐?’며 조른 것이다.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마침내 번호를 가르쳐 주었고, 통역은 열심을 발하여 복권을 사왔다. 하지만 발표 전에 큰스님께서는 이번에 결과는 맞지 않는다고 미리 말씀하셨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8>큰스님께서 인사동 여래선원에서 다시 써 주신 ‘南無阿彌陀佛’과 ‘願生西方蓮’ 대련 글씨
(현재 아미타사 법당 불단 장엄)
휘호가 맘에 안 들어
큰스님은 시간이 나면 제자들에게 휘호를 써 주시곤 하셨다. 그림도 잘 그리셨는데 주로 휘호를 쓰시고 부수적으로 연꽃그림을 가미하셨다. 드물게 극락세계 하품하생 연꽃 화생하는 모습의 그림도 그리신다.
어느 날 지방에서 법회마치고 인사동 여래선원에 오셨을 때 법당에 걸린 당신께서 전에 써주셨던 ‘南無阿彌陀佛’, ‘願生西方蓮’ 휘호족자를 보시고, 글씨가 당신 마음에 안 드신다며 다시 써 주시겠다는 것이다. 붓과 벼루, 화선지를 준비해드리자 큰스님께서는 정말로 정성을 드려 글씨를 다시 쓰셨다.
‘南無阿彌陀佛’
‘願生西方蓮’
願生西方蓮(서방 극락 연꽃으로 태어나길 바라나이다) 하단에는 연꽃그림도 잘 그리셨다. 큰스님께서는 대단히 흡족해 하셨다. 우리는 즉시 새로 써주신 휘호를 표구사에 맡겨 족자를 만들어 부처님 양쪽에 걸어 새로이 장엄하였다.
정토수행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밑천(資糧)인 믿음(信)ㆍ바람(願)ㆍ염불(行) 가운데 두 가지를 정확하게 써 주신 것이다. 처음 믿음(信)은 바로 큰스님이 극락을 다녀오신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큰스님은 우리에게 3가지를 정확하게 짚어주신 것이다. 지금도 그때 큰스님께서 다시 써주신 큰스님 정성의 휘호를 서울 종로에 있는 아미타사 법당 부처님 양옆에 대련으로 모시고 수행지침으로 삼고 있다.
<9> 청와대 방문기념 손목계
* 관정 큰스님께서 입적하실 때까지 지니셨던 사연 있는
청와대방문기념 손목시계(망경산사 보관)
등인스님은 어떤 불자님에게 받은 청와대방문기념 봉황문장이 박힌 손목시계를 큰스님에게 선물로 드렸다. 그런데 큰스님은 그 시계를 가지고 중국에 가셨을 때 사람들에게 한국 총통을 만나 선물로 시계를 받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당신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전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우리는 큰스님께 물었다.
“큰스님께서 한국의 대통령을 직접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왜 거짓말 하셨습니까?”
큰스님께서는 간단히 대답하셨다.
“무료한 일상에서 사람들과 재미난 얘깃거리로 말한 것뿐이다.”
그런데 큰스님은 그 시계를 소중히 여기셨던 모양이다. 2007년 큰스님이 입적하시고, 2009년 봄 보정 거사님이 큰스님 전기문을 펴내고자 큰스님 관련 자료조사를 위하여 중국 거주 큰스님의 가까운 인연을 초청하여 한국에 왔을 때, 그분들이 큰스님 유산이라며 대통령 시계를 귀히 싸서 가져와 전해 주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입적하실 때까지 손목에 차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그 시계를 전혀 돌려받을 가치나 필요성이 없었으나 가져온 정성으로 봐서 받아놓지 않을 수 없었다.
<10> 하루에 한 양동이의 물을 넘게 쓰지 않는다.
큰스님의 절약하는 습관은 대단하셨다. 사소한 소비물도 결코 함부로 허비하지 않으셨으며 최소한으로 사용하셨다. 서울 인사동 여래선원에 며칠씩 머무시거나 망경산사에서 잠깐 지내실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사소한 일상 소비물을 무엇이든지 매우 아끼신다는 점이다. 해우소에 가실 때 쓰는 화장지도 절취눈금의 두 세 바닥 정도만 쓰시는 정도였다. 어쩌다 외부에서 해우소 이용하실 때도 화장지를 넉넉하게 뜯어드리면 조금 쓰시고 나머지를 되가져오셨다. 특히 큰스님은 일상에 물 쓰는 것을 경계하셨는데 우리가 물을 충분히 떠드려도 세숫물, 양칫물, 발 닦는 물 등 극소량의 물만 쓰셨다. 하루는 왜 물을 그렇게 작은 양으로 쓰시는가 여쭤봤다. 큰스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출가 사문은 하루에 한 양동이의 물을 넘게 쓰지 않는다!”
7) 큰스님의 뜻을 펴는 활동
(1) 아미타사 개원과 무량수경 강좌 및 정토불교대학
큰스님은 2004년 만경사(萬頃寺) 중창불사 회향식을 가졌을 때 참석하신 것을 마지막으로 한국 방문이 이어지지 못하셨다.
2005년 우리 스님들이 관정 스님과 인연을 맺은 뒤 염불수행을 하며 인사동 여래선원에서 이사하여 종로 와룡동 비원 앞에 아미타사라는 이름으로 포교당을 개설하였다. 정식 명칭은 ‘나무아미타불 아미타사’였다. 아미타사 법당에 모신 불상은 인사동 여래선원에서 관정 큰스님이 직접 점안을 해주신 아미타불 고불상이고, 불단 양 옆에는 관정 스님이 직접 써주신 ‘南無阿彌陀佛’과 ‘願生西方蓮’ 대련 글씨 족자를 걸었다.
2005년 7월 10일 아미타사 개원식을 갖고 첫 사업으로 정토경전 가운데 가장 내용이 많고 중요한 무량수경 강좌를 열었다.
법보신문과 현대불교신문에 광고를 내기도 하였고, 강의 신청한 불자는 50여명이 신청하여 효란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7월 20일 개강하여 매주 수요일 저녁 2시간씩 진행된 강의는 원래 3개월 예정이었으나 거의 6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수행법 논의: 전병롱 원장, 홍명화 보살님 등
강의 전 출석 체크하는 필자
이 강의에는 관정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은 굉명 전병롱ㆍ굉혜 박병규를 비롯하여 연당 한순남ㆍ해인향 양경옥 보살처럼 관정 스님을 만난 인연이 깊은 제자들이 참석하였고, 도안ㆍ홍명화ㆍ혜명화ㆍ반야심ㆍ무량심ㆍ여래심 같은 불자들도 이미 관정 스님의 정토선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밖에 이미 염불법문을 많이 공부한 덕암 박종린 거사와 삼보제자 편집을 맡은 평등심 보살 같은 정토수행인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무량수경 강의가 끝난 뒤 아미타사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미타정토 불교대학을 개설하였다. 이 과정은 6개월 과정이라 기간도 길고 강사진도 실제 정토를 닦는 염불인들이라서 수행에 크게 도움이 되는 강좌였다.
수강생들은 모두 36명이었는데 무량수경 강좌에 참가했던 불자들과 새로 원왕생 임헌상 거사를 비롯한 많은 염불수행자들이 등록하였다.
본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정토법문의 권위 있는 강사들을 모셔서 듣는 특강도 진행되었다. ① 만오 스님(고성 건봉사) ② 자림 스님(의정부 포교원) ③ 정목 스님(양산 정토원장) ④ 공파 스님(부산 원효센터) ⑤ 선용 스님(음성 용운사) ⑥ 능행 스님(청주 정토마을) ⑦ 주경 스님(강릉 성원사) 같은 스님들이 강사로 초빙되었는데, 그 가운데 음성 용운사의 선용 스님이 공개적으로 관정 스님의 정토선을 소개하였다. 아울러 만오 스님, 자림 스님도 관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스님들이고 특히 정토마을 능행스님은 초청하지 않았는데 관정 스님이 찾아가 도와준 인연이 있는 스님이기도 하다.
능행 스님과 법담
능행 스님 특강 (사진 혜명 스님 제공)
6개월 과정의 아미타정토 불교대학 기본소양과정을 모두 마친 회향법회가 2006년 9월 15일 아미타사 법당에서 열렸다. 특별히 이 자리에는 그 동안 강의를 들으며 신심을 일으킨 불자들과 강의를 듣지 않더라도 불문에 들어갈 것을 결심한 불자들을 위해 대승보살계 수계의식도 함께 열려 뜻 깊은 회향법회가 되었다.
이 강좌는 망경산사 스님들과 아미타사 주지 등원 스님의 협력과 노력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모티브는 물론 관정 스님이 전한 정토선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분이 모두 관정 스님으로부터 처음으로 정토선을 배워 정토수행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네 분 스님들 뿐 아니라 앞에서 보았듯이 강사로 참여한 굉선ㆍ굉명ㆍ굉혜를 비롯하여 만오ㆍ자림ㆍ능행 스님들이 모두 관정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2) 아미타삼존불과 33관음성상 석불봉안
종로 아미타사의 본사는 영월의 망경산사와 만경사 두 절이다. 관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우리는 서울 시내에서 정토수행 보급에 나서는 한편 본사인 만경사에 아미타삼존불과 33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불사를 진행하였다. 이는 2002년 관정 스님을 따라 중국에 가서 관정 스님이 일생 동안 불사한 절들을 돌아보고 온 등인 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은 만경사도 정토도량의 면목을 갖추는 불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룩한 불사였다.
만경사는 2004년 관정 큰스님이 친히 오셔서 점안을 해 주신 절이다. 이제 관정 스님은 참석하지 못하지만 제자들이 스스로 이루기로 발원을 하고 불사를 시작했다. 드디어 1년 남짓 준비 끝에 2006년 10월 15일 만경사 도량에서 ‘아미타삼존불 및 33관음’성존 봉안 점안법회를 진행하였다. 그동안 아미타삼존불과 33관음 성상 시주 불자들은 각 가정별로 배포한 사경자료 ‘아미타경’과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정성으로 사경하여 공덕탑에 봉안하는 등, 등인 스님은 여법한 성지 환경 조성의 장엄을 위해 불철주야 온힘을 쏟아 부었다.
관정 큰스님이 투병중이시라 한국에 오실 수 없어 법회에 스승인 큰스님을 모시지 못했지만 정토선법의 선양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당일 법회는 성황리에 치뤄졌다. 영월지역 주민들과 지역사회 단체장을 비롯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서 온 인연있는 불자님들이 200명 넘게 참석한 보람 있는 행사였다.
이 행사를 기하여 망경산사에서는 별도로 무주고혼을 위한 천도재가 2부 순서로 오후에 진행되었는데 이 지역은 과거에 탄광지역으로 탄광에서 희생된 영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도량내외 유주무주고혼 등 특별히 탄광 근로자들 가운데 사고로 희생된 영가들의 천도재를 지낸 것이다.
삼존불과 함께 내려다보는 극락의 아침
삼존불과 함께 내려다보는 극락의 저녁
이로서 관정 스님이 길을 열어주신 망경산사ㆍ만경사ㆍ아미타사가 정토선 수련을 위한 중요한 터전이 되었다. 이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지 10년이 넘어 만경사 주지라는 중책을 맡아 현장에서 정토선을 수행하고 펴면서 큰스님과 함께 하며 입은 가피를 늘 마음속에서 떠올리고 그 혜명을 펴는데 더 열심히 매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