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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강원 무비스님의 증도가 강의(8)
오늘 『증도가』는
不可毁 不可讚
(불가훼 불가찬)
훼방할 수도 없고 찬탄할 수도 없음이여
불가훼 불가찬(不可毁 不可讚) 체약허공물애안(體若虛空勿涯岸)이라, 여기서부터 할 차례지요.
훼방할 수도 없고 찬탄할 수도 없다 왜냐,
體若虛空勿涯岸이라
(체약허공물애안이라)
심체는 허공과 같아서 가장자리가 없다
체(體)가 체라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야.
몸과 마음, 그리고 우리의 어떤 정신의 세계, 이 모든 것이 이 체라고 하는 말 속에 포함 되어 있어요.
이『증도가』는 무생(無生)이라는 말을 잘 쓰고, 또 체(體)라는 말도 잘 씁니다 보면.
저 앞에 ‘무로운하체상의(霧露雲霞體上衣)라’ 그렇게 했는데 그 때의 체도 마찬가지라.
이 영가스님의 어떤 깨달음과 수행의 모든 것, 깨달음과 수행의 모든 것이니까 바로 정신세계고 그게 이제 영가스님의 어떤 삶이고 그런 거죠.
여기서 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이 체는 무슨 뭐 꼭 심체(心體)다 아니면은 신체(身體)다 이런 식으로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이 다 포함된 그런 체야.
그래 이것은 그 크기가 허공과 같아서, 같을 약(若)자죠 이럴 때는, 허공과 같아서 애안(涯岸)이 없다, 한계, 어떤 가장자리 끝나는 데가 없다. 이 말입니다.
너무 넓고 크고 위대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뭐 굳이 찬탄할 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훼방할 거리도 아닌 것이다 그런 거죠.
不離當處常湛然이나
(불리당처상담연이나)
당처를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항상 맑고 깨끗하나
불리당처상담연(不離當處常湛然) 멱즉지군불가견(覓則知君不可見)이다, 그런데 그 체라고 하는게 뭐냐? 애매모호하거든.
말인즉슨 체약허공물애안이고, 불가훼 불가찬이고 저 앞에서도 무로운하체상의다 체라고 하는 표현을 그렇게 자주해왔지만 사실은 애매모호한 거야.
그 체가 도대체 구체적으로 뭐냐는 거지.
여기 잘 표현 돼 있어.
불리당처상담연(不離當處常湛然)이라, 당처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담연하다. 당처, 바로 이자리, 바로 이자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글씨를 쓰고 말을 하고 말을 듣고 견문각지 그러잖아요.
견문각지(見聞覺知) 눈으로 보죠? 귀로 듣죠?
이 견문(見聞)이 제일 아주 큰 범위를 차지합니다. 보고 듣는 일이 우리 삶의 80프로 이상을 차지하거든요.
안이비설신의 이렇게 하지만 안이(眼耳)가 그만치 범위를 많이 차지하는 거야, 그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인생에 살아가는데 보통 불편한게 아니죠.
그 다음에 각(覺) 하는 것은 촉각, 몸으로 촉각, 감촉하는 것 있죠, 그 다음에 혀로 미각, 그 다음 코로 후각 이런 것들이 있어요. 이런 것들을 다 포함해서 견문각(見聞覺)할 때 각(覺)이야.
느낀다 이거지. 각이라는 게 느끼는 거예요.
감각하는 거죠. 느껴서 아는 것을 각이라고 그래. 감각.
깨닫는다 그런 뜻이 아니고 감각하는 거야. 느껴서 아는 것이 견문각지.
우리 삶이 전부 견문각지야 전부.
보고 듣고 느끼고, 느끼는 데는 코로 냄새 맡아서 느끼고, 몸으로 춥다 덥다 이것을 느껴서 알고, 그 다음에 뭐 맛봐서 알고 이런 등등 느껴서 아는 것을 각이라고 해.
그 다음에 우리가 뭐 누구를 이렇게 알아보는 것, 또 글을 아는 것,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아는 것, 들어서 아는 것, 봐서 아는 것, 과거의 것을 또 기억해내서 아는 것, 등등 그렇게 아는 작용이 또 상당한 범위를 차지하고 있거든.
그래서 그 아는 것.
그래서 그 각지(覺知) 견문각지 이렇게 이제 우리의 삶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바로 견문각지하는 것이 우리의 현재의 삶인데 바로 이 견문각지 하는 이 일을, 이 사실을 떠나지 않고 있다 이 말이예요.
체라는게 구체적으로 깨달은 사람의 어떤 마음의 세계, 깨달은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게 결국은 뭐냐?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견문각지, 이 사실을 벗어나 있지 않다. 바로 이 사실에 있다 이 말입니다.
불리당처상담연(不離當處常湛然)
저 앞에서 체를 이야기 했고, 주로 체를 이야기 많이 했는데, 그 체라는 게 바로 그것이야, 그걸 알아야 돼요. 멀리서 찾는 게 아니예요 절대.
이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말 듣고 하는 이 사실, 이것이 제일 중요해요, 바로 거기에 촛점을 두고 거기에 늘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거기서 벗어나 버리면은 불법이 아니예요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서 어디 바깥, 그 외의 것에서 찾는 그런 버릇들이 상당히 많거든.
예를 들어서 등상불에서 찾는다든지, 경전상에서 찾는다든지, 음구상에서 찾는다든지, 무슨 공안에서 찾는다든지 등등 뭐 우리의 어떤 눈을 끌고 가는, 그런 것들을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너무 불필요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 그만 우리가 끄달려 가지고, 진짜 불법은 정말 진짜 우리가 알아야 할 그 불법하고는 거리가 오히려 멀어져 버린 그런 상황에 이르른 거야.
불교가 근기 따라서 제도한다고 하는 그런 미명하에, 방편이 너무 많아. 방편이 너무 많다고요.
이제 뭐 정초되면 별별 기도 하고, 뭐 입춘 되면 입춘기도 하고 야단이죠.
또 저기 북쪽에서는 서울 경기쪽에서는 입춘을 초파일 못지 않게 그렇게 성대하게 해. 사찰의 수입도 입춘 수입이 초파일 수입하고 같다는 거야.
하여튼 묘하게 그렇게 돼 있다고 입춘이. 그래가지고 지금부터 부적 준비한다고 그 부처님의 정법만 이야기 하고, 선(禪)이 어떻고, 깨달음이 어떻고, 이야기 하다가, 입춘 딱 돌아오면은 부적 준비한다고 야단이야.
절마다 전부 주지들이 경면주사 사가지고 요즘은 부적 준비한다고 야단이야.
그래 내가 이제 그 사람들 좀 부적 쓰지 말고, 이왕 쓰려면 부적 쓰지 말고 진언을 써라.
‘옴마니반메훔’ 같은 거, 이런 진언을 써가지고서 주면은 훨씬 그게 불교적이고, 부적을 대신하고, 부적보다도 천 배 만 배 영험이 있고 하다.
내가 이걸 자꾸 이제 그쪽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조금씩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스님들도.
그래서 이제 옴마니반메훔을 써가지고 이제 주고 그러는데 소식이 막 들어오는 거야.
뭐 그거 경면주사 가지고 부적 쓰느라고 밤을 새웠다고 이런 소리를 요즘 내가 많이 듣고 있어. 그러니까 그런 상황으로 이제 벌어져 버리는 거야. 이 불교라고 하는 게.
그 근기를 맞춘다고 하는 이 미명하에, 말은 좋지, 근기 맞춘다, 그래 근기 맞추다가 볼 일 다보는 거지.
그럼 언제나 그 근기를 좀 이렇게 발전시켜 가지고, 정법을 심어줄 수 있는 그런 단계로 끌어 올려야 할텐데
수십 년 다닌 사람에게도 내- 그 방편이야.
수십 년 다닌 사람에게도 하나도 발전이 없고, 내- 그 방편 그대로 쓰고 있거든, 그럼 언제 그런 방편 떠나나? 그래가지고.
불교에는, 그래서 나는 세속적인 표현으로, ‘불교에는 거품이 너무 많다’ 이 놈의 방편이 너무 많은 거예요. 실법은 어디 가버리고.
그 근기 맞춘다고 하다보니까 그만 그렇게 돼 버린 거야. 근기 맞추다가 그만 엉망진창이 돼 버린 거야.
그 불교가 그렇게 됐다고 사실.
이게 거품 걷어내고 방편 확 추려야 돼.
그래야 아주 오롯한 부처님의 바른 법이 드러나지 너무 방편 쫓아가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라.
우리는 뭐 설이 돌아오고, 입춘이 돌아오고, 뭐 기도철이 돌아오고 하면은 할 수 없이 하기는 하되,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불교 중심에 있는 스님이고 프로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알고 해야 된다 이거야, 알고.
우리까지 하면서 거기에 떨어져 가지고서 정신 못차리면 곤란하지 않느냐.
불교는 뭐니뭐니 해도 스님이 그 불교 중심에 있고, 스님들이 불교를 바르게 이끌어 가야 그 불교가 바로 가는 거지.
중심에 있는 사람이 바르게 이끌어 가지 못하면은 이거는 불교가 엉망으로 가버리는 거야.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돼 버린다고.
지금 불교에 거품이 너무 많아.
언필칭 선이니 뭐니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상황을 살펴보면은 너무 방편이 많고 거품이 많은 거예요.
우리, 불교 중심에 있는 스님들은 그래도, 불교의 진정한 정신, 핵심을 잘 잡고, 다시 말해서 종지를 딱 잡고, 거기에 중심을 두고 불교 공부를 하고, 신도들을 대하더라도 종지에다가 중심을 두고 근기를 맞춰야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라.
근기 맞추다 그만 중심을 잃어버리는 그런 예들이, 사례들이 비일비재해, 비일비재 하는 게 아니라 뭐 거의 뭐 99프로가 그렇게 살지 사실은, 한국불교 전체를 상황을 보면은.
우리는 상황을 잘 살피고 또 우리의 본분이 무엇인가, 이것도 잘 이해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 이제 불리당처상담연 하는, 정말 진정한 불교는 바로 우리가 견문각지 하는, 보고 듣고 하는 이 말하고 하는 바로 이 순간 이 자리를 떠나 있지 않다는 사실.
이것 외에는 전부 가짜야.
이것만 하나의 진실이야.
유차일사실(唯此一事實)이라고, 이것만이 진짜지 그 외엔 전부 가짜라고.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이 사실만 진짜지.
그러니까 이런 점들에 대해서 좀, 어떤 그 눈을 떠야 되고, 종지를 추려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멱즉지군불가견(覓則知君不可見)이다, 당처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담연하다. 항상, 이 담연(湛然) 하다고 하는 것은 맑다는 뜻이지만은 고요하다는 뜻도 됩니다.
견문각지 하면서 또 그 자리는 적정하고 텅 비었고, 맑고, 이 맑다는 이 뜻은 텅 비었다, 고요하다, 이런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어요, 항상 담연하다. 그러기 때문에
覓則知君不可見이라
(멱즉지군불가견이라)
찾으려고 하면은 분명히 알리라, 그대가 볼 수 없음을
멱즉지군불가견(覓則知君不可見)이라, 찾은 즉슨, 찾아보면, 고 당처를, 고 주인공을 찾아보면은 그대는 알리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찾아보는 즉슨 그대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렇게 새겨야 돼요.
이걸 잘 못 새기는 경우들이 더러 있더라구요 해석을.
찾아보면은 그대는 볼 수 없다. 찾으면 못 본다 이거예요.
우리 견문각지 하고 일상생활 하는데 일일이 다 스며들어 있고, 전부 그것이 들어서 견문각지 하지만은 정작 그 주인공을 찾으려면 찾아지지가 않아, 못 봐, 보이지가 않아.
그러니까 방망이 가지고 후려쳐서 일깨워주기도 하고, 고함을 쳐서 보여주기도 하고, 손가락을 들어서 보여주기도 하고, 혹은 눈에 미끌어져서 그것을 보기도 하고, 울력하다가 돌이 굴러가 가지고 대나무를 툭 치는 그 소리에 그걸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복숭아꽃이 핀 모습을, 복숭아꽃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그렇게 딱 보는 동안에 그것을 알게도 되고.
매일 아침 보는 그 아침별, 금성 그걸 떡 보고, 어느 날 아침에 그것을 보고 또 그것을 눈치 채고 깨닫기도 하고 알게도 되고, 그렇게 되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별, 그것이 그 놈은 아니야.
별을 보고 그것을 알았지만은 별, 그것이 그것은 아니라고.
복숭아꽃 피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았지만은 복숭아꽃이 그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멱즉지군불가견(覓則知君不可見)이지, 굳이 찾아보면은 보이지가 않아, 찾아지지가 않아. 찾은 즉 어떻게 해? 십만 팔천 리야.
보고 듣고 하는 여기에 있지만은 그것을 찾으려고 하면 이미 계심동염(契心動念)하면, 마음을 거기다가 계합하려고 움직여 버리면은 이미 십만 팔천 리를 미끌어져.
그 자리에 없다고, 찾으려고 하면 벌써 멀리 도망가 있어. 십만 팔천 리나 미끌어져 있다.
불교는 결국 이 문제 아는 일이고, 이거 알면은 모든 문제 해결이고, 그러니까 중언부언 『신심명』에서도 그렇지만 『증도가』에서도 중언부언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이것이 불교의 근본이고 또 종지다 하는 것입니다.
取不得 捨不得이니
(취부득 사부득이니)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취부득 사부득(取不得 捨不得) 불가득중(不可得中)에 지마득(只麽得)이라 참 멋진 표현이죠.
이것을 우리가 취할래야 취할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어.
찾은 즉슨 보이지 않고, 찾을 길이 없지만은,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어. 못 찾는다고 어디 떠나 있는 건 아니야.
그래 취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게 바로 그 자리다 이거지. 체자리다 이거야.
체약허공물애안(體若虛空勿涯岸), 그 가장자리 없이, 아주 드넓은, 허공보다도 더 넓은.
『능엄경』에는 뭐 ‘공생대각중(空生大覺中)에 여해일구발(如海一漚發)이라’ 그랬지.
허공이, 이 우리의 체(體) 여기서 말하는 체지, 대각(大覺) 가운데 큰 깨달음 속에서 생긴 것이 여해일구발(如海一漚發)이라, 마치 바다에 물거품 하나가 바다에서 생긴 거와 같이 그렇다.
그 드넓은 바다에 물거품 조그만한 거 생긴 게 그 바다하고 비교가 되겠어? 수억만 분의 일도 안 되는 거거든.
그와 같이 대각이라고 하는 것, 우리 심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허공과 비교했을 때 그와 같은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큰 것은 허공이니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허공을 비유로 잘 들지. 그것 밖에 가까운 게 없으니까 제일 가까운 게 그래도 허공이니까.
그래서 여기서도 체약허공물애안(體若虛空勿涯岸)이라 그랬어요. 취부득 사부득(取不得 捨不得)
不可得中에 只麽得이라
(불가득중에 지마득이라)
얻을 수 없는 가운데서 또 그렇게 얻는다
불가득중(不可得中)에 지마득(只麽得)이라, 그래서 취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어찌 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불가득 (不可得)이라고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런 뜻이예요.
얻지 못하는 가운데가 아니고, 취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그런 할 수 없는 가운데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지마득(只麽得), 그렇게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뭐야?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말하고 듣잖아요. 이렇게 말하고 듣잖아요.
손에 잡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어, 잡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고, 또 그거를 떼쳐 버릴래야 떼쳐 버릴 수 없는 가운데서 이렇게 또 잘 쓰고 있는 거야.
손을 놀려서 글씨를 쓰고, 발을 움직여서 걸어가고, 귀를 이용해서 듣고, 입을 이용해서 말하고 이렇게 쓰는 거야.
불가득중(不可得中) 지마득(只麽得)이라는 게 그런 뜻이예요. 무슨 물건이 하나 있어서 그것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 얻는다 그런 게 아니고, ‘취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할 수 없는 그 가운데서 이렇게 잘하고 있다’ 이 뜻이예요.
이렇게 하고 있다.
黙時說 說時黙이요
(묵시설 설시묵이요)
묵묵하면서 말하고 말하면서 묵묵하니
묵시설 설시묵(黙時說 說時黙) 대시문개무옹색(大施門開無壅塞)이라, 묵묵할 때 말하고 있고, 말할 때 또 묵묵해.
이것은 그야말로 무슨 뭐 저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했었지만, 쌍차쌍조(雙遮雙照) 부정과 긍정이 다 여기에 동시에 무르녹아 있는 거예요.
묵묵하다고 하는 것은 쌍차(雙遮) 부정이고, 설한다고 하는 것은 긍정이라.
그 묵묵한 가운데, 그러니까 부정 속에 긍정이 있고, 긍정 속에 또 부정이 있어요.
묵묵할 때 이미 그 속에 묵묵한 속에 말이 많아. 설명이 많아. 또 설명 아무리 해봐야 거기에는 설명으로 이를 수 없는 그 자리야. 그러니까 묵묵할 수밖에.
이거 아주 묘한 표현이거든. 묵시설 설시묵이라고 하는 게
아주 묘한 표현이야.
요게 동시에 존재해 동시에,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그걸 드러낼 수 없는 그 입장이라면 그건 묵묵한 거야.
설명하는 것이 또 그것이 묵묵한 자리고 묵묵한 것이 설명하는 자리고.
大施門開無壅塞이라
(대시문개무옹색이라)
크게 베푸는 문이 활짝 열리니 옹색함이 없다
대시문개무옹색(大施門開無壅塞)이라
크게 베푸는 문이 열리니 옹색함이 없더라.
이것은 이제 바로 우리 심체자리가, 심체자리가 이렇게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너무나도 그야말로 툭 터져서 걸리지 아니하는 그런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죠.
그래 이제 육조스님은 ‘도시통류(道是通流)라’ 내가 잘 쓰는 말인데, 도시통류라, 도라고 하는 것은 통류다 그랬어요.
통류(洞流)라는 말, 도라고 하는 것은 어디 한 곳에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른다고 하는 말은 말하자면 통한다는 그런 뜻이예요.
여기서 앞에서 통자는 통한다는 뜻이 아니고 모두 다 라는 뜻이라, 모두 다 전체가 다, 통째로 이런 말이예요. 전체.
전체로 통한다 이말이예요. 전체로 통한다.
그래야지 뭐 무슨 뭐 이(理)에만 능하고 사(事)에 어둡다 사에는 능하고 이에는 어둡다 그러면 도가 아니야.
그럼 이건 잘하는데 하, 그건 못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못하는 게 자랑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못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해 가지고, 아이구 그건 나 못한다고 못한다고. 많이 보지 그런 사람들.
부처를 바라보는 사람이, 부처를 기약하는 사람이, 못한다고 그렇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면….
통류가 돼야 해. 통류. 무엇이든 다 통류, 막힌 게 없어야 돼.
글이면 글, 목탁이면 목탁, 염불이면 염불, 포교면 포교, 참선이면 참선 프로는 통류가 돼야 된다고.
여기서 대시문개무옹색(大施門開無壅塞) 큰 베푸는 문이 열리니 옹색함이 없더라.
사람이 옹색해 가지고, 아이고 나는 그거는 못한다고. 글 좀 쓰라고 하면 아이구 나는 필체가 어째서, 강원에서 실컷 글씨 쓰는 것 공부해 놓고 못쓴다고 그렇게 발뺌을 하면 그게 될 법이나 한 소리야?
무옹색이 돼야 돼. 대시문개무옹색이 돼야 돼.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위대한 보물을 제대로 활용하는게 되는 거죠. 제대로 활용하는 게.
위대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은 못할 바가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것이거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그것을 가지고, 하느니 못하느니, 그거 못하면은 배워서라도 하려고 하고, 또 당장에라도 배워서라도 잘 하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한거라.
그래서 이제 무슨 도시통류(道示洞流)니 대시문개무옹색(大施門開無壅塞)이니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자리를 표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은, 또 우리가 십분 이끌어 내려가지고 우리의 일상에다가 그걸 해석을 해야 되거든.
일상에 적용이 돼야 된다고.
그래서 도시통류라는 것도 그렇게 우리가 적용을 해야 돼.
대시문개무옹색이라는 것도 그렇게 이제 우리의 일상에 적용이 돼야 되고. 그게 중요한 관계예요.
일상과 거리가 떨어져 버리면 그거는 그야말로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라, 책은 책이고 나는 나고’ 이렇게 돼 버린다고요
당장에 그게 하나가 되긴 어려워요.
그렇지만 될려고 하는 자세, 왠고 하니 본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해.
有人問我解何宗고하면
(유인문아해하종고하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슨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유인문아해하종고(有人問我解何宗)하면 보도마하반야력(報道摩訶般若力)이라고 하리라
그런데 이렇게 내가 당당하게 큰소리 치는데 도대체 당신은 어떤 종지를 알고 있느냐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묻는다면
報道摩訶般若力이라 하리라
(보도마하반야력이라 하리라)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하리라
나는 마하반야의 힘이다 라고 하겠다. 마하반야(摩訶般若)의 힘.
우리 대웅전 앞에 뭐라고 해놨지?
마하대법왕(摩訶大法王)이여 무단역무장(無短亦無長)이라
참 멋진 표현이거든, 야부스님 소린가, 마하대법왕, 마하반야의 힘 똑같은 뜻이지.
마하대법왕, 무단역무장, 긴 것도 아니고 또한 짧은 것도 아니다
본래비조백(本來非皂白)이다 본래 검은 것도 흰 것도 아니지만은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이라, 곳을 따라서 푸르기도 하고 누렇기도 하고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하고, 상황 따라서 그렇게 된다 이거야.
그래 돼야 되는 거라. 상황 따라서 그렇게 돼야지, 아 이거 못한다고 발뺌하는 것, 그걸 갖다 자랑으로 그렇게 치면 안된다고.
어디가서 뭐 이제 중이 돼가지고 이제 강원에 가가지고 공부했는데 어디 말사나 어디 뭐 본사나 아니면 은사스님 절에나 와가지고 ‘니 강원에서 공부했으니 이것 좀 해봐라’ ‘아이 그거 안 배웠어요’ 하고 못한다고 이렇게 꽁무니 빼는 건 그건 아주 못난 짓이예요. 해 봐야 된다고요.
마하반야의 힘이잖아.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이 돼야 돼.
곳을 따라서 푸를 필요가 있으면 푸르게 되고 누를 필요가 있으면 누렇게 되고 그렇게끔 돼 있어. 우리의 근본자리는.
본래 그렇게끔 돼 있는 소질이 있고,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려고 그렇게 마음을 쓰면은 그렇게 된다고요.
대웅전의 주련이 아주 참 좋은 주련이예요.
그거 하나만 우리가 마음에 잘 새겨도 우리는 마하대법왕 이 돼 모두가, 모두가 마하대법왕이야.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보도(報道), 알리겠다.
或是或非人不識하고
(혹시혹비인불식하고)
혹 옳기도 하고 혹 그르기도 한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혹시혹비(或是或非)를 인불식(人不識)하고 혹은 옳고, 혹은 그르고, 남이 보기에 옳게도 보이고 혹은 그르게도 보이는 거야.
그런데 사람이 그거 옳다 그르다 자기 잣대를 가지고 판단을 하니까 그 깊이를 잘 알지를 못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이라
(역행순행천막측이라)
역행도 하고 순행도 하는 것을 천신도 측량하지 못함이라
역행순행(逆行順行)을 천막측(天莫測)이라 역행도 하고 순행도 해. 우리 기준으로, 중생들의 기준으로 보니까 역행이고 중생들의 기준으로 보니까 순행이야.
별별 일들이 다 있지. 조사스님들의 그 어떤 행적을 보면은 역행도 있고 순행도 있고. 하늘도 측량하지 못해, 천신도 측량하지 못한다 이래야 돼.
하늘이라는 게 무슨 뭐 공간이 그걸 측량하는 게 아니라, 천신도 측량하지 못한다. 신도 측량하지 못한다, 이걸 하느님도 측량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석해도 좋아.
천신도 측량하지 못해. 이 천(天)이라는 것, 천신이라 그렇게 해석해야 돼요. 하늘하면 너무 막연해. 천신이라는 소리도 사실은 막연한 소리지만은 그래도 천신이라고 하면 조금 더 가깝지.
吾早曾經多劫修라
(오조증경다겁수라)
나는 일찍이 다겁을 지내면서 수행하였기에
오조증경다겁수(吾早曾經多劫修)라 나는 아조증경, 나는 일찍이 다겁을 지내면서 수행했노라
不是等閑相誑惑이라
(불시등한상광혹이라)
등한히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불시등한상광혹(不是等閑相誑惑)이로다 등한히 괜히 쓸데없이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억만 겁을 닦아오면서 이 소리 하려고 수행해 왔다.
이건 이제 꼭 뭐 성불하는 것이 수행에 근거해서 성불하는 것은 아니야. 종지는 그렇게 돼 있어.
그러나 이 말에 대한 무게를 싣기 위해서 그리고 이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뜻으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 이제 오해하면 안돼요.
오조증경다겁수(吾早曾經多劫修)라 라고 하는 게 다겁을 닦아서 비로소 이렇게 됐다 그걸 주장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오랜 세월을 공력을 들여서, 마음이 실리고 내 공이 실려서 하는 말이지, 결코 아무렇게나 등한히 아무렇게나 남을 속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말이예요. 그 뜻입니다 여기서는
建法幢 立宗旨는
(건법당입종지는)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드날리는 것은
건법당입종지(建法幢立宗旨)명명불칙조계시(明明佛勅曹溪是)라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세우며, 이게 이제 말하자면 나는, 내가 아는 종지는 바로 이것이다, 불법은 이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제대로 된 삶은 이것이다. 불법이라고 해서 꼭 뭐 불법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서 정말 제대로 사람답게 사는 삶의 모습은 이것이다 이런 의미예요.
건법당입종지(建法幢立宗旨)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세우는 것은
明明佛勅曹溪是로다
(명명불칙조계시로다)
너무나도 분명한 부처님의 법이며 조계 육조가 바로 그것이로다
명명불칙조계시(明明佛勅曹溪是)라 밝고 밝게 부처님이 분부한 것이고.
그 분부한 법이 내려오고 내려와서 가섭(迦葉)존자로부터 아난(阿難)존자 상나화수(商那和修)로 이렇게 쭉 내려 와가지고 육조 조계, 조계산의 육조스님 바로 여기까지 내려온 이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그 뜻이예요. 그래
第一迦葉首傳燈하사
(제일가섭수전등하사)
제일 먼저 가섭존자가 그 등불을 전해 받으사
제일가섭수전등(第一迦葉首傳燈), 제 일의 가섭존자가 먼저 처음으로 등불을 전해 받고 그리고 아난존자에게 전해준 그 전통,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二十八代西天記라
(이십팔대서천기라)
28대 달마스님까지가 서천의 기록일새
서천까지는 이십팔대죠. 달마대사가 28대고, 동토에 와서는 초조가 되는 거죠.
이십팔대서천(二十八代西天)의 기록으로
法東流 入此土하야
(법동류 입차토하야)
법이 동쪽으로 흘러서 중국에 들어와서
법동류입차토(法東流 入此土)라, 법이 동쪽으로 흘러와서 차토에 들어왔다. 중국에 건너왔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菩提達磨爲初祖
(보리달마위초조)
보리달마가 초조가 되었네
달마대사가 선법을 가지고 달마대사가 오기 전에도 불법이 중국에 한 200여년 전에 이미 중국에 불교가 들어와 있었지.
그런데 너무 초기에 불교라고 할 꺼리가 뭔가 형식이 있어야 되니까, 그래서 뭐 경을 가져오고, 불상을 가져오고, 그리고 스님이 있고, 그래서 이제 불법승 삼보가 갖춰지고, 그래서 이제 백마사라는 최초의 사찰을 중국에 세우고 이렇게 해서 불법이 전해져서 계속 그 가르침을 전해 받다 보니까 경전상의 불교만 이해하고 있었어.
경전을 떠난 진짜 우리의 삶이 견문각지 하는 그 주인공을 우리가 제대로 깨달아서 거기에 근거해서 사는 이 삶이 진짜 불법이다 라고 하는 여기서 이제 못 미치고 그만 너무 문자에만 치우쳐 있고, 형식만 치우쳐 있어서 그래서 달마스님이 오셔가지고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경전 그거 너무 그렇게 의지하지 마라. 거기에 꼭 불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바로 우리 마음, 마음 가진 사람이 부처요, 사람의 마음이 부처다’ 이렇게 딱 해버렸거든.
마음 가진 사람이 부처요, 사람의 마음이 부처다 그랬다고요. 그래서 바로 보이려고 이제, 직선으로 바로 보이게 된 거지.
그래서 이제 깨달음의 어떤 입장에 있어서 선가의 입장에 있어서는 말하자면 달마스님을 초조로, 그 앞에 이백여년 이상 불교가 들어와 있던 것은, 기록에 불교사에서는 많이 기록을 하고 있지만은 크게 이 선가에서는 높이 숭상을 하지 않고, 달마대사가 들와가지고 비로소 심법을 전한 것부터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그랬거든.
바로 이 마음 마음의 문제를 가장 중요시 여기고, 마음을 관하는 그 한 가지가 모든 수행을, 무슨 경전을 보는 거라든지 염불을 하는 거라든지, 참선을 하는 거라든지 일체 것을 전부 육바라밀 포함해서 일체 수행을 전부 포섭하고 있다.
그래서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이렇게 이제 주창을 하고 나선거야. 그래 그때부터 이제 정상적인 불법이 행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중국 불교를, 그래서 이제 보리달마위초조라 그랬잖아, 보리달마가 초조가 되고
六代傳衣天下聞이라
(육대전의천하문이라)
육대까지 내려오면서 옷과 법을 전한 것을 천하가 다 아네
육대전의(六代傳衣) 육조스님까지 내려오면서 육대전의를 육대까지 옷을 전하는 것, 옷이라는 것 이건 뭐 가사지만은 신표, 가사와 발우를 육조스님이, 오조스님께서 육조스님에게 전한 그런 내력들 잘 아시잖아요.
그런 것을 이제 천하가 다 안다 이거예요.
그럼 육조스님부터는 왜 안 전했느냐? 육조스님 당시에도 목숨이 달랑달랑 했어 그 놈 가사발우 때문에.
육조대사가 죽을 뻔 했잖아. 그 큰 법력이 아니었으면 막바로 죽는 거예요. 그거 뭐 이름도 없는 행자 그거 하나 죽이고 묻어버리고 발우 뺏어가 버리면 끝나는 거지 그거 뭐 어딨겠어요. 그런 상황이 된 거예요.
그래서 명여현사((命如懸絲)라, 이 놈 발우와 가사 때문에 목숨이 실에 매달린 것처럼 그렇게 위태롭다.
여러 사람 생명을 잃을 것이다. 이렇게 본거야. 그래서 못 전하게 했어. 그래서 못 전하게 한거야 이게. 가사와 발우를 육조스님이상 더 이상 못 전하게 했어.
그래서 후로는 안 전해진다고. 그 후로 안 전해져가지고 그러면은 제자들에게 신표로 경을 주기도 하고 죽비를 주기도 하고, 불자를 주기도 하고, 자기가 사용하던 선판, 깔고 앉았던 선판, 선판을 주기도 하고 경상, 조그마한 경상을 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건 이제 자기 의미대로 그렇게 이제 뭐든지 신표로 그렇게 주는 경우가 있고, 줘도 임제스님 같은 경우에는 그까짓거, 황벽스님이 경상을 주니까 ‘이걸 가져가서 내 법을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시시비비 할 때 이걸 보여라 내가 평생 사용하던 경상을 물려받았으니까, 보여라’ 하니까 ‘아휴 그까짓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고 시자보고 갖다 태워버려라 그랬어요 임제스님이.
아주 대단한거지 대단한 거라구.
그러니까 그런 사례들이 많았다고요.
그러니까 신표라는 게 그야말로 신표에 불과한 것이지. 요는 얼마나 법력이 있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것이고, 신표는 신표지. 그래서 육대까지는 부처님의 가사가 전해졌다고 하는 것을 천하사람들이 다 들어서 아는 사실이 아니냐?
後人得道何窮數라
(후인득도하궁수라)
후인들이 득도한 것을 어찌 다 헤아리랴
후인득도(後人得道)를 하궁수(何窮數)라 후인들 그 뒤에 그야말로 도인들이 흔히 하는 표현대로 깨가 쏟아지듯이 쏟아졌다 그래요.
가을에 참깨를 베어가지고 떨어보면은 알아. 그 숫자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숫자가 쏟아지거든.
그와 같이 도인들이 많이 쏟아졌다.
후인들이 도 얻은 것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헤아릴 수(數)자예요 이럴 때는.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이렇게 말하자면은 자기의 내력을, 내가 이런 당당한 그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이런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이게 다 내력이 있다 이거예요 내력이.
근본이 있고, 근거가 있어서 하는 소리지 무슨 내 멋대로 미쳐서 하는 소리가 결코 아니다.
이와 같이 아주 전통이 있고, 전통 있는 것이 아주 정상적인 불법이다. 전통불법은 정통불법이라야 된다.
이 뜻이예요.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그런 어떤 정신을 여기서 이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강의 여기까지 하죠.
첫댓글 有人問我解何宗고(유인문아해하고) :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슨 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報道摩訶般若力(보도마하반야력)이라 하리라 :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하리라.... 물 들다님 감사드립니다....새해에도 늘 대길하신 날 보내시길 빕니다. _()()()_
不離當處常湛然..당처를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항상 맑고 깨끗하나...진정한 불교는 바로 우리가 견문각지 하는, 보고 듣고 말하고 하는 바로 이 순간 이 자리를 떠나 있지 않다..꽃물들다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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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삼배 올립니다
취부득 사부득(取不得 捨不得) 불가득중(不可得中)에 지마득(只麽得)이라.ㅡ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서 또 그렇게 얻는다.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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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