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짜리 아들이 열심히 마당의 꽃밭을 다듬고 있습니다. 그리고 6살짜리 동생이 다가오자 그에게도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저녁까지 시켰습니다. 둘은 오후 내내 놀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들에게 아빠가 주신 것은 500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아빠도 열심히 일하시니 우리도 열심히 하자고 했습니다. 저녁까지 일한 것입니다. 훌륭한 아빠에 훌륭한 아들들이었습니다. 돈때문에 일했다는 것보다도 아빠의 본을 그들이 부지중에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행위가 바로 자녀들에게는 본이 되고 모범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 집안은 잘되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하시는 아빠를 통해 배우는 자녀들의 성실함은 자랑이 될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의 하나됨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하나이심을 드러내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하나이심을 강조함은 그를 믿는 우리 신자들의 본질과 목표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가 다 다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었고
하나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됨을 힘써 지켜가야 함을 명령으로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제품처럼 한곳에서 대량생산된 물건들이 아닙니다.
우린 각자가 다양하며 또 다양한 은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하나됨은 시작합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사람들에게서, 인간관계 중에서, 우리는 금방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우리를 또 다양한 모습으로 부르심은 그만큼 하나됨을 힘써 이루고 지켜가야 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양성 가운데서의 하나됨은 교회가 가진 아름다움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4장을 정리해 보면
1-6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됨은 우리 신자됨의 증거요 우리가 누릴 일종의 특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의 메마르고 각박한 삶의 다툼 속에서 하나된 지체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위로해 주며 넉넉히 이길 힘을 북돋워 줍니다.
7-11절은 우리가 받은 개인적인 은사를 통해 드러나는 다양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의 분량대로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의 전리품인 것입니다.
은사의 주심은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넘치는 능력이요 함께 하심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다양하게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분의 은혜인 것입니다.
12절 이하는 은사의 올바른 기능과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들입니다만 이것은 우리 개인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자신의 신앙의 우월함을 드러내려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 역시 전체를 위한 도움의 소재인 것입니다. 전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은사들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몸을 세우며, 온전한 사람을 이루게 하려는 것입니다.
<< 영적인 선물 >>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승리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들에게도 승리를 나누어 주셨고 승리의 맛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 승리의 전리품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 전리품이 곧 은사인 것입니다.
8-10절을 보면 하늘 끝에서 땅 끝까지 "온우주"를 승리의 행렬과 함성으로 가득 채우신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전리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신 이 영적인 선물은 충성스러운 성도에게 주신 은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 은사의 주신 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 친히 머리가 되시며 전체의 교회와 각각의 지체들이 향유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의 제공자 되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오해를 불식시키고 오직 은사를 주신 그리스도께 성도들의 몸과 마음이 집중되도록 하십니다. 남들이 가지지 않은 신비한 은사를 활용하게 되면 대체로 개인의 이름이 더 드러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활용에 있어 중요한 원리인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에 쓰여지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데 인간이 머리되려하는 모든 시도들을 꺾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나귀에게 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나귀를 타고 있는 임금님에게 절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당나귀는 으쓱해져 교만 하는 것은 정말 꼴불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심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을 때 은사는 드디어 바로 쓰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전체의 유익이란 교회 공동체의 각각의 지체들의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런 일들에 은사가 동원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한 개인의 영적인 자랑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양성 속에 통일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다양한 은사들이 한 분이시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향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수고하고 , 봉사하고, 섬기고, 말씀 배우고, 교제를 나누는 것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누가 많이 안다고 더 우월한 것도 아니고 누가 은사가 없다고 해서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은사란 없는 것이 아니고 개발이 안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모두에게 적어도 한가지 이상씩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가 어떤 것이든 그것들은 바로 교회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혹 누가 게을러서, 혹은 무지해서, 자신의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은사는 전체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성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도 꼭 같은 원리 즉 성령의 은사가 같은 내용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여기에도 중심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과
또 선물이 각각의 "분량대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각 사람에게"라 함은 거듭난 모든 성도들이 나름대로의 은사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혹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분량대로"라 함은 주님께서 우리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따라 그 은사의 양과 질을 알맞게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은사를 개발시키고 성도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헌신과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욕심이나 낙담은 쓸모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 그리스도의 이름 >>
바울은 벅찬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괄호를 쳐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즉흥적 계획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곧 하나님의 크신 목적 가운데 일부인 것입니다.
시편 68편의 인용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전쟁에서 승리하심에 대한 언급인데,
바울은 오늘 이 본문을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등식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곧 여호와이심을 선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시68:18에서처럼 일단 정복자가 패잔병들에게 공물과 전리품을 받으면
그는 다시 본문에서처럼 그러한 전리품의 대부분을 자신의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고 활용하고 사십니까?
세상 일에 분주하여 그 전리품이 가진 영광과 승리를 음미할 수 없습니까?
요즘의 신자들은 이 승리의 특권과 권리를 제대로 못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매일 작은 일들에 아둥바둥 거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승리의 전리품을 그 백성들과 나눈다는 이 개념은
이미 승리한 군사들의 모임인 교회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능력의 크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가진 능력과 임무는
단순한 성도들의 모임 정도로만 끝나지 않고
악한 세력과 죽음을 이기신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포가
그 주된 임무임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사용하십니까?
주의 영광을 선포하며 사십시다.
주의 승리를 외치며 사십시다.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한 군대의 영광스런 능력을 선포하며 사십시다.
그렇게 자신 있게 세상을 향해 도전하십시오.
담대히 외치십시오.
이미 성도들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승리를 선포하는 담대함과 같이
성도는 은사를 선포하고 활용하여 악한 적들의 궤계를 물리치십시오.
패잔병들에게 겁먹지 마십시오.
공동체를 무너뜨리려고 흔들어대는 악의 세력들에 대해 주저없이,
강하고 담대함으로 주의 승리를 선포하십시오.
이 선물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선물들은 그의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적에 대한 승리를 확신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승리한 후에 개선하는 왕이나 장군은 모든 영광을 받습니다.
승리한 후 개선 행진하는 것은 병사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뒤에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잡혀서 따라오지 않습니까?
그들은 구경거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전리품들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들도 이미 사단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 분의 선물을 받는 우리는 위대한 하늘의 대장님의 백성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 선물은 주께서 나옵니다.
주와 함께 가까이 하는 주의 백성들은 그 은사에 마름이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틱"합니다.
승리한 군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때마다 이 개선행진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제 그분의 오심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마지막 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 몸의 세포처럼 >>
그 선물이 각기 다른 분량대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더 깊이 살펴보십시다.
몸 안의 세포들이 각각 이름이 다르듯이 각기 하는 역할이 다른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충양 돌기가 있는가 하며, 갑상선도 있고, 내분비선도 있습니다.
이 세포들은 생김새도 다르고 하는 역할도 다르지만 그들의 연합은 꼭 붙어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서로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교회 내에서 각각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수동적이 되어야 함은 아닌 것입니다.
각기 역할들을 한다는 것은 모두가 각기 제 역할을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한 것을 바울은 교회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 결 론 >>
선물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우리를 교회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친히 부르셨다는 이 말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결정하는 것과, 감정적인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부르신 이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사십니까?
신자는 그저 단순해 보이고 평범해 보이는 단조로운 일상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언제나 번쩍거리는 일만 하나님의 일은 다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바로 몸 안의 세포가 그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 할 때 몸이 건강한 것과 같이, 일상의 단조로와 보이는 공동체 내에서의 일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가는 일의 핵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