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 중학교! 힘차게 뻗은 소백산 자락을 배경으로 아늑하게 자리잡은 소백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 큰 인물을 많이 배출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명당의 자리. 나는 금계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중학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돌이켜 봅니다.
저희 때에도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선배님들 시대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어려웠다고 하겠습니다. 고생을 많이 하셨던 선배님들께서 지금 사회 각처의 중요한 요직에서 활동하시는 많은 분들이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금계 중학교를 나오신 동문님들은 누구보다 많은 추억과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으로 봅니다. 그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과 발자취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새록새록 되살아 나는 것은 동문님들 누구나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시대는 바야흐로 인터넷 네트워크 통신망의 발달로 드디어 모교의 홈페이지가 생겼고 또한 카페를 통해서 동문님들의 소식을 전하고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장을 마련하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드리오며 무엇보다
금계인의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우는데 수고하시는 운영자 분들이야말로 금계인의 큰 인물들이며 노고에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저에겐 중3 때 담임 선생님이 셨고 현재 교장 선생님이신 박주병 선생님. 무섭지만 인자하셨던 선생님을 그 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이 제자로서 죄송한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뵙고 싶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부터 추첨 제가 시작되었는데, 사실 그때는 영주 중학교를 목표로 했던 사람들은 충격이 컸다고 하겠습니다.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물래를 돌려서 나온 번호가 나는 금계 중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나에게 좀더 강하게 살라고 주문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성인이 빠른 걸음으로 3 시간 가량을 걸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 길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그때는 버스도 시간이 안 맞아 어쩔 수 없이 걸어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차가 너무 많아서 편한 세상이지만 그때는 차 타기도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이 도로에는 굵은 자갈을 깔아 놓아 대형 차 등이 지나갈 때면 바퀴에 자갈이 튕겨 나갈 때 맞기라도 하면 큰 부상이나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주로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면 날이 저물어 밤길을 가야만 했지요. 집에 도착하면 자정 무렵이나, 또는 넘어야만 도착이 가능했고 그 다음날 이른 새벽에 출발해서 학교에 도착하면 늦어서 지각하는 게 다반사였던 것 같군요.
특히 장마철에 집에 가다가 비는 억수 같이 내리는데 한가하게 우산 받쳐들고 걸을 수가 없었는지 그 비를 다 맞으면서 가방은 그때 들고 다니는 형식이라 한쪽 끈을 어깨 걸고 가방은 옆구리에 끼고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다녔지요.
집에 도착하면 책은 다 젖고 가방은 엉망이 되어 펴 놓고 말리기도 했지요. 비 오는 날에는 밤길을 걷다 보면 안개가 자욱하고 빗줄기 속에 길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더군요. 길을 더듬어 가면서 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길 옆의 가시덩굴에 굴러 떨어졌는데, 다시 기어 올라와 가고 했었지요.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길 어귀 후미진 곳에 상여를 보관해 두는 일명, '곳집'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밤에 귀신을 봤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때 울진 삼척 지구 무장 간첩이 자주 출몰하여 몇 명을 사살했다는 등의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군요.
또한 아침 학교 등교 때에 지각을 해서 교문 앞에서 회초리로 많이 맞았던 기억도 납니다. 어느날 그때 수학 선생님이신 송대영 선생님께서 내일부터 지각하는 사람은 특별히 혼날 줄 알라고 경고를 하셨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지각을 하고 말았고
교문 앞에서는 회초리가 한다발 아예 준비되어 앞에 사람 맞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죽을 맛이었지요. 내가 맞을 때는 아픔보다는 따갑고 아리고 그런 느낌이었는데 걸음 걷기가 힘들어서 걷어보니 사방이 새까만 멍 투성이더군요.
그러던 어느날 학교 마치고 집에 가다가 너무 저물어 한밤 중인데다가 길을 걷기도 싫고 해서 중간에 먼 친척집을 찾아 갔는데 거기서 묵고 다음날 등교할 생각이었는데, 집에서 늦어도 안 들어 오니 어머니께서 학교에 전화를 하셨나 본데,
그때 송대영 선생님께서 직접 받으셨는지? 학교에 가니 선생님께서 걱정이 되셨는지 너 어제 집에 안 가고 지난 밤을 어디서 보냈는지 물으시며 그렇게 멀리서 다니냐고 물으시더니 그 다음부터 교문 앞에서 회초리를 들고 계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군요.
그렇게 학교를 다녔던 나는 결국 졸업식 날에도 지각을 해서 참석하지 못하고 졸업장이나 앨범도 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하도 많이 걸어다녀서 나중에 마라톤 선수로 뽑혀서 출전한 적도 있습니다.
그 시절 나의 고생은 내가 사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스스로가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사자는 새끼를 낳아서 언덕에 굴러 떨어뜨려서 기어올라오는 놈만 키운다고 합니다.
오늘날 부모님들은 자식을 너무 과잉 보호하여 나라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격이라고들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이나 체력을 기르고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 아니겠습니까?
군대에서도 공수 훈련을 고강도로 받는 것은 어떤 악조건에서도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온갖 역경과 맞닥뜨리고 많은 고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신세대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힘겹게 다녔던 그 길은 지금은 말끔하게 포장이 되어 가끔 고향에 갈때면 자동차로 가며 오며 내가 이 길을 어떻게 다녔을까?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모교인 금계 중학교를 멀리서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힘들었던 과거는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되어 두고두고 가슴 속에 피어납니다.
동문 여러분 감사합니다.
첫댓글귀한 글 올려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힘들지만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현재의 선배님의 삶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귀한 추억 영원히 함께 하시면서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선배님이시기를 빕니다. 근데~~ 질문있는데요. 성인이 빠른걸음으로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고 하시는데 도데체 고향집이 어디신지 궁금합니다. 전 성내4동 빗집거리에서도 한참이나 멀다고 느꼈었는데.. 지금보면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데 말이죠.
와이고 멀긴 머네요. 작년에 모친 친구분들 태워드린다고 하촌 까지 갔다 왔었는데 그다리건너서도 한참이나 들어갔네요. 울 25회 동기들도 유난히 힛틋재 넘어 살던 친구들이 많으네요. 일부는 자취를 하였고 일부는 자전거로 통학했지요. 다 대단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생각나는대로 이름을 읊어볼까요? 황영훈,정현갑,고정섭,박현수,윤경상, 권순택, 권혁대,이창희, 정명모,.. 생각나는 대로 적어봅니다 만은 여자동기들은 없네요.
young 님 도 송대영 선생님 께 맞으 셨나 본데.여학생 이라고 별로 봐주지 않았나 봅니다. 누구든 매 맞는건 싫지요.특히 여자는 남자 보다 더 그렇 다고 봐요.스파르타 식 교육 은 나 역시 동의 하진 않아요. 그 당시에 선생님 께서 하시던 말씀이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아이 매 하나 더 때린 다고 하셨는데. 선생님 께서 그만큼 제자 들에 게 사랑 과 열정 과 의욕 이 강하셨던 같군요.
첫댓글 귀한 글 올려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힘들지만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현재의 선배님의 삶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귀한 추억 영원히 함께 하시면서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선배님이시기를 빕니다. 근데~~ 질문있는데요. 성인이 빠른걸음으로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고 하시는데 도데체 고향집이 어디신지 궁금합니다. 전 성내4동 빗집거리에서도 한참이나 멀다고 느꼈었는데.. 지금보면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데 말이죠.
고향 집이 어디 였는지 궁금 하시다 구요. 주소 는 봉현면 노좌 2 리 인데 3 리 와 갈라 지는 다리 가 있고 다리 건너 과수원 이 있었는데 거기 가 고향 집인데 지금은 없어 졌어.
저도 선배님 고향집이 궁금했었는데여... 우리칭구도 그쪽에 있었는데... 서부동에서 자취를 했던걸로 기억합니다...엄청 먼곳에서 다니셨네요.
와이고 멀긴 머네요. 작년에 모친 친구분들 태워드린다고 하촌 까지 갔다 왔었는데 그다리건너서도 한참이나 들어갔네요. 울 25회 동기들도 유난히 힛틋재 넘어 살던 친구들이 많으네요. 일부는 자취를 하였고 일부는 자전거로 통학했지요. 다 대단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생각나는대로 이름을 읊어볼까요? 황영훈,정현갑,고정섭,박현수,윤경상, 권순택, 권혁대,이창희, 정명모,.. 생각나는 대로 적어봅니다 만은 여자동기들은 없네요.
통학을 했다는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답니다 대단하네요..송대영 선생님은 때리기선수잖아요 잔인하다니까 난 지금도 그분은 이해할수 없는 사람이랍니다. 그분은 지금까지도 싫을뿐더라 이해가 안 돼..!!!
young 님 도 송대영 선생님 께 맞으 셨나 본데.여학생 이라고 별로 봐주지 않았나 봅니다. 누구든 매 맞는건 싫지요.특히 여자는 남자 보다 더 그렇 다고 봐요.스파르타 식 교육 은 나 역시 동의 하진 않아요. 그 당시에 선생님 께서 하시던 말씀이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아이 매 하나 더 때린 다고 하셨는데. 선생님 께서 그만큼 제자 들에 게 사랑 과 열정 과 의욕 이 강하셨던 같군요.
사랑과 열정같은 말로다 미화하지 말자구요 무슨 미운 아이 떡을 더 주남 이쁜아이 떡 하나 더 주지...!!! 그넘의 의욕과 편견이 사람 잡는거제...